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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百濟本紀)]수수께끼】(1-1)
[百濟本紀(백제본기)第一(제1)溫祚王(온조왕)]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陀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여 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 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 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한 편,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로 아내삼았고,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1.<백제시조(百濟始祖)> 수수께끼】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수(編修)한 <김부식(金富軾)>은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설화(說話) 세 가지를 소개(紹介)했습니다.
<김부식(金富軾)>은 <온조(溫祚)>와 <비류(沸流)>의 설화(說話)는 겨레 고기(古記)에서 인용(引用)하고, <구태(仇台)>의 설화(說話)는 <지나사서(支那史書)>를 인용(引用)하여 기록(記錄)하면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이 시조(始祖)라고 착각(錯覺)하여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未知孰是)”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史實)은 세 사람이 각각 따로 나라를 세웠다가 뒤에 하나로 연합(聯合)하여 <온다라(百濟)>로 발전(發展)한 것입니다.
【2. <부여(扶餘)> 수수께끼】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된 것은 <김부식(金富軾)>이 <부여(夫餘)>를 왜곡(歪曲)했기 때문입니다.
[백제본기(百濟本紀)] [건국기(建國記)]를 제대로 읽으려면 <부여(扶餘)> 수수께끼가 풀려야 합니다.
우리 <한밝겨레> 역사에서 <부여(夫餘)>는 <대부여(大夫餘)> <북부여(北夫餘)> <졸본부여(卒本夫餘)> <동부여(東夫餘)> <서부여(西夫餘)> <갈사부여(葛沙夫餘)> <남부여(南夫餘)>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부여(大夫餘)> <북부여(北夫餘)> <졸본부여(卒本夫餘)> <동부여(東夫餘)>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온조(溫祚)> <비류(沸流)> <소서노(召西奴)> <우태(優台)> <고주몽(高朱蒙)>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환한나라(桓國)>와 <밝은다라(倍達)=밝은나라>에 이은 <아사다라(阿斯達)=아침나라>가 저물고 어두워지자 BC.425년에 44대 <구물(丘勿)> 단군(檀君)이 <장당경(藏唐京) 아사달(阿斯達)=지금의 <요령성(遼寧省)창도현(昌圖縣) 천두(泉頭)>에서 어둠을 밝히려고 불을 지피고, <대부여(大夫餘)>를 선포(宣布)했습니다.
[檀君世紀(단군세기)]
四十三世 檀君 勿理 在位三十六年
庚辰元年(紀元1873年)
乙卯三十六年(1908)隆安獵戶于和沖自稱將軍聚衆數萬陷西北三十六郡帝遣兵不克冬賊圍都城急攻帝與左右宮人奉廟社主浮舟而下之海頭尋崩是歲白民城褥薩丘勿以命起兵先據藏唐京九地師從之東西鴨綠十八城皆遣兵來援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 원년(단기1873년=BC.461)
을묘 36년(단기1908년=BC.426)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 만 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 해에 백민성[지금의 팔면성(八面城)]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지금의 창도현(昌圖縣) 천두(泉頭)]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지금의 동서 요하(遼河)]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四十四世 檀君 丘勿 在位二十九年
丙辰元年(紀元1909年)三月大水浸都城賊大亂丘勿率兵一萬往討之賊不戰自潰遂斬于和沖於是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于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改三韓爲三朝鮮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一尊臨理之制 而惟和戰之權不在一尊也七月命改築海城爲平壤作離宮
丁巳二年(1910)禮官請行三神迎鼓祭乃三月十六日也帝親幸敬拜初拜三叩再拜六叩三拜九叩禮也從衆特爲十叩是爲三六大禮也
壬申十七年(1925)遣監察官于州郡糾察吏民擧孝廉
戊寅二十三年(1931)燕遣使賀正
甲申二十九年(1937)帝崩太子余婁立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단기1909년=BC.425) 3월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 단제께서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지금의 창도현(昌圖縣) 천두(泉頭)]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 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
정사 2년(단기1910년=BC.424)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고 한다.
임신 17년(단기1925년=BC.409)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 23년(단기1931년=BC.403)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갑신 29년(단기1937년=BC.397)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하였다.
<대부여(大夫餘)> 말기(末期)에 불길이 약해져 연방(聯邦)의 결속(結束)이 느슨해지자 <웅심산(熊心山)=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중부(中部) 아루커얼친(阿魯科尒沁) 천산(天山)>에서 <고리국(槀離國)> 사람 <해모수(解慕漱)>가 일어나 <북부여(北夫餘)>를 선포(宣布)했습니다.
[檀君世紀(단군세기)]
四十七世 檀君 古列加 在位五十八年
丙寅元年(紀元2039年)
己卯十四年(2052)立檀君王儉廟于白岳山令有司四時祭之帝歲一親祭
己酉四十四年(2082)燕遣使賀正
癸丑四十八年(2086)十月朔日蝕是歲冬北漠酋長阿里當夫請出師伐燕帝不從自是怨不朝貢
壬戌五十七年(2095)四月八日解慕漱降于熊心山起兵其先槀離國人也
癸亥五十八年(2096)帝仁柔不斷令多不行諸將恃勇禍亂頻起國用不敷民氣益哀三月祭天之夕乃與五加議曰昔我列聖肇極垂統種德宏遠永世爲法今王道哀微諸汗爭强惟朕涼德懦不能理無策招撫百姓離散惟爾五加擇賢以薦大開獄門放還死囚以下諸俘虜翌日遂棄位入山修道登仙於是五加共治國事六年
先是宗室大解慕漱密與須臾約襲據故都白岳山稱爲天王郞四境之內皆爲聽命於是封諸將陞須臾侯箕丕爲番朝鮮王往守上下雲障蓋北夫餘之興始此而高句麗乃解慕漱之生鄕也故亦稱高句麗也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진 원년(단기2039년=BC.295)
기묘 14년(단기2052년=BC.282) 단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기유 44년(단기2052년=BC.252)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인사를 올려왔다. 이해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며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 57년(단기2095년=BC.239) 해모수가 웅심산[지금의 아루커얼친(阿魯科尒沁)천산(天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
계해 58년(단기2096년=BC.238)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들은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니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틑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 하였다.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北夫余纪 上(북부여기 상)]
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
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从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依熊心山而起策室兰滨戴乌羽冠佩龙光剑乘五龙车与从者五百人朝则厅事暮登天至是郞位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 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지금의 아루커얼친(阿魯科尒沁)천산(天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니 이에 이르러 즉위 하셨다.
<북부여(北夫餘)> 말기(末期) BC.108년에 <한(漢)>나라 도적(盜賊)이 <번조선(番朝鮮)>과 <서압록(西鴨綠)>에 들어오자 <대부여(大夫餘)> <고열가(高列加)> 단군(檀君)의 후예(後裔)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몰아내고, <졸본부여(卒本夫餘)>를 세워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추대(推戴)되었습니다.
<졸본부여(卒本夫餘)> <동명성왕(東明聖王)>은 BC.87년에 <북부여(北夫餘)>를 물려받아 5세단군(五世檀君)으로 즉위(卽位)했습니다.
[北夫余纪 上(북부여기 상)]
四世檀君 高于娄在位三十四年
辛酉元年遣将讨右渠不利擢高辰守西鸭绿增强兵力多设城栅能备右渠有功升为高句丽侯
癸亥三年右渠贼大举入寇我军大败海城以北五十里之地尽为虏有
甲子四年帝遣将攻海城三月而不克丙寅六年帝亲率精锐五千袭破海城追至萨水九黎河以东悉降丁卯七年设木栅于坐原置军于闾以备不虞
癸酉十三年汉刘彻寇平那灭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于是高豆莫汗倡义起兵所至连破汉寇遗民四应以助战军报大振
甲午三十四年十月东明王高豆莫汗使人来告曰我是天帝子装欲都之王其避之帝难之是月帝忧患成疾而崩皇弟解夫娄立之东明王以兵?之不己君臣颇难之国相阿兰弗奏曰通河之滨迦叶之原有地上壤膏腴宜五谷可都遂劝王移都是谓迦叶原夫余或云东夫余
4세 단군 고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계유 13년(BC.108),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의 나라가 혼란스럽자 번조선인인 최가 우거를 살해하였다. 뒤에 성기가 반항을 하였으나 그 또한 번조선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러하여 우거가 망하자 4군을 두고자 병력을 치막시키니,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군을 연파하였다. 이러자 그 지역의 백성들 모두가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BC.87)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께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 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라 하며 또 동부여라고도 한다.
[北夫余纪 下(북부여기 하]]
五世檀君 高豆莫 在位二十二年 在帝位二十七年
癸酉元年是为檀君高于娄十三年帝为人豪俊善用兵尝见北夫余衰汉寇炽盛慨然有济世之志至是即位于卒本自号东明或云高列加之后也
乙亥三年帝自将传橔所至无敌不旬月众至五千每与战汉寇望风而溃遂引兵渡九黎河追至辽东西安平乃古槁离国之地
甲午二十二年是为檀君高于娄三十四年帝遣将破裵川之汉寇与遗民并力所向连破汉寇擒其守将拒以有备
乙未二十三年北夫余奉城邑降屡哀欲保帝厅之降封解夫娄为候迁之岔陵帝前导鼓吹率众数万而入都城仍称北夫余秋八月与汉寇屡战于西鸭绿可之上大捷
壬寅三十年五月五日高朱蒙诞降于岔陵辛酉四十九年帝崩以遗命葬于卒本川太子高无胥立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제재위 27년
계유 원년(BC.108), 이 해는 단군 고우루13년이다. 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갑오 22년(BC.87)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 장수까지 사로 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3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 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BC.79)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BC.60) 제가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 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북부여(北夫餘)> 4세단군(四世檀君) <고우루(高于娄)>의 동생, <해부루(解夫娄)>는 <가섭원(迦叶原)=지금의 부여(夫餘)>로 옮겨 <동부여(東夫餘)>를 세웠습니다.
[迦葉原夫餘紀(가섭원부여기)]
始祖 解夫婁 在位三十九年乙未元年王爲北夫餘所制徙居迦葉原赤稱岔陵宜五穀尤多麥又多虎豹熊狼便於獵丁酉三年命國相阿蘭弗設賑招撫遠近流民使及時飽暖又給田耕作不數年國富民殷時有時雨滋岔陵民歌王正春之謠壬寅八年先是河伯女柳花出遊爲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仍升天不是父母責其無媒而從之遂謫居邊室高慕漱本名弗離支或曰高辰之孫王異柳花同乘還宮而幽之是歲五月五日柳花夫人生一卵有一男子破殼而出是謂高朱蒙骨表英偉年甫七歲自作弓矢百發百中夫餘語善射爲朱蒙故以名云甲辰十年王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淚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兒金色蛙形王喜曰此乃天?我令胤乎乃收而養之名曰金蛙及其長立爲太子壬戌二十八年國人以高朱蒙爲不利於國欲殺之高朱蒙奉母柳花夫人命東南走渡淹離大水到卒本川明年開新國是爲高句麗始組也癸酉三十九年王薨太子金蛙立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을미 (B.C.86) 원년 왕은 북부여 때문에 지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능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B.C.84) 3년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원근의 백성들을 널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 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인 8년(B.C.79)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 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 10년(B.C.77)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임술 28년(B.C.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새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계유 39년(B.C.48)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다.
【3.<주몽(朱蒙)> 수수께끼】
<주몽(朱蒙)>에 대한 이야기는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 기록된 나이와 연대가 서로 엇갈립니다.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기록에 따르면 <동부여(東夫餘)>에서 말직이를 하던 <주몽(朱蒙)>이 22살 때 <졸본부여(卒本夫餘)>로 망명(亡命)하여 <고구려(高句麗)>를 건국(建國)한 해가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신라(新羅)>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甲申, BC.37)이라고 했습니다.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는 <주몽(朱蒙)>을 20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라고 왜곡(歪曲) 했습니다.
그러나, [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따르면 <주몽(朱蒙)>은 <북부여(北夫餘)> 시조(始祖) <해모수(解慕漱)>의 둘째 아들인 <고리군왕(櫜離郡王)> <고진(高辰)>의 손자(孫子)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마나 bc79년에 낳은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몽(朱蒙)>은 <해모수(解慕漱)>의 현손(玄孫)입니다.
[太白逸史(태백일사)第六(제6) 高句麗國本紀(고구려국본기)]
櫜離郡王高辰 解慕漱之二子也 沃沮侯弗離支 高辰之孫也 皆以討賊滿功 得封也弗離支 嘗過西鴨綠 遇河伯女柳花 悅而娶之 生高朱蒙 時則壬寅五月五日也 乃漢主弗陵元鳳二年也 弗離支薨 柳花 率子朱蒙 歸于熊心山 今舒蘭也旣長 周遊四方 擇迦葉原而居之 選於官家 爲牧馬 未幾 爲官家所忌 與烏伊摩離陜父 逃至卒本 適 夫餘王無嗣 朱蒙 遂以王壻 入承大統是謂高句麗始祖也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 왕 불능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직이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백제본기(百濟本紀)]를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연대에 맞춰 정리하면 <주몽(朱蒙)>이 22살에 <동부여(東夫餘)>에서 <졸본부여(卒本夫餘)>로 망명(亡命)하여 <고무서(高無胥)> 단군(檀君)의 둘째 사위가 된 해가 BC.58년인데, 이듬해 3대(三代) 단군(檀君)으로 즉위(卽位)했다가 곧바로 <졸본부여(卒本夫餘)> 사람들에게 쫓겨나 <비류수(沸流水)> 가에 있다가 <소서노(召西奴)>를 만나 <고구려(高句麗)>를 건국(建國)한 해가 BC.57년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와 [백제본기(百濟本紀)]의 <주몽(朱蒙)> 연대(年代)는 20년의 차이가 납니다.
또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는 <지나사서(支那史書)> [위략(魏略)]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 있는 <동명설화(東明說話)>를 <주몽설화(朱蒙說話)>로 인용(引用)했으나,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졸본부여(卒本夫餘)> 시조(始祖) <고두막한(高豆莫汗)>의 존호(尊號)입니다.
[論衡卷二(논형권2) 吉驗第九(길험제9)]의 <동명 이야기>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북이 탁리국 임금을 모시던 무수리가 임신했다.
王欲殺之婢對曰 임금이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사뢰되
有氣大如雞子從天而下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我故有娠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後産子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捐於豬溷中豬以口氣噓之不死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했다.
復徙置馬欄中欲使馬借殺之 다시 마구간에 옮겨 말이 대신 죽이게 했으나
馬複以口氣噓之不死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王疑以爲天子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令其母收取奴畜之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名東明令牧牛馬 동명이라 이름 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 동명은 활을 잘 쏘아 임금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欲殺之東明走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南至掩水 以弓擊水 남쪽 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魚鱉浮爲橋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東明得渡 魚鱉解散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追兵不得渡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因都王夫餘 그리하여 부여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故北夷有夫余國焉 그래서 북이에 부여 나라가 생기게 됐다.
東明之母初妊時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見氣從天下 及生棄之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豬馬以氣籲之而生之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長大 王欲殺之 몸이 장대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以弓擊水 魚鱉爲橋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天命不當死故有豬馬之救 하늘의 운명이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구해주었다.
命當都王夫餘 부여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故有魚鱉爲橋之助也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도와주었다.
【4.<소서노(召西奴)> 수수께끼】
[백제본기(百濟本紀)]는 <소서노(召西奴)>가 <주몽(朱蒙)>과 결혼하여 <온조(溫祚)>를 낳았다는 설화(說話)와 <우태(優台)>와 결혼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다는 설화(說話) 등 두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사서(民族史書)]에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가 <동부여(東夫餘)> 시조(始祖) <해부루(解夫娄)>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결혼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은 후에 과부(寡婦)로 있다가, <졸본부여(卒本夫餘)> 3대(三代) 단군(檀君) 자리에서 쫓겨나 <비류수(沸流水)> 가에 있던 <주몽(朱蒙)>을 도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建國)했습니다.
<주몽(朱蒙)>이 <동부여(東夫餘)>에서 찾아온 유복자(遺腹子) <유리(琉璃)>를 태자(太子)로 책봉(冊封)하자, <소서노(召西奴)>는 BC.42년에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고구려(高句麗)>를 떠나 남쪽으로 가서 지금의 <요하(遼河)> 하구(河口) <대석교시(大石橋市)>에 반천리(半千里) 장원(莊園)을 일궈, BC.31년에 <주몽(朱蒙)>에게 편지를 보내 <어하라(御瑕羅)>로 책봉(冊封) 됐습니다.
[太白逸史(태백일사)第六 高句麗國本紀(제6고구려국본기)]
延豹渤 卒本人 來往於南北曷思 而理財致富 至累巨萬 陰助朱蒙 其創基立都之功 居多 後 率衆 轉徙九黎河而賈漁鹽之利 及高朱蒙聖帝 伐北沃沮納穀五千石 移都訥見 而先自願納招撫流亡 以勤王事 以功得封於坐原 而年八十歿 時平樂十三年丙申 春三月也高朱蒙 在位時 嘗言 曰若嫡子琉璃來 當封爲太子 召西弩 慮將不利於二子 歲己卯 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 南奔至辰番之間 近海僻地而居之十年 買田置庄 致富累萬 遠近聞風 來附者衆 南至帶水 東濱大海 半千里之土境 皆其有也 歲庚寅三月 遣人致書于朱蒙帝 願以內附 帝甚悅而獎之 冊號召西弩爲於瑕羅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bc42년)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辰番)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경인년(BC.31)3월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5.<비류(沸流)> 수수께끼】
BC.31년에 <어하라(御瑕羅)>로 책봉(冊封)받은 어머니 <소서노(召西奴)>가 13년 만에 죽자 BC.19년에 큰아들 <비류(沸流)>가 <어하라(御瑕羅)>를 계승(繼承)했습니다.
[太白逸史(태백일사)第六 高句麗國本紀(제6고구려국본기)]
冊號召西弩爲於瑕羅 及至十三年壬寅而薨 太子沸流立
어하라 책봉후 13년 임인(-19)에 소서노가 죽었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6.<온조(溫祚)> 수수께기】
형(兄), <비류(沸流)>가 <어하라(御瑕羅)>를 계승(繼承)하자 동생(同生) <온조(溫祚)>는 BC.18년에 형(兄), <비류(沸流)>를 떠나 동쪽으로 와서 <압록강(鴨綠江)> 북쪽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열다라(十濟)>를 세웠습니다.
후에 형 <비류(沸流)>가 죽어 그 백성이 귀부(歸附)하자 나라를 통합(統合)했습니다.
[太白逸史(태백일사)第六 高句麗國本紀(제6고구려국본기)]
太子沸流立 四境不附於是 馬黎等謂溫祚 曰臣聞馬韓 衰敗立至 乃可往立都之時也溫祚 曰諾 乃編舟渡海 而始抵馬韓彌鄒忽 行至四野 空無居人久而得到漢山 登負兒岳而望可居之地 馬黎烏干等十臣 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開沃澤 西阻大海 此天險地利 難得之勢 宜可都於此更不可他求也 溫祚 從十臣議 遂定都于河南慰支城 仍稱百濟 以百濟來 故得號也後 沸流薨 其臣民 以其地歸附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온조(溫祚)>의 <열다라(十濟)>는 BC.6년 북쪽의 <말갈(靺鞨)=고구려(高句麗)>과 동쪽 <낙랑(樂浪)=아사달(阿斯達)=속칭(俗稱) 고조선(古朝鮮) 연방(聯邦)이 흩어진 거수국(巨帥國) 들>의 공격(攻擊)에 시달려 <마한(馬韓)=BC.194년에 백아강(白阿崗)=대동강(大同江)을 차지한 기준(箕準)의 후예(後裔)>의 허락을 받아 <압록강(鴨綠江)> 건너 백리(百里) 땅에 자리 잡았습니다.
AD.8년에 <마한(馬韓)=BC.194년에 백아강(白阿崗)=대동강(大同江)을 차지한 기준(箕準)의 후예(後裔)>을 수멸(遂滅)하고 <한성(漢城)>을 천도(遷都)했습니다.
【7.<구태(仇台)> 수수께끼】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구태(仇台)>에 관한 기록(記錄)이 [백제본기(百濟本紀)]에 한 번,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한 번 등, 두 번 나옵니다.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북사(北史)]와 [수서(隋書)]를 인용(引用)하여 <동명(東明)의 후예(後裔) <구태(仇台)>가 처음으로 <온다라(百濟)>를 세웠다고 소개(紹介)되었습니다.
[北史(북사)列傳第八十二(열전제82)百濟(백제)]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
[隋書(수서)列傳第四十六(열전제46)百濟(백제)]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부여왕자(夫餘王子)> <구태(仇台)>가 <현토성(玄菟城)>을 포위(包圍)한 <고구려(高句麗)> <마한(馬韓)> <예(穢)> <맥(貊)> 연합군(聯合軍)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三國史記卷十五(삼국사기권15)高句麗本紀第三(고구려본기제3)<太祖大王(태조대왕)>]
○六十九年(121),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諷{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菟>·<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69년(121) 봄, 한 나라 유주 자사 풍 환·현토 태수 요 광·요동 태수 채 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 환·요 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한 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 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隧縣>. <遼東>太守<蔡諷>, 將兵出於<新昌>, 戰沒. 其功曹椽 <龍端>·兵馬椽 <公孫酺>, 以身扞 <諷>, 俱歿於陣, 死者百餘人.
여름 4월, 왕이 선비의 군사 8천 명과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 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연 용 단과 병마연 공손 포는 자신의 몸으로 채 풍을 엄호하다가, 모두 진영에서 죽었다. 이 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70년(122),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한 나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의 <부여왕자(夫餘王子)> <구태(仇台)> 기록(記錄)은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록(記錄)을 그대로 베낀 <김부식(金富軾)>이 <마한(馬韓)>에 대한 수수께끼를 덧붙인 것입니다.
[後漢書卷八十五(후한서권85) 東夷列傳第七十五(동이열전제75)]
夫餘國,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建光元年春, 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捕斬濊貊渠帥, 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遣使詐降;光等信之, 遂成因據險阨以遮大軍, 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 焚城郭, 殺傷二千餘人. 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 而貊人已去.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 殺略吏人. 蔡諷等追擊於新昌, 戰歿, 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 俱沒於陳, 死者百餘人. 秋, 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 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 與州郡并力討破之, 斬首五百餘級.
[후한서(後漢書)]의 [본기(本紀)]에 따르면 <선비(鮮卑)>와 <고구려(高句麗)>의 잇따른 공격(攻擊)에 시달리던 <후한(後漢)>을 <부여왕자(夫餘王子)> <위구태(尉仇台)>가 구(救)해준 것입니다.
[後漢書卷五(후한서권5)孝安帝紀第五(효안제기제5)]
建光元年春正月,幽州刺史馮煥率二郡太守討高句驪、穢貊,不克。
夏四月,穢貊復與鮮卑寇遼東,遼東太守蔡諷追擊,戰歿。
冬十一月, 鮮卑寇玄菟。
冬十二月,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夫余王遣子與州郡並力討破之。
延光元年春二月,夫余王遣子尉仇台將兵救玄菟,擊高句驪、馬韓、穢貊,破之,遂遣使貢獻。
[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후한(後漢)> 말기(末期) <현토성주(玄菟城主)>로 있다가 <요동왕(遼東王)>으로 독립(獨立)한 <공손탁(公孫度)>이 당시의 두 강국(强國)인 <고구려(高句麗)>와 <선비(鮮卑)> 사이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부여왕(夫餘王)> <구태(仇台)>에게 딸을 바쳐 결혼동맹(結婚同盟)했습니다.
[三國志卷三十(삼국지30)魏書三十(위서30)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오환선비동이전제30)]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공손탁(公孫度)>은 <후한(後漢)> 말기(末期)에 <현토성주(玄菟城主)>로 있다가 <요동왕(遼東王)>으로 독립(獨立)하여 손자(孫子) 때까지 50년 동안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동성(山東省)에 군림(君臨)했습니다.
[三國誌卷八(삼국지권8)魏書八(위서8)二公孫陶四張傳第八(2공선도4장전제8)]
先時,屬國公孫昭守襄平令,召度子康為伍長。度到官,收昭,笞殺於襄平市。郡中名豪大姓田韶等宿遇無恩,皆以法誅,所夷滅百餘家,郡中震慄。
당초 속국 사람 공손소가 양평령을 지낼 때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을 불러 오장으로 삼았었다. 공손탁이 관직(요동태수)에 취임하자 공손소를 잡아들여 양평의 저자에서 태형을 가해 죽였다. 요동군 내의 이름난 호족, 대성인 전소 등 평소 자신을 은혜롭게 대우하지 않은 이들을 모두 법에 따라 주살하니 멸하여 없앤 것이 백여 가에 이르러 군중이 진율했다.
東伐高句驪,西擊烏丸,威行海外。
동쪽으로 고구려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을 공격하여 위엄을 해외에 떨쳤다.
初平元年,度知中國擾攘,語所親吏柳毅、陽儀等曰:「漢祚將絕,當與諸卿圖王耳。」
초평 원년(190년), 공손탁은 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알고 친임관리인 유의, 양의 등에게 말했다, “한조가 장차 끊어지려 하니 응당 경들과 더불어 왕업을 꾀하려 하오.”
[一]時襄平延裡社生大石,長丈餘,下有三小石為之足。
[1] 당시 양평현 연리의 사묘에 큰 돌이 생겨났는데 길이가 1장 남짓이었고 아래로는 3개의 작은 돌이 있어 발이 되었다.
或謂度曰:「此漢宣帝冠石之祥,而裡名與先君同。社主土地,明當有土地,而三公為輔也。」
度益喜。
어떤 이가 공손탁에게 이르길, “이는 한나라 선제 때 관석의 상서로운 조짐이며 리의 이름이 선군 공손연(公孫延)과 같습니다. 사는 토지를 주관하니 분명 토지를 가지게 되고 삼공의 보좌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공손탁이 더욱 기뻐했다.
故河內太守李敏,郡中知名,惡度所為,恐為所害,乃將家屬入於海。度大怒,掘其父□,剖棺焚屍,誅其宗族。
예전에 하내태수를 지냈던 이민은 군내에서 저명한 인물이었는데, 공손탁의 소행을 증오하고 그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해 가속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손탁이 대노해 그의 부친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신을 불태웠으며 그의 종족들을 주살했다.
[二]分遼東郡為遼西中遼郡,置太守。越海收東萊諸縣,置營州刺史。自立為遼東侯、平州牧,追封父延為建義侯。
[2] 요동군을 나워 요서, 중료군을 설치하고 태수를 두었다. 바다를 건너 동래군의 여러 현들을 거두고 영주자사를 두었다.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에 오르고, 부친인 공손연을 건의후에 추봉했다.
立漢二祖廟,承制設□墠於襄平城南,郊祀天地,藉田,治兵,乘鸞路,九旒,旄頭羽騎。
한나라 2조(한고조 유방과 후한 광무제 유수)의 묘를 세우고 승제(천자의 명을 거치지 않고 관작을 봉배하는 것)하였고 양평성 남쪽에 단선(흙은 쌓아 만든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교사를 지냈다. 적전(제왕이 직접 밭을 갈던 의식), 치병(연병 의식)하고 난로(제왕의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구류(아홉개 비단깃술로 장식한 천자의 깃발), 모두(아홉개의 술이 달린 관모)를 쓰고, 우기(천자의 의장행렬 중 선두에 서던 기병)를 부렸다.
太祖表度為武威將軍,封永寧鄉侯,度曰:「我王遼東,何永寧也!」藏印綬武庫。度死,子康嗣位,以永寧鄉侯封弟恭。是歲建安九年也。
태조가 공손탁을 무위장군으로 삼고 영녕향후에 봉하니 공손탁이 말했다, “내가 요동에서 왕으로 지내는데 무슨 영녕향후인가!” 그리고는 인수를 무기고에 넣어두었다. 공손탁이 죽자 아들인 공손강이 그 지위를 이었고 영녕향후의 작위는 공손강의 동생인 공손공에게 봉했다. 이 해가 건안 9년(204년)이다.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AD.204년 <둔유(屯留)> 남쪽 황무지(荒蕪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계(薊) 동쪽 지역>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設置)하고 유민(遺民)을 모았는데, <공손강(公孫康)>의 매제(妹弟)인 <구태(仇台)>가 <부여(夫餘)=졸본부여(卒本夫餘)> 백성(百姓)을 나누어 이주(移駐)시키고, <온다라(百濟)>를 세운 것입니다.
[三國志卷三十(삼국지권30) 魏書三十(위서30)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오환선비동이전제30)]
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
<대방고지(帶方故地)>에 있던 <온다라(百濟)>는 <공손강(公孫康)>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이 <조위(曹魏)> 태위(太衛) <사마의(司馬懿)>에게 토벌(討伐)될 때, AD.238년에 <고마성(固摩城)=웅진(熊津)=공주(公州)>로 천도(遷都)한 후,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 AD.238년에 <한성(漢城)>의 <열다라(十濟)>를 <담로(擔魯)>로 통합(統合)하여 <동이강국(東夷强國)>으로 발전(發展)한 것입니다.
[三國誌卷八(삼국지권8)魏書八(위서8)二公孫陶四張傳第八(2공선도4장전제8)]
景初 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六月,軍至遼東。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修櫓,為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潰,與其子修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周書卷四十九 列傳第四十一異域上 高麗 百濟 蠻 獠 宕昌 鄧至 白蘭 氐 稽胡 庫莫奚]
百濟者,其先蓋馬韓之屬國,夫余之別種。有仇台者,始國於帶方。故其地界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治固麻城。...王姓夫余氏,號於羅瑕,民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妻號於陸,夏言妃也。...其王以四仲之月,祭天及五帝之神。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삼국유사(三國遺事)제2권(第二卷)기이제2(紀異第二)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
또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즉시 이를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BC.239)에 사비왕(沙沸王)이 죽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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