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실학(實學)의 정의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전통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 을 모색한 유학의 한 분파의 학문 및 사상으로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의 학문이다.
실학은 간단히 말하면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크게 발달한 청나라의 문화를 본받자 는 주장이었다. 주요 논리는 과학기술 발전, 교육제도 발전, 청국과의 교역, 도 구의 이용과 서민생활의 위생 보건적인 문제등 인간이 최소한 누릴 수 있는 기 본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실용주의 논리를 말한다.
2.실학의 발생 배경
1) 왜란과 호란 이후의 사회 변화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번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우리 나라의 많은 땅이 황폐화되어 못쓰게 되고,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큰 어려움을 겪게 되 었다. 나라 일을 맡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고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 은 소홀히 하여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2)성리학의 배타적 성격 -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
①조선 전기의 학문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다. 고려 말 안향에 의해 중 국에서 전해진 성리학은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조선 전기에 이미 학문적 위 치를 굳혔다. 그 후 성리학은 명종과 선조 때에 이황과 이이 등 뛰어난 학자 들의 연구에 힘입어 조선 성리학으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굳혔다. 당시의 학자들은 벼슬을 하면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학 자들은 성리학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성리학만이 옳고 그 밖의 다른 학문은 모두 그르다는 배타적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불교는 물론 같은 유 학 계통이지만 흐름이 다른 양명학마저도 배척하였다. ②성리학적 학문 활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왜란과 호란 을 겪고 나서부터이다. 기존의 성리학은 왜란과 호란으로 파괴되고 혼란한 사 회를 재건하고 바로잡기에 적합하지 못하였다. 즉,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억누 르고, 이론과 생각의 깊이만을 내세우는 성리학은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해 나 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지식인들이 반성과 그 학문에 대해 비판 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때에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학문 을 연구하자고 주장한 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3)실학과 서학 연구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새로운 문화 움직임은 이후 학술과 종교, 철학, 문학, 예 술 등 모든 문화 영역에 걸쳐 일어났다. 이 가운데 학술 분야에서 나타난 새로운 학풍이 실학이다. 또 실학과 더불어 서양 학문인 서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움직임도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실학자들은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하고, 백성들의 실 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3.실학자들의 주장
①백성들의 생활 안정 및 향상을 통한 국력 신장
②양반과 상민으로 구분된 신분 제도 철폐
③외국과의 무역을 통한 부강한 나라 건설
④근면, 성실 강조 및 사치 근절의
4. 실학자들의 연구 활동
1) 백성들의 생활 향상 : 농촌 사회의 문제를 개혁하여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토지 제도의 개혁을 추구 하였다.
①유형원 : 농촌 체험을 바탕으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주장. '반계수록 -토지 제도, 과거 제도, 군역제의 개혁을 주장한 백과 사전식의 책' 저술
②박지원 : 농기구와 농토 경작 방법 등을 연구하였다.
③이익 : 농민의 입장에서 개혁 방법을 제시하였고, '성호사설-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백과 사전식의 책'을 저술
④정약용 : 토지 제도와 세금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들의 무능함을 비 판하였다.
⑤박세당 : '색경'이라는 농서를 저술
⑥신숙 : 농사에 관한 책을 지어 농서 보급에 힘썼으며 모내기와 이모작을 권장.
2) 상공업의 발전 모색 :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잘 살려면 상공업이 발달하고, 중국과의 무역에도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박지원 : '열하일기-청나라에서 보고들은 일기'를 저술하였고, 상업 기술 익히 기를 권장하였으며, 화폐 사용을 강조 하였다.
②박제가 : '북학의-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문제점과 대책을 정리'를 저술하였고,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 혁신, 청나라와의 통상 확대를 주장.
③유수원 : 중상학파 실학자의 선구자로 '우서'를 저술하였으며, 상공업을 통해 농민 중심의 경제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과학 기술의 도입 : 서양의 발달된 문물에 관심을 갖고 이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①홍대용 : 서양에서도 주장한 적이 없는 독창적인 이론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 는 '지구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천문 기술을 배워 와 서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만들었다.
②정약용 :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을 쌓는 데 이용하여 경비를 크게 절감하였다.
③허적 : 화폐 사용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
4) 역사와 지리의 관심
①김정호 : 산맥, 하천, 도로망 등이 자세히 표시된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조선 의 지도 제작 수준을 크게 높였다.
②이중환 : 우리 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함께 각 지역의 경제 생활과 풍속을 자 세히 조사한 후 '택지리'를 저술하였다.
5.실학의 의의와 한계
①특징 :자유로운 비판 정신(실사구시의 실증적 학문) , 실용적(백성의 실생활 반영).
②성격 :실증적(학문연구에는 확실한 사실과 증거가 가장 중요하다는), 민족적(중 국중심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연구). 근대 지향적(양 반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 산업을 발전 시켜 새로운 사회로 나가려는) → 개화사상에 도움을 줌
③한계 :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실학자들의 주장과 생각이 실제 국가정 책에 반영되지 못했다.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
실학은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등장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조선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대해 반발하면서 사회의 개혁을 주장했던 학문 또는 사상이다. 실학과 학자들은 정치.경제.종교 및 문화 등의 제반 제도를 개선하여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한 절박한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중점을 두었다.
즉, 서구 과학과 청의 농법.농제를 토대로 하는 경세의 학문을 주로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실학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도모하는 실천적 철학이자 학문으로, 크게 농업을 중심으로 한 개혁 및 경제치용을 주장하는 중농학파와 상공업 중심의 개혁 및 이용후생을 주장하는 중상학파로 나눌 수 있다. 고려 말에 중국에서 전해온 성리학은 그 사이에 많은 발전을 보였으나 일상 생활과는 먼 감이 없지 않았고, 임진.병자의 양난을 겪고 난 국민은 때마침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아 학계에 큰 변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학은 성리학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성리학의 자기 반성이라는 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실학파의 실학 연구와 개혁 요구가 대체로 몰락한 지식층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사실에 토대를 둔 실천을 역설한 실학자 김정희의 실사구시의 방법론이 추구 되었다.
경제치용학파(중농학파)
조선후기 실학의 한 학파로 농업을 중요시한 학파이다. 주로 남인 출신으로 붕당정치에서 밀려나 지방에 살며 학문을 연구했다. 자연히 권세가에게 시달리는 농민의 실상을 접하게 되어 이들은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농업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아래와 같다.
☞유형원: 경제치용파의 선구자로 <반계수로>에서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제도, 과거제도,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이익: 경제치용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성호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저서 <성호사설>을 통하여 나라를 좀먹는 여섯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정약용: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이를 공동 경작, 공동 분배 하자는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이용후생학파(북학파)
18세기 후반 영.정조 대에는 상공업 발전 및 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당시 오랑캐라 배척하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그들은 주로 청나라에 내왕하면서 청조 문화의 우수함을 보고 조선에 돌아와 그 발달한 문화를 수입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견문을 토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농업에만 치우친 유교적 이상국가론에서 탈피, 부국강병을 위한 더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유수원: 북학파의 선구자이다. 그의 저서 <우서>에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홍대용: 사신으로 청나라를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사대부의 중화사상을 비판하였다. 저서로는 <담헌집>이 있다.
☞박지원: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청나라에 갔다온 경험을 담은 여행기 <열하일기>로 유명하다.
☞박제가: 박지원의 제자로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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