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봄, 벗, 차, 즐거움
박숙희 / 한문교육학 박사, 우리 협회 충북지부장
양지쪽 잔디밭에 보랏빛 제비꽃이 소담하다. 가녀린 작은 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봄의 전령사. 온 세상에 봄빛이 따사롭다. 활기 넘치는 생명력을 가득 담고 있다. 봄은 우리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준다. 새로운 세계로의 기대로 희망찬 걸음을 내딛고 싶은 계절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속에서, 땅 위에서 /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학창시절 삶의 활력과 지표를 제시하는 조병화 님의 시 ‘해마다 봄이 되면’은 봄의 전령사 못지않게 힘찬 발걸음을 나아가게 했다. 새학년의 기쁨에 앞선 불안, 새로운 친구에 대한 기대와 망설임, 상급학교의 진학에 대한 조바심과 두려움으로 걱정이 앞설 때, 무거운 책가방과 만원버스에 시달리면서도 뭐든지 잘될 거라는 믿음을 은근히 갖게 하였다.
봄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준다. 흐드러지게 핀 온갖 꽃들은 최상의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을 만끽하게 한다. 그러나 너무나 순간적이다. 당나라 때 시선(詩仙) 이백이 ‘덧없는 삶이 꿈과 같으니 기쁨을 누리는 때는 얼마나 될까? 옛사람들이 촛불을 밝히며 밤까지 놀던 것이 진실로 이유가 있었구나.’라며, 짧게 가버리는 봄이 아쉬워 탄식한 것이 절묘하게 공감이 간다. 이 봄을 몇 번이나 더 볼까? 더 절절히, 더 많이 가슴에 담아 오래도록 봄을 즐기고 싶어진다.
원감국사의 <우연히 설당의 운을 써서 인과 묵의 두 선인에게 보이다>는 조계산에서 지은 시로, 봄의 자연풍광의 아름다움 속에서 활달하고 풍치 있게 펼친 즐거운 차자리를 눈에 선하도록 묘사하였다.
曹溪不獨龍象窟 사찰은 스님들만 사는 곳이 아니니
春晩園林最奇絶 늦은 봄 경내 숲은 최고의 절경일세
數枝山茶紅似火 가지마다 붉은 동백은 불타는 듯하고
千樹梨花白於雪 동산 가득 핀 배꽃은 흰 눈 내린 듯하네.
竹外紅桃開最晩 대숲 너머 붉은 복숭아꽃 뒤늦게 피니
正似卯酒初上頰 두 볼에 막 해장술 오른 듯하구나
朝來山雨灑如飛 새벽녘 봄비 흩날리듯 뿌리니
但見綠葉相低垂 축축 늘어지는 푸른 잎새들 싱그럽기만.
良辰美景古難得 좋은 때와 멋진 경치 만나기 어려우니
我今行樂嗟暮遲 저물도록 모여 마음껏 즐겨보세
憑君急呼二三子 그대여, 얼른 벗님 몇 더 모셔와
論詩煮茗供遊嬉 시 읊고 차 마시며 함께 놀아 보세나.
붉게 핀 산다화와 봄비를 머금어 더 푸른 잎. 대비되는 색채는 봄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며 지상 최고의 아름다운 장소를 표현한다. 조계는 용과 코끼리의 큰 위용을 지닌 고승(高僧)들의 거처로 중생구제에 우뚝 서 중생들의 흠모를 받고 있으니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다. 아름다운 풍광과 좋은 사람이 있으니 이보다 더 즐거운 잔치자리가 또 있을까.
‘예로부터 얻기 어려운 양신과 미경’이니, 두 세 사람 불러 와 봄날의 절경을 즐기며 시를 이야기하고 차 마시면서 함께 득도의 즐거움을 위해 정진하기를 멋들어진 흥취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모여 살기 마련이지만 뜻 맞는 사람이 모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자연도 아름다운 꽃을 즐기고자 하면 벌써 시기를 놓치기가 일쑤이다. 이 모두가 들어맞은 날 날씨마저 화창하니 즐거운 차회를 베풀고 시로 지어 남기고 싶다. 좋은 벗과의 즐거운 차자리는 생활의 활력소이다. 더구나 산사(山寺) 생활 최고의 즐거움은 ‘좋은 때와 아름다운 경치’ 속의 ‘차 자리’ 뿐이다.
친구는 천륜은 아니지만 천륜 못지않은 귀중한 관계이다. 친구와 같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벗이 있어 인간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차(茶)에 의한 교유는 다양한 계층과 인물임에도 이렇듯 솔직하고 정겨운 소박한 우의를 다지게 한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의 교유로 벼슬이나 명예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시공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진ㆍ선ㆍ미가 어우러진 자리라 할 수 있다.
햇차의 향기, 맛, 빛깔이 진하게 다가온다. 이백이 봄꽃이 어우러진 동산에서 집안 형제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봄을 즐겼듯이, 백자 다관에 한웅큼의 차를 넣고 넉넉히 우려내어 마음 맞는 벗들과 정담을 나누며 봄을 즐기고 싶다. 호사로운 이 바람이 내 인생에 몇 번이나 찾아올까. 봄꽃이 지기 전에 서두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