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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직 주만 원문보기 글쓴이: 신의손
갈보리 십자가의 작사/작곡 김 석완(형제중보기도회 인도자)
해병대에서 제대한 이후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인 1977년 6월에 교회에 출석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족함이 없었던 풍요로운 생활.... 그러나, 이 시절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때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집안에서는 부친의 실직, 소송문제, 광산개발을 위한 과도한 투자 등으로 경제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성경과 관련 서적을 구매하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으니까요.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새신자 였지만 하루 3차례 1시간 이상씩 기도를 했는데 그중 중심을 이루는 기도제목은 부친 사업과 관련하여 미국, 핀란드 광산회사와의 합작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1979년 가을, 2년에 가까운 기도 후에 미국의 National Nickel Alloy라는 곳에서 투자를 검토하고 한국에 임원을 파견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참으로 기뻤고 감사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했던 나머지 저는 기타를 들고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양을 시작한지 1시간쯤 지났을까 제 입에서는 그때까지 들어보지도 못했고, 불러보지도 못했던 곡과 가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찬양을 내려 주신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곡과 가사는 마음과 생각 속에 강하게 각인되었고 저는 그것을 기타음에 일일이 맞추어 오선지에 악보를 그리고, 가사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음악성이 부족해서 1시간이 지나서야 그 작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음악성이 부족했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목소리가 좋아서 노래를 잘 부른다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대학 1학년 때 대학 합창단에서 클럽활동을 하게 되면서 참으로 음악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악보가 잘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part에서 하는 음정을 따라가곤 했습니다. 지휘자에게 지적도 많이 받았었습니다. 제대 이후 기타를 배웠는데 겨우 code를 잡는 수준이었습니다.)
1980년 1월 봉사부서인 교회 대학부 동계수련회에 이 곡을 처음으로 소개했으며 대학부 찬양집에 수록되었습니다. 잊고 지내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5년 이후 저는 이곡이 카세트 테이프에 수록되어 시판된 것을 알게 되었으며, 미국 한인교회에서도 즐겨 부르는 찬양이 되었다는 소식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와 감사의 찬양을 참으로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감사로 인해 이 곡으로서 많은 분들의 믿음생활에 조그마한 격려가 되는 선물이 주어졌지요.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들을 결코 멸시치 않으시고, 여러분들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놀라운 선물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결국, 미국 광산회사와의 합작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차례 시도가 있었지요. 시추 결과 경제성이 낮아 개발할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1983년의 일이었습니다. 7년간의 지속적이고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큰 위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게 되었었습니다. 오랜 기도 후 기도응답이 되지 못한 아픔 속 에서도 저를 침체의 늪 가운데서 일으켜 세운 것은 “이제는 응답되지 않고 있는 이웃의 기도제목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중보기도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간절한 기도제목이 응답되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주님께서는 새로운 응답인 “영광스러운 직분 - 중보기도 사역자”의 사명을 저에게 내려 주신 것입니다. 중보기도사역을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 뵙는 그날까지 이루어가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작사․작곡자/ 중보기도 사역자 김석완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