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와 해순은 문화센터에서 영어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가벼운 대화로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서로의 외로움을 알게 되면서 감정이 깊어졌다.
둘은 각자의 가정이 있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래서 오늘도, 조심스럽게 대구역에서 만났다. 목적지는 원동역.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그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해순은 영해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렇게라도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아."
영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나도 그래. 너랑 있으면 모든 게 다 잊혀져. 우리… 이렇게 몰래 만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같이 살 순 없을까?"
해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기차가 원동역에 도착하고, 둘은 활짝 핀 매화길을 함께 걸었다. 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감쌌다.
"정말로… 도망칠 수 있을까?" 해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 다 행복하지 않잖아. 여기서 멈추면 평생 후회할 거야."
매화꽃잎이 흩날리는 길목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랑을 약속하듯,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았다.
"같이 떠나자. 우리 둘만의 삶을 살자."
해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오랜 갈망 끝에 얻은 확신이었다.
"그래… 어디든, 너와 함께라면."
둘은 서로를 꼭 안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에서
영해와 해순은 조용히 사라졌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서둘러 휴대폰을 버리고, 새벽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거제도였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 근처, 작은 마을에는 낡았지만 아늑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주인은 서울로 올라가 살게 되면서 집을 내놓았고, 영해와 해순은 망설임 없이 그곳을 빌렸다.
처음엔 낯설고 서툴렀지만, 둘이 함께하는 삶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해순은 작은 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쪽파와 상추를 심고, 방울토마토 모종도 심었다. 아침이면 바람의 언덕을 따라 걸으며 햇살을 맞았다.
영해는 마을 선착장에서 어부 일을 도왔다. 새벽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를 타고 나가, 싱싱한 고기를 잡아 돌아왔다. 저녁이면 둘이 갓 잡은 생선으로 매운탕을 끓여 먹고,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웃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해순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솔직히… 처음엔 불안했지. 그런데 지금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것 같아."
밤이면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마을, 바닷바람이 부는 언덕 아래서, 두 사람은 세상의 걱정을 잊고 살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곳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불청객
늦여름, 거제도의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해순은 작은 밭에서 방울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영해는 바다에 나가 있었고, 집에는 그녀 혼자였다.
그때였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낯선 발소리. 고개를 들자, 해순의 남편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해순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전의 감정은 이미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은 손에 든 서류를 내밀었다.
"이혼 서류야. 그리고 이건 재산 포기 각서. 다 정리하고 깨끗하게 끝내자."
해순은 서류를 흘끗 보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다음 말이 그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네 친정에서 받은 땅이랑 건물, 그거 다 내 앞으로 해. 애초에 네가 나한테서 도망쳤으니 그 정도는 포기해야지."
해순은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건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거야. 당신이 가져갈 이유가 없잖아."
"네가 날 버린 대가라고 생각해." 남편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해순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 당신을 버린 게 아니라, 내 삶을 찾은 거야. 그리고 내 재산은 내 것이야. 당신한테 줄 생각 없어."
남편은 이를 악물었지만, 해순의 눈빛이 흔들림 없는 걸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혼 서류만이라도 빨리 도장 찍어. 그거면 되니까."
해순은 말없이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펜을 들어, 조용히 사인을 했다.
"이제 됐어. 가."
남편은 씁쓸한 표정으로 서류를 챙기고 돌아섰다. 그는 끝까지 재산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해순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사라진 뒤, 해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제도의 바람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이제 정말 자유야."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토마토를 따기 시작했다.
돌아갈 수 없는 길
거제도의 바람이 점점 차가워질 무렵, 해순은 친정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영해와 함께 급히 대구로 올라갔지만,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눈물로 장례를 준비하던 중,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해순의 전남편이었다.
"네가 뭔데 여길 와?!" 해순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전남편은 검은 상복 차림이었지만, 눈빛은 불길했다.
"아버님 돌아가셨다길래 조문하러 왔다. 그런데… 너,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전남편은 비웃듯 웃더니, 돌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거제도에서 산다고 해서 조용히 있으려 했어. 근데 네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꽤 많더라? 너랑 나, 법적으로 완전히 정리됐지만,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지."
해순은 그제야 그가 왜 나타났는지 깨달았다. 돈 때문이었다.
"미쳤어? 당신이 뭔데 우리 아버지 재산을 넘본다는 거야?"
전남편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너 혼자만 잘 살겠다고 날 버렸잖아! 근데 이제 와서 떵떵거리고 살겠다고? 그건 안 되지!"
그는 다짜고짜 해순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 순간, 옆에서 참다 못한 영해가 앞으로 나섰다.
"놔라."
"뭐야, 이 자식이?"
전남편이 비아냥거리며 영해를 밀쳤다. 순간, 영해의 주먹이 날아갔다. 한 방에 나가떨어진 전남편은 곧바로 벌떡 일어나 영해와 뒤엉켰다.
장례식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이 출동했고, 영해는 폭행 혐의로 연행되었다.
합의
경찰서에서 해순은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영해는 구속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전남편을 찾아갔다.
"그만하자. 합의해."
전남편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합의? 그럼 나한테 뭐 해줄 건데?"
해순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 재산 중 일부를 줄게. 대신, 두 번 다시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
전남편의 눈빛이 번뜩였다.
"얼마?"
해순은 망설였지만, 영해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가 남긴 건물 하나, 그걸로 끝내."
전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더 이상 너랑 엮이지 않을게."
그렇게 합의가 이루어졌고, 영해는 풀려났다.
그날 밤, 영해는 씁쓸한 표정으로 해순을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해순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 때문이 아니야. 이제라도 완전히 끝낼 수 있어서 오히려 잘된 거야."
영해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대구의 밤은 차가웠지만, 두 사람의 마음만은 단단했다.
이제, 진짜 새로운 시작이었다.
앞산 빨래터 근처에서
장례를 마친 후, 해순과 영해는 대구에 남기로 했다. 거제도에서의 생활도 좋았지만, 해순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녀는 앞산 빨래터 근처에 작은 집을 구했다. 오래된 주택이었지만, 정원이 있고 햇살이 잘 드는 곳이었다. 해순은 집을 손질하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릴 때 여기서 엄마랑 빨래했었어. 개울물에 발 담그고 놀던 기억도 나."
영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네."
둘은 함께 가구를 들이고, 벽을 칠하고, 정원에 꽃을 심었다. 집이 점점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갔다.
새로운 일상
아침이면 해순은 작은 텃밭에서 채소를 따고, 영해는 근처 시장에 가서 신선한 재료를 사 왔다. 함께 요리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나누었다.
어느 날, 해순은 오래된 빨래터를 찾아갔다. 세월이 흘러도 그곳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담그며 미소 지었다.
"여기서 이렇게 다시 살 줄은 몰랐어."
영해가 조용히 그녀 곁에 앉았다.
"그럼 후회는 없어?"
해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 당신이랑 함께라서."
영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앞산의 바람은 포근했고, 두 사람의 삶은 이제야 온전히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따뜻한 초대
어느덧 대구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해순은 문득 문화센터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자심, 춘애, 기순, 연이, 그리고 영어를 가르쳐주던 고정조 선생님까지.
"우리 예전처럼 다 같이 만나볼까?"
영해도 반가운 얼굴들이 생각났는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그럼 우리 집에서 저녁 파티 하자."
그렇게 초대가 시작되었다.
재회
그날 저녁, 해순과 영해의 집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자심은 여전히 말이 많았고, 춘애는 부드러운 미소로 모두를 반겼다. 기순은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고, 연이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고정조 선생님은 반백이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렇게 다 같이 모이니 옛날 생각이 나는구먼. 그때는 영어 공부한다고 머리 싸맸었는데."
"맞아요! 선생님이 'This is a pen'만 가르쳐줬어도 우린 참 열심히 배웠지!" 자심이 농담을 던지자 모두 크게 웃었다.
해순과 영해는 직접 요리한 음식을 대접했다. 거제도에서 배운 생선요리, 해순이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만든 반찬들. 따뜻한 음식과 함께 옛 추억도 하나둘 꺼내졌다.
행복한 순간
와인잔을 기울이며, 연이가 조용히 말했다.
"해순아, 너 진짜 행복해 보여."
해순은 영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응, 나 이제야 진짜 내 삶을 사는 것 같아."
영해가 해순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더 행복하지."
고정조 선생님이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자, 우리 오랜 인연과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 건배하자!"
"건배!"
잔들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밤이 깊어갈수록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웃음과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저녁, 해순과 영해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그 어떤 것보다 값지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앞산 빨래터 근처의 작은 집에서, 두 사람은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