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 [원본 메세지] ---------------------
하이젠베르크 [Heisenberg, Werner Karl 1901.12.5~1976.2.1]
부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August Heisenberg)는 처음에는 김나지움의 교사였다가 1910년에 뮌헨 대학에서 중세 및 근세 그리스 문헌학 강좌를 담당하였다. 베르너는 1911년 뮌헨의 막시밀리안
(Maximilian)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1920년에 졸업하였는데, 매우 우수한 성적이었다. 1914년에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18년에 근로동원에 차출되었다. 그해 독일의 패전으로 대전은 끝났으나 전후의 혼란은 잠시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플라톤의 저작을 읽었는데 이것은 그의 정신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20년에 러드위크 막시밀리안 대학에 입학하고 1921년에 뮌헨 대학에서 최우(summa cum laude)수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27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1922년 6월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가 괴팅겐에서 강연하였을 때, 접촉할 기회가 있어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그 후 1924년에 2회에 걸쳐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실을 방문하여 그 곳에 머물렀다.
그는 1922년부터 23년, 괴팅겐 대학에서 보른(Born)의 조수로 있었으나, 그의 물리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보어였다. 1925년, 보어-좀머펠트의 원자모형을 기초로 한 고전적 양자론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속의 전자궤도 개념에 의심을 품고, 방정식을 양자론적으로 해석하는 양자역학을 확립하였다. 이것이 1925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때쯤에 고초열에 걸려, 치료를 위해 헬골란드 섬에 체재하고, 거기에서 연구에 몰두할 기회가 있었다. 논문은 7월에 완성되어 Zeitschrift f r Physik에 실렸고 보른(Born)과 요르단(Ernst Pascual Jordan)은 이것에 근거하여 수일 동안에 의 관계를 발견하고 양자역학의 수학적 체계를 세웠다. 그 후 보른, 요르단과 양자역학에 관한 두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곧 물리학자 사이에 퍼져나갔다. 이 논문을 쓸 때쯤 파울리(Wolfgang Pauli)와 격렬한 논의를 하였으며 또한 서로 가르침을 받는 일도 있었다.
1927년에 하이젠베르크는 좌표와 운동량에 관한 불확정성 관계에 대한 논문을 썼다. 1933년에는 양자역학의 창시에 대한 공의로 막스 플랑크 메달, 또 1932년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32년, 채드윅(James Chadwick)이 중성자의 존재를 확인한 후,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제안하였으며, 방사능 발생의 과정에서도 중성자가 양성자와 전자로 변환된다는 주장을 발표하였다. 1933년 앤더슨(Phillip Anderson)에 의한 양전자의 발견은 그를 이 방향으로 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1933년은 또한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된 해로, 이즈음부터 유태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져 보른, 블로흐(F. Bloch), 슈뢰딩어(Erwin Schr dinger) 등 많은 물리학자와 몇몇 과학자가 독일을 떠나 망명하였다. 한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슈타르크(Johannes Stark)나 레나르트(Philipp Lenard) 등의 물리학자는 나치를 지지해 높은 지위에 앉아, 양자론이나 상대론을 유태적이라 하여 공격하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에 머물렀기 때문에 모종의 타협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주위에는 우수한 동료도 없어지게 되었다. 1937년 그는 추밀고문관 헤드만 슈마허(Hermann Schmacher)의 딸 엘리자베스(Elizabeth)와 결혼하였다. 1933년 독일에서도 핵에너지 이용에 관한 관심이 증대되어 병기국이 관계하는 '우라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는데 하이젠베르크도 중요한 실험에 참가하였다. 또한 1942년에 베를린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하이가롯호성의 교회 지하동굴 실험실에서 원자로를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1945년 2월말, 원자로의 임계조건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쯤, 영국군과 미국군 그리고 소련군도 독일국 내에 들어가고,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하였으며, 5월 7일에 독일군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하이젠베르크는 5월 4일 미국에게 체포되어 영국의 포암홀이라는 큰 저택에 구류되었다. 여기에는 핵분열의 발견자인 오토 한(Otto Hahn),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Freiherr von Weizs cker) 등의 핵물리학자도 있었다. 여기에서 8월 6일 뉴스를 통해 히로시마에 고성능 폭탄이 투하되었다는 것을 알고, 원폭인가 아닌가를 논의하였다.
핵물리학자들은 1946년 1월 3일에 구류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귀환하였다. 1946년 2월 14일부터 12년간 괴팅겐에서 살았으며 그 동안 독일 과학의 재건에 전력하였다. 1946년 1월 1일 영국 점령군의 제안으로 독일 과학협의회가 설립되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한과 함께 이 협의회 위원이 되었다. 1949년에는 독일 연구협의회가 설립되어 하이젠베르크가 총재가 되고, 또한 1953년 12월 10일에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이 설립되고 역시 총재가 되었다. 또한 1956년에 독일 원자력위원회가 창립되어, 핵물리학 부문의 위원장이 되었다.
1955년 5월 5일 파리조약의 발효로 독일의 재군비가 시작되고 과학연구에 관한 제한도 없어졌다. 이때 독일의 핵무장 문제가 생겨, 1957년 4월 13일 '괴팅겐 선언'이라 불리는 원폭 반대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폰 바이츠제커의 제안에 의한 것이지만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하여 18명의 핵물리학자가 서명하였다.
한때는 아데나워(Konrad Adenau; 초대 서독 수상) 정부와 심각한 대립을 일으켰다. 1960년 5월 9일 뮌헨에 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첸체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되고 하이젠베르크는 1970년 12월 7일 정년이 될 때까지 소장직을 맡았다. 하이젠베르크는 개개의 소립자는 하나의 '원자량'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1957년말에 새로운 물질 방정식을 유도하였다. 이 방정식은 '세계공식' 또는 '우주방정식'이라는 이름으로 저널리즘에서 다루었고, 1958년 2월 24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강연을 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이 쇄도하였다. 그러나 그가 6월에 제네바의 CERN에서 강연을 하였을 때는 그 수학적 난점이 비판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최후까지 그의 이상에 확신을 갖고 겔만(Murray Gell-Mann) 등의 쿼크 복합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