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크메르의 세계
다문화 예술사 : 20세기 문화의 파괴자들
지난 3개월 간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시민항쟁인 "태국 레드셔츠 70일 항쟁사"를 거의 생중계 형식으로 쫓아가 보았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 잔학성에 익숙해지다 못해 우리의 골수 깊숙히 피비린내가 진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살인적 광기를 빼냄과 동시에, 20세기 대중음악계의 한 영웅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번 시리즈에서는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의 추모 특집을 준비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다문화"(Multi-culture)라는 주제를 모토로 하면서도, 우리의 다문화적 세계관을 반성하거나 가다듬는 작업에 왜 하필이면 락뮤직(Rock Music)이란 장르를 많이 동원하는 것인가 의문을 가지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선 맨 첫번째 이유는 바로 카페지기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락뮤직이야말로 20세기의 산업문명 속에서 출현해서 성장해온 예술장르로서, 현대사회의 여러 주요한 특성들을 그대로 반영한 예술 장르라는 점입니다. 또한 수많은 슈퍼 뮤지션들을 배출하여, 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창작하는 과정에는 고도의 예술적 훈련이 필요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은 "대중적" 문화라는 점도 놓칠 수 없는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바로 우리 카페가 동남아 지역학을 제도권(연구의 깊이)과 일반대중(정보의 공유) 사이에서 함께 포착하려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지난번 우리가 추모한 로니 제임스 디오에 대해, 제 개인적으로는 "20세기 최고의 명창"으로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의 가창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 것으로, 디오라는 인물이 "창조적인" 작곡가였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디오라는 대가는 20세기의 특징인 보편적 구조와 파워풀한 형식을 잘 보여준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는 포드자동차 생산시설이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량생산 문화 및 몇몇 보편적 특성들이 지구 전체로 퍼져나가는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점에서 약간은 비극성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전통적인 단조음계(마이너 스케일)의 선율을 사용하고, 그에 걸맞는 무난한 반주 형식과 함께, 최고의 파워풀한 가창력을 보여줬던 "디오"라는 인물은, 과히 20세기를 상징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뮤지션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는 "파괴"(destruction)입니다. 즉 디오와 같은 이들이 20세기적인 사조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한다면, 오늘 보여드릴 뮤지션들은 그러한 20세기적 특징들을 창조적으로 파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전쟁과 같은 "물리적 파괴"는 나쁜 것입니다만, 기존의 사조에 대한 "예술적 파괴"는 새로운 창조적 영역을 보여주고, 인류로 하여금 이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상상력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사람들의 사고영역으로는 불가능한 천재들만의 활동영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천재들이 길을 개척한 후에는,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이 다시 대중 속으로 침투한다는 점이죠..
사실 우리가 "다문화"를 말하기도 하고, 또 얼마전 "어떤 이"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다른 생각" 혹은 "다른 관점"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다른 생각" 혹은 "다문화"란 것은 단순히 "나와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성장해온 사회 속에서 형성된 "상식"(common sense)의 바깥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앞에서 본 양아치같은 이들이 말하는 "다른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즉 위에서 실례로 든 이에게 만일 제가 반문한다면, 그럼 "내 생각도 당신과 다르니, 당신이야말로 내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문제는 "다문화"란 것을 "상식"의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해 수용하려는 태도라고 한다면, 과연 "상식"이란 무엇인지 한번 살짝 생각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상식"을 <최소한 2인 이상의 공동체가 먼저 형성된 후에, 그 공동체 내에서 용인되는 규범과 무언의 합의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상식"을 "커먼 센스"(common sense: 공통적 감각)라고 하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란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항상 염두에 둘 것은 "우리 동네"(=우리 공동체)에서는 상식인 것도, "남의 동네"(다른 공동체)에서는 "상식"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하여간 "상식"의 보다 깊은 측면에 대해서는 훗날 <철학적 탐구> 게시판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다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예술에 있어서의 기존 사조의 파괴"에 관한 것이므로, 적어도 예술적 사조에서 상식을 파괴하는 것은 상당히 건설적이고도 풍요로운 결과를 안겨다 줍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나 그런 상식적 경계의 바깥을 보거나 나갈 수 없다는 점이죠. 우리가 오늘 감상할 뮤지션들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조류를 한 차원씩 부수고 나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故-디오 선생을 예로 든 것처럼, 20세기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어떤 정형화된 사조가 지배를 했고, 그것은 곧 산업사회의 특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미학"(美學, aesthetics) 혹은 "예술철학"(the philosophy of arts) 전공자들은 "모더니즘"(Morderbism)이란 말로 형상화시키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학술적 토론이 필요합니다만, 대강만 언급하여 우리의 논의진행을 돕고자 합니다. 반면 정형화된 모더니즘적 요소들을 좀더 탈피해나간 예술사조를 "포스트 모더니즘"(Post-Mordernism)이라 불렀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사람에 따라서는 <후기-모더니즘>이라고 이해한 사람도 있지만, 저는 <모더니즘 사조를 초월한 것>으로 정의해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예술에는 크게 청각예술(음악으로 대표됨)과 시각예술(미술이나 행위예술)이 있습니다. 즉 "예술"이란 것은 인간의 관념적 영역을 시각이든 청각이든 감각(sense) 혹은 경험의 영역에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미술과 음악은 서로 다른 감각적 도구를 사용합니다. 어린이들의 경우를 보면 음악(연주연습)보다는 미술(그림그리기) 쪽으로 더 쉽게 접근합니다. 그것은 최초 접근방법은 미술 쪽에 좀더 용이한 점이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미술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작품들을 대하려면 음악보다 훨씬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가령 대부분의 밤무대 가수의 노래와 이미자 씨의 노래를 비교해보면, 이미자 씨의 노래가 더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과 마로니에 공원의 거리작가의 추상화 작품을 함께 보여주면, 일반인들은 그 수준차를 잘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술은 어떤 면에서 음악보다 더 고도의 "해석"(interpretation) 능력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뛰어난 화가들은 뛰어난 철학자에 못지 않은 세계에 대한 해석능력을 가졌던 경우가 많습니다. 동시에 미술이 가진 이런 측면 때문에, 한 시대의 예술사조의 파괴가 음악보다 앞서서 미술이나 건축 분야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사조 역시 음악보다 미술(건축 및 디자인 포함) 쪽에서 20세기 초반부터 더 일찍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음악 쪽에서 이러한 변화는 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나타났고, 락뮤직의 경우엔 ----- 일부 아트락 밴드나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을 제외한다면 ----- 196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베이비 붐 세대 뮤지션들"의 시대가 지난 후, 바로 그 다음 세대에 가서야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다음 세대는 한국으로 치면 386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METALLICA
오늘 맨 먼저 들려드릴 밴드는, 현재 세계 라이브공연 산업에서 몸값으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밴드인 <메탈리카>(Metallica)입니다. 드러머인 라스 울리히(Lars Ulrich: 1963년생)를 리더로 해서 결성된 이 4인조 밴드는 1981년에 결성됐습니다. 리더인 라스 울리히와 리드 보컬 겸 기타리스트인 제임스 앨런 헷필드(James Alan Hetfield: 1963년생)를 제외한 베이스기타와 또 하나의 기타리스트 자리에는 그간 4명의 멤버들이 교체되어 나가 이들의 역사에는 총 8인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나머지 멤버들도 1961~1963년 사이 출생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딮퍼플"과 같은 초기 헤비메탈의 영웅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가운데, 이미 소개해드린 "주다스 프리스트"와 동일한 트윈기타 시스템(리드 기타리스트가 2명)을 채택해 더욱 헤비한 사운드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이들이 결정적으로 자신의 선배 세대와 다른 점은 정교한 리듬 쪼개기 및 인간의 통상적 반사신경을 거스르는 액센트 위치 등이 팀웍을 이뤄 강력하게 사용된 점에 있습니다. 저는 현대 대중음악이 클래식 음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흔히 리듬(박자)으로만 알려지던 요소를 극대화시켜, 비트(Beat)라는 측면을 음악의 핵심적 요소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재즈 음악이든 락뮤직이든 비트가 살아 움직이는 밴드나 뮤지션들이 곧 좋은 대중음악인이라 할 수 있고, 어떤 비트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장르가 출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가령 한국의 트로트 뮤직만 해도 폴카 시대가 있는가 하면, 트위스트 시대도 있었고, 디스코 시대도 있었던 것입니다.
<메탈리카>는 이전의 선배들과 다른 비트감을 자신들의 특징으로 형상화시켜 냅니다. 1986년 발표된 3번째 앨범 <마스터 어브 퍼핏>(Master of Puppets: 꼭두각시 인형의 달인)은 그런 점에서 락뮤직 역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었고, 빌보드 차트에 72주 동안 랭크되고 미국에서만 600만장이 팔리면서 그들 개인에게도 명성과 부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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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1989년 시애틀에서 진행된 공연이다. "메탈리카"가 자신들의 최대 명곡인 제3집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 <마스터 어브 퍼핏>(Master Of Puppets)을 연주한다. 중간의 느린 부분을 포함하여 총 3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심지어 느리고 애절한 트윈 기타의 화음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비트감이 살아서 진행된다. 이렇게 "메탈리카"의 곡들은 대부분, 1곡 내에서도 수많은 비트의 변화를 볼 수 있고, 매 순간 리듬을 잘게 썰어서 해부하는듯한 느낌을 주기조차 한다. |
이러한 "메탈리카"의 특성은 결국 "스래쉬 메탈"(Thrash Metal)이란 강력하고 스피디한 락뮤직의 한 서브 장르로 발전되면서, 이들 역시 이 장르의 가장 주요한 선도자 역할을 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메탈리카"는 단순히 새로운 영역의 개척자로만 머물지 않고, 상업적으로도 이전의 락 밴드들을 능가하는 경제적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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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1989년 "그래미상 시상식" 무대에서 특별공연을 한 "메탈리카".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락음악은 이미 1970년대부터 세계 음악산업의 주력 장르 중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팝뮤직 시장 전체로 보면 여전히 무언가 암울하고 언더그라운드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1989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메탈리카"가 특별공연을 한 것은, 이제 락뮤직이 상업적 음악 시장 전체에서도 선도적 위상으로 부상해 전면으로 나섰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곡명: "One" |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추진했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후폭풍에 따라, 1980년대 말부터 동서 이념논쟁의 시대가 해체되면서, 우리가 공부하는 캄보디아 역시 평화체제를 맞이한 바 있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개혁개방 정책을 더욱 홍보하고자 몇 차례 대규모 락 페스티발을 개최합니다. 그 중 1991년도에 초청을 받은 "메탈리카"의 공연은 오랜 기간 공산체제에서 살아왔던 러시아인들에게는 거대한 충격이었습니다. 사상 최대 규모로 이뤄진 이 공연에서는, 심지어 공연에서 질서유지를 담당하던 군인들까지 "메탈리카"의 음악에 흥분한 나머지 열광적인 관중으로 돌변하고 마는 진귀한 장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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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1991년 9월 28일 진행된 "몬스터스 어브 락 인 모스코우"(Monsters of Rock in Moscow)에서의 메탈리카 공연은,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군사시설인 모스크바 공군비행장에서 진행됐다. 최소 60만명 이상 100만명 사이로 추산되는 관중들 앞에서 펼쳐진 이 공연은, 과히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공연으로 기록될만하다고 생각된다. "메탈리카"를 상징하는 히트곡 중 하나인 <엔터 샌드맨>(Enter Sandman)을 연주한다. |
이제 "메탈리카"의 음악으로는 마지막으로 그들의 2006년 내한공연 모습을 전해드립니다. 2006년 8월 15일 진행된 이 공연의 장소는 잠실에 있는 "올림픽 주경기장"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멋진 헤드뱅잉(머리채 휘돌리기)을 보여줬던 베이스 기타의 클리프 버튼(Cliff Burton)이 탈퇴하고, 새롭게 로버트 트루히요(Robert Trujillo)가 가세한 모습입니다. 이제 "메탈리카"는 과거와 같이 장발을 하고 있지 않아서, 더 이상 "메탈리카"의 헤드뱅잉을 볼 수 없게 됐는데, 설령 여전히 장발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기엔 이제 이들의 육체적 나이로 보아, 목뼈와 그 근육도 뒷받침이 안될듯 합니다. ^^ 헤드뱅잉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공연 다음날 목에 파스를 몇장이나 붙여야 할지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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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06년 내한공연. 초반부에서는 프로그래시브 락 밴드인 "핑크플로이드"의 명곡 <타임>(Time)을 재편곡한 버전을 삽입한 후, 자신들의 장중한 연주곡인 <오리온>(Orion)을 연속으로 들려준다. 다른 장르에 비해서는 소수에 속하지만, 한국의 새로운 세대의 락매니아들은, 라이브 공연장에서 세계적인 락밴드들도 놀랄만한 열정적 반응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공연에서도 상당히 즐거운 한 때를 함께 보낸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사실 "메탈리카"의 새로운 특성들은 한국의 서태지 같은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나름대로 한국 대중문화사가 전환되는 데도 한몫 했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장중함을 배경으로 하는 "메탈리카"의 음악은 아직도 약간은 기존 사조에 한 발 걸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가 시작되면 정말로 완전히 다른 형태의 락음악 등장합니다. 이들은 마치 잉위맘스틴과 같은 기교파 속주 기타리스트들에 이어 메탈리카와 같은 극한의 리듬변형과 같은 초인적 테크닉과 기교가 등장한 것에 반기를 들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최초에는 소위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이라 불리다가 나중에는 "인디"(Indi)라고도 불리는 등,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준 이들 뮤지션들은 어떻게 정의하기도 불가능한 다양성으로 무장하고, 동시에 수많은 밴드들이 탄생합니다. 이 새로운 락커들(Rockers)을 조금 과장해서 설명한다면, 정말로 "기타 코드 딱 3~4개" 사용하는 단순성과, 더불어 과거 포크음악이나 펑크음악이 보여주었던 저항적이고도 심플한 정서까지도 집어넣어, 어떤 면에서는 1960년대나 1970년대 초반으로 복귀하는듯한 느낌까지 주었습니다. 그러나 복고적이긴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복고풍으로 과거와는 또다른 면을 갖고 있었습니다.
NIRVANA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개척적 뮤지션 한 사람을 든다면 밴드 "너바나"(Nirvana: 니르와나)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였던 커트 코베인(Kurt D. Cobain: 1967년생)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커트 코베인. 한마디로 말해 그의 등장 이전과 그의 사후 전세계 대중음악 신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학교 때부터 마리화나(대마초)를 피우면서 마약중독자이기도 했던 그는, 1987년에 음악을 시작하여 1994년에 인기 절정의 순간에서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와 유사하게, 이 천재 역시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지만, 도저히 후대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새로운 감성적 세계를 보여주고 떠나갔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비틀즈+지미 헨드릭스+밥 딜런+얄타꾸레+이해안됨+~%*%@!> 뭐 이런 표현으로밖에는 설명이 안될듯 합니다. 따라서 커트 코베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듯 합니다. 그냥 쭈욱~~ 감상들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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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울트라-노마드 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궁금증만 더 유발시키는 글..... 음악평론가 뺨치는 글과 편집 그냥 좋습니다.^^*
^^, <정체성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카페의 정체성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우리 모두가 받은 명예박사학위가 바로 <정보가공 예술학 박사>인 것입니다~~ ^^ 우리 모두는 예술가들입니다 ^^ ... 우리끼리는요~ 남들이 보면 <또라이들>이고요~~ ㅋㅋㅋ ^^
전체 화면으로 확대해서 보니 박진감이 넘치는구만요 ~~ 참조들 하시길... ^^ 아래쪽 우측에 화살표 4개 벌어지는 모양으로 된 아이콘 누르면 전체화면으로 바뀝니다.. 다시 작은 화면으로 돌아오실 때는 ESC 버튼 누르시고요..
이걸 지금에서야 아신거유?...
허~...거 참...이 상황을 뭐라 표현을 해야할 지 참으로 난감하오이다...
ㅋㅋㅋ
최초로 락음악을 들어본 것이 작년 성공회대에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추모음악회에서입니다. 일단 강한 사운드가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스트레스 해소로는 그만인거 같았습니다. 락음악을 저항의 음악이라고들 하는데 그날의 뮤지션들(강산애 피아 윤도현밴드 안치환 신해철 등등...)은 특히 그러했었구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명박 정권에서 가해질 자신들의 불이익에도 굴하지 않고 무료출연을 해주었고 많은 청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갔었죠. 근데 저는 늘 클래식 음악만을 듣고 있다는 ㅋㅋㅋ
부라사리 님을 위해 다음번엔 클래식 음악을 살작 건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캄보디아의 서양 클래식 음악계의 수준이랄까... 정말 궁금하네요. 아직 캄보디아 출신의 세계적인 연주자는 전혀 모릅니다. 베트남은 이미 20년전 배출되었지요. 피아니스트 당타이손...
아직은 뭐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될듯 합니다.. 전통음악이나 예술은 그나마 국가에서 복원하기 위해 노력 중인데, 클래식 음악은 기반이 취약할걸로 추정됩니다.. 일단 저희 <인도차이나 문화예술> 코너의 "캄보디아 VD 갤러리" 게시판에 보시면 시하누크 국왕이 제작한 영화들이 있습니다..그 중에 <쁘레이 쁘라싯>이란 영화를 좀 참조해주십시요..
그 중에 제5편을 보시면, 내전 이전에 촬영된 <왕립합창단>의 공연모습이 들어있습니다.. 대충 전쟁 전에는 약간 인프라가 있었던듯 합니다..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이겠죠.. <쁘레이 브라싯>은 시하누크 공이 권력을 갖고 있을 때 제작되어서.. 등장인물이 주인공인 시하누크 국왕(당시는 왕자라고 부름)과 모니니엇 왕후는 물론이고... 나오는 등장인물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다 진짜 그 당시 그 직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왕립합창단도 그 당시 합창단이 공연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