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과 영애’가 지금도 불려지니 신기하고 감사하죠
70년대 포크송 가수에서 화가, 그리고 마음 교육 강사로… 박영애씨
포크송의 전설이라 불리는 여성듀오 ‘현경과 영애’는 1974년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뒤 활동을 중지했다. 그럼에도 34년이 지난 지금도 팬들의 사랑은 여전했다. 간혹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들을 수 있고,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노래를 듣는 팬클럽이 있음에 박영애씨는 놀라워했다. “마음으로 움켜잡지 않았던 노래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내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게 기쁘다”고 말한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날들~ 지금도 내 가슴엔 꽃비가 내리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1970년대의 포크송 한 곡이 흘러나왔다. “너무나 아름다운 노랫말, 맑고 청아한 목소리. 도대체 누가 부르는 노래예요?”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순식간에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더욱 퍼져 나갔다. 방송국으로는 ‘현경과 영애’를 출연시켜 달라는 요구가 잇따랐다. 도대체 누군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것. 하지만 방송국조차 그녀들의 소식을 알기란 쉽지 않았다.
월간<마음수련>은 ‘현경과 영애’ 중 박영애(56)씨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대학생 가수였던 박영애씨는 졸업 후 화가 겸 아티스트로 활동했고, 평소 관심이 많았던 마음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덕분에 요즘은 마음수련 강사로도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박영애씨. 이현경씨와 함께라면 다시 한 번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그녀의 노래와 그림, 그리고 마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_MBC-TV 인기드라마<커피프린스1호점>의 한 장면
“너무너무 신기하죠. 정작 노래한 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아직도 저희 노래를 좋아한다는 게….”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계속 등장하고, 수천 개의 블로그와 카페에서 ‘현경과 영애’의 노래를 듣고 있으며 아직 팬클럽도 있다고 하자, 박영애씨는 감사하고 또 신기하다고 했다. “이제 그 노래들은 ‘누가 불렀느냐’를 떠난 거 같아요. 이미 그 노래를 즐기는 많은 분들의 것이 되었고, 노래 자체의 생명력을 지닌 채 세상의 사랑을 받아왔구나 싶습니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대학 시절 4년간만 활동했던 포크송 듀오 가수 ‘현경과 영애’. 그 후, 사람들은 전혀 그녀들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청아하고 순수한 노래만은 변함없이 사랑 받았고, 단 한 장의 앨범은 희귀 앨범이 되어 사람들의 애장품이 되었다.
앨범에 실린 사진 중 긴 생머리 여대생이 바로 박영애씨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어느새 50대 중반이 되었다. 그동안 화가이자 아티스트로서 그리고 마음을 안내하는 교육자로서 살아왔다는 그녀는 ‘나이 든다는 건 참 좋은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 편안하고 화사해 보였다.
통기타와 청바지 문화로 대변되는 70년대, 당시 포크송의 인기는 대단했다. 요즘도 활발히 활동하는 양희은, 김세환,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그들 중에 여대생 듀오가수 ‘현경과 영애’도 있었다.
그것은 그때의 시대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박영애씨는 말한다. 탄압과 단속, 규제로 심란했던 유신정권 시절, 통기타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여대생들의 풋풋한 노래는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훗날 당시를 회고하던 한 음악평론가는 ‘현경과 영애’를 일컬어 “참으로 싱그럽지 못하던 시절의 참으로 싱그러운 가수”였다며 그리워했다.
_이 앨범은 2003년 어떤 팬이 자비를 들여 복원한 것으로 CD와 함께 제작됐다.
‘현경과 영애’가 노래를 시작하게 된 동기 또한 그렇게 순수했다. 1971년 서울대 신입생 환영회 때 미대 회화과 대표로 박영애씨와 이현경씨가 같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두 사람 다 통기타를 칠 줄 안다는 이유로 뽑힌 거였다. “팝송을 불렀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그 다음부터 우리만 보면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도 그게 재밌어서 열심히 부르러 다녔죠.”
그런 어느 날 친구인 김덕년이 직접 만든 노래라며 ‘얘기나 하지’라는 곡을 주었고, 얼마 후에는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 선배로부터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곡도 받게 된다. “라디오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 노래는 ‘얘기나 하지’ 한 곡밖에 없었죠. 김민기 선배가 “한 곡으로는 부족하다”며 그 곡을 주신 거예요. 방송국에서 팀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없다고 했더니, 그냥 ‘현경과 영애’라고 하죠,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두 사람은 ‘현경과 영애’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하게 된다. 대학 다니는 동안만 하자는 게 두 사람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현경과 영애’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다. 라디오와 TV, 대학 축제에서 쉴 새 없이 그들을 찾았고 노래도 십여 곡으로 늘었다. 4년 후, 졸업을 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약속대로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1974년 그간의 활동을 기념하며 앨범 한 장을 낸 것이 끝이었다.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면서 계속하라고 권했어요. 특히 현경이는 원래 음대에 가려고 했을 정도로 피아노도 잘 쳤고 작사, 작곡도 직접 할 만큼 음악적 재능이 많던 친구라, 저만 보면 다시 노래하자고 했는데, 전 고지식하게도 이것도 자기와의 약속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노래에 대해서도 전혀 미련이 남지 않았구요.” 무엇보다 박영애씨에게는 좀 더 근본적이면서도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삶의 의문들이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누굴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떤 게 나의 진짜 모습인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질 않았거든요. 겉으로는 활달하게 무대에도 서고, 웃고 떠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우울함, 불안함 같은 게 항상 있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들은 취직을 한다, 대학원에 간다, 결혼을 한다, 진로를 탁탁 정하는데 자신만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는 박영애씨.
그녀는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 만큼 답답한 시간들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방황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그 답을 찾아가야만 했다. 박영애씨는 그림을 선택했다. 그리고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자 마음먹은 그녀는 전공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바꾸고 대학원에서는 도자기를 전공했다. 뭔가 정신적으로 더욱 고양되고 충만해질 수 있는 작업을 해야만 할 것 같았던 그녀는 그림뿐 아니라 판화, 전각, 붓글씨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숙제를 끝내듯 답을 찾는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기대했다. 열심히 한 만큼 성과는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고즈넉하고 고상하다, 주제가 분명하며 매번 고정관념을 깨는 작가다’라는 평과 함께 그녀의 작품들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 박영애씨는 매해 그룹전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 개인전도 수차례 열었다. 특히 2000년에 전시한 ‘기하산수(幾何山水)’는 문화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전시장 바닥에 북한산 그림을 펼쳐놓고 걸어갈 수 있게 하여 그림은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뒤집었던 것이다. 화가이자 아티스트로도 활동한 그녀는 우리나라에 ‘캘리그라피’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연극 및 콘서트의 로고 작업과 제목을 붓글씨로 써주는 작업도 했고, 2001년에는 가야금 연주의 대가 황병기 선생과 함께 영상퍼포먼스를 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정작 그녀는 행복하지 못했다.
_ 오랜만에 기타를 잡는다는 박영애씨. 고운 음색만큼이나 봉숭아물들인 손이 소녀처럼 곱다.
평생의 숙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그녀의 나이 50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똑같았어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도 여전했고, 현실에 만족 못하는 것도 여전했고요. 오히려 그림에 대한 부담만 커져갔죠. 제 딴에는 그림을 통해 삶의 답을 찾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는데, 나는 화가다, 작가다 하는 의식이 생기면서 호평 받고 싶고, 잘한다는 소리 듣고 싶은 마음부터 생기니까 오히려 그림이 저를 구속하기 시작한 거예요.”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구나’ 하고 좌절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를 통해 마음수련을 알게 된 박영애씨는, 마음을 비워내면서 오랜 삶의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한다.
“모든 의문들이 술술 풀리는 거예요. 내 불안감의 원인도 알 수 있었어요. 내가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 붙들려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안했던 거였어요. 그림을 그릴 땐 그냥 그리면 되는데, ‘이런 그림을 그릴 거야, 저런 작품을 만들 거야!’ 하고 미리 설정해 놓는 거죠, 그렇게 과거에 먹어놓은 마음에 현재를 맞추려고 하니까 늘 편치 않을 수밖에요. 매사에 그랬더라구요.”
박영애씨 한동안 수련에 집중했고, 더 이상 방황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마음 없이 그냥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눈을 뜨면 오늘 하루 어떻게 살아야 되나, 근심 걱정을 하며 눈을 떴거든요. 이젠 그런 게 없어요. 말 그대로 비워진 마음으로, 물 흐르듯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그건 실제로 비워보지 않으면 몰라요.” 이제 더 이상의 번뇌나 고민 없이, 무엇을 하든 정말 자유롭게 그 순간을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쁨으로 벅차 있을 때였다. 2003년 겨울, 박영애씨는 아주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는다.
‘현경과 영애’ 시절 같이 활동했던 기타리스트 김의철씨의 연락이었다. 70년대 포크송 가수들의 송년 콘서트를 열려고 하니 ‘현경과 영애’도 참석해 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현경씨는 찾을 수가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재일교포와 결혼하며 일본으로 건너갔던 현경씨의 소식을 통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30년 만의 무대에, 그녀는 혼자 서야 했다. 변함없이 맑은 목소리, 훨씬 편안해진 모습…. 3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박영애씨에게 감탄했다. 그리고 혼자서라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하지만 포크송 가수로서의 ‘영애’는 ‘현경’ 없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박영애씨 생각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마음수련 강사 과정을 수료한다. 그녀에게 가장 완전한 행복감을 주었던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음수련 강사로 바쁜 날들을 보내지만 불현듯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현경과 영애’의 노래를 듣게 될 때가 있다는 박영애씨. 그럴 때면 역시 마음을 비우며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다고 한다.
“제가 노래를 할 때는 가수가 되겠다는 욕심도 없고, 어떤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마음도 없이 그냥, 그야말로 그냥 불렀거든요. 그래서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었고 마음에서 탁 놓을 수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 노래들은 세상이 되어 더 큰 사랑을 받고 있잖아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노래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간 거지요. 그게 바로 세상의 이치였어요. ‘내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는 게 참 기뻐요. 제가 놓아주어야 자유롭게 날아가 세상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요.” 그녀는 언젠가 이현경씨를 만나면 ‘우리 노래가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큰 노래가 되었어’라고 꼭 얘기해주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한 번 더 무대에 서보자고 권하고 싶단다. 현경아, 34년 만에 둘이 부르는 ‘그리워라’는 어떤 느낌일까…. 너도 궁금하지 않니?
박 영 애 님은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 동대학원 도자공예과를 졸업한 님은 대학 재학 시절 이현경씨와 함께 ‘현경과 영애’라는 포크송 듀오가수로 활동하며 <그리워라> <아름다운 사람> <나 돌아가리라> 등 10여 곡을 발표합니다. 졸업 후에는 그림에만 전념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8년간 그룹전에 참여했습니다. 그림뿐 아니라 도자기, 판화, 전각, 영상 퍼포먼스, 캘리그라피, 표지 디자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중견 화가 겸 아티스트인 박영애님은 경희대, 성균관대 미술학부의 강사로 재직했으며, 현재 마음수련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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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아름답게 나이드신 언니~ 나동나동~ㅎㅎ
멋진 박영애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