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 1.68㎞. 사적 제235호.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세 봉우리와 서쪽 골짜기를 잇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이루고 있으며, 산은 높지 않지만 꼭대기에서 바라보면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470년(자비왕 13)에 축조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려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오정산성이라고도 했다.
성벽은 납작한 판돌로 한 켜는 가로로 놓고 다음 한 켜는 세로로 놓아 우물 정(井)자처럼 엇물려 쌓았다. 특히 기초를 견고히 하여 하중을 잘 견딜 수 있게 했으며, 성벽이 높은 곳은 13m에 달한다. 동서쪽 성벽은 바깥쪽에 돌을 쌓고 안쪽에 흙으로 다진 내탁외축(內托外築) 방식이며, 남북쪽은 안팎에 돌을 쌓고 그 안에 돌을 채운 내외협축(內外夾築) 방식이다.
성문터는 동서남북 4곳에 있으며, 서문터에는 너비 165㎝ 간격의 홈이 패어 있어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7개소의 옹성(甕城)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했다. 수구는 서쪽 성문 옆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각형의 수문이 동쪽 성벽에 남아 있다. 우물터는 5개소가 있었는데, 그중 아미지(蛾眉池)라는 곳이 유명하다. 이 산성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조선 시대에 걸친 기와·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줄곧 이용되었음을 증명해준다.
삼년산성을 유네스코에 올리기 위하여 신청을 하였으나 복원하는 과정중 사용한 돌이 예전에는 사진에서 보듯이 검은부분(점판암)을 이용하여 복원했어야 됐는데 흰부분(화강암)을 사용하여 복원한점 그리고 시공과정에서도 성의 내외 공간에 어떤 중요 유적이 매장되어 있는지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작업통로를 만드는등 유적관리에 소홀함이 많았던 점이다. 그렇지만 삼년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잠정목록에는 올라가 있는 상황이다.
삼년산성에 가면 대장장이 체험장이 있다.
그곳에 가면 풀무와 모루를 이용하여 어린이들이 대장장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목걸이 또는 키고리를 본인이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해준다.
직접만든 목걸이
모루
대장간의 모루는 보통 연철(鍊鐵)이지만 간혹 경화강으로 된 부드러운 작업면이 있는 주철(鑄鐵) 모루도 있다. 한쪽 끝에 튀어나온 원뿔형 부리는 굽은 금속을 망치로 두드릴 때 사용한다. 다른 쪽 끝에는 종종 직사각형 단면의 부리가 있다. 앤빌커터나 끌과 같은 도구를 사용할 때는 모루면에 정사각형으로 구멍이 뚫린 연장삽입구멍(holder)에 절삭날을 위로 해 끼워놓는다. 동력 해머를 사용할 경우 나무·돌·콘크리트 등으로 만든 튼튼한 토대 위에 육중한 받침대를 놓으며, 이 받침대로 모루를 받친다.
풀무
풀무란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녹이기 위하여 화덕에 공기를 불어 넣는 연장이다. 그리고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데 이용되는 기구이며,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풀무질'이라고 한다.
풀무는 네모난 통에 한쪽은 손잡이와 공기 흡입구를 두고, 한쪽은 풍로를 끼워 화덕의 밑부분과 연결하여 사용한다. 풀무에는 손풀무(橫式)와 발풀무(縱式)가 있는데, 이 손풀무는 소규모 대장간에서 농기구나 금속공예품을 만들 때 사용되었다.
삼년산성과 대장간체험을 마치고 정이품송으로 향했다.
정이품송은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정이품송은 다음과 같은 속설도 전해지고 있는데,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조선의 세조는 하늘이 노한 탓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집권 내내 종양과 피부병으로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전국의 이름난 약수와 온천을 찾아 헤매던 세조는 어느 날 약수로 유명한 법주사 복천암을 찾아 가고 있었다. 세조는 행렬이 한 소나무 아래를 지날 때 가마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유를 물으니 나뭇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세조는 고개를 내밀고 “무엄하구나! 연(輦) 걸린다!” 하고 꾸짖으니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기특히 여긴 세조는 소나무에게 친히 옥관자를 걸어주고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소나무를 ‘정이품송’ 혹은 ‘연걸이소나무’라고 부른다.
또한 정이품송 아래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와 노인이 이 나무를 안고 돌면 죽을 때 편히 세상을 뜰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정이품송까지 둘러보고 오전의 답사는 끝이 났고, 우리는 속리산 법주사 주변에 있는 식당으로 점심을 먹기위해.........신나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