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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독립리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의 경기장면 |
7월 1일. 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014 프로야구 1차 지명자’를 발표했다. 10개 구단의 지명을 받은 10명의 유망주는 ‘꿈의 무대’에 더 바싹 다가가게 됐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85%에 가까운 아마추어 선수들은 그해 신인지명회의에서 프로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선수 대부분은 대학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는다.
특히나 한국은 프로가 아니면 더는 성인 야구선수들이 뛸 무대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 최초의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는 큰 의미가 있다. 독립구단이 프로야구의 새로운 선수공급처이자, 프로를 꿈꾸는 ‘숨겨진 유망주들’에게 마지막 지푸라기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더스는 지난해와 올해 소속 선수를 프로에 진출시키며 기대 이상의 효과를 냈다.
원더스의 성공에 고무된 야구계는 “10구단 시대, 한 시즌 총관중 800만 관중을 바라 보는 대한민국 프로야구에 더 많은 독립구단이 생겨야 한다”고 목소릴 높인다. 최근 경기도가 독립구단 창단 계획을 발표하며 독립구단에 대한 기대는 더 커지고 있다. <스포츠춘추>가 독립리그가 활성화된 일본을 찾아 독립구단의 빛과 그림자를 취재했다. 독립구단이 한국 야구발전의 또 다른 자양분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새 삶을 찾아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헛된 기대를 심어주는 ‘희망 고문’으로 그칠지, 야구계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립리그 경기가 열릴 때면 경기장 밖엔 작은 간이 음식점이 생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그래서일까.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카마쓰 공항에 내렸을 때 대부분의 승객은 40대 이상의 장년층이었다. 공항 청사 안에도 머리가 백발인 노인만 보일 뿐, 공항 직원을 제외한 20대 젊은이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오기 위해 자료를 찾을 때만 해도 다카마쓰시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되레 반대였다. 일본 야구인들은 다카마쓰시를 가리켜 ‘일본 야구의 젊은 심장’이라고 칭했다. 이곳에 일본의 대표적 독립리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이하 시코쿠리그)’ 사무국이 위치한데다 독립리그 최고구단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가 다카마쓰시를 연고지로 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항에서 내려 끝없이 이어지는 좁은 시골 길을 달리며 기자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어째서 이곳을 일본 야구의 젊은 심장으로 부르는가’하는 것이었다.
58년 동안 독립리그 불모지였던 일본 시코쿠리그 사무국(사진 오른쪽 건물)(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공항에서 차로 2시간 가까운 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다카마쓰시 외곽의 시코쿠리그 사무국이었다. 시골 주택가에 자리잡은 사무국은 2층 건물이었다. 1층은 주차장, 2층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자를 맞은 곤도 다쓰히로 시코쿠리그 사무국장 겸 가가와 단장은 “일본에서도 이곳은 꽤 시골에 속한다. 일본야구기구(NPB) 관계자들도 이곳에 올 때마다 ‘너무 멀다’고 혀를 내두른다”며 멋쩍게 웃었다.
먼 길을 왔으니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가야 했다. 먼저 곤도 국장에게 일본 독립리그의 성격과 전반적인 현황을 물었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3년간 프런트로 일했던 곤도 국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잘 아시다시피 독립리그는 일본의 NPB, 미국의 메이저리그(MLB)나 마이너리그와는 별도로 조직된 프로야구리그를 뜻한다. 일본과 미국 모두 지방 소도시를 중심으로 팀과 리그가 만들어지고, 정식 프로리그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들이 활동한다. 미국은 8, 9개의 독립리그가 운영되고, 리그가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1947년에 독립리그가 생겼다가 이듬해 사라졌고, 2004년 이후 한때 4개 리그까지 늘었지만, 현재는 시코쿠리그와 베이스볼챌린지리그(BC리그), 간사이 독립리그 등 3개 리그만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정상적으로 리그가 운영되는 곳은 시코쿠리그와 BC리그뿐이다.”
독립리그 역사만 따진다면 일본은 미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세기부터 미국의 독립리그가 활성화됐다면 일본은 1947년 창설된 ‘국민야구연맹’이 독립리그의 시작이었다. ‘NPB와 대등한 리그’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야심 차게 출범했던 국민야구연맹은 그러나 1년 뒤 해체했다. 리그 팀간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흥행 실적도 저조했던 까닭이다. 그 뒤 일본에선 2004년까지 독립리그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 공백을 사회인야구(실업야구)가 메웠다.
특히나 사회인야구는 노모 히데오, 후루타 아쓰야 등 일본 프로야구의 빅스타들을 수시로 배출하며 NPB의 ‘마르지 않는 젖줄’ 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했다. 프로 진출에 실패하거나 더 좋은 조건으로 프로구단에 입단하려는 아마추어 선수들도 사회인야구를 통해 재기를 노리는 걸 당연시했다. 일본 야구계가 ‘프로에 선수를 공급하는 게 큰 목표’인 독립리그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것도 그만큼 사회인야구가 활성화한 까닭이었다.
시코쿠리그 곤도 사무국장(사진 왼쪽부터)과 영업담당 직원(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그러던 2004년. 세이부 라이온즈 강타자 출신이자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버팔로스) 전(前) 감독인 이시게 히로미치가 사재를 털어 ‘IBLJ(인디펜던트 베이스볼리그 오브 재팬)’이라는 회사를 설립하며 58년 만의 독립리그 부활에 시동이 걸린다.
지난해 7월 한·일 레전드 매치 출전 차 내한했던 이시게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1997년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코치 연수를 하며 미국 독립리그에서 뛰는 일본 선수가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며 “이 선수들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는 브로커들이 많아 ‘일본에 독립리그가 있으면 일본 젊은이들이 미국까지 와서 고생하지 않아도 될 텐데’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특히나 그즈음엔 노모 히데오의 성공 이후 일본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속화하며, 일본 프로야구는 스타 부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사회인야구 역시 버블 경제가 무너지며 기업들의 수익저하로 문을 닫는 곳이 생겼다.
다저스 코치 연수를 마친 이시게는 ‘독립리그야말로 새로운 스타를 발굴해 NPB리그의 부흥을 이끌고, 프로 진출을 꿈꾸는 젊은 선수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라는 판단을 내렸고, 오랜 준비 끝에 2004년 4월 IBLJ를 설립해 독립리그 출범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NPB리그나 사회인야구는 기업이 모체라, 운영비 조달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독립구단은 달랐다. 독립구단 스스로 운영비를 조달하는 게 기본이었다. 그러려면 스폰서를 모집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는 독립구단 자체가 생소했던 때라, 선뜻 스폰서를 하겠다고 나서는 기업이나 개인이 없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이시게는 스폰서를 구하기 쉽고, 야구열기가 뜨거운 대도시 도쿄, 오사카가 아닌 ‘변방’ 시코쿠 섬에 독립리그를 출범시켰느냐는 것이다.
'변방’ 시코쿠 섬에 독립리그가 생긴 이유 시코쿠리그 팀들의 감독과 주요 선수들이 사진촬영에 임하고 있다
2005년 2월 이시게는 1947년 ‘국민야구연맹’ 이후 58년 만에 새로운 독립리그를 출범시켰다. 바로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다. 리그명에서 보듯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는 시코쿠 섬(아일랜드)을 중심으로 하는 리그로, 리그 소속의 4개 팀도 시코쿠 섬에 있는 4개 현(에히메 현, 가가와 현, 고치 현, 도쿠시마 현)이 연고지다.
문제는 지역 경제 규모와 유대감 부재였다. 일본을 구성하는 4개 섬(홋카이도, 혼슈, 규슈, 시코쿠)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는 지역 경제 규모도 작아 해마다 일본 전체 GDP의 3%를 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대도시는 고사하고, 큰 공장도 없어 독립구단이 자생하기엔 최악의 조건이었다. 여기다 큰 산맥이 가로막은 탓에 4개 현은 유기적 관계보단 단절된 채 오랜 세월을 살아 유대감이 부족했고, 상대 현에 대한 라이벌 의식도 희박했다. ‘경쟁’이 필수인 프로 스포츠가 살아남기엔 흥행 요소가 턱없이 부족했던 셈이다.
그런데도 이시게가 시코쿠 섬에 독립리그의 깃발을 꽂은 덴 이유가 있었다. 이시게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먼저 시코쿠의 높은 야구열기였다. 시코쿠는 일본 야구의 변방이지만, 스타 선수들을 자주 배출했고, 지역 고교팀이 고시엔대회(일본고교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오며 지역민의 야구 관심이 무척 높았다.
두 번째는 시코쿠가 ‘저출산 고령화’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시코쿠는 해마다 많은 젊은이가 대도시로 떠나며 젊은 노동력이 부족한 지역이었다. 어차피 프로에 진출할 선수가 극소수고, 나머지 선수들은 야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게 독립리그의 속성이라면 야구를 그만둔 젊은 선수들이 시코쿠에서 제2의 인생을 사는 것도 꽤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시코쿠의 고민도 어느 정도 덜어지고, 시코쿠 자체도 보다 젊은 지역이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야구가 한 지역사회의 이미지를 바꾸는 터닝 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세 번째는 시코쿠에 프로야구팀이 없다는 것이었다. ‘야구는 보고 싶은데, 응원할 고향팀이 없다’는 지역민의 야구 갈증을 독립리그 팀이 풀어준다면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흥행 역시 보장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세 가지 이유 모두 타당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스폰서 확보는 여전히 숙제였다. 고민 끝에 이시게는 일단 팀을 만들고, 차후 스폰서를 찾기로 결심했다. 결국 이시게는 사재와 몇몇 기업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대표로 있는 ‘IBLJ’ 명의로 4개 팀을 만든다. 이것이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의 시작이었다.
시코쿠리 가가와 팀을 응원하는 지역팬들 |
2005년 4월 29일. 대망의 시코쿠리그 첫 시즌이 개막했다. 이시게는 “프로 첫 타석만큼이나 몹시 긴장했다”며 “과연 개막전에 얼마나 관중이 들어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개막전엔 무려 7천 명의 관중이 몰렸고, 지역민들은 이시게의 손을 잡고선 “우리 지역에 야구리그를 만들어줘 고맙다”며 연방 고개를 숙였다.
그해 10월 16일까지 180경기를 소화한 시코쿠리그는 애초 예상한 목표 관중수를 돌파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서 리그 소속 2명의 선수가 프로에 진출하며 리그 출범의 본래 목적도 달성했다. 프로 진출에 실패한 아마추어 선수들은 그때부터 시코쿠리그에 관심을 나타냈고, ‘우리도 시코쿠리그에서 열심히 뛰면 프로에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독립리그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독립구단의 세 가지 축, 지역기업 후원+지자체 지원+지역밀착 마케팅 지역밀착 마케팅에 앞장 서는 선수들
곤도 다쓰히로 시코쿠리그 사무국장 겸 가가와 단장은 “2005년이 지나고, 시코쿠리그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리그가 4개 팀을 모두 운영하면서 문제점이 노출됐다. 구단이 자생력을 기르려기보다 리그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짙어지며 적자 폭이 커진 것이다. 그래서 2006년에 4개 구단을 IBLJ의 직접 보유에서, IBLJ가 100% 출자해 만든 자본금 1천만 엔(약 1억1천300만 원)의 자회사로 법인화하며 자력갱생 하도록 했다. 그해 고치 파이팅 도그스를 제외한 나머지 3개 팀은 새로운 출자자를 확보하며 진정한 독립구단이 됐고, 고치 역시 2008년 출자자를 찾아 세 팀의 뒤를 따랐다.”
일본 독립구단 가운데 구단 운영의 모범으로 꼽히는 ‘가가와’는 현재 가가와 현의 6개 회사가 출자해 운영하고 있다. 다른 구단의 출자자도 대부분 지역 회사다. 스폰서 역시 마찬가지다. 4개 구단을 후원하는 스폰서들은 대부분 연고지 회사다. 곤도 국장은 “연고지 기업들이 십시일반 독립구단을 후원해주고 있다”며 “스폰서료가 높지 않다는 게 기업들의 후원에 순영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독립구단의 자생을 도와주는 건 비단 연고지 기업만이 아니다. 지자체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자체가 구단에 대놓고 돈을 주는 건 아니다. 세금 혜택도 없다. 지자체가 출자자로 참여하거나 마케팅에 협조하는 식이다. 대표적인 예가 에히메 만다린 파이러츠다.
2005년 창단 때부터 적자가 쌓였던 에히메는 2008년 누적 적자 2억 엔을 기록하며 해체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2009년 연고지 에히메 현은 두 번에 걸쳐 총 1억 엔을 출자해 구단 해체를 막았다. 그리고 티켓을 구매해 지역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며 야구 관전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구단 매상을 올리는데 일조했다.
곤도 국장은 “시코쿠리그에서 지자체의 지원은 에히메가 유일하다”며 “에히메 현이 J2리그(일본 프로축구 2부리그) 팀을 지원한 통에 종목 형평상 지역 독립구단에도 비슷한 지원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지, 다른 지자체 대부분은 프로팀에 운영비를 지원하는 식의 직접적인 ‘퍼주기’는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연고지 기업과 지자체가 독립구단을 도와주려 노력하는 덴 이유가 있다. 곤도 국장은 “지역 경제 발전과 이미지 개선에 독립구단이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며 시코쿠는 점점 ‘올드한 지역’이 되고 있다. 그래선지 시코쿠 4개 현은 고향 사람을 독립구단 직원으로 쓸 경우 자신들이 그 직원의 급여를 책임져준다. ‘고향을 등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데 야구가 일조했다’고 믿는 까닭이다. 구단마다 2, 3명의 직원은 지자체가 급여를 부담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구단들의 지역밀착 마케팅도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4개 팀은 해마다 적게는 150회, 많게는 200회의 사회 공헌 이벤트를 실시한다. 사회 공헌 이벤트라고 거창한 건 아니다. 선수들이 지역 초교를 찾아 학생들에게 급식을 나눠주거나 학생들과 통학 길을 함께 걷는다든지 1일 경찰로 근무하는 일 등이다. 물론 불우한 이웃을 돕는 모금활동을 하거나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다.
이런 이벤트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이웃이 된 독립구단은 현재 지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호응을 얻고 있다.
월급 113만 원에도 ‘프로 진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선수들 가가와의 구단 버스. 오사카에서 경기를 가진 덕분에 구단 버스를 이용했지, 대부분의 원정경기는 선수들이 각자 이동이 원칙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지난해 시코쿠리그는 4월부터 9월까지 팀당 80경기씩을 치렀다. 72경기는 리그 경기(전후기 36경기씩)였고, 나머지 8경기는 소프트뱅크 호크스 3군과의 교류전이었다. 재미난 건 소프트뱅크 3군과의 교류전 성적을 리그 성적에 반영한 것이다. 전기와 후기 우승팀끼리 맞붙어 챔피언을 뽑는 포스트 시즌은 지난해 10월에 열렸다. 우승팀은 가가와였다.
소화하는 경기수가 많고,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가 열려 구단마다 적지 않은 운영비가 들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곤도 국장은 “독립구단들은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 긴축경을 하고 있다”며 “외부에서 생각하는 이상으로 독립구단 운영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연 어느 정도일까.
지난해 시코쿠리그 우승팀 가가와의 매출은 1억 엔(약 11억3천만 원)이었다. 지역 기업들로부터 받은 스폰서비가 8천만 엔, 관중 수익과 용품 수익이 2천만 엔이었다. 1억 엔에서 선수단 운영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0%가 조금 넘었다. 선수단 연봉과 이동 경비, 식대 등이 주요 운영경비로, 나머지 3천만 엔은 홍보·광고비, 프런트 월급, 사무실 운영비, 기숙사 관리비 등으로 쓰였다.
1억 엔으로 구단 운영을 하다 보니 프런트 인원은 적을 수밖에 없다. 가가와는 리그 사무국장을 겸하는 단장을 제외하고 프런트가 6명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3명이 영업사원이고, 3명은 트레이너와 매니저, 홍보·마케팅 직원이다.
리그 사무국 사정은 더 열악하다. 국장 포함 직원은 4명. 이들은 자신의 업무 외에도 다양한 일을 소화해야 한다. 곤도 국장은 “그나마 업무보조를 담당하는 아르바이트 3명이 있어 숨통이 트인다”며 환하게 웃었다.
사무국 역시 4개 구단처럼 자력갱생이 원칙이다. 여기다 한술 더 떠 4개 구단을 도와줘야할 의무까지 있다. 그래선지 사무국 직원들은 매일같이 외부로 뛰어다니며 스폰서 확보에 열을 올린다.
지난해 사무국은 7천만 엔을 벌었다. 이 돈 가운데 70%는 스폰서비였다. 3천만 엔을 후원한 코카콜라를 비롯해 아사히 맥주, ‘파친코 업체’ 마루한, 요미우리신문 등이 스폰서가 돼줬다. 곤도 국장은 “지난해 일본 경제가 좋지 않아 기업들이 지갑을 여는데 주저했다”며 “7천만 엔 가운데 4천만 엔은 4개 구단에 1천만 엔씩 운영비 보조금으로 지급했고, 남은 3천만 엔으로 광고 홍보, 유인물 제작, 사무실 운영비, 직원 월급 등을 충당했다”고 설명했다.
4개 팀은 사무국으로부터 받은 1천만 엔을 경기 기록비와 심판비, 구장 사용료 등으로 썼다. 지자체의 협조로 구장 사용료를 60% 가량 감면받은 건 호재였다. 곤도 국장은 “원래 낮 경기 구장 사용료가 10만 엔, 야간 경기는 20만 엔, 관중이 많이 들어오는 좋은 구장은 60만 엔까지 줘야 한다”며 “지자체가 60% 정도 구장 사용료를 감면해준 덕분에 큰 부담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다”고 밝혔다.
가가와 유니폼은 움직이는 광고판이다. 유니폼 앞면의 광고는 개당(1년 기준) 1천500만 엔이고, 소매의 광고는 개당 75만 엔에서 1천만 엔 사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그렇다면 선수단 구성은 어떻게 될까. 가가와를 예로 든다면 코칭스태프는 총 3명이다. 감독과 타격코치, 투수코치가 전부다. 적은 운영비 탓에 수석코치나 수비·주루·작전·배터리 코치는 기대할 수 없다. 타격코치가 수비와 주루, 작전을 동시에 맡고, 투수코치가 배터리 코치를 겸할 때가 많다. 감독 역시 뒷짐을 지고 있기보단 일반 코치처럼 선수들을 지도한다.
선수단의 규모는 최대 30명이다. 이 가운데 경기에 뛸 수 있는 인원은 25명이다. 선수들은 구단과 1년씩 계약을 맺는다. 대개 월봉은 10만 엔(약 113만 원)으로 많아야 12만 엔을 넘지 않는다. 사무국에서 선수단 총 연봉을 3천만 엔으로 묶는 샐러리갭을 시행하기 때문이다.
곤도 국장은 “샐러리갭을 어긴 팀에겐 벌금을 물린다”며 “그러나 팀 대부분이 적자이기 때문에 샐러리갭을 깨거나 특정 선수에게 과도한 월급을 주는 팀은 한 곳도 없다”고 말했다.
1년 계약을 맺었더라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등 심각한 결격사유가 발생하면 시즌 중 계약이 해지된다. ‘낮엔 업무, 밤엔 야구’를 하는 사회인야구 선수와 달리 독립리그는 준프로 선수들이기 때문에 시즌 중엔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없다. 따라서 선수 대부분이 비시즌 기간 중 파트타임을 뛰며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한다.
시즌 중 생활은 고달프기만 하다. 원정경기는 각자 이동이 원칙이고, 아무리 먼 지역이라도 당일치기가 기본이다. 집이 먼 선수들을 위해 기숙사가 운영되지만, 한달에 2만 엔씩의 기숙사비를 내야 한다.
과거엔 길어도 3년까지만 독립리그에서 뛰는 걸 허용했다. 새로운 선수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조항이 사라져 계속 독립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곤도 국장은 “6년째 독립구단에서 뛰는 선수도 있다”며 “‘언젠간 프로의 부름을 받겠지’ 하는 희망으로 열심히 뛰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프로의 부름을 받은 운좋은 사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곤도 국장은 “2005년 2명 이후 해마다 5명 정도의 선수가 프로구단에 이적했다”며 “지금까지 40명 가까운 선수가 프로 문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독립구단에서 프로구단으로 진출하는 걸 ‘이적’이라 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곤도 국장은 “독립리그와 NPB리그가 상하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라, 선수 이동 시 ‘이적’으로 칭하고 있다”며 “NPB 구단이 원하면 시즌 중이라도 언제든 선수가 이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8월 가가와에서 뛰던 이탈리아 출신의 투수 알렉산드로 마에스트리는 오릭스로 이적했고, 그해 4승3패 평균자책 2.17을 기록했다.
독립리그에서 뛸 때의 김무영(사진 왼쪽). 사진 오른쪽은 김무영이 2009년 소프트뱅크에 입단한 장면(사진 맨 윗줄 왼쪽) |
소프트뱅크 불펜진의 한축을 담당하는 김무영 역시 시코쿠리그 출신이다. 김무영은 2008년 시코쿠리그의 후쿠오카 레드와블러스에 입단했다. 그해 독립리그에서 2승 무패 17세이브 평균자책 0.41을 거두자 6개 프로팀에서 ‘콜’이 왔다. 결국 2009년 김무영은 소프트뱅크에 지명되며 꿈에 그리던 프로 무대를 밟았다. 올 시즌 김무영은 1군 경기에 17번 등판해 평균자책 1.96을 기록 중이다.
시코쿠리그는 이처럼 선수들이 프로구단과 계약을 맺으면 적은 돈이라도 이적료를 받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독립구단의 존재 이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독립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가 꽤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사무국이 발간한 ‘공식선수명감’에 따르면 시코쿠리그에서 뛰는 일본 외 국적 선수는 총 11명이었다. 미국, 도미니카, 타이완, 중국, 한국(재일교포) 등 국적은 다양했다. 곤도 국장과 자리를 함께한 또 다른 사무국 관계자는 “대개 NPB리그로 진출하길 바라는 외국인 선수들이 시코쿠리그의 문을 두드린다”며 “독립리그 활성화와 리그 실력 향상 차원에서 외국인 선수들의 참여를 적극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립리그의 세 가지 목표. ‘유망주 육성’, ‘지역 사회 공헌’, ‘인재 양성’ 일본 독립리그는 꾸준한 지역밀착 마케팅으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은 지역 팬이 시구를 하는 장면
2005년 시코쿠리그가 출범할 때만 해도 4개 팀은 연고지 출신 선수만을 뽑았다. ‘지역밀착’이란 명분을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재는 타지역 출신 선수가 더 많다. 아마추어 선수 일색이던 선수 구성도 2006년 히로시마 도요카프에서 뛰던 아마노 코이치가 가가와에 입단하고, 2009년엔 전 메이저리거 고 이라부 히데키가 고치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다.
현재 시코쿠리그는 ‘만 15세 이상의 야구 경험자’를 상대로 연중 테스트를 열어 신인선수를 선발하고 있다. 남녀 차별이 없어 여성선수도 실력만 있으면 테스트에 참가할 수 있다.
곤도 국장은 시코쿠리그의 수준을 묻는 말에 지난해 소프트뱅크 3군과의 성적을 보여주며 “미국으로 치자면 트리플A와 더블A 사이의 수준”이라고 대답했다.
지난해 시코쿠리그 4개 팀은 소프트뱅크 3군과의 교류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가가와는 5승 1무 2패, 에히메는 4승 1무 3패로 상대전적에서 우위를 기록했고, 도쿠시마 인디고삭스는 3승 2무 3패로 동률, 고치만이 2무 6패로 열세를 나타냈다.
지난해 소프트뱅크 3군은 한국 프로야구 2군팀과의 교류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교류전 초반엔 한국 2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며 한국 야구인들 사이에 “3군 실력이 저렇게 좋냐”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2010년 가가와에서 투수로 뛰었던 김경태 SK 코치는 “시코쿠리그의 몇몇 팀은 한국 프로팀의 웬만한 2군 팀과 전력이 비슷할 것”이라고 평했다.
곤도 국장은 “독립리그 팀들이 지역사회에 뿌리 내리는 걸 볼 때마다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며 “NPB에 진출한 선수가 인사를 오거나 독립리그에서 선수로 뛰었던 이가 코치가 돼 후배들을 지도하는 걸 볼 때도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엘리트 코스를 밟은 곤도 국장이 박봉에도 독립리그를 지키는 것일지 몰랐다. 곤도 국장은 “우리의 목표는 좋은 선수를 육성해 프로로 진출시키는 것이지만, 프로로 진출하지 못한 선수들을 책임지는 것도 중요 임무”라고 밝혔다.
“간혹 주변에서 ‘독립구단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불가능한 희망을 제시하는 곳’며 ‘쓸데없는 희망으로 젊은이들의 인생을 축내지 마라’는 비판을 가하곤 한다. 맞는 지적일지 모른다. 독립리그 선수 가운데 극소수만이 프로에 진출하고, 그 가운데서도 극소수가 1군에서 성공한다. 하지만, 독립리그는 야구를 잘하는 이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야구를 잘하고 싶은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다. 어차피 야구를 못했던 이들이 오는 무대이기에 독립리그는 처음부터 선수들의 다음 인생을 고민한다.”
곤도 국장의 말대로 시코쿠리그는 ‘지역사회에 필요한 인재 육성’이라는 구호 아래 선수들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한다. 대표적인 게 ‘캐리어 서포트’다. 사무국은 야구를 그만두고 취업을 원하는 선수가 있을 시 지역 기업에 이 선수를 소개해준다. 단체생활의 장점에 주목하는 많은 기업은 야구 선수 출신 직원을 무척 선호한다.
학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선수들에겐 ‘아카데미 서포트’를 해준다. 시코쿠리그는 대학 진학을 원하는 선수가 있으면 지역 대학과 연계해 학비를 감면해주거나 장학금을 받도록 지원해준다. 현역 선수의 경우엔 방송통신대 프로그램으로 공부를 계속 하도록 독려한다.
곤도 국장은 “독립리그는 ‘프로 진출을 위한 유망주 육성’, ‘지역 사회 공헌’,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 양성’ 등 세 가지 목표가 잘 맞물려야 롱런할 수 있다”며 “시코쿠리그를 가리켜 ‘일본 야구의 젊은 심장’이라 부르는 것도 세 가지 목표를 충실히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높이 산 결과”라고 말했다.
곤도 국장은 독립리그를 준비하는 한국 야구계에 몇 가지 당부를 했다.
“리그 운영이 매우 힘들 것이다. 팀당 1억 엔에서 1억5천만 엔의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리그 운영진의 책임으로, 정열 이상의 노력이 요구된다. 중요한 건 스폰서비가 적더라도 10년, 20년을 꾸준히 지원해줄 수 있는 스폰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일희일비하지 않고 리그를 이끌 수 있다.”
덧붙여 곤도 국장은 “꼭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독립구단 운영은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것”이라며 “독립구단을 통해 큰돈을 벌려거나 개인의 안위에 이용하려 한다면 그 팀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욕심없이 ‘프로 진출을 위한 유망주 육성’, ‘지역 사회 공헌’,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 양성’ 등 세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린다면 이른 시일 안에 지역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시코쿠리그엔 9만5천839명의 관중이 몰렸다. 경기당 관중으로 따지자면 581명이었다. 곤도 국장은 “경기당 1천명이 몰리면 4개 구단 모두 흑자경영이 가능하다”며 “한국에 독립리그가 생기면 꼭 ‘마의 1천명’을 돌파해달라”고 당부했다.
[2편] 일본 BC리그 취재기 “독립리그는 제2의 프로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