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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트 ‘덤버’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지혜란 한낱 가치 없는 것으로 보이고 쓸 데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들은 모든 것의 가치를 지금 당장 요긴히 쓰일 수 있는 물질적 재화로만 환산하기 때문이다.
1
1954년 11월경으로 겨울이었다. 그날은 망망한 산야를 혼자서 헤쳐 걷기엔 힘에 버거울 정도로 모진 눈보라와 함께 기온도 영하로 내려가 만물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는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늙은 스트라겐은 병들고 지친 몸을 가누어가며 그가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딸 모헤가 사는 이탈리아 북부 작은 마을 포싸노로 가기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이었다.
그의 행색은 너무나 초라하여 겹겹이 껴입은 누더기가 거지를 무색케 하였다. 모질게 휘몰아치는 바람과 맞서 잔뜩 몸을 움츠리며 걷는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스트라겐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에 한적한 시골마을 몬페라토에 겨우 당도하였다. 더 이상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몸은 이미 지쳐있었다. 그가 가길 원하는 목적지인 포싸노까지는 부지런히 걸어서 3일은 더 가야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은 마냥 춥고 또 저물어가기에 쉬어 갈 요량으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어느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허름한 집이었는데 낡고도 단정한 그 집만큼이나 집주인도 선량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몇 번인가의 노크 끝에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등잔을 비추며 문밖으로 나타났는데, 그는 전형적인 농사꾼으로 방금 전까지 부엌에서 저녁끼니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저, 하룻밤만 묵어 갈 수 있겠습니까?”
당시 흉흉했던 세상인심과는 달리 의외로 집주인 앙네헨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다정하게 스트라겐을 맞이했다.
“네, 당연하지요. 어서 들어오세요.”
스트라겐은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들어서자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침은 한동안 멋질 않고 이어졌다.
“쿨럭 쿨럭, 쿠…… 울럭, 쿨럭…….”
“어쩌나?”
“쿨럭 쿠울…… 럭, 죄…… 송…… 합니…… 다. 쿠울럭!”
“별말씀을……, 몸이 많이 편찮으신가 봐요.”
앙네헨은 얼른 따뜻한 홍차 한잔을 따라서 스트라겐에게 권하였다. 스트라겐은 멎지 않는 기침을 계속 쿨럭이면서도 홍차를 조금씩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간혹 입 안에 머금은 찻물이 기침과 더불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따끈한 찻물이 목구멍을 타고 짜르르 넘어 갈 때마다, 향기로운 차향을 콧속으로 들이킬 때마다 조금씩 몸에 훈기가 도는 듯했다.
앙네헨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계속 스트라겐을 지켜봤다. 스트라겐의 얼굴 대부분은 귀까지 덮인 두터운 방한모와 도수 높은 안경, 유난히 숱이 많은 회색빛 턱수염으로 가려졌으나 안경에 가려진 선량한 눈빛만큼은 감지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다듬지 않은 듯 헝클어진 턱수염엔 하얀 서릿발과 얼음조각들이 엉켜 붙어있었다.
“이런, 온몸이 잔뜩 얼어붙었군요.”
앙네헨은 커다란 무쇠난로에 팔뚝만한 장작 몇 개를 더 쑤셔 넣고 난로 밑에 위치한 공기 주입구를 활짝 열어놓았다. 난로는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고 난로 위의 무쇠 주전자에서는 끓는 물이 아우성을 치는지 삑삑거리며 뚜껑을 들썩거렸다.
“원래 이 지방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또한 혹독하기도 하지요.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모르오나 그리 불편한 몸으로 이 추운 날 여행하시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답니다.”
“네, 제 딸아이가 포싸노에 살고 있는데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했지요.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찾아가는 중입니다.”
스트라겐은 방한모를 벗어들었다. 방한모에 바싹 눌린 머리 역시 회색빛 털 뭉치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뒤덮인 노쇠한 얼굴이지만 뭔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아, 그러세요? 포싸노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하필 이런 혹독한 날씨에 더군다나 편찮은 몸으로 여행을 하시는지요?”
“못 본지도 꽤 오래되었고……, 아마 십년은 족히 되었을라나……. 또…… 제가 살아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도 해서…….”
“아, 그렇군요. 그런데…… 이런 날씨에 그 몸으로 마차나 자동차를 이용하시지 않고 걸어서……?”
“네, 제 사정이…….”
앙네헨은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스트라겐의 남루한 행색으로 보아 수중에 돈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스트라겐은 그로부터 꼬박 3일간을 앓아누웠다. 그는 심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딸 모헤를 연신 찾아댔다. 그리고 용서해 달라는 소리만 주절댔다.
“모헤야! 모헤야……, 모헤야…… 날…… 용서해다오. 모헤야…….”
앙네헨의 지극히 정성어린 간호로 4일째 되던 날, 스트라겐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제가…… 이렇게 큰 폐를……, 어찌 갚을 수 있겠는지요?”
“네, 그래도 참 다행입니다. 전 혹시라도 어찌될까 하여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그렇게나 그리던 따님도 못 뵙고…… 잘못될까 해서요.”
“이런, 제가 괜한 걱정을 끼쳐드렸군요. 그리고 제가 잠꼬대를……?”
“따님을 그리도 애타게 찾으시더라고요.”
“제가 잠꼬대를 많이 했나보군요. 이상하게 꿈만 꾸면 딸애의 어렸을 때 모습이 그리 선명하게 보이더군요. 그것도 일곱 살 때의 모습만을……, 10년 전쯤에도 저를 찾아온 딸애를 잠깐 보긴 했었는데, 그땐 그 애가 스무 살이 좀 넘었었나? 아마 스물둘 쯤 되었을 겁니다. 근데 그때 본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고…….”
“네, 따님의 성숙한 모습보다 어렸을 적 모습만 자꾸 떠오른다는 말이겠지요. 꼭 따님을 찾으셔서 여생을 행복하게 지내셔야지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근데…… 제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앙네헨은 스트라겐을 간호하면서 그가 혼수상태에서 지껄여대는 소리를 들어 대충 그의 처지를 이해했다.
‘딸과 그리도 오랜 세월 헤어져 살아야 할 만큼,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
허름한 차림새와 병약한 몸으로 보아 먼 이국을 떠돌지는 않았을 테고, 분명 그는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살아왔을 것이란 추측이 들었다.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그런 의문도 잠깐 들었으나 스트라겐의 선량한 눈빛으로 보아 무슨 피치 못한 사연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너무 자책하지는 마세요. 자식한테 죄 안 짓고 사는 부모가 어디 있어야지요.”
“그런데 집에는 어찌 혼자서……?”
“네, 제 아내는 오래전에 먼저 세상을 떴고요. 자식 놈이 하나 있기는 한데 도시로 나가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님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럼, 혼자서 생활하시오?”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아직은 젊어 보이시는데…….”
“…….”
스트라겐이 감사를 표하며 길을 떠날 차비를 하자 앙네헨은 한사코 만류했다.
“며칠 더 묵으면서 날이 좀 풀리면 그때 떠나시지요. 더군다나 몸도 무척 수척하신데…….”
“그리하고 싶어도……, 폐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폐는 무슨……. 지금 영감님께서 그런 몸으로 여행하시고자 하면 멀리 못갑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릴 때까지 묵어가세요.”
“그리할까요?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다니……. 정말 이 은혜 어찌 갚아야 할지. 그럼 염치불구하고…….”
2
이틀을 더 묵은 스트라겐은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고 얼굴에도 언뜻 화색이 도는 듯했다. 그러나 오랜 지병인 폐결핵으로 한번 기침이 나오기 시작하면 오래도록 멈출 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기침 끝에는 반드시 한 줌의 각혈까지 토해내는 것이다.
그러한 스트라겐을 바라보는 앙네헨은 마찬가지로 10여 년 전에 폐결핵을 앓다 죽은 마누라의 생각이 떠올라 안쓰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니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날씨도 많이 잠잠해진 것 같기도 하구요.”
“날이 좀 풀린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까진 먼 여행을 떠나기에는 무리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며칠 더 쉬면서 날이 더 풀리면 그때 떠나심이…….”
앙네헨은 진정으로 스트라겐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기엔 아무래도 시간이 없는 것이……, 제가 너무 오랜 세월을 덧없이 흘려보냈나 봅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미루다 보면 모래시계에 담긴 한 줌의 모래처럼 어느새 제 희망이 다 빠져나가 버리고 영영 사그라지고 말 것 같은 불안감이……, 어쨌든 그간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앙네헨은 부득불 떠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스트라겐을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대신 마을로 데리고 나가 포싸노로 가는 버스표를 구입하여 스트라겐의 손에 쥐어주었다.
스트라겐은 앙네헨의 친절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몬페라토에 오기까지 긴 노정에서 겪은 숱한 사람들의 불친절을 떠올리면 앙네헨의 친절은 과분할 정도였다.
스트라겐으로서는 앙네헨의 지나친 친절에 보답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수중엔 물론 지닌 돈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그나마 유일하게 지닌 것이라고는 값비싼 황금색 플루트뿐이었다. 스트라겐은 그 플루트를 버스에 오르기 전 한사코 만류하는 앙네헨의 손에 쥐어주었다.
“저는 옛날엔 플루트를 연주하는 연주자였습니다. 그때부터 지녀온 것인데 지금은 쓸 일이 없네요. 저 대신에 이놈을 맡아주셨으면 해서요.”
“이처럼 귀한 것을 제게 주시면 영감님께선……?”
“네, 이 플루트는 제가 30년 넘게 소중히 간직해온 거랍니다.”
“그렇다면 더욱 더 영감님께 필요할 텐데요.”
“괜찮습니다. 제 마음이 그리하라 하니 그리할 뿐이지요.”
“저는 이 플루트를 어찌 사용하는 줄도 잘 모르겠고……, 저보다는 영감님이…….”
“아닙니다. 제발 부탁이오니 이 플루트를 받아주십시오.”
앙네헨은 결국 플루트를 받아 쥘 수밖에 없었다.
플루트는 스트라겐이 지난 30년간을 악착같이 지녀왔던 가장 소중한 물건이며, 그가 지닌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러기에 죽기 전에 자신의 딸 모헤를 만나게 되면 직접 그녀의 손에 꼭 쥐어주려고 소중히 지녀왔다.
그렇듯 자신이 가장 아끼던 플루트였으나 앙네헨이 지난 며칠간 베푼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건넴에 있어 전혀 아까울 것이 없었고, 그보다도 그의 마음이 그리하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앙네헨은 스트라겐에게 있어 플루트야 말로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몇 번이나 사양을 했음에도 막무가내여서 할 수 없이 받아든 것이다.
스트라겐을 태운 버스가 저 멀리 아득하게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던 앙네헨은 손에 쥐어진 플루트를 내려다보았다. 플루트를 남기고 떠난 스트라겐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히며 왠지 불안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제발, 몽매에 그리던 따님을 만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부디 행복하게 사시기를…….”
앙네헨은 스트라겐의 남은 여정이 편안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앙네헨은 그 플루트를 집안의 다른 집기들 속에 방치한 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리고 스트라겐의 기억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3
스트라겐은 젊은 시절 유명한 플루트 연주자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버금가는 밀라노오케스트라의 관현악단 멤버로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보장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부인 앙리마르셀과 인형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 모헤가 있었다.
참으로 남부럽지 않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아주 사소한 질투의 감정으로 인해 그의 가정과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은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의 소박하면서도 운치 있는 소도시 로비고에서 조그만 섬유염색 가내공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 마셍 이노코시아와 사교적이고 매력적인 어머니 마샬 트로아제 사이에 사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가 소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제법 화목한 가정을 이뤘다. 그러나 그가 중등학교로 진학할 즈음부터 어머니는 연하의 스페인계 귀족 청년과 눈이 맞아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면서 그의 가정엔 점차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가 시작되었고, 아버지의 간섭이 심해질수록 어머니의 남성 편력도 따라서 심해졌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렸으나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갇힌 지 두어 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아버지는 술로 모든 시름을 잊으려는 듯 한동안 술독에 빠져 지냈다. 사업도 가정도 전혀 돌보지 않아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다행히 얼마 후 아버지는 정상을 되찾고 예전의 아버지로 돌아왔지만, 그때부터 그가 갖게 된 여자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는 작은 키에 마른 체형을 지녔지만 얼굴은 지적으로 생겼고 품위도 있어보였다. 그래서 학교 친구들 간에 왕자님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격은 솔직하고 온순한 반면에 지극히 내성적이며,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여간해서는 잘 안 듣는 편협함이 있어 친구는 별로 없었다.
그에겐 어렸을 적 소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오랜 친구 마르코가 있었다. 마르코는 그와는 달리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았으며 장난도 짓궂었다.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긴 외모에 화술도 좋고 장난기가 다분히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하였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도 많았고 특히 예쁜 여자들이 들끓었다.
“이봐, 자네도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어때, 마땅한 아가씨가 없다면 내가 좋은 여자 소개해줄까?”
“글쎄, 내가 자네만큼 잘 생기고 인기라도 있다면 모를까……, 나 좋다는 여자가 어디 있을라고?”
“무슨 소리야? 자네라면 내가 일등 신랑감이라고 보증할 수 있지. 내가 동생처럼 여기는 어여쁜 아가씨가 하나 있는데, 언제 한번 만나 볼 텐가? 아마 자네도 몇 번인가 대면한 적이 있었을 걸?”
스트라겐은 마르코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얼른 눈치를 챘다. 마르코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늘 가슴을 두근거리며 멀리서 눈여겨 본 아가씨였다. 두 눈 가득히 장난기가 어려 있고 늘 신나는 일만 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와 영특함마저 지니고 있어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에 감히 말조차 건네 보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미모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여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마르코는 중등학교 때 가족들과 함께 밀라노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쭉 살아왔는데, 마침 이웃집에 앙리마르셀이란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마르코와 앙리마르셀은 수시로 어울리면서 남매처럼 허물없는 사이로 자라왔다.
그녀는 맹랑하다고 여겨질 만큼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았으며, 거기에 더하여 그녀가 지닌 대단한 미모로 하여금 사람들의 이목이 절로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런 사람들의 관심을 꽤나 즐기는 듯 보였다.
“앙리마르셀…… 이라 했던가?”
스트라겐은 그녀의 모습을 잊지 않았다. 모습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름까지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그래, 그 아가씨 이름이 앙리마르셀이지. 그만한 아가씨도 보기 드물 걸? 내가 여태껏 동생처럼 생각해 오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를 내 아내로 맞이했을 걸세.”
“글쎄……. 보기엔 대단한 미인이긴 한데…… 너무 천방지축이라…….”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거지 철들면 얌전해 질 걸세. 그리고 여자란 잘 웃고 떠들며 또 애교란 게 있어야지 너무 얌전만 떨어도 밥맛이네.”
“그런가?”
그렇게 해서 그는 그녀를 아내로 맞게 되었다. 그는 결혼 후에도 변함없는 그녀의 나대기 좋아하는 활달함이 여전히 기분을 거슬리게 했지만, 그때마다 남자답지 않은 편협한 자신을 나무랐다. 오히려 말 수가 적고 늘 진지한 자신에 비해 그녀의 활달함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녀는 다정다감할 뿐만 아니라 온순하고 순종적이어서 둘 사이에는 별 다툼 없이 한동안은 마냥 행복한 듯 보였다.
마르코는 여전히 스트라겐에게 자주 들렀는데, 그때마다 앙리마르셀은 마르코를 환대하며 그와 어울려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처음엔 그도 그러한 분위기를 불편한 대로 참으려 노력했다.
고지식하고 유머라곤 전혀 없는 자신과 살면서 마르코로 하여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다행이라며 오히려 그 둘 사이를 질투하는 자신을 옹졸한 놈이라며 나무라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녀와 마르코의 관계는 그의 눈에 예사롭지 않게 비쳐질 정도로 흉허물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그가 싫어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를 약 올리려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의 질투를 충동질하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점차 자신의 심기를 아랑곳 않는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로인해 질투의 감정이 치솟는 것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그는 조금씩 변해갔다. 그녀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여겨지면서도 왠지 그녀의 태도가 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혼자 이유 없이 웃는 것조차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 것이다. 자연히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고 대신에 양 미간에 깊은 주름만 생겨났다.
‘도대체 마르코 녀석과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다고 혼자서 웃고 지랄이야?’
그만 변해가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 또한 점점 변해가는 듯했다. 말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웃음도 예전 같지 않게 느껴졌다. 왠지 그의 눈에는 그렇게 비쳐졌다. 그녀는 그와 단둘이 있을 때와 마르코와 함께 있을 때와는 그 태도가 확연하게 달랐던 것이다.
그렇게 느꼈기 때문일까? 그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까닭 없이 그녀에게 화를 내곤 하였다.
‘앙리마르셀이 달리 보이는 것은 혹 그녀가 변해서라기보다 내 자신에게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왠지 두려운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럴수록 마르코에 대해 심한 질투의 감정이 솟구쳤다.
어쨌든 마르코는 눈치도 없이 여전히 그의 집을 들락거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도 때도 없이 시시덕거리고 그에게도 자꾸 장난을 걸고 웃음을 강요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피곤하다며 자리를 뜨곤 했다.
‘저 놈이 나를 만나러오는 것이 아니라 앙리마르셀 때문에 들락거리는 것이야.’
한번 의심을 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숱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나중엔 마르코가 드나드는 것을 달가워하지도 않게 되었지만 그러한 속내는 은연중에 겉으로도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러한 그의 의중을 꿰뚫어 본 듯이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과 단 둘만이 있을 때에는 말도 잘하려 들지 않고 웃음도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마르코만 오면 마치 딴 사람으로 돌변한 듯 웃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당신은 마르코가 오면 그렇게도 좋은가 봐.”
“그럼, 당연한 거 아녀요? 마르코는 10년 넘게 날 친동생처럼 대해줬고 또 나도 마르코를 친오빠처럼 따랐는데, 그게 뭐 어때서요?”
“친오빠, 친동생이라……, 그렇지만 실제로 친남매간은 아니잖니?”
“당신에겐 마르코가 가장 친한 친구일 텐데, 내가 마르코한테 친오빠 대하듯 잘해주는 것에 대해 설마……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니죠?”
“아니, 질투는 뭔…….”
“이마에 질투라고 쓰여 있는 데, 뭘 그래요?”
“어……, 내 이마에 그런 글씨가 써 있다고?”
그렇게 질투의 감정을 거세게 불러일으켰던 마르코도 사업차 로마로 떠난 이래 오랜 동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모처럼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4
1930년 5월 14일이었다. 그 당시 밀라노의 날씨는 무척 습했고 기온도 예년과는 달리 8도 가량 낮아 마치 초겨울을 다시 맞은 듯 서늘했다. 그리고 밀라노 근교의 공장지대로부터 뿜어져 나온 짙은 연기가 음습한 안개와 뒤섞여 도시를 휩싸고 있었으며, 대낮에도 짙은 스모그로 불과 5미터 앞을 식별하기 어려웠다.
도시의 건물들은 마치 불 밝혀놓은 폐허처럼 스산하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핏기 잃은 시체처럼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런 짙은 스모그는 한번 나타나면 일주일이나 보름간 지속될 경우가 많았으며, 그 때문에 기관지가 약한 사람들은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를 삼가야 했다.
짙은 스모그로 도시가 휩싸이게 되는 날에는 어김없이 약탈과 방화가 잇따랐다. 밀라노 외곽에는 대규모의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어 평소에는 구걸행각을 하던 빈민들이 치안의 허점을 틈타 노상 강도짓은 예사요, 부잣집을 털거나 여의치 않으면 불을 지르기도 했다.
스트라겐은 그 날도 평상시처럼 관현악단 단원들과 함께 연주연습을 끝내고 서둘러 귀가를 재촉했다. 그의 집은 신흥주거지역으로 인근엔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의 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집에 이르는 동안 감기기운이 있는데다 까닭모를 불안감이 엄습하여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저택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창문을 통해 붉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여느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정경이었다. 그가 집에 도착하였을 때, 참으로 오랜만에 마르코가 그의 집에 먼저 도착하여 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스트라겐이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의 눈에는 차마 못 볼 광경이 들어왔던 것이다. 거실 한쪽의 소파에서 앙리마르셀과 마르코가 바싹 붙어 앉아 서로 껴안고 키스하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비쳐졌던 것이다.
얼마나 농염한 키스였던지 그가 들어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그들 둘은 미동도 않고 그 자세 그대로를 한동안 계속 유지했던 것이다.
“저런, 쳐 죽일 연놈들 같으니라고…….”
순간 스트라겐의 눈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온통 하얗고 수많은 작은 불빛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렸다. 살의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며 모든 근육이 경직되고 부르르 떨려왔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 감춰 두었던 권총을 꺼내들고 다시 거실로 내려왔다.
“이게 누군가, 스트라겐…….”
마르코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스트라겐에게 다가서려다 말고 멈춰 섰다.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굳어있는 스트라겐의 표정보다도 그의 손에 쥐어진 권총의 총부리가 자신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네…… 이게…….”
‘탕, 탕, 탕……!’
이미 냉정함을 상실한 스트라겐의 귀에 마르코의 변명 따위가 들릴 리 없었다. 스트라겐이 마르코를 향해 겨냥한 권총에서 세 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마르코는 복부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이게…… 뭔…….”
마르코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을 꺼냈으나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맥없이 고꾸라졌다. 앙리마르셀이 마르코에게 다가가려다가 주춤했다. 이윽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려있었고, 두 눈과 입은 한껏 벌어져 그대로 굳어있었다.
“여보……, 여…… 보…… 이게…….”
그리고 이어서 총부리가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앙리마르셀에게 겨누어졌다.
“여보……, 당신이…… 뭔가…… 오…… 해…… 를…….”
“뭐, 오해? 미친 연놈들 같으니라고……, 죽어서 함께 잘 살아보라지.”
‘탕!’
‘탕!’
“당신, 미쳤…… 어…… 요?”
앙리마르셀은 가슴과 복부에 각각 한 발의 총탄을 맞고 소파에 나뒹굴었다. 분홍색 블라우스는 금방 붉은 피로 얼룩졌다.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스트라겐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는 고통과 함께 안타까움이 담겨있었다. 그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때 이미 그녀와의 사이에는 일곱 살이던 딸 모헤가 있었다. 어린 모헤가 울부짖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 차린 스트라겐은 방금 일어난 그 일들이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이라 여겨졌다.
스트라겐은 모헤를 정신없이 껴안았다. 까무러칠 듯 울고 있는 모헤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온통 더럽혀져 있었다.
“모헤야……, 이거 꿈이지? 분명…… 꿈이 맞지?”
스트라겐이 앙리마르셀과 마르코가 키스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 오해였음은 금방 드러났다. 그들이 앉아있던 소파 한쪽에는 눈에 넣는 안약과 약솜 등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앙리마르셀이 마르코의 눈 속에 들어간 이물질을 씻어주려 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결국 자신의 편협한 마음과 질투로 인한 오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자신과 어린 딸 모헤의 운명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한 것이었다.
5
스트라겐은 살인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1년여 진행된 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을 확정 선고받고 산타루치아의 달걀성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되고 나서 얼마 후,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딸 모헤가 남의 집에 입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후론 모헤의 소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딸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감옥에 갇힌 이래 10여 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945년 4월경, 모헤가 다 자란 숙녀의 모습으로 그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으로 면회하러 왔을 때였다.
모헤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아버지라 불러드릴 수 있는 건 지금 단 한 번뿐입니다. 저는 곧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아버지를 찾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저를 찾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저를 딸이라 생각마시고 영원히 잊어주세요.”
“모헤야!”
“…….”
그녀는 그의 시선을 굳이 외면했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흐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헤야, 정말 잘 자라주었구나.”
“…….”
“하나님, 우리 모헤가 잘 자라주었군요. 이제 곧 시집을 간답니다. 우리 모헤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
“모헤야! 꼭…… 어디서든 꼭 행복해야 한다. 비록 내 지은 죄 많지만…… 죽을 때까지 내 죄를 속죄하며 살 테니……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모헤야…….”
“네, 아버지……. 그럼 안녕히…….”
스트라겐은 감옥에서 보낸 23년이란 긴 세월동안 단 한 순간도 자신의 딸 모헤를 잊고 지낸 적이 없었다.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앙리마르셀과 마르코에 대한 죄책감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 어린 모헤에게 안겨줬을 고통에 대한 죄책감은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다.
그의 수형생활은 나날이 한결같았다. 처음 수감되면서 그의 변호사를 통해 전달받은 신구약 성경과 그가 가장 아끼는 플루트를 늘 어루만지며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성경은 하도 많이 읽어서 웬만한 구절은 눈을 감고도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성경구절 가운데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마테복음 5장을 매일 한 차례씩 암송했다. 그러면 마음이 정한해지고 모든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나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성경책은 종이가 다 낡아서 너덜해지고 활자도 흐릿하여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몇 장을 넘기면 어떤 구절이 있을지 훤히 꿰뚫을 수 있을 정도였기에 그가 성경책 한 장씩 장을 넘기는 것은 묵주신경을 외우면서 손가락으로 묵주알을 한 알씩 넘겨가며 굴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스트라겐은 하루에도 몇 번씩 플루트를 정성껏 닦으며 어루만졌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절친한 친구를 처참히 살해한 뒤로 여태까지 플루트를 연주해 볼 생각을 가져 본 적도 없었지만, 또한 입에 갖다 대 본 적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 클뿐더러 영원히 속죄될 수 없으리라 여겼던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있을 때는 물론 잠을 잘 때에도 그가 가장 아끼는 플루트는 항상 그의 품을 떠난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플루트에게 온갖 얘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제 플루트는 그에게 있어 평생의 동반자요 살아있는 숨결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말을 시작할 때마다 플루트의 애칭을 불렀다.
“덤버야, 지난밤에는 모헤가 내 무릎에 앉아 그 예쁜 앵두 같은 입술로 이 아빠 입에 뽀뽀를 해주더라고. 어찌나 앙증스럽던지 깨물어 주고 싶은 걸 참느라고 애 많이 먹었단다.”
‘…….’
“덤버야, 그 미카엘 샤르브라고 기억나지? 키가 껑충하니 멋대가리라곤 하나도 없는 그 오보에 연주하는 여자 말이다. 그 여자가 날 꽤나 좋아했었나 보더라. 내가 앙리마르셀과 결혼하고 나자 그 여자도 갑자기 결혼하게 되었다며 관현악단을 그만 두었잖아, 신랑 따라 캐나다인가 영국인가 간다며……, 나중에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났다 잖니.”
‘…….’
6
플루트 덤버는 매일 밤마다 앙네헨 집의 집기들로부터 조롱을 당하였다. 처음 덤버가 그들 사이에 머물게 되었을 때 집기들은 덤버의 화려하고도 우아한 모습과 찬란한 황금빛에 다소 주눅이 들었고, 덤버가 경험했을 바깥세상 일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러나 덤버는 원래 말 수가 적은데다 예전 주인 스트라겐에 대해 할 말을 잊고 지냈다. 아니, 그로서는 잊었다기보다는 잊고 싶었으며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였다. 따라서 덤버에게 아무리 얘기를 들려달라며 졸라대도 덤버는 시종일관 묵묵부답으로 집기들을 대했다. 그 때문에 집기들은 덤버가 겉모습만 화려하고 요란했지 머릿속은 텅 빈 바보로 취급했고 더 나아가 노골적으로 깔보기까지 했다.
“저 덤버란 놈은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놈이 분명해.”
“그러게……. 도대체 뭐하던 놈인지 알 수가 없어.”
“저 무딘 몸뚱이로 땅을 팔 줄 아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저 길쭉한 몸뚱이로 씨를 뿌린다거나 마차를 움직인다거나 뭐 그런 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러게……. 암튼 희한한 놈이야.”
덤버는 세상에 나온 이래 두 가지 세상을 지켜보았다. 두 세상은 서로 상반된 느낌이었다. 가장 화려한 세상과 가장 그늘진 세상……, 화려한 세상은 색깔이 있고 소리가 있고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활력으로 가득 찬 반면, 그늘진 세상은 색깔이 없으며 소리 또한 없고 오직 무덤 같은 싸늘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덤버가 겪은 화려한 세상은 아주 잠깐이었고, 반대로 그늘진 세상은 아주 오래도록 이어져왔다. 더군다나 주인 스트라겐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여겼기에 덤버는 더욱 침울해 질수밖에 없었고,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덤버는 이탈리아 중부의 소도시 아다지오에서 조상대대로 악기 제조기술을 전수받아 이어온 악기 제조업자 쉬밀 알헤르의 손에 의해 1924년 8월경 세상에 나왔으며, 당시 쉬밀 알헤르는 50세가 넘은 대머리에 온화한 성격의 남자였다.
그는 여러 종류의 악기들을 직접 수작업으로 만들었는데, 특히 플루트를 잘 만들어 그가 만든 플루트는 당대의 플루트 연주자들한테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덤버는 밀라노의 악기상 드완이니에게 건네졌다가 그해 10월경부터 스트라겐의 손으로 건네어져, 꼭 30년 세월을 그와 함께 지내온 것이다.
처음 6년간, 덤버는 화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해왔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자신의 기량을 맘껏 뽐내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갈채를 받아왔고, 수많은 악기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한껏 뽐내왔다.
그러나 지난 24년간은 덤버에게 있어서 어두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물론 스트라겐의 관심과 사랑은 여전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연주해 주지 않았다. 다만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닦아주고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물론, 덤버 역시 눈치로 스트라겐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아내 앙리마르셀과 사랑스런 딸 모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행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덤버로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 역시 덤버로서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의 기억이었다.
7
몇 개월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이제 집기들도 더 이상 덤버의 존재를 신기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덤버 또한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대충은 눈치 챘다. 농촌에서 하는 일이란 빤한 것들이어서 그들 집기들 상당수가 농사일과 관련된 일을 했기에 대개의 모양새가 투박했고 게다가 몸통 여기저기엔 지저분한 흙이 덕지덕지 묻어있게 마련이다.
덤버에게 말을 건네 온 것은 말안장 스밀이었다.
“넌, 이름도 없냐?”
“응, 내 이름은 덤버야.”
덤버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넌 뭐하는 놈이냐?”
부지깽이 쏠이 물었다.
“난 악기란다.”
“악기가 뭔데?”
“음악을 연주할 때 소리를 내는 걸 악기라 하지.”
“음악? 음악이 뭔데?”
“노래의 음에 해당하는 거다.”
“점점 못 알아듣는 소리만 지껄이는 놈이네.”
마차바퀴 도뚜아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여물주걱 밀란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 네가 한다던 그 소리라는 것 말이다. 한 번 우리에게 들려주려무나.”
“난 연주 안 한지도 벌써 24년이 넘었는 걸…….”
“그럼 24년간 넌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렸다는 말이냐?”
뒤지 엔나가 비꼬듯이 말했다.
“원래 주인은 유명한 플루트 연주자였단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과 예쁜 따님이 하나 있었는데, 그 부인을 사소한 오해 때문에 죽이고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다 얼마 전 출소를 했지. 그리고 그 따님을 찾아 가는 도중에 나를 이곳에 남겨 두었단다.”
채찍 덩컨이 궁금한 듯 다음 얘기를 재촉했다.
“오호라. 얘기가 점점 흥미진진해 지는데……. 그래서?”
덤버는 한동안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을 떠올리는 듯 침울한 표정에 잠겼다. 불행의 시작은 대부분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비롯하며 순식간에 벌어지고, 그 후유증은 엄청난 것으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쉽게 파괴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불행은 사소한 오해가 걷잡을 수 없는 증오심을 키우고 그 증오심으로 판단이 흐려질 때 오는 것이다.
“사람들이란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진 것 같더라.”
덤버의 말에 덩컨이 가는 채찍 줄기를 파르르 떨며 키득거렸다.
“어쭈? 덤버, 넌 마치 사람들에 대해 제법 많은 연구를 해 본 말투를 쓰는구나. 맞아, 맞아. 사람들은 영리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 땐 아주 멍청하거든…….”
도뚜아가 집안을 한 바퀴 떼그르르르 구르며 웃어 젖혔다.
“파하하하! 야, 이 바보들아!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보고 말하렴, 별에 별 사람 다 있지.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있고……, 미운 사람, 예쁜 사람 있지…….”
“사람들은 왜 변덕이 심할까?”
스밀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오래된 벽시계 벤도 헛기침을 뱉으며 끼어들었다.
“어험! 사람들은 이기심이 너무 많아. 즉 자기 자신밖엔 모른다는 얘기지. 사람들은 남에게 베푸는 것은 인색하면서도 남이 자신에게 베풀지 않으면 화를 내거든…….”
“그래, 맞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조급하게 사는 것 같아. 뭐가 그리도 바쁜지……. 하긴 사람들 수명이 우리보다 훨씬 짧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덤버, 네가 살았던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다를 바 없었겠지?”
덤버는 덩컨의 비아냥거리는 말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전 주인은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가족에겐 자상한 분이셨다. 그런 분이 어쩌다 한 순간에 가장 친한 친구와 가장 사랑하는 부인을 살해하고 평생을 후회 속에 사시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물론 나에게는 변함없이 각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만……, 그렇다고 지난 24년이란 세월, 하는 일 없이 가만있었던 나 역시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단다.”
“그럼, 넌 이제부터 뭘 할 거니?”
덩컨이 궁금한 듯 물었다.
“글쎄, 누군가가 나를 힘껏 불어준다면 모를까……, 그렇잖음 나도 내가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오, 불쌍한 덤버. 아무리 네 차림이 휘황찬란할지라도 쓸모없음 쉽게 잊혀지는 물건일 뿐…….”
스밀이 신파조로 덤버를 비아냥거렸다. 도뚜아도 이에 가세하듯 거들기를
“나야 바퀴라서 온갖 무거운 짐을 옮기는데 없어서는 안 되거든, 또 이곳저곳 안 가본 데도 없구 말이야. 그런데 넌 아무리 살펴봐도 마땅히 쓰일 구석이 없는 것 같아. 할 일 없다는 게 얼마나 큰 비극인데…….”
“맞아 맞아, 우리 모두는 할 일이 있는데 덤버만 할 일이 없잖아. 모든 물건은 제각기 할 일들이 주어지게 마련이다. 그렇잖으면 죽은 목숨이지, 안 그런가?”
그들 집기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덤버를 쓸데없는 물건으로 취급하여 또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덤버는 스트라겐이 그리웠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찾으러 다시 올까?’
세월이 많이 흘러갔다. 어느덧 황금색으로 찬연하던 플루트도 점점 뿌연 녹이 슬어가기 시작했고 먼지도 수북하니 쌓여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아무도 집적거리지 않았다. 아마 모두들 덤버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은 듯했다.
8
그러던 어느 날, 앙네헨의 외동아들 헤겐이 객지에서의 10년이란 긴 세월 에 걸친 방랑생활을 정리하고 그의 고향인 몬페라토로 되돌아왔다.
앙네헨은 훤칠하니 장성하여 믿음직스럽게 변한 아들이 꽤 자랑스러웠고, 일견 대견하게 여겨졌다. 스물네 살의 한창 나이가 아니던가. 키나 덩치로는 오히려 아비를 능가하듯 훌쩍 컸고 우람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들, 훌륭하게 잘 커주었구나.”
“아버지…….”
아내가 폐병으로 죽고 나자 앙네헨은 세상사는 의미를 잃고 그 상실감으로 한때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었다. 아내가 비록 폐결핵 말기의 환자로 자리보존을 할지언정 그래도 살아있을 땐 집안이 사람 사는 체취로 그득 찬 듯 느껴졌었다. 그러나 아내가 떠난 텅 빈 아내의 침상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듯 썰렁하게 자리하였다.
헤겐은 어머니가 죽었을 때 열한 살이었다. 어린 그에게 있어 어머니의 죽음 자체가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절망스러웠지만, 그보다 아버지가 좀처럼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더욱 싫었다. 자연 그들 부자간에 말이 없어지고 웃음도 없어지고, 따라서 집에만 들어오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식사 때가 되면 그냥 묵묵히 밥상을 차려주고, 뭘 어찌해 달라 요구하면 묵묵히 들어줄 뿐 자상한 말 한 마디 건네주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2년여를 그런 아버지 곁에서 우울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같은 마을에 살던 선배가 근처 도시로 배관기술을 배워 취업하러 간다기에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무조건 그 선배를 따라 나선 것이 햇수로 10년도 더 된 것이다. 그 10년 세월을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이처럼 배회하다 마음잡고 고향의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 그동안 많이 늙으셨네요. 저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셨지요?”
“아들아, 그동안 네가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지, 네가 하루 빨리 마음잡는 것 외엔 내가 네게 바랄게 뭐가 있었겠냐. 이렇게 장성하고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구나.”
“제가 철없어 아버지 심려만 끼쳐드린 거지요. 이제부터라도 아버지 일을 거들며 고향에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네가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있어준다면 나야 더 바랄게 뭐가 있겠냐. 하지만 이곳은 한창 혈기가 넘치는 젊은 사람이 있을 곳이 못되잖니.”
“아버지,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대처에 나가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붙일 수 없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론 마찬가지더군요. 지금부터라도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일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고맙고 기특하구나.”
헤겐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농사일을 거들었다. 제법 너른 농장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만 무성했다. 대부분 밀농사를 주로 하였으며, 농장 한쪽 3에이커의 농지에는 올리브나무 2만여 그루가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하여 무성하게 우거져있었다. 그가 도시로 떠날 당시엔 겨우 자신의 키와 맞먹을 만 한 크기였었는데 말이다.
헤겐은 헛간을 정리하면서 구석에 처박혀 있던 플루트를 발견하였다. 녹이 잔뜩 슬고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플루트는 그가 어렸을 때 줄곧 불어댔던 중국산 피리를 연상케 하였다.
헤겐이 플루트를 정성껏 닦아내자 황금빛 장식과 자줏빛 몸체부분이 선명한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피리라 여기며 장식에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문양은 이슬람사원의 벽면 장식이나 이슬람 공예품의 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라베스크 문양과 흡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헤겐은 플루트로부터 어떤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환청이었을까? 아니면 잠시 졸았던 것일까? 그렇게 자문하면서 플루트를 어루만졌다.
‘참 신기한 피리로구나.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야. 근데 이 피리는 어디서 난 걸까?’
헤겐은 그날 밤, 아버지로부터 플루트를 얻게 된 사연을 들었다.
“재작년 11월경으로 기억되는데……, 그날따라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고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저녁을 지으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질 않았겠니. 밖엘 나가보니 걸인 차림의 노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야. 아마 그대로 놔뒀으면 얼마 못 견디고 얼어 죽었을 거구먼…….”
“…….”
“노인은 포싸노에 있다던 딸을 찾으러가는 중이었다나……. 어쨌든 몸이 상당히 편찮아 보여 며칠 쉬어가게 했단다. 내가 보기에는 감옥소에서 출감한지 얼마 안 된 사람처럼 보이더구나.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그 선량해 뵈는 눈빛이며 점잖은 말투하며……, 그런 걸로 보아 걸인으로 느껴지진 않았지만, 남루한 옷차림새며…….”
“…….”
“노인은 떠나면서 내게 그 플루트를 막무가내로 떠넘긴 거야. 20년인가 30년인가 애지중지 지니고 있던 소중한 물건이라면서 말이야. 난 처음엔 극구 사양했었어. 모처럼 만나게 될 딸에게 징표로 남기면 더 좋으리란 생각 때문에……. 그런데 노인을 막상 떠나보내고 나서 참 이상한 예감이 들더구먼. 그가 며칠 앓아누우면서 그리도 딸 이름을 불러대던데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럴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어. 그 불길한 생각이 너무 집요하게 들었거든……. 마치 플루트가 없기 때문에 그 노인은 딸을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란…….”
“…….”
“지금도 가끔은 그 노인이 어찌되었을까 궁금해 질 때가 있어.”
9
이후 헤겐에게 어떤 마법의 힘이 강하게 작용되었던지 그는 잠시라도 플루트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귀신에게 홀린 듯 플루트에게 자꾸 이끌리는 것이 그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도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의 손에 익숙해진 물건처럼 손에 익숙할뿐더러 자석처럼 손에 착착 둘러붙는 것이 플루트였다.
‘정말 이상하고도 기묘한 물건이다.’
헤겐은 한동안 플루트의 그 같은 현상을 이해하려 고심했다. 탁상 위에 놓여있는 플루트에 손을 가져가면 자력에 이끌리듯 강한 힘이 작용하고 그로인해 손은 손대로 플루트에 이끌려가고 플루트는 플루트대로 손 쪽으로 끌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손아귀에 거머쥔 플루트에선 마치 살아있는 작고 여린 생명체로부터 느낄 수 있는 부드럽게 숨 쉬는 듯한 그 어떤 생명력이 감지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섬뜩한 느낌이 아닌 정반대의 황홀한 느낌이었으니 마침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여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 이 플루트 말인데요.”
“플루트가 어때서?”
“이 플루트 정말 이상해요.”
“뭐가?”
“꼭 살아 숨 쉬는 동물 같아요.”
“핫하하하……. 플루트가 마음에 썩 들었나보구나.”
“그게 아니고요. 아버지, 이 플루트 한 번 어루만져 보세요.”
“어디보자……. 뭘? 난 아무것도 못 느끼겠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그저 밋밋한 감촉밖엔 못 느끼겠는데…….”
“이상하네요. 그리고 어떤 자력, 그러니까 손바닥에 둘러붙는 그런 감촉도 못 느끼세요?”
“응……. 전혀…….”
“이상하네요. 전 분명히 숨결도 느껴지고……, 또 손에 둘러붙는 자력도 느껴지는데…….”
“그게 말이다. 아마 플루트가 진짜 주인을 만났다는 증거가 아니겠니? 어찌 보면 사물마다 제 주인이 따로 있거든……. 그래서 진정한 주인이란 사물을 대할 때 남들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단 말이지.”
“그런가요?”
헤겐은 피리와는 달리 마우스피스의 위치와 생김새가 전혀 다른 플루트를 어떻게 부는지 그 방법을 몰랐기에 선뜻 불고자하는 충동을 자제했다. 그러면서 플루트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고 부드러운 양가죽에 올리브유를 묻혀 부지런히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덧 플루트는 그의 일상의 중심이 되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단 한시라도 그의 손에서 플루트를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이며 집안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죄송해요.”
“뭐가?”
“아버지 일을 도와드리지 못해서요.”
“녀석, 아버지는 네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 걸.”
“그런데……, 정말 이상해요. 플루트를 손에서 잠시라도 떼어놓질 못하겠어요.”
“네가 플루트에 반해도 단단히 반한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플루트를 손에 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또 괜히 황홀한 기분에 젖어들어요. 그리고 플루트를 눈에 띠지 않는 것에 놓고 딴 일을 하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또 어지럽기까지 해요.”
“아니, 그럼 플루트를 예쁜 처녀처럼 사랑한다는 게냐?”
“그럴 리가요. 그렇지만 제 의지와는 달리 뭔가에 홀려도 잔뜩 홀린 기분이 들어요.”
“흠……. 그렇담 예사 플루트가 아닌 모양이구나. 어쩜 너더러 플루트 연주가가 되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 전 그런덴 관심이 없어요. 또 재능도 없고요.”
그렇지만 플루트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은 날이 갈수록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속삭임은 때론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때론 하늘을 두둥실 떠오르는 황홀함을 그리고 때론 뭔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차고 오르는 격한 충동을 느끼게 했으며, 그로인해 예전엔 전혀 경험해보지도 못한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한 엇갈린 감정들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알 수 없는 감동으로 표출되는 기분이었다.
헤겐은 마침내 플루트를 불어보기로 작정을 했다. 어찌 부는지 알바 없었으나 피리처럼 불면 음이 나오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플루트의 마우스피스를 입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조금씩 입김을 흘려보냈다.
그때 그의 귀를 의심케 하는 곡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니, 이게 뭐야?’
단지 입김을 조금 흘려보냈을 뿐인데, 플루트로부터 3옥타브를 넘나드는 메조소프라노 음역의 한 소절이 절로 울려나온 것이다. 그건 피리소리라기보다 인간의 소리, 그것도 변성기 이전의 음색 고운 여자아이 목소리로 그리 고울 수가 없어 천상의 소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우스피스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플루트에서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음률이 흘러나왔다. 입김을 세게도 불어보고 약하게도 불어보고 길게도 짧게도 불어보았다. 그때마다 각기 다른 음색의 음률이 파도치듯 울려 퍼졌다.
“아버지. 한번 들어보세요. 정말 신기해요.”
앙네헨도 플루트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쉰 넷의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그처럼 아름다운 음률을 들어 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 플루트가 예사 플루트가 아니란 것을 실감했다.
“아들아, 이 플루트가 네 손에 들어 간 것도 따지고 보면 하늘의 뜻인 게 분명하다. 그래…… 그 노인이 이 플루트를 왜 자신의 딸한테 주지 않고 내게 주었는지, 그리고 네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도 다 이유가 있나 보구나. 그래 그 노인은 운명을 예고한 거야. 아니 이 플루트와의 만남은 네게 있어 운명인 게야.”
“아버지. 정말 운명이란 게 있나 보지요?”
“그럼, 운명이란 게 있지. 우리가 모르고 지내서 그렇지 분명 거역할 수 없는 신비한 미지의 세계와 관련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세계와의 운명적 교류가 있는 게야.”
“설마…… 악마에 씌었다던가…… 그런 나쁜 쪽은 아니겠죠?”
“그럴 리는 결코 없을게다. 악마로부터 이렇듯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리는 없잖겠니.”
“그러면 다행이겠고요.”
“아들아, 이는 하늘의 뜻이다. 이 플루트의 아름다운 소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라는…….”
“이제부턴 너를 덤버라고 불러야겠구나.”
어느 날 문득 헤겐은 플루트에게 덤버라는 이름을 붙였다. 덤버란 어떤 의미가 있는 이름도 아니요, 누군가의 이름을 따온 것도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덤버란 이름을 붙인 것인데, 따지고 보면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 마음먹은 순간 덤버란 이름이 자꾸 떠올라 그와 같은 직감에 충실히 따른 것이다.
그는 플루트를 열심히 불었다. 부는 요령이 생길수록 플루트는 헤겐의 감정변화에 따라 움직이듯 음의 진폭과 영역이 무한대로 펼쳐졌다. 비로소 헤겐은 플루트 덤버와 영혼의 교감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헤겐은 플루트에 신들린 사람처럼 몰입했다. 플루트로부터 끊임없이 들려오는 속삭임,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플루트를 덤버라 부르기로 한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다.
10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에너지, 그리고 혼령魂靈이란 것을 인간만이 지닌 것은 아니다. 동물에게도 있을 수 있고, 식물에게도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무생물인 사물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린 그러한 특별한 사물을 일컬어 영물靈物이라 말한다.
혼령은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두뇌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흔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요, 때론 사물이나 인간의 사고능력에 영향력을 미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론 암시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초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플루트 덤버는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악기이지만, 스트라겐의 운명과 더불어 그의 숭고한 혼령이 깃들어 있었다. 스트라겐은 질투의 화신으로 화하여 순간적으로 두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해했지만, 23년이란 긴 영어囹圄의 세월을 회한悔恨 속에서 속죄의 길을 걸었다. 마침내 그의 영혼은 순수해졌으며 모든 것을 초탈할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의 생명을 무참히 빼앗은 이래 23년간 단 한 번도 플루트를 연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두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연주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영혼을 울려 천상의 음률을 연주했던 것이다.
“덤버야, 내 영혼의 노랫소리를 기억해다오. 내가 죽고 나서 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그 누군가를 위해 내 영혼의 노랫소리를 들려주려무나.”
이후 헤겐은 플루트 연주자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내로라하는 관현악단은 물론 파르마, 제노바, 카세르타 등의 왕립극장에도 줄곧 초빙되어 그만의 단독연주회를 가졌다.
그의 연주를 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황홀경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심지어 그의 정통성을 의심하던 사람들조차 그의 연주를 듣고 나서는 더 이상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플루트의 성자聖者’
이탈리아 언론들이 일제히 그에게 붙여준 최고의 극찬이자 호칭인 것이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구 거절했고, 연주 외에는 그 어떤 만찬이나 파티 석상 등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으며, 사회활동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 베일에 싸인 인물로 신비감을 더해갔다.
1964년 10월경 헤겐은 마침내 음악인이 설 수 있는 최고의 무대라 할 수 있는 미국 카네기홀에 초청되어 하루 1회 3일간에 걸쳐 플루트 독주를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명성은 이미 미국에서도 자자했던 터라 3천 석에 가까운 객석의 3일치가 불과 하루 만에 매진되었다. 그리고 표를 구하지 못해 불만인 사람들의 항의로 카네기홀 일대는 한동안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그의 공연은 연일 성황리에 끝났으며 미국 언론들은 그의 공연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머물던 호텔은 그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북적거렸다.
3일째 공연이 시작되던 10월 14일 오후 6시, 존슨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우탄트 유엔사무총장, 그리고 미국의 내로라하는 저명인사들이 마지막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카네기홀에 속속 입장했다.
무대의 막이 오르고 은은한 조명 세례를 받으며 헤겐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헌칠한 키에 약간 해쓱해 보이나 이지적인 얼굴은 무대조명과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더해갔다.
관중에 대한 인사말도 생략한 채 그는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음률은 나지막이 속삭이듯 시작되었다가 점차 템포가 빨라지며 고음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흐느끼듯 가슴을 저려오더니 격정으로 내달았다. 희로애락 모든 감정들이 표출되고 황홀경으로 빠져들게 하더니 끝내는 무아지경의 경지까지 관중을 몰고 갔다.
관중은 플루트 음률에 맞춰 감정의 기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격정의 순간에는 너나 예외 없이 불끈 쥔 손아귀에 땀이 흥건히 고였고. 부드러운 햇살 같은 기운이 뻗혀왔을 땐 하나같이 나른한 졸음을 느꼈다. 황홀한 음률에는 모두가 그 황홀함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으며, 무아지경의 경지에 들어서서는 하나같이 입가로 침을 질퍽하니 흘렸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플루트 연주가 끝났어도 관중은 넋을 잃고 멍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연주가 끝난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헤겐은 플루트 연주를 끝내고 관중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5분여 동안 이어졌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관중 하나가 박수를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로 장내는 박수소리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네기홀의 3천 관중은 일제히 기립하여 그의 명연주를 높이 기리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박수소리는 그로부터 거의 10분이 지나도록 멈춰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때 헤겐이 다시 무대 위로 나섰다. 장내는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수소리가 거의 자지러질 무렵 헤겐은 홀 안의 관중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비록 어설픈 영어발음이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하고 성심껏 말을 하였기에 관중은 그의 말 속에 빨려 들어갔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의 일입니다. 저의 조국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 몬페라토에 있는 저의 고향 집으로 한 초라한 노인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어느 마을인가에 살고 있을 그의 딸을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부친께서 잠시 쉴 곳을 찾던 그에게 며칠을 머물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 그때 그분은 자신의 가장 소중하고도 유일한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이 플루트를 극구 만류하는 부친께 보답의 의미로 남겨주고 떠났습니다.”
“저는 당시 집을 떠나있었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도회지를 떠돌면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은 물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세상을 비난하고 제 처지를 한탄하며 늘 술에 절어 지내는 방탕한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버지 생각이 그리 간절해지더라고요. 또 고향엘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견딜 수 없게 하였습니다. 10년 가까운 방황을 끝내고 고향집을 찾았을 때 홀로 남은 아버지께서는 저를 반기셨고, 또 헛간 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서 이 플루트를 발견했던 겁니다.”
“첨엔 녹이 잔뜩 슬고 먼지까지 듬뿍 뒤집어 쓴 이 플루트가 단순한 피리정도려니 여겼습니다. 어려서부터 피리는 곧잘 불었거든요. 전 이 플루트를 정성껏 닦았습니다. 황금장식과 자줏빛 몸통이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내자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더군요. 이전엔 전혀 경험해 보지도 못한……, 참으로 묘한 감정이었습니다.”
“가슴을 저미는 슬픈, 그러면서도 황홀한…… 감정, 끓어오르는 격한 감정까지도……. 그런 여러 감정들이 융합되어 마치 시뻘건 용암이 화산구를 통해 거대한 불기둥 되어 분출하듯 복합적인 그런 감정이 마구 솟구치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전 몇날며칠 플루트를 들여다보며 내 본래의 감정과는 전혀 다른 그런 감정이 까닭 모르게 솟구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폐결핵을 오래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네,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절로 납니다. 홀로 계신 아버지……, 네, 아버지를 생각하면 왠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방황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오로지 지긋지긋하기만 하고요.”
“그러다 전 플루트를 입에 대고 가만히 불어봤습니다. 아……, 천상의 소리……, 순간 플루트로부터 천상의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영혼을 사르는…… 처절한 아름다움이 담긴 소리…….”
“저는 플루트…… 아니 플루트는 자신의 이름을 속삭여 말하길 덤버라고 하더군요. 물론 여러분께서는 제 말이 모두 곧이곧대로 믿어지지 않겠지만 참으로 신기하게 전 덤버와 영혼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덤버는 어떠한 감정을 제게 전달한답니다. 그 감정의 전달은 분명하여…… 실제 어떤 일을 겪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을 아주 생생하게…… 분명하게 전달해오고 있습니다. 영혼의 소리를…… 천상의 소리를…….”
“그럼 피날레 곡으로 덤버의 곡을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헤겐은 모든 반주자들을 제지하고 아무 반주도 없이 플루트를 독주하기 시작했다. 순간 카네기홀 안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관중의 눈에 환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환상은 뚜렷이 잡히지는 않았으나 그 느낌은 분명하게 다가왔다.
또렷한 모습은 아니지만 분명히 수천수만의 작은 천사들이 덤버의 영혼을 울리는 천상의 소리에 맞춰 카네기 홀 안을 어지러이 날고 있는 것이 관중의 눈에는 분명 보였던 것이다.
2004/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