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자료는 미국 예일대학의 "캄보디아 학살연구계획"(Cambodian Genocide Program: http://www.yale. edu/cgp/thiounn.html)에서 공개하고 있는 티오운 쁘라싯(Thiounn Prasith)의 자필 이력서 내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티오운 쁘라싯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에 의해 UN 주재 캄보디아 대표로 임명되었고, 1979년 1월 베트남의 침공으로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몰락한 직후에도 UN 주재 대표직을 유지하여 이후 3파 연합 측의 의석으로 계승시킨 인물이다. 현재 예일대학 "캄보디아 학살연구계획"이 공개한 자료는 "영어로의 번역"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원래 이 자료가 영어로 쓰여지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지만, 원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976년경 티오운 쁘라싯이 당에 제출한 소명자료이기 때문에 원어가 크메르어였을 개연성이 무척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게시물의 "상편"을 먼저 읽으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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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운 쁘라싯의 자필 이력서 (하편)
Autobiography of Thiounn Prasith
티오운 쁘라싯(Thiounn Prasith) 전 UN 주재 크메르루즈 대사를 역임했다.
이 자필 이력서는 1976년 12월 25일에 작성된 것으로,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
6. 1970년 3월 - 1975년 12월
이 시기는 본인이 조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전선"(Front)에 참여하여 혁명활동에 복귀한 시기임(8월에 한번 귀국한 적이 있지만, 단 이틀만 머물고 다시 출국했음).(역주)
(역주) 1970년 론 놀(Lon Nol) 장군 주도의 쿱테타가 발생한 직후, 시하누크 국왕은 베이징에 머물면서 크메르루즈와 연합해 임시정부인 "캄푸치아 민족통일왕국정부"(GRUNK)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 정부의 전위조직이자 일종의 정당 성격을 띤 것이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FUNK)이었다. |
본인은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1970년 7월 8일에 베이징에 도착하였음. 당시 프랑스 항공사들은 태국을 경유해 들어갔으므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노선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음. 본인은 5년 이상에 걸친 이 기간에 대하여 보다 명확하게 본인의 활동모습과 관점들을 밝혀보고자 함.
(1) 당 사업: 본인은 당의 지도를 수행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음. 하지만 이미 앞에서 서술한 이유로 인해 곧장 출발할 수 없었음. 그리하여 당시 파리에 있던 우리의 당원과 협의하여, 우선 본인의 형이자 당원이었던 티오운 뭄(Thiounn Mumm)을 먼저 베이징으로 보냈음.
베이징에서 본인의 첫번째 목표는 먼저 당에 도착을 보고하고 당의 지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었음. 하지만 본인이 당과 새로이 접촉하게 된 것은 1971년 2월 하노이에서 가능했음. 당시 본인은 오랜 기간 당 교육을 받지 못했고, 프랑스 자본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혁명적 관점이 미약했음...... 본인이 당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도 많은 난점이 있었음. 하지만 이때부터 지속적으로 당의 교육적 지도를 받게 되어, 일순간에 본인의 부동산과 사유재산을 포기하였음. 본인은 다시금 당과 혁명에 매진할 수 있었음. 당 역시 단계적으로 본인을 다시금 신뢰하기 시작했음. 그리하여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본인으로 하여금 당이 할당한 과업의 완수를 승리로 장식했다고 선언할 수 있도록 해주었음. 동시에 본인은 공산주의의 정수를 이해하고 확고히 파지하기 시작했음. 또한 본인 자신도 한 차원 더 상향 개선되었음. 본인이 혁명운동에 재결합함으로써 본인의 인생이 다시금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
(2) "전선"의 사업: 본인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와 뻰 노웃(Penn Nouth)은 본인을 중국 내 거주 인민들을 접촉하는 장관에 임명했음. 또한 당원인 께엇 촌(Keat Chhon: [역주] 2009년 현재 캄보디아 재정경제부 장관임) 동지는 부총리에 임명되었음. 이러한 임명에 대해 본인은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다지 필요한 일도 아니었음. 시하누크와 뻰 노웃은 자신들 쪽으로 세를 규합하려 한 것임. 당시 그들은 우리 두 사람과 당과의 내적 관계를 알지 못했음. 그들은 본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음. 그들은 다만 본인을 자신들과 같은 계급출신이라고만 생각했음. 하지만 당시 본인의 가장 큰 고민은 봉급을 받아 파리에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문제였지, 지위나 명예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음.
"전선" 내의 고위직들은 우리의 임명을 달가와하지 않았음. 본인이 그들 계급의 이익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계급을 배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본인에 대해 강력한 비난을 퍼붓곤 했음. 또한 본인이 그들의 권력쟁취 계획을 저지하고 제국주의자들과 협상을 반대하면서 그들이 자금을 착복하는 것을 제지하였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했음. 결국 그들은 (본인의 아내가 프랑스인이였으므로) 본인을 프랑스인의 노예라고 하던가, 수정주의자 혹은 베트남인 등으로 비난했음. 하지만 본인에게는 다음과 같은 결점들이 있었음.
- "전선"의 정치적 노선과 당의 행동 계획에 대해 효과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음. 지나치게 경직된 느낌을 만들어 열린 단결력을 구축하지 못함.
- 본인의 내부에는 아직도 많은 외세(프랑스)의 특성들이 남아 있음. 본인의 생각이 경솔하여 가족들에게 송금을 했음. 이러한 결점은 착취계급 출신의 잔재가 남은 것임.
하지만 "전선" 내에서의 계급투쟁이 격렬했던 것만은 사실임. 착취계급은 본인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을 비판했음. 당시 본인이 중국 내 인민들을 접촉해야 했으므로, 본인은 그들이 본인을 저어할까봐 염려했음. 그들은 본인의 약점을 공격했음. 이 약점들 때문에 본인은 효과적으로 당을 대표하지 못했음. 본인이 "전선" 내에서 활동한 기간은 본인으로서는 고통스런 경험이었음.
(3) 베트남과: 1970년 7월 본인은 짜우 셍(Chau Seng)과 함께 베트남 정부 초청을 받아 하노이를 방문했음. 이 방문을 계획하기 전에 중국 당원 한 사람이 본인에게 와 누군가 본인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언을 받고, 당원인 랏 사모은(Rat Samuoeun) 동지를 만났음. 그 역시 베트남을 방문하고 싶어 했음. 랏 사모은 동지는 본인을 만나서 짜우 셍에게는 아무 것도 모르게 하라는 주의를 받았음.
랏 사모 동지가 직접 조종간을 잡았고, 하노이에 도착한 후에도 많은 시간을 비밀리에 그와 만났음. 본인은 그에게 "당의 정책과 베트남의 정책이 일치하는가?"라고 물었음. 그는 명쾌하게 "거의 같고, 상호 신뢰한다"고 답했음.
하노이에서 본인은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크메르 학생들을 위해, 베트남이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음. 동시에 본인은 그들로부터 자금을 빌려 프랑스에 있는 본인의 주택대출을 반환하는 데도 사용했음. 이것이 너무 큰 잘못이란 생각이 들 때마다 본인은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곤 했음. 당시 본인은 정치적 경험과 민족적 자긍심이 부족했고, 국제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도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 이러한 과오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임.
최초 9개월 간([역주] "예일대학"의 영어 원문은 "9년 간"으로 되어 있음) 본인은 베트남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음. 관념적으로 본인은 베트남이 우리에게 정직하다고 생각했음. 이러한 오해로 인해 본인은 그들에게 우리의 내부 상황에 대해 종종 보고를 해주곤 했음. 결국 그들이 우리의 약점을 모두 알게 되었음. 1971년 2월에서야 본인은 기쁘게도 다시금 당과 접촉할 수 있었음.
당시 베트남은 본인을 포섭할 수 있다고 믿었음. 그들은 본인이 프랑스에 거주한 것, 본인의 조부가 베트남인이란 점, 자유로운 관점을 가진 점 등 본인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임.
본인이 "전선"에 합류하기 전에는 어떠한 베트남인도 알지 못했음. 본인이 알고 있는 것은 베트남인들이 혁명을 건설 중이란 것과 그들 역시 혁명적이란 것 뿐이었음. 이 5년 간의 기간 동안 당의 지속적인 지도와 국제적 차원의 참다운 경험 일부를 통해 본인은 베트남의 가식적 얼굴과 조국이 직면한 베트남의 위협에 대해 자각할 수 있었음.
현재 베트남인들이 가진 계획은 우리 당 지도부를 붕괴시키고, 우리의 성장하는 혁명을 봉쇠하는 것으로 ...... (문서 소실) ...... 또 다시 우리와 베트남의 심각한 갈등을 반영하는 것임. 그들은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음. 그들의 현재 당대회는 ...... (문서 소실) ....... 그 야망을 명확히 하고 있음. 1970-1971년 사이의 국제대회에서 일부 협력이 있었고 ...... (문서 소실) ...... 1972년 이래로 비록 그 대회가 언급하긴 했지만 ....... (문서 소실) ....... [3개] 국가 중에서, 우리 대표만 독자적이었음.
(4) 러시아와:
가) 본인이 최초로 러시아 수정주의자들과 접촉한 것은 모스크바를 경유할 때의 일로 ...... (문서 소실) ...... 짜우 셍(Chau Seng)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던 길이었음. 우리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전선"의 모스크바 주재 대사인 찌어 산(Chea San)이 마중을 나와 우리를 그 지도자에게로 안내했고, ....... (문서 소실) ...... 소련의 대중조직인 "러시아평화기구"(Russian Peace Organization)였음. [당시 본인은 아무런 권한이 없었으므로] 짜우 셍과 찌어 산이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상황을 설명했음.
나) 1970년 9월 "전선" 정부는 동독의 베를린에서 개최된 회의에 본인을 파견했음. 본인은 캄푸치아의 새로운 상황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초청을 받아 "베트남 스톡홀름 회의"(Vietnam Stockholm Conference)에 참가했음. 하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논의하지 않았고, 본인은 듣고 있기만 했음.
다) 1970년 10월 "전선" 정부는 스톡홀름에서 열린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범죄에 관한 학술회의"(American Crimes in Indochina Research Conference)에 본인을 파견했음. 당시 본인은 러시아인들을 만났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 하지만 그들은 본인을 감시하고 탐문하였음.
라) 1970년 11월 "전선" 정부는 스톡홀름에서 열린 베트남, 라오스, 캄푸치아에 관한 회의에 본인을 파견했음. 모스크바를 경유할 때 본인은 "러시아평화기구"에 석조상 하나를 선물했음. 스톡홀름에서는 러시아 대사가 베트남, 라오스, 캄푸치아 대표를 대사관 내에서 열린 만찬에 초청했음. 캄보디아 대표는 본인과 더불어 반역자들인 삐뚜렛(Pituret)과 끄린 리언(Krin Lean)의 3인이었음. 이 리셉션에서 본인은 러시아 측의 지원에 대해 감사를 표했음. 귀환길에 다시 모스크바를 경유할 때, "러시아평화기구"는 베트남, 라오스, 캄푸치아의 추쟁을 지원하는 회의를 개최하였음. 본인은 연설을 통해 캄푸치아의 현황을 설명하고, 우리의 투쟁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에 대해 사의를 표했음.
마) 모스크바에서 우리는 1970년 12월에 개최될 또 다른 회의를 기다렸음. 당시 우리는 "코발롱코"(Kovalongko)란 이름의 러시아인을 만났는데, 그는 러시아 "당 중앙위원회"에서 아시아 문제를 담당하는 이라고 함. 그가 우리가 머무는 호텔 방을 방문해서 만나게 되었음. 그가 말하길, 러시아는 강대국이지만 캄푸치아 착취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였음. 그는 시하누크를 인정하지 않지만, 만일 캄푸치아의 당이 시하누크를 인정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라 하였음. 만일 당이 우리의 "전선"을 인정해 달라는 서한을 보내오면 그렇게 할 것이라 하였음. 이때가 본인이 러시아인과 최초로 대면 접촉을 한 때임. 당시 본인은 캄푸치아 내에 당이 존속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답한 후, 그렇다 할지라도 캄푸치아 국내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그의 입장을 전달할 것이라고 답했음.
12월 말 베이징에 귀환한 후, 본인은 이 대화에 관해 상세한 보고서를 당에 제출했음. 본인은 베이징 주재 베트남 대사관을 통해 빈번하게 보고서를 보냈음. 그들은 하노이에 머물던 당 지도부 동지들을 알고 있었고, 답신을 받아 베이징의 당 대표였던 본인에게 전해주었음. 물론 그들이 하룻동안 전통문을 읽어보고 난 후였음.
바) 1971년 2월 본인이 비로소 당과 접촉하여 당의 지도와 학습을 받은 이후, 당은 프랑스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열린 "인도차이나 평화와 독립을 위한 국제회의"에 본인이 참석토록 지시함. 이 회의는 수정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열린 대중조직들의 회의였음. 당시 프랑스 대표를 통해 캄보디아 대표와 러시아 대표 사이에 우연한 접촉이 있었음. 러시아 대표는 회의의 결론에 캄보디아의 관점이 모두 다 채택되는 것을 반대했음. 몇 시간에 걸친 토론 후, 본인은 그들에게 만일 캄보디아의 관점에 관한 연설문 전문이 채택되지 않는다면, 일부를 채택하는 것도 거부한다고 말했음. 당시 회의에서는 캄보디아 문제가 그다지 관련이 없었고, 캄보디아 문제를 언급하는 것도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본인은 향후 곧 열릴 예정이던 보다 큰 회의를 대비하고자 했음. 이 논쟁에 대해 모두가 알았고, 프랑스 신문 및 외국 TV들이 이를 보도했음. 회의 막바지에 러시아인들은 우리에게 동의했음. 당시 우리의 입장은 1970년 3월 23일에 발표된 5개항에 따라 캄보디아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음. 또한 우리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선" 정부를 인정하도록 요청했음.
사) 1973년 5월 "스톡홀름기구"(Stockholm Organization)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관한 회의에 초청되어, 캄보디아 상황을 설명할 대표로 파견되었음. 당시 베트남과 라오스에서는 더 이상의 전투가 없는 상황이었음. 당은 본인을 캄푸치아에 관한 국제회의 대표단장으로 임명했음. 당시 러시아인들은 이 회의 초창기부터 회의를 중지시키기 위해 많은 술수를 꾸미고 있었음. 하지만 1973년 8월 15일 우리가 승리를 거두자, 그들 역시 캄보디아 인민들의 투쟁을 지지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이 회의를 후원하였음.
아) 캄푸치아에 관한 국제회의가 1973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되었음. 당은 본인을 대표단장으로 임명했음. 우리는 이 회의에서 큰 승리를 얻었고, 러시아인들은 매우 고립되었음. 본인은 연설을 통해 평화와 정의에 가치를 두는 다른 나라의 인민들과 단결할 것을 언급했음. 특히 캄푸치아, 베트남, 라오스, 중국, 북한([역주] 영문에는 단순히 "Korea"로 표현되어 있음)을 언급했음.
회의가 끝난지 2-3일 후, 1970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코발롱코가 만남을 요청해왔음. 본인은 그를 파리 주재 우리 사절단 관저에서 환영하였음. 본인은 그가 "당 대 당 만남"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이 회합에 4-5명의 여타 "전선" 관계자들도 동석시켰음. 당시 이엥 꾼사끼(Ieng Kunsaky)도 이 자리에 참석했음. 코발롱코는 "당신은 단결에 대해 말했다. 특히 5개국을 언급했다. 캄푸치아는 오직 5개국만이 우방이라고 생각하나? 캄푸치아를 지원한 다른 국가즐은 뭐가 되는가? 캄푸치아는 그들을 우방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만일 당신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발언한다면, 나는 거시아와 캄푸치아 관계에 악형향을 기칠 수밖에 없다"고 발언했음. 이러한 발언은 상당한 위협이었고, 우리의 주권을 무시하는 일이었음. 따라서 본인은 "이들 5개국은 사태의 초기부터 모든 면에서 매우 정직하게 우리의 투쟁을 지원했기 때문에, 나는 이 5개국 인민들 및 5개국의 단결을 언급한 것이다. 또한 여타 국가들과 달리 그들은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지도 않았다"고 답했음. 코발롱코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고, 더 이상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음. 대신 그는 회의의 승리에 대해 언급함. 그는 본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직전에,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으므로 본인을 만나 기쁘다고 말했음.
[당시 회의가 제공한 비행기표를 통해] 모스크바를 경유해 베이징으로 귀환할 때, "러시아평화기구" 사람들이 공항에 나와 영접해 주었음. 당시 본인의 모스크바 체류 시간이 짧았던 관계로, 그들은 공항 내에서 식사를 대접했음. 본인은 다만 베이징행 항공편을 기다렸고, 그들은 대단히 우호적이었음. 그들은 말하길, 캄보디아에서 미국이 사주한 쿱테타가 불발로 그친 것은 역사 상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캄보디아인들이 반드시 그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해야만 한다고 하였음.(역주) 이것이 1975년 본인이 UN으로 가기 전까지 러시아인들과 마지막으로 접촉한 때임.
(역주) 1959년 시엠립 도지사였던 덥 추온(Dap Chhuon) 등이 주동한 시하누크 정권 전복기도는 "방콕모의"로 불리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캄보디아 내 주요 우파들이 참여했던 이 사건의 배후에는 미국의 CIA가 개입했던 정황이 발견되어 많은 추측을 낳게 했다. 하지만 CIA 무선통신요원 한 사람이 체포된 것 이외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방콕모의"에 관한 보다 상세한 정보는 본 카페 내의 다음 게시물을 참조하라. ☞ 바로가기 : "[사건분석] 방콕 모의 : 1959년의 시하누크 정권 전복 기도" |
자) 수정주의자들 중에서 쿠바(Cuba)가 우리에게 가장 적극적인 편이었다. 우리를 초창기에 인정한 것은 수정주의 국가들이었기 때문에, 매 회의 때마다 그들은 우리 대표단에 와서 말을 건넸고...... (문서 소실) ...... 하지만 단지 외형으로만 그랬다. 쿠바가 연설을 시작하자?진실은 ...... (문서 소실) ...... 본인은 그들에 대해 매우 우호적으로 화답했음. 특히 대표단장이었던 멜바 헤르난데스(Melba Hernandes)에 대해 더욱 각별했음. 그녀는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투쟁에 2-3번
째로 동참한 여성이라고 함. 하지만 그 이상의 교분은 없었음.
본인의 기억으로는, 러시아인들과 쿠바인들은 본인이 당원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문서 소실) ...... 베트남인들이 그들에게 말했음. 그들이 본인에게 우호적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었음. 현재 그들은 이미 본인을 알고 있음. 우호적 태도가 많이 사그러든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임. 5월에 당은 본인을 쿠바에 파견했고, 그들은 캄보디아 대표단을 매우 환영하였음.
차) 러시아에 대한 본인의 견해와 관점 : 1970-1971년 사이에 본인은 수정주의가 무엇인지 몰랐음. 본인은 러시아가 어떤 국가인지 확실히 몰랐음. 그리하여 그들 수정주의 국가들이 우리를 승인하길 바랬던 것임. 본인은 그들 역시 혁명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품위있게 대했고,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려 애썼던 것임. 그리하여 혹시라도 그들이 우리를 승인하면, 우리의 ....... (문서 소실) ...... 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본 것임.
그러나 당으로부터 받은 지도와 본인의 여러 경험을 통해, 수정주의에 대해 보다 나은 지식을 갖게 되었음. 또한 우리의 혁명에 수정주의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음. 실행계획에 따라, 본인은 그들과 어떤 갈등도 유발시키지 않았음.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주권과 위엄을 침해하는 일을 확고하게 막지는 못했음. 본인은 자본주의적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혁명에 참가해서도 여전히 수정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음. 이로 인해 본인은 항상 주의를 기울였고, 특히 외국에 나갈 대는 더더욱 그러했음.
제국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은 본인의 이력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음. 그들은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했음. 그들은 본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음. 본인이 조국으로 돌아와 살게 된 것은 엄청난 일임. 그로 인해 본인은 확고한 근본을 수립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수정주의적 관점을 일소할 수 있었음.
(5) 미 제국제의자들과: 본인은 그들과 강력하게 투쟁했고, 결코 타협하지 않았음. 그들은 처음부터 위협적인 적이었음. 이러한 관점에서 본인은 "전선"의 고위관료들에게 이것이 최후의 전쟁임을 주입시키려 노력했음. "전선"이 제시한 5개항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싸워야만 했음. 하지만 1971년까지 본인은 방법을 찾지 못했고, 협상전략도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음. 1973년부터, 특히 8월부터 본인은 협상 없이 승리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믿게 되었음. 해외에 거주한 본인에게 오랜 기간의 투쟁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 왜냐하면 가족과 헤어져 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임. 장기적인 투쟁의 승패는 국내에 거주하던 우리 인민들의 강인함에 달려 있었음. 국제적인 차원에서 본인은 어떠한 타협도 없는 절대적 관점에서 투쟁했음. 이 점에 대해서는 결코 본인이 실수한 바가 없음.
(6) 결론: 이 5년 이상의 기간 동안, 본인은 본인의 감정적 강도(=세기)와 육체적 강도를 모두 바쳐 우리 인민혁명당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기에 더없이 행복했음. 또한 본인은 국제적 차원에서 당과 우리 인민의 혁명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기에, 본인의 인생에서 더없이 의미있는 시간들이었음. 본인은 완전한 승리를 이룩할 때까지 민족민주혁명에 봉사할 수 있었음. 다시금 당을 만나 당의 일부가 된 것은 행복한 일이었음.
하지만 본인이 프랑스 자본주의자들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특히 1963-1970년 사이에 당과 덜어져 있는 사이에, 본인이 바란만큼 빠르게 성숙하질 못하였음. 당시엔 사유재산과 가족의 문제도 본인 깊숙히 자리했음. 비록 일반적인 당의 정책과 외형 및 관점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세부적으로 상세한 이해를 갖지는 못했음. 특히 독창적인 외교정책에 대해 그러했음. 이러한 비효율적 속성들은 1975년 말 본인이 조국으로 귀국하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음.
7. 금년 (1976년)
(1) 종전: 역사적인 위대한 승리 이후에도 본인은 1975년 8월말까지 "전선" 내에서 활동했음. 그 이후 당은 본인을 국제적 차원의 과업으로 이동시킴. 특히 페루의 리마(Lima)와 UN에서 개최된 "비동맹국 외교장관회의"에 우리 캄보디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음. 본인은 수정주의자들이 이끌던 대중조직과의 사업을 중단했음..
그 이후 본인의 활동은 제3세계 국가들 및 비동맹국가들에 역점을 두게 되었음. 이전에 UN에서 이미 본인은 자본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의 활동과 핑계들을 명확히 보고 있었음. 그들은 캄보디아 대표에 대해 매우 품위있고 우호적으로 대했음. 미 제국주의자들은 스스로 우리에게 다가와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음. 러시아 수정주의자들은 그 인민들을 통해 접촉을 시도해왔음. 캄보디아 대표에 인접한 의석에 앉는 벨로루시(Byelorussia) 출신 인물을 통했음. 본인이 이해하는 바 이러한 행동들에 대한 대처요령은 양특 모두와 어더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이었음. 이후 본인은 대단히 주의했고, 특히 수정주의자들보다는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해 더욱 주의하였음.
작금의 반동적 상황은 본인으로 하여금 우리의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의 위험수위를 자각하게 만들어주었음.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서, 본인은 단결과 우호를 더욱 강화하고자 했음. 특히 내전 기간 동안 우리를 지원해준 국가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했음. 하지만 그들이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어서, 본인은 그 문제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음. 또한 제3세계 국가들 사이의 우호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그리고 개별적인 문제들을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본인은 그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 양측 모두에 대해 투쟁하자고 인식시켰음.
금년(1976년)의 UN에서의 본인은 "해양법 회의"에 참석했고, 아프리카 국가들을 순회한 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에서 개최된 "비동맹국가 정상회담"에 참여하였음. 또한 기존 우방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새로운 우방국을 증가시키며, 동시에 적들을 세계에서 고립시킨다는 당의 계획 실행에 참가하였음.
본인이 순방한 국가들 중 쿠바와 제네바에서, 그들은 당이 본인을 단장으로 임명한 우리 대표단을 그리 우호적으로 환영하지 않았었다는 것만은 지적해두고자 함. 그들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우리 대표단을 만나주지 않았음. 쿠바는 베트남을 우대하였음.
(2) 컴푸치아 혁명 역사에 관하여: 1975년 말 캄푸치아로 귀국하기 전까지, 본인은 1975년 4월 17일이 인민의 민주혁명이 완전히 성취된 날이란 점을 인식하지 못했음.(역주)
(역주) 1979년 4월 17일은 바로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시킨 날이다. |
본인은 이 혁명이 조금 더 길게 갈 것으로 생각했음. 또한 도시주민 소개령 및 화폐사용 금지와 같은 광대한 계획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음. 본인은 이러한 전략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지속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계급투쟁 전략임을 알지 못했음. 당시 본인은 이러한 전략들이 전후의 긴급한 상황에 대한 처방이라고 생각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음. 아마도 본인의 관념론적 태도로 인해 그런 생각들이 생긴 것 같음. 본인은 국내에서의 운동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했음. 단지 본인이 본 것에서 회피하려고만 했음.
지속적으로 학습한 후 본인은 이해하게 되었고....... (문서 소실) ....... 당이 지속적인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하려는 전략임. 세계 사회주의 혁명사에서 이러한 사건은 단 3차례밖에 없는 일임. 1917년 10월 레닌(Lenin)이 이끌어 러시아에서 발생한 최초의 사회주의혁명, 1949년 10월 1일에 일어난 중국의 혁명, 그리고 1975년 4월 17일의 캄보디아 혁명임.
현재 사회주의혁명 지속을 위해 당이 사용하는 전략은 역사상 한번도 사용된 전례가 없는 일임. 본인은 이들 전략들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캄푸치아가 보다 복잡한 상황에 휘말려들어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음. 그 경우 우리는 독립과 우리의 주권을 상실할 수도 있음. 그렇게 되면 100만명 이상의 우리 인민들이 흘린 피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임. 당이 강력하게 이 전략들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베트남이 우리나라를 침공할 것임. 심지어는 우리가 이들 전략들을 실행하고 있음에도, 이미 베트남은 우리 영토를 훔치고 있음. 만일 우리가 이러한 정책들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현재 우리의 사회주의혁명이 처한 상황은 양호함. 우리의 상황은 베트남이나 라오스에 비해 더욱 양호함. 단 일년만에 우리는 [모든] 기지(지역)의 공급문제를 해결하였음. 이는 [과거에는] 결코 없었던 일임. 조국과 인민을 해방시키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즉시로 인민의 민주혁명을 달성하였음. 그리고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지속하기 위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음. 이 또한 [과거에는] 결코 없었던 일임. 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국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화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니, 전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임. 이 모든 일이 역사 속에서 볼 수 없어떤 일임. 이러한 일들은 본인을 자랑스럽게 만들고, 더욱더 당 및 영명한 당 지도부의 지도 하에 사회주의혁명에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갖게 만듦.
한편 개인의 사고 속에서 사유재산의 개념을 일소시키기 위한 운동도 있음. 이러한 운동은 혁명의 단계에서 수정주의의 근원을 하괴하는 가장 심오하고 가장 정당한 방법임. 이 운동은 본인으로 하여근 본인이 착취계급 출신이며 사회주의혁명의 대상임을 깊이 자각하게 만들어주었음. 이는 본인 자신 안에서 사유재산의 갸념을 완전히 분쇄하고 공동재산 개념을 수립토록 강력하게 투쟁하도록 만들어줌. 이러한 자신 내부에서의 계급투쟁은 너무도 강력한 것임. [본인 자신 속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포기는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음. 이러한 일은 본인을 끊임없이 기쁘게 만듦. 하지만 이 투쟁은 장기적인 것임. 본인은 보다 강한 훈련을 필요로 하고 있음. 특히 본인의 자식들에 대한 감정에서 기인한 가족재산에 관한 관념은 아직도 남아 있음. 그러나 초창기에 비해 약화되었고, 이전보다 훨신 강고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음.
비록 그렇긴 하지만, 본인은 혁명의 서열이나 당의 서열에서 결코 멀어질 수 없을 것임. 당은 본인을 학습시켜주었고, 지속적으로 신뢰하여 주었음. 본인은 결코 잊을 수 없음. 1970년 쿱테타가 발생했을 때, 당은 본인을 생각해주어 즉시 서열에 복귀할 수 있도록 호출해주었음. 본인은 그것이 본인을 구조해준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고 생각함. 당으로부터 교육과 신뢰를 받은 결과, 본인은 오직 한 길 혁명전선을 따라 걸을 수 있었고, 인민의 민주혁명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음. 또한 조국 캄보디아에서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 봉사하는 일도 계속할 수 있었음. 본인의 인생에서 만일 당을 만나지 못했다면, 본인이 무엇이 되었을지 알 수 없음. 그러므로 이 위대함을 결코 잊을 수 없음. 이러한 일들이 본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개선시키고 당과 혁명에 보다 다가가게 만들며, 당과 혁명, 인민에 대해 본인의 모든 감성적 강도(세기)와 육체적 강도를 강력하고도 정직하게 바쳐 봉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은 본인의 인생을 더욱 의미있고 심오하게 만들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임.
이 이력서는 모든 부분이나 본인 생애의 모든 시기에 걸쳐 잘 작성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인 인생에 있어서 특정한 시기나 부분을 명료히 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 부분에 대하여 만일 당이 [특정한 시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회상할 수 없었던 부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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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실오라기 없이 자신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며,누군가의 의심으로 부터 신뢰와 믿음을 얻고자하는 간절한 내용의 이력서로 보입니다. 그러나 후반부(1975년 4월)글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궁금합니다.
아마 이 사람도 역시 크메르루즈 핵심멤버들과 마찬가지로 1930년생이고 역시 파리 유학파입니다. 캄보디아 인민혁명당(KPRP) 제2차 당대회(20명 정도가 참여한 비밀회합)가 프놈펜 기차역에서 열렸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인물이 장소를 준비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후의 소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만, 나이로 보아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글 때문인지는 몰라도, 티오운 쁘라싯은 이후 숙청당하지 않고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했을 당시 UN 주재 크메르루즈(민주캄푸치아) 대사를 맡고 있었습니다. 국제사회도 이 의석을 유지해서 계속 유지하다가 이후 1982년에 시하누크, 손 산, 크메르루즈가 연합한
3파 연합의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 의석으로 계승되었는데, 아마 그때도 무언가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후의 소식은 현재로서는 아직 파악된 것이 없습니다. 후반부의 글, .... 참,.. 우리가 동일한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쓰게 될지, 생각할수록 착잡하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