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프라이데이 애프터눈의 속지를 본적이 있을거라 믿는다.
자세히 보면 나의 포즈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다면...
앗..못봤다구요? 그럼 말구.
암튼..뭐 싸는 포즈로 외면 때리고 있는데...그건 당시 나의 심경이 그랬다
라는거다....왜냐구? 삐졌으니까.
( @ 운영자 : 그 문제의 사진은 2~3일 안으로 올려놓겠습니다 !!!!)
나만 판내고 히히낙낙할께 아니라 여러 사람 살리자고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그것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섭외하고 만나고 녹음하고 설득하고
계약까지...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일일히 설명하기도 괴롭다.
그런데 자켓 사진 촬영날에 다들 웃고 떠드는게 왜그리 속으론 섭섭한지..
해서 사진이 찍기가 싫었다. 아..참 나도 애같은 맘이 있었나보다.
앨범은 반응이 좋았고 밴드들도 전보다 분위기가 업되었다.
결국 큰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잠실 체육관이였다.
당시 멤버들은 메탈리카의 추종자들인 아발란쉬와
나성메탈 그룹 크라티아...그리고 우리...기타 등등
사람도 대빵오고...상당히 고무적이였다.
그나마 그땐 목마른 중생들과 배고픈 밴드들의 만남이 드물던 차여서
아주 흥겨운 행사가 되었고 조금 일찍 데뷰해서 선배 대접이란것도 받아볼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메스컴에서도 조금씩 주목을 받을수 있었고 크라티아와 아발란쉬의
인기는 상당한 것이라 레코드사에서도 두 밴드의 조인트 앨범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당시에 동병상련하던 잉간들을 알아보자.
일본 메탈 카피로 시작했던 이승환....(채림이랑 좋냐?)
셀프 써비스란 밴드를 하던 마이클 쉥커 추종자 손무현(이젠 아주 백밴드로 살더만)
신씨 가문에 또하나의 기타리스트 신윤철
내사랑 내곁에를 베껴서 만든 오태호(윤철과 태호는 리자드라는 아이언 메이든 카피 밴드 출신)
게리무어를 좋아하던 부활의 멤버들 등등이 있었다.
늘어놓고 나니 다들 가요계에서 한수 하시는 분덜이구만.
이 대목에서 우린 갈등하게 된다....
가요를 해야하나? 아님 일본 노래라도 베껴야 하나?
것도 아님 진정 마초의 길을 가야하나?
보시다시피 나의 선택은...............마초라이프올시다.
어느덧 한국 록 필드엔 시나위, 백두산, H2O, 부활,블랙신드롬,무당등이
자릴 잡아나가고 있었고 연말 가요시상식땐 송골매와 함께 무당이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올림픽도 끝난뒤 대한민국의 경기는 단군 이래 최고라는 평을 들으며
하이 드라이브 분위기로 달리고 있었고...우리 메탈 패밀리들의 행보도
점점 바빠졌다.
이때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엔 라이브 클럽이란게 생기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전국 클럽 라이브를 다녔고 헤아려 보니 일년에 100회가 넘는
정말 헤비한 일정을 보냈던것 같다.
참고로 프라이데이 애프터눈엔 내가 절라리 좋아하고 어릴쩍 친구놈인
정훈이의 연주도 들어있는데..그건 바로 박물관의 쥐를 연주했던
밴드였다. 미국 가서 몇년 지나더니..미8군으로 한국 복무를 지원해서
군바리 신분으로 나와 재회했던 것이다.
드럼은 나의 영어 스승인 마크 도나휴였고 기타와 베이쓰 모두 정훈이놈의
연주였다...어릴적 우정을 조금이나마 발휘해보려고 애쓴 결과였다.
난 이당시만 해도 술을 잘 못했는데...
이 군바리 녀석들과 놀다가 폭주를 배우게 되고...결국 요즘 못말리는
주당이 되어 버린다.
문제가 많던 리듬 파트도 보강된 우리 밴드는 이래저래 미국 군바리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과 이태원 등지를 주름 잡게 되는데....
요 대목에서 방탕한 아주 방탕한 생활과 ....알아서 생각하시라.
얼마후 2집 작업에 착수했고...난 이당시 미국 여자 친구까지 생겨서리
많은 걸들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
2집땐 좀더 세련되게 해볼려구 무던 애를 썼는데 그런데로 우린 만족할수 있었고
우리 나름대로의 자신감이랄까 뭐 그런게 생겼다.
그러나 밴드의 컨트롤은 지금도 악명이 높지만...완전한 독재 체재였고
나 외의 멤버들은 김영감의 구박에 치를 떨수밖에 없었다.
그 뒤론 이 동네에서 악명을 떨치게 되고....뒤에 가입한 재만 영감이
오히려 밴드의 리더로서 슬슬 자릴 차지해가고 있었다.
그런건 내게 문제거리가 아니였다...제일 신경이 쓰이는건 역시 군문제
였고 졸업이 다가 올수록 이제사 재미가 붙은 밴드 생활에 미련만 남아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여 가고 있었으니......
대한 민국 남자들의 가장 큰 문제....군대.
지금은 연예인들의 병역 기피로 많은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그때도 역시 군 문제는 많은 재능있는 뮤지션들의 인생방향을 송두리채
바꿔놓을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하나둘씩 군입대를 하며 밴드들이 없어져갔고 다들 이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차라...나도 별수없이 궁리를 하게 되었다.
당시로선 별 뾰죽한 수가 없어보였고 코앞에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였다.
우린 2집인 world of confusion 의 녹음에 착수하였고...시나위 1집의
엔지니어였던 최병철 기사와 일을 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탑퀄리티의 장비들을 쓰며 별탈 없이 굴러가고 있었지만
지금 들어보면 역시..알량한 싸운드는 여전했다.
그런 중에 프라이데이 2집도 윤곽이 잡혀갔고 1집의 성공이 부담으로
작용되긴 했지만 지난번 보다 수월하게 밴드를 모을수 있었다.
그때 참가 팀중엔 제로지를 비롯한 프라즈마등의 밴드들이 괜찮은 평을
받았던걸로 기억된다.
특히 프라즈마에는 지금은 '이고시스템'의 사장으로 있는 기타리스트
임창수를 비롯 넥스트에 같이 재적했던 드러머와 쉬리의 영화음악을
만든 이동준 그리고 디오니서스에 들어가게 되는 이시영등이
포진 되어있던 부산 밴드인데...
끼가 다분한 그들이 오래갈순 없었지만 동향이라는 동질감으로
음악을 하던 시절이라 그나마 라인업을 유지하는듯 보였다.
(우리 칭구아이가? 그제?)
프라이...2집에는 다 같이 부르는 노래도 있는데...자세히 들어보면
잘나가다 모기 소리로 변하는 보컬 파트가 날 애먹였던 자외선의
민치영이였다. 그는 특유의 감성으로 좋은 평을 얻고는 있었지만
초절정 모기 목소리로 도저히 내공이 약한...즉 녹음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있었고 프로트맨으로선 어딘지 성량이 딸리는 결점덕에
많은이들을 괴롭혔다...
앨범이 나온뒤...혹자들은 전작에 못 미친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고
훗날 서태지로 변한 현철이도 종서네 집에서 이 앨범을 따라 부르며
우리를 웃겨주기도 했을 만큼 ...진지하지만 너무나 재미있는 신인들의
곡들이 많았다.
한편 우리의 2집은 좀 더 많은 양의 영어가사와 마왕님의 신공을
흉내내어보려던 나의 노력으로 그럭저럭 외국 취향의 앨범으로
만들어졌고 그런 노력은 일본의 토이즈 팩토리에서의 라이센스 발매로
이어진다.
드뎌 생전 처음 왜놈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씨디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아쉽지만 어쩔수 없었고....그것이 현실이였다.
당시 라인업은 드럼에 홍진규. 베이스 방승현 김영감 나였다.
아마 가장 혈기 넘치는 멤버들이였고...괜찮은 라이브를 할수 있었던
멤버들에다가....공연이 많으니 당연히 연습이 되는..글렌옹도 언급한
바있는 얘기지만....안정된 상황이였다.
특히 이맘땐 송설라이브가 꽤 인기였는데 빠순이들의 경쟁도 대단해서
그 덕에 재미있는 일이나 해프닝도 엄청 많았고 끝없는 염문과
질투 복수극도 자주 일어났다.
모든 사건들을 일일히 나열하긴 좀 그렇지만...에이 한가지만 밝혀보자.
현재 종서의 와이프는 (본인에겐...미안하다 사생활인데...) 재일교포
구모씨다. 두아이의 엄마고 뮤지션의 아내로서 내조도 잘하는
훌륭한 부인이라 말하고 싶다.
한국으로 유학을 와있던 미쓰 구는 친구의 소개로 크라티아의 기타인
이준일을 소개 받는다....준일이는 꽤나 맘에 들었던 모양이지만
뮤지션 다운 소심한 성격으로 제대로 된 사랑고백 한번 못해본 모양
이였다...그런데...미쓰 구를 슬적 봤던 종서가....파상 공세를
펼쳐 결국 자기 사람을 만들어버린 것이였다.
그뒤 송설 뒤편 구석에서 울고 있는 준일이를 우리는 위로해줘야 했다.
흠흠...
나?...다른 사람 얘기만 까발리면 안되겠지?...호호
나도 캠퍼스 커플로 잘지내던 그녀를 통해 이성에 눈?을 뜨고....
(이 대목에서 '짝짝짝..'감사의 박수)
긴 머리의 양아치를 사귀던 그녀의 고충은 말로 다할수가 없었고
집안의 반대도 만만치 않아지자...서서히 좋던 사이가 금이 가고
고교때 부터 졸라게 따라다니던 한약방 아들의 품으로 떠나버린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그녀의 마지막 멘트.......
"영철아 나 임신 했어.....미안..."
아 어쩌란 말인가?........언놈의 애까지 있다는데 더 할말은 없었고
돌아가는 그녀의 갈색 코트 자락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 없이
죽은놈 마냥 눈물을 글썽이며 몇시간이나 서있던 기억이 주말의 명화
시간처럼 돌아가고 있다.
그뒤로 난 탕자의 생활을 시작했고...지금의 처를 만나기 전까지
수십명의 걸들과 젊음을 불사르며 과거를 묻지마세여..라고 외치고 산다.
다시 본론으로 가보자.
일본에서의 앨범 판매고는 시나위나 우리나 형편 없는 수준이였다.
망할놈의 병역문제로 출국자체가 불가능해서 현지 프로모션을 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직접 가서 확인했던 숫자는 고작 천장 정도...그것도 80%가 동경이
아닌 오사카에서 팔렸단다....뭐 그쪽에 교포들이 많아서라나?
좌우간 좋은 기회였는데 절라 억울했다......
한편 국내에서 그럭 저럭 몇만장이 팔려나가고 긴머리는 방송불가라나
뭐라나 하는 개소리에 떠밀려 공중파 한번 못나가보고...라디오도
팝송 프로에나 나가는 수모를 겪으며 했던 프로모션치곤 괜찮은 성과였다
그때 도와주던 엉아들..전영혁,배철수,김광한등등...참 고마울 따름이다.
뮤직비됴란걸 만들어보고 싶었지만....때가 때인지라...후후
사실 이런 생각은 미국에서 간간히 들어오던 그리고 이태원에서나
볼수 있었던 미국 엠티브의' 헤드뱅거스볼'을 보며 했던 상상인데
98년도가 되서야 실현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나?...흑흑흑
.. 우리나라에서 헤비 메탈 공연을 볼수있게 된겄은 몇년 안된 얘기다.
아시다시피...검열이나 외화낭비를 이유로 이웃나라 일본이
문물을 개방하여 앞서 나가고 있을때 쇄국을 외치며 깡통을 차봤던
우리 아닌가?
어릴적 부터 이 대목은 정말 싫었다. 뮤직라이프 ,영기타,논노,앙앙
번....이런 책들을 사다보며 느낀 그 괴로움....왜 우리나라엔 ....
머리가 길다고 사탄의 무리로 치부되어 끝없는 암흑의 구덩이를 해메이고
있을 당시...드뎌 예수의 전도사로 미화된 크리스쳔 메탈 밴드의
내한 공연이 열린다.
그것이 바로 스트라이퍼!!!!!!!!!
불모지라는 핸디캡과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꿈에도 그리던
메탈 공연이 성사된 것이다.
하이톤에서 베이스를 치던 기훈이와 함께 우린 촬영장비를 챙기며
마냥 즐거웠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딴따라와 관계자들까지도 모두 흥분 상태였다.
그도 그럴것이 레이프 게럿 이나 봤던 우리들에겐 만배 업그레이드된
공연이였으니까.
공연전날
우린 몰래 체조경기장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행색이 먹어줌으로...무사히 안쪽으로 잠입에 성공.
기훈과 난 탐정이라도 된냥 여기저기를 살펴볼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싸이즈의 랙박스...노란색과 검정색의 도색이 되어있던
박스엔 각자의 이름이 프린트 되어있었고 열려있는 박스안엔
수십벌의 빤짝이 의상이 즐비했다.
으아...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그런 상태로 또 무대 뒷편으로 직행....죽음이였다.
생전 처음보는 대형 피에이 장비들과 두셋트를 이어부친 드럼...
말로만 듣던 수십대의 메사부기 앰프와 깔끔한 스테이지.
조명 리허설과 함께 그 찬연한 무대를 보고 우린 모두 쓰러져 버렸다.
약먹은 놈들 마냥 개거품을 흘리며 감동의 눈물로 무대를 바라보며
으 씨발...언제 저런데 함 서보냐?
몰래 가져간 비디오를 꺼내어 여기 저기를 찍고 있는데...
매니져로 보이는 뚱땡이 아저씨 등장...
what the fuck are you doing now?
젠장...걸린거다. 그러나 물러설 우리가 아니지...
우리는요...한국에 뮤지션이디요...배울께 많을것 같아서....어쩌구 저쩌구...
역시 배울께 있다는 말에 뚱스 아저씨도 끄덕끄덕..좀 띄워 주니
걍 구경만 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림.
으휴....내일 와서 멤버들을 만나자...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컴백.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찍어온 비됴를 보며 감동을 추스렸다.
당일
아싸..아주 일찍 가있었는데도....흐미.. 끝이 안보이는 사람들.
더불어 젤로 신난것은.....스트라이퍼 팬클럽 빠순스들이였다.
오프닝도 없이 시작된 공연.
백스테이지에서 보았던 멤버들은 마치 예쁜 여자들 같은 느낌이였다.
인갓 위 트러스트의 오프닝이 흘러나오면서 시작된 연주는 마치
씨디로 듣는듯 정갈했고 특유의 드럼소리는 후진소리에 찌들어있던
대한민국 뮤지션들의 귀를 확 뚫어버리는듯 했다.
저것이 진정 라이브란 말인가?...우음...
그러나 곧 사고가 발생했다.
방송국 카메라 라인을 밀고 관중들이 덮치기 시작.
주최측의 노땅하나가 나오더니 공연을 중단 시켜 버린것이다.
스테이지의 싸이드에 있던 난...불쌍하게 천막 뒤에서 연주하던
비정규 멤버인 키보디스트와 어이없는 표정으로 들어오는 베이시스트를
만나 잠깐이지만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장내는 아수라장이였고....수습을 위해서 등떠밀려 올라간 김광한씨는
쩔쩔매고 있는 상황.
나는 그들에게 왜이리 관객들이 흥분하는지 설명해주었고 그들은
작은 성경책에 싸인을 해주며 이 실황을 녹화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물론 난 그 약속을 못지켰다.........쩝...
그들도 관객들의 열광에 넉이 나간듯 보였다.
나중에 스트라이퍼의 마지막 앨범 속지엔 한국팬들에게
특별히 감사한다는 그들의 진심어린 메세지를 적기도 했다.
암튼 공연은 속개되고 예정된 쇼를 마친 그들은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난 지금도 그곳에서 찍었던 우리의 잠입 르포 비됴를 가지고 있는데
가끔 꺼내서 보다가 혼자 웃곤 한다.
이젠 화질이 최악으로 변해 더 이상 볼수 없지만 나의 기억 속에
그 흥분되었던 이틀간의 그림들은 영원히 남아있을듯 싶다.
그후 많은 관계자와 음악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며 몇년간은 그얘기가
자주 술자리의 화제로 등장하곤 했다.
수 많은 공연을 봤지만...처음 봤던 리얼 메탈 밴드의 공연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였다.
난 두살 아래인 동생놈이 하나 있는데 ..그놈은 내가 음악을
시작 할 무렵, 추장의 신경을 건들지 말라..가정 평화를 위협하지
말라는등..사사건건 날 물고 늘어지던 놈이였다.
난 속으로 '니가 음악을 알아?' 라고 외치며 무시하곤 했다.
그런던 놈이 언제 부터인지 나의 음반과 잡지를 훔쳐 듣더니..
열혈 매니아가 되어 부렀다.
지금은 이 녀석도 미국에서 내 작업을 조언해줄 정도로 컸다.
영화를 전공한 동생은 현재 독립 영화를 만들며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어 보려 고민중이지만...이 못말리는 딴따라 형제를 둔 추장님의
걱정은 늘 계속 된다.
암튼 90년도엔 드뎌 영장이 나와버렸다.
물론 동생도 쫄았지...우린 모의를 시작했다.
일단 난 대학원 응시를 하여 시간을 벌고 동생은 엄마를 꼬시기
시작했다.
이민.
그것이 유일한 방법. 누구처럼 정신 병원을 들락댈수도 없고...
병이 있는것도 아니고..눈이 나쁘지도 않았던 우리 형제는
이 방법을 최선으로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해 여름..우린 가장 수속이 빠르다는 아르헨티나로 결정.
3개월만에 비자를 받을수 있었다.
모든일정은 빡빡했지만 살던 집을 정리하고 작은 아파트
한채와 약간의 부동산만을 남긴채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론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난 다시 돌아와서 h2o의 피터처럼
교포로서 왕래하며 음악을 계속하리라 맘먹었고...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생면부지의 머나먼 남미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공항에서 부터
힘겨운 싸움이 시작된다. 살집도 없고 아는 사람 조차 없이
도착을 하고 보니 말도 안통하고 정말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어리지 않은 나이에 남의 땅에 가보니 막연한 오기와 깡이
생겨서인지 안통하는 영어로 이래저래 해결을 하고 시내로 들어와
허름한 호텔에 짐을 풀고 늘상하던데로 엄마는 기도와 찬송으로
이국 땅에서의 첫밤을 보내게 된다.
엄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록커들을 만나본 장본인이시다.
허구한날 늦은 저녁 머리가 덥수룩한 친구들을 끌고 들어와 난장을
까던 아들내미 덕분에 맘고생도 많으셨지만 그 만큼 음악을
하겠다던 나를 뒤에서 걱정해주시던 넓은 아량의 소유자이시기도 하고..
아...갑자기 엄마가 뵙고 잡다....
얘기가 또 흘렀군.
호텔에서 일주일 가량이 흐르고 이곳저곳 매일 나가서 구경을 하던 우리 식구는
한국인 교회의 교인들의 도움으로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집을 보러 다녔다.
유랑생활을 한달여 만에 청산하고 새로운 보금자릴 꾸민 가족들은
동생의 학업 문제나 먹고사는 문제등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었고
다시 돌아오리라고 장담했던 나는...영주권이 얼렁 나오길 학수고대하며
이쪽 동네의 록은 어떨까..란 생각으로 가판대에서 메탈 잡지로 추정?되는
한권의 책을 사들고 연구를 해보았다.
그러다가 보니 집에서 한 블럭 떨어진 곳에 '할리'라는 클럽이 있는게 아닌가?
어느 금요일...난 가죽잠바로 무장을 하곤 할리를 가보았다.
극장같이 생긴 전형적인 나이트 클럽 분위기의 건물앞엔 엄청난 인파들이
줄을 서있었고 모두들 입은건지 만건지 스러운 복장에 여인네들과
긴 머리 사내놈들이 난리들을 떨고 있었다.
하염없이 쳐다보며 멍하니 있었는데...내 행색을 살피던 어느 놈이
자기 앞에 줄을 스라며 선심을 베풀어 주었다.
5달러를 내고 들어가선 뭔가를 다들 바꿔다가 음료수를 마시던데..
(아르헨티나는 기본적으로 페소라는 자기네 돈이 있지만 살인적인 인플레
이후 미국돈 달러를 걍 써버리는 희안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난 메뉴를 몰라서 그냥 오렌지 쥬스를 들고 서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흐와......
거의 축구장만한 엄청난 규모였다.
키스나 에이씨디씨의 음악이 주로 나오는 가운데 천여명이 넘는 인간들이
헤드뱅을 해대는 장관을 연출하는데...디스코 텍이나 가봤던 나로선
엄청난 광경이였다.
그 와중에 서성대던 난 누군가에게 이끌려 한 무더기의 여인네들 틈에
서게 되고 어설픈 영어를 하는 놈의 도움으로 무슨 영문인지 알게되었다.
그 여자들이 원하는건......
움베시또라고 스페인식 인사인데...
고거 이성끼리 할땐 거의 입술을 뺨에 대는 형태의 아주 훌륭한? 인사법이다. 흐흐흐
동양인과는 해본적이 없어서 나만 괜찮다면 다들 해보고 싶다는거다.
후후후..내가 싫을리가 있나....
결국 난 이십여명의 여인네들과 키스를 하게된다.
음..좋았겠지?....그러나 동물원 원숭이가 된겄같아 그리 즐겁지만
않았다는 말씀......
그날밤 처음 만난 친구들과 참 질펀하게 놀고...집에 돌아오니
동생놈이 도끼눈을 뜨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미안하다 동생아.
이민을 가본 사람들은 모두 겪어봤을만한 일들을 겪으며
몇달이 흘렀다.
일단 식구들의 주거 문제가 해결 되고 난뒤는 약간의 여유도 생기고
동생도 근처 칼리지에 연극영화과에 입학을 해서 잘다니고있었고....
한국에선 블랙신드롬 멤버들의 편지도 오고...
내용이야 뭐 빨리 돌아와라..뭐 이런것이였지만 사실 빨리 돌아갈수가
없었다. 망할 영주권이 안나와서였다.
참고로 이놈의 나라를 좀 뒤벼보자.
광활한 땅 덩어리에 석유나 기타 천연자원이 무한정 있으며
인구의 80%는 스페인이나 이태리 계통의 백인들이고
쾌적한 날씨에 공해도 없으며 극지방까지 커버되는 긴 국토를
자랑하며 축구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럽고.....아름다운 꾸냥들이
길에 널린 나라다.
자...어떤가? 이만하면 낙원 아닌가?.......그러나.
1950년대나 6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전세계 4위의 부국을
자처하다가 정치의 부패와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서서히
민심을 잃던 후안 페론 정권이 마지막 선심으로 국고를
퍼주다가 도산해버린 나라이기도하며....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 은근한 인종차별과 신나치들의 기승..
2차대전 이후 가장 많은 전범들이 은신하고 있는 나라에다
거의 모든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고,주5일 근무에 긴 점심시간과
씨에스타라는 낮잠 시간등 아무리 봐도 일하는 시간보다는
쉬는 시간이 많아 보이는 시스템들.
유태인들이 모든 상권을 장악..그들 특유의 비열한 장사 숫법으로
여러사람 피곤하게 만들고.....
마지막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꾸냥들도...애 낳거나 나이30 넘기면
도저희 봐줄수 없게 변해 버린다는것이다.
그들끼린 농담으로 ..신부의 어머니를 먼저 뵙고 참을만하면
청혼을해라...라고 말할 정도니까...
아..오늘은 악마...가 아니라 역사 시간인듯....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나라에 정이 가는 이유는 젊은이들이
모두 록음악을 좋아하고 왠만한 밴드들은 다 공연을 오는데다
남자들이 머리가 길다는것이였다.
앞에서도 말했다 시피 할리라는 클럽에서 난 아르헨티나의 잉베이로
불리는 라따블랑까의 기타 월터를 만나게 된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그 녀석은 인기 밴드의 리더답게
거만한 자세로 많은 여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바에 앉아있었는데
내가 블랙신드롬의 앨범을 보여주자....거기다가 싸인을 해주는게
아닌가? 난 속으로 누가 너더러 여기 싸인해달라고 했냐? 하며
황당해 했지만.....말이 잘 안통하니까 걍 넘어갔다.
암튼 라따블랑까는 화이트 랫..즉 흰쥐라는 뜻인데 레인보우와 흡사한
음악을 하는 밴드였다.
내가 너 잉베이 추종자지?라고 물으니 펄쩍 뛰면서 자긴 리치블랙모어의
수제자라며 잉베이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더군.
제길...그게 그거지 뭐.그리구 잉베이가 훨 유명하지 않은가? 쯔압.
나도 이들의 앨범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언제 엠피쓰리화해서
다 같이 함 들어보자.누가 좀 도와줘야할것 같구만....
영주권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난몇몇 외국 밴드들의 공연도 볼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비해 저렴한 표값도 맘에 들었고.
이 나라는 뭘하는데 별다른 제약이 없어보였다.
술이나 담배 회사들이 스폰을 해주니까....어딜가나 대형 페스티발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약간의 알바로도 여름 한철 잘 놀수있었다.
참고로 이 나라의 계절은 우리와 정 반대로서 크리스마스를 비키니 차림으로
즐길수 있는 희안한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여름 해수욕장의 그림은...............캬...환상이다.
꾸냥들의 기본 복장은 수뻬르 미니라고 불리는 울트라 미니 똥꼬치마에
탑한장.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들을 뽐내며 썬탠을 할라치면 토플리스는 기본임다.
아주 왔땀다.
키쓰도 한번 붙으면 30분 기본임다.
한번은 시계보며 재보다가 지쳐서 관뒀슴다.
이런 상황이니.....뭐 딴 생각이 나겠나.
결국 정신 없이 몇달이 흐르고 난 다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서른 시간이 넘는 비행끝에 다시 밟은 김포 공항.
감개가 무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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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이 되었다.
우리 밴드는 아세아 레코드사와의 전속이 만료되고 프라이데이...때
부터 친분이 있는 대도 레코드사로 이적을 한다.
당시로선 꽤 큰돈이였던 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그러나 중요한건 받은돈의 합계는 고작 400만원 선이였다.
왜 그렇게 되느냐고?
이 대목에선 할말이 정말 많다.
예나 지금이나...돈 가지고 장난 치는 인간들 때문이고...
얼빵한 뮤지션들은 걍 믿고 있다 당하기만 한다.
에쵸티 멤버들 인터뷰를 보라. 장당 인세 20원? 흐흐흐
껌 사먹으란 얘긴가?
우리 역시 이런 말도 안되는 조건이나 계약에 평생 시달려왔다.
누군가는 나더러 잘나갈때 돈 좀 벌지 않았냐고 물어오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돈이라는게...정직하게 벌어서 어디 벌리나?
아님 끈기와 뚝심으로 버는게 돈인가?
일부 재수 좋은 인간들외에는 정말 머리 많이 굴린 순서대로인거 같다.
좌우간...3집 앨범의 제작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넓직한 스튜디오에서 간섭 없이 많들었고 5만장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
수작이였다.
쟈켓 디자인은 내가 했는데...당시 생각엔 ac/dc 의 백인 블랙풍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던것 같다.
김 영감 아버님의 일필휘지도 들어가있었고 그 동안 우리를 성원해 주던
팬들의 이름도 수록 되어있는....꽤 기억에 남을 작품이였고
밴드도 어느정도 자기만의 색깔을 완성했다.
이런 분위기가 4집까지 가지 못했던건..대도 내부의 사정 때문이였고
최민수의 솔로 앨범을 적극적으로 밀고 있던때라 부서간의 알력이
작용했던것도 있다.
당시 프로모션팀은 홍대앞에 따로 라임라이트라는 사무실을 운영했었는데
거기선 우리와 제로지 그리고 최민수..막내들로 B612를 키웠다.
아마 그 홍대 앞 사무실이 지금의 언더록의 메카가 될수있었던
초석이였던 같다.
오갈때가 없던 나는 사무실 한켠에 커텐을 치고 기거하고 있었는데...
누가보면 불쌍할지 몰라도 내 나름대로 가장 자유롭고 행복했었다.
나의 재산이라곤 자동차 한대와침대 그리고 오디오가 다였지만
공연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리얼 프리덤이였다....
이때부터 난 자신감도 생기고 우연치 않게 일본도 자주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번지의 편집장이던 코 사카이씨와도 알게 되는데...
어느날인가 더운 여름 일본을 방문했고 약속도 없이 신코뮤직 본사로
불쑥 찾아간 우리 일행을 사카이는 환대해 주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던 가운데 사카이가 한때는 존로드의 광팬으로
키보디스트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일본 록계는 비쥬얼에 물들어
실력없는 뮤지션이 많아져서 큰일이라는둥...어때 요즘 한국의 현실과
비슷하지 않은가? 딱 십년전 얘긴데...
마지막에 나온 얘기중에 내게 충격적인것은 라우드니스의 보컬이 공석인데
요즘 오디션이 있으니 한번 해 보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놀란 나는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날 더러 귀화를 해야 한단다.
요말을 듣곤 난....삐짐이였다. 김칫국 마실 얘긴인것이다.
나중에도 두고두고 통역하던 형은 나더러 멍청한 놈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이미 마이크 베세라 같은 놈이 나올건란 예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국을 다녀왔으니 본토 놈들중 보컬을 고를꺼란 예상이였지..
몇달뒤 정확하게 실현이 된걸 보고는 나도 놀랐다..흠
잠시 짬을 내서 우린 일본의 클럽들을 돌아봤는데...
유명한 록크메이깐에 가서 또 한번 놀라게 된다.
그때 출연팀은 피스톤 로드라는 팀인데 드럼이 라우드니스의 미노루 니하라의 동생
이라서 유명했던 밴드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 건스앤 로지스풍의 음악이였고
라이브를 참 잘했다. 거기다 화려한 의상이며 빵빵한 사운드가
일품이였다.
제자리에서만 노는 일본 관객 특유의 관람태도도 신기했고..호호호
암튼 그해의 일본 순방 덕에 나의 기사가 번에 나오기도 했고
이젠 뭔가 큰물에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의 이런 생각들은 92년도의 라이브 앨범 제작으로
화두를 바꾸게 된다.
연말 연시에는 늘 그렇듯이 존나 바빴다.
어끄제도 진주에서 크라잉 넛과 공연을 했는데...
역시 공중파의 위력은 대단했다.
제트때 오프닝을 스며 악기도 없이 다니던 거지 밴드
크라잉넛이 이젠 매니져가 둘씩 붙어다니며 관객을 천명씩 동원하는
거물이 되어있더군....
게다가 이번 공연의 페이는 오백만원이 좀 넘는다는 말도 있고...
그러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건강에 좋지 않으니 잊기로 하고..
라이브 앨범을 좋아하던 나는...우리도 라이브를 제작해 보자는
생각에 자나 깨나 그 얘기만 하고 다녔던것 같다.
결국 이태원의 비바 아트홀에서 3집 발매 기념 공연을 하기로 하고
아는 동생 모두 동원하여 포스터를 부치고 직접 풀통들고 밤에 나가
돌아다니고....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었다.
그리하여 본공연을 하니...정말로 관객이 천여명 가까이 와주었다.
시나위나 에치투오의 오프닝만 하던 우리가 첨으로 자부심을 느낄수 있던
공연이였다.
비바 아트홀의 장비는 그 당시론 초 호화판이여서 멀티녹음기를 써가며
고스란히 녹음을 할수 있었고...국내 최초로 현장의 모든것을
개별적으로 녹음하는데 성공한다.
난 마치 한마리 들짐승처럼 뛰어다니며...거친숨을 고르고 있었고
김영감도 투혼을 불태우며 레스폴을 패대기치고 있었다.
관객들 중엔 안면이 있는 여인네들도 있었지만...
첨 보는 미모의 여인들도 있었는데.....가장 쇼킹한건...
중간쯤에 서있던 어느 아가씨가 모피코트를 풀어헤치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의 우유빛 가슴팍을 확 보여주는데...
아무리 강심장인 나도 고기서 다리에 힘이 확풀리며....주저 앉을뻔했다.
그러다가 시크릿 러브를 하던중 무대위로 던져진 속옷한조각....
잔잔한 꽂무늬였는데...크흑.
신이시여..진정 여기가 우리나라 맞슴니까? 라고 외치며...난 노래했다.
정말 아쉬운것은 그런 선행?을 베풀었던 이름 모를 그녀가 아직도
누군질 모른다는것이다. 아..분하고 안타깝다.
다시 진정하고....
녹음을 마친 테입을 들고 다시 우린 대도 레코드의 녹음실에서 믹싱및
약간의 수정작업을 하고 발매를 서두른다.
그러나......
나에게 공짜는 없다. 또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우릴 밀어주던 재선이 형이 대도를 관둔다는게 아닌가?
가뜩이나 어수선한 차에 회사도 매니져도 없는 상황이 또 발생한것이였다.
젠장....김영감과 나는 아는 라인을 총 동원해서 발매사를 찾아돌아다녔다.
결국...어렵사리 삼포니와 연결이 되었고 무사히 앨범이 세상으로 나왔다.
이 당시의 스토리는 참 드라마틱한데...역시 이때도 한 여인의 도움이 있었으니
지금은 이름 조차 희미하지만....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아가씨였는데 우리가 마스터를 들고 회사를
찾아가자 참 반갑게 맞아주었고 회장의 거부 반응을 무마시켜주며
할소리 다하던 여장부였다.
왜 그렇게 배짱이 좋은진 나중에 알게 되지만 회장 친구분의 자제였던것이다.
해서 회사는 다녀도 그만 안다녀도 그만이라나? 덕분에 무사히
일이 풀려 나갔고 그 아가씨 어머님 친구분이였던 홍승연 작가를 알게되어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추억의 드라마 '두려움 없는 사랑"에 출연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머리가 길어 출연자체가 불가능하던 시절.
정작 음악 프로그램이 아닌 드라마라니...참 기구한 팔자였다.
드라마의 초반이 이미 시작했던 시점이였는데...첨엔 단발로 한 삼회
정도 출연해 달라는 말에 즐거이 임했는데...
촬영장에서 우릴 만난 작가가 정말 재미있는 양념이라며 칭찬을 하더니
어수룩하고 연기도 못하는 우리를 고정 출연으로 만들어 주었다.
당시 머물곳이 없던 나는 에치투오의 보컬 준원이 형과 일년여간의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준원이 형은 정말 마당발로서 그의 오피스텔에는
잘나가는 연에인들이 많이 놀러오곤했고 덩달아 나도 안면을 트고 지냈고
티비 출연도 하게 되었으니..흐흐 나름대로 꿀리지 않고 어울릴수있었다.
남자들 부류는..신성일씨의 아들이였던 강모씨와 지금은 잘나가는 이창훈
그리고 장군의 아들로 데뷰하기 직전의 박상민...나이가 우리보다 많던
김세훈등등...그리고 여자들은 노현희,옥소리,유호정등과 자주 어울리곤했다.
특히 유호정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데...지금의 와이프를 소개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첫촬영은 신촌의 엠티비였는데...몇줄되지도 않는 대사가 왜그리 힘들던지.....
이럭저럭 우린 첫녹화를 마쳤고.. 담주에 방영되는 드라마를 본 많은
인간들의 각종 비웃음을 사야했다..흐흐흐...
.. 첨으로 티비에 출연하긴했는데...절라 아쉬운건 당시 sbs는
전국 방송이 아니였다...해서 수도권 지역외엔 별 반응이 없었다.
동료들은 야..이제 스타되는구나..라든가 '음악이 안되니까
별짓을 다하는군'등등...엇갈린 반응이였다.
그러나 사실 주위의 생각이야 어찌되었든...녹화 자체가 고역이였다.
sbs는 제대로된 시설이 없어서 양평동쪽 공장을 개조해서 스튜디오로
쓰고 있었는데..갈때마다 마주치는 탤런트들이 참으로 생경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쪽은 그쪽대로
뭔 저런 놈들이 다 있나하고 원숭이 보듯하고....
그러나 몇주가 흘러가고 차츰 안면이 생기자 아줌마 연기들부터
슬슬 친해지기 시작.
뭐 젊은 아가씨들이야 내숭이 대단하니깐....흐흐
결국 주연 배우들과 회식을 하며 조금씩 거리를 좁힐수 있었다.
우린 대사를 잘 보이게 발밑에 대본을 깔기도 했고 소품사이에 낑겨놓고 보기도 했는데...
시선 처리가 않좋다고 피디한테 잔소리 무지 먹었다.
사실 다들 얼마 안가 짤릴거라 생각했는데..왠걸...
얼마후부터 시청률이 치솟기 시작 급상승세를 타더니 결국은 일위를
해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촬영장 분위기 좋고...간부들도 와서보며 격려도 해주고..
덕분에 우리의 어눌한 연기도 재밌다며..그냥 지나갔다.
운이 좋았던것 같았다.
당시의 출연료는 등급대로 지불이 되는데...작가 선생이 우겨서
등급을 받았다. 아마 내 기역으론 6등급인가인데...
그쪽 등급은 숫자가 높을수록 좋은것 이였다.
처음 부여받은 등급치고 괜찮은 등급이였고 야외촬영은 따블로
계산이 되니까 이삼일 일하고 어떤주는 돈백만원에 가까운 출연료가
나올때도 있었다.
그 드라마는 유난히 여자들이 많이 나왔는데...덕분에 분위기 엄청
산만했다. 역시 작업중엔 집중력이 있어야한다.
자 기억이 흐리흐리하지만 짚어보자.
삼성가의 며느리 고현정양. 당대 최고의 주가였쥐...
예쁘기도 하고 성격도 온순. 과연 저런 여자가 뭐하러 이판에 나왔나
싶기도 했는데...아쉽게도 자주 모일순 없었다.
그녀의 어머님은 그때부터 매니져를 자청하며 딸이 빗나기지 않게
항상 감시의 눈길을 주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이트 크럽에 회식을 가서도 먼저 계산을 하고는 딸을 모시고
일찍 나가버리는 지경이였으니...참
그냥가면 욕먹을까봐 미리 머리를 쓰는듯 보였다.
그 다음은 변소정양..한 동안 쉬다가 요즘은 선생님으로 부활했으나
그당시엔 청춘 스타였다..
허나 그녀는 목이 엄청 짧아서 의상코디를 애먹이곤 했다.
요즘은 얼굴도 좀 달라졌던데....암튼 내숭 9단쯤 된다.
미쓰 머니 코리아...서정민양.
브라운관에서나 실제로 보나 엄청난 매부리 코의 소유자.
어찌하여 미쓰 코리아가 되었는지 알길이 없었으나 얼마후
사건이 나면서 연예계에서 은퇴.
암튼 콧대하면 생각나는 그녀.
그리고 재미교포 두자매들.
한국말이 엄청 서투른 동생을 챙기느라 바쁘던 언니는 세트로 다니는것으로
보아 뭔가 빽이 있다는 느낌이였는데...요즘은 아마 양가집 며느리가 되어
활동하고 있을것 같은 예감.
마지막으로 재성이형은....
날 보자 마자 한다는 말이..
영철씨....'예전엔 저도 키쓰 무지 좋아했슴다.'...
아...예...저두요.
이게 우리의 음악적 대화였다.
그러나 재성이형은 군입대를 앞두고 마지막 작품이라 최선을 다하려는게 보였고
시간만 나면 음악에 대해 묻고 혼자 생각하는듯 보였다.
당시에 윗형인 재훈이형은 방배동에 로바다야끼를 하고 있을때라
우린 틈만 나면 그곳에서 술을 재끼는일이 다반사였고
카메라 감독들과 술내기를 하던 김영감은 매취순 25병을 마지막으로
실신하는 사태를 일으키기도....그러나 알콜의 피해자는 다름아닌
당시 고현정의 오빠로 출연하던 형님이셨으니.....
드라마 종영후 그 덩치 좋고 터프하던 엉아가 감염으로 허무하게
가셨다는 말을 듣고...눈물만을 흘렸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막판까지 계속되던 출연으로 어느정도 연기에도 탄력이 붙을무렵.
작가는 아예 니 대사는 이제 니가 좀 쓰라고 말했고 늘 마감에
쫒기며 원고를 쓰던 상태라 나도 좀 돕고싶단 생각도 들어서
우습지만 여러 구다리의 대사를 직접 써가는 일도 발생했었다.
암튼 나의 불안한 한국 체류 덕에 막판 4회쯤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야하는 일이 생겨 결국 마지막회엔 김영감의 고군분투로 이어지고
난 아쉬움을 달래야했다.
어쨌거나 그 좋은 기회에 우린 별다른 일도 못해보고 울분을 삼킬수밖에
없었다. 끝없는 매니져 없는 설움......
아무도 가난한 록커들의 매니져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듣곤하던 얘기가 떠돈다.
제네들은 판보다 라이브가 더 낫다...
상업성이 없다....등등
늘 따라다니는 이등이라는 꼬리표.
난 그걸 벗어던지고 싶었지만...역부족이였다.
첫댓글재영아, 연재 11회 질문 세 개. 1.'마왕님의 신공을 흉내'할 때 마왕님이 오지 오즈번 맞냐? 2.'글렌옹도 언급'의 글렌옹은 누구지? 3.송설라이브가 뭐니? 다음 14회 아르헨띠나 얘기 가운데 남자들 장발. 진짜 아르헨띠나 축구대표팀 보면 장발 많아. 바띠쓰뚜따,끄레쓰뽀,오르떼가,아이마르. 빡빡머린 베론 하나 뿐.
첫댓글 재영아, 연재 11회 질문 세 개. 1.'마왕님의 신공을 흉내'할 때 마왕님이 오지 오즈번 맞냐? 2.'글렌옹도 언급'의 글렌옹은 누구지? 3.송설라이브가 뭐니? 다음 14회 아르헨띠나 얘기 가운데 남자들 장발. 진짜 아르헨띠나 축구대표팀 보면 장발 많아. 바띠쓰뚜따,끄레쓰뽀,오르떼가,아이마르. 빡빡머린 베론 하나 뿐.
에... 마왕.. 글쎼요. 오지 오스본 아니면 디오일꺼라 보는데. 나머지 두개는 잘 모르겠네요. 한국 애기라.. 글렌이 주다스 프리스트 기타리스 글렌 팁톤은 아니겠고. 송설라이브? 라이브 클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