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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7장24-35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리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간 사람들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7:24-25)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이제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 요한에 관하여 증언하십니다(24절).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강한 경고의 어조로 말씀하셨을 때 무리들이 듣고 요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차지하는 요한의 중요한 위치를 분명히 주지시키기 위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요한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질문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외칠 때 많은 무리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였습니다(3:2-14).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그의 설교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요한이 어떠한 인물이며 그가 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과 동시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질문과 바로 다음의 질문(25절)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답변으로 이끄는 풍자성이 강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흔한 갈대를 보기위해 굳이 험한 광야로까지 나갈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광야에서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흔하고 하잘것없는 갈대처럼 요한이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 땅에는 일신의 부귀와 안락을 위해 마치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양심마저 팔아 넘겨버리는 배도자(背道者)들과 매국노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여론이나 세상의 유혹에 동요되지 않고 거룩한 소명에 충실한 사람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강직성은 헤롯과의 충돌 사건을 통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헤롯의 악행은 묵시적으로 방관될 뿐 누구 한 사람 감히 이를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이 범죄를 공공연하게 책망하다가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고 질문하십니다(25절). ‘그러면’(알라)은 화제를 새로운 초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은 ‘너희가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미입니다(R.C.H. Lenski). '부드러운 옷'이란 곱고 감촉이 부드러운 값비싼 옷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한은 거칠고 값싼 약대 털옷을 입었음으로(막 1:6) 이와는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식민지의 상황에서 수탈과 착취로 인해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녔음에 비해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은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을 걸치고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치하게 지내다'란 말은 원어상으로 '건강을 해치다', '쇠약해지다'는 의미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결국 건강을 해치기까지 흥청거립니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고관대작들이 호의호식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핍절해 감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황폐한 곳에서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귀에 달콤한 말만 골라 들려주었더라면, 근사한 옷과 음식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궁의 회유 따위에 넘어가거나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치부까지도 과감히 책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요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헤롯의 왕궁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마캐루스(Machaerus) 요새에서 낡고 거친 외투를 입은 가련한 죄수로서 있습니다.
2. 주의 길을 준비하러 보냄 받은 선지자 요한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7:26-27)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고 질문하십니다(26절).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위대함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리들에게 두 가지 풍자적 질문을 자문자답 형식으로 던지셨습니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질문은 요한이 선지자 혹은 그보다 탁월한 자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서곡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냐”라는 말은,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더냐'는 의미이며, '선지자와 인격적인 접촉을 얻기 위하여, 즉 그의 말과 그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R.C.H.Lenski). 한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2)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입니다. (3)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사실들을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4)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취해야 될 행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함입니다. (5)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나 예언자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6) 장차 메시야를 통해 절정에 이를 위대한 구속 역사의 맥을 잇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관건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는 것인데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3:2). 따라서 요한은 분명히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지자 이상의 어떤 자'(페리쏘테론 프로페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그 어떤 선지자보다 탁월한 이유는, (1) 그의 활동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 예로 이사야 40:3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말라기 4:5에 예언된 '선지자 엘리야'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2) 그의 사역의 위대성 때문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직접 그 메시야를 보고 그를 증거하며 또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구자였습니다(27절).
‘기록된바’(27절)라는 말은 말라기 3:1에 기록된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3:1에 예언된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킨 것입니다. ‘기록된바’의 완료형 '게그랖타이'는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has been written)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말라기 3:1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27절) 주님께서 이 예언을 인용하실 때에 구약의 원문 그대로 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여 인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인용된 '네 앞에'(프로 프로소푸 수)란 말이 히브리어 원어에는 '내 앞에'(레파나이)로 되어 있고, 70인역에도 ‘내 앞에’(프로 프로소푸 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내 앞에’란 말을 '네 앞에'로 바꾸어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친히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자기 계시(self-revelation)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를 '메시야 앞에'로 해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메시야이신 자신이 일체(一體)인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메시야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한 사람이라고 증거하십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직접적인 선구자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해야할 사람이었습니다. 원문에는 목적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가 쓰여서 사자의 역할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함으로 메시야의 출현을 명백히 선포하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회개를 외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3:7-14; 마 3:2).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겸손히 말하면서 구속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는 말씀은, 말라기의 예언이 세례 요한과 메시야이신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언하는 말씀입니다.
3.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7:28-30)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28절). 이 말씀은 인간의 죄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강조합니다(시 51:5). 요한은 비록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볼 때 그만큼 위대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결코 요한의 위대함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비록 위대한 선지자보다도 큰 자라 하여도 그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로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증거하는 등 사역면에서 구약에 속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하였지만,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여전히 옛 언약이 속한 옛 세대(the Old Dispensation)의 사람이었고, 신약의 예비 단계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약에 속한 성도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큽니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이해하며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기록된 계시의 완결성을 늘 묵상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성도의 심령속에 내주하사 영적 안목을 뜨게 하며 삶의 바른길로 인도해 주십니다(딤후 1:14). 그러나 이 구절을 하나님 나라에서 요한을 배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면 13:28(마 8:11)의 내용과 상반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의도는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요한의 활동 이후에 온 시대의 변화에 중요성을 둔 것입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29절). 모든 백성들이란 말 안에는 당연히 세리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리들이 따로 구별되어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그 당시 일종의 사회적 계급의 한 부류로서 마치 별개의 족속처럼 취급될 정도로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 미움과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12,13; 5:27-30). 이들이 미움과 배척을 받은 것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거두어들인 세금을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은 자기들의 몫으로 착복하였습니다. 랍비 문헌에는 이 세리들이 강도와 동일하게 분류되어 나타나고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죄인들'로 언급됩니다(5:30; 7:34; 마 9:10; 11:19; 막 2:15). 이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로마 압제자들에게 아부하여 자기 동족을 희생시켜 치부(致富)하고자 하는 변절자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가가 '요한의 세례'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통용된 관례에 의한 표현법입니다(20:4; 행 18:25; 19:3). 요한의 세례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1) 메시야적 내지는 종말론적 예비 교육의 측면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장차 메시야를 통해 시행될 성령 세례의 예비 단계로서 물세례를 시행하였습니다(마 3:11). (2) 세례 받은 자의 생활 변화의 측면입니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은 단지 혈통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자긍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들이 메시야를 통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와 구체적 삶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 3:7-9).
요한의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과 세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리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라고 선언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30절). '율법교사'에 해당하는 '노미코스'는 '서기관'(그람마튜스)과 동의어로 쓰였습니다(5:21; 10:25; 11:45,46,52,53; 14:3; 마 22:35). 이 말은 마 22:35를 제외하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이는 누가가 '그람마튜스'라는 말보다 '노미코스'라는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쉽게 이해하리라는 생각에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상반된 두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있다고 자랑하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반면, 세리들과 같이 외견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율법교사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연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어서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그속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들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4. 이 세대의 사람들에 대한 비유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7:31-34)
예수님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말씀하십니다(31절). 류만(Luhrman)에 의하면 '세대'(게네아)란 이스라엘 전체보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대'라는 말 속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그 말이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절한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마 11:20-24; 13:53-58). 이 말 속에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 때문에 받게 될 하나님의 진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아니한 자들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32절).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평일날 장터에서 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 대해 묘사하신 것입니다.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져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한 편이 장례 흉내를 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도 그 곡(哭) 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놀이가 잘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쪽 아이들이 상대편의 행동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이 아이들은 불평했고 서로가 서로를 나무랬습니다. 이처럼 서로 뜻을 같이 하여 그 놀이에 흥을 돋우면서 재미를 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는 아이들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도 자기 의(義)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경멸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공의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세리나 기타 죄인 취급받는 자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우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죄인 중의 하나로 몰아붙였습니다.
33절 원문에는 '왜냐하면'(가르)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은 앞절에서 말씀하신 아이들의 비유가 이 세대를 적절히 묘사하는 이유를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과 다음 절을 통해서 요한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아이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그들은 그가 귀신이 들렸다 말하였습니다(33절). 병행구절에서(마 11:18) 마태는 떡과 포도주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떡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었습니다(눅 1:15; 막 1:6). 또한 그는 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나실인처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민 6:2-4) 광야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자신들의 사악한 잔치와 사치한 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요한을 가리켜 귀신들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바 장터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따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싸움에까지 이르는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도 그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말하였다 말씀하십니다(34절).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하는 것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자유로이 교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없다'(막 2:19)고 하신 것과 같이, 어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가운데서 진리의 본질과 참된 생명의 도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반영한 것입니다. 특히 세리들과도 상종(相從)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인위적인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온정을 베푸셨습니다(5:27-3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처럼 율법적인 금식을 하지 않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폭언을 일삼았습니다. 요한에 대해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하여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오히려 이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 반대 이유를 들어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이 비난한 대로 만일 예수님께서 탐식가요 술주정꾼이셨다면 율법의 기준대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의 항목에 속했습니다(신 21:20,21).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은 곧 예수님을 정죄할 뿐만 아니라 그를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I. Howard Marshall).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특별히 세리 마태의 집에서 베푼 잔치 때에 예수님께서 참여하신 사실과 관련됩니다(5:27-32). 예수님은 세리 마태의 경우 외에도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당한 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특히 잃은 양(15:1-7), 잃은 드라크마(15:8-10), 돌아온 탕자(15:11-32)등의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5. 예수님의 결론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7:35)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35절). 구약성경에서는 곧잘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표현합니다. 특히 잠언의 경우는 지혜에 관해 많은 언급을 하며 특별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잠 1:20; 8:22-31). 그리고 특별히 이사야 9:6과 11:2는 메시야를 지혜와 긴밀하게 연관시킵니다. 여기서 '지혜'란 곧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고전 1:23,30). 성경은 지혜의 출처를 하나님께로 부터 찾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욥 28:12)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잠 1:7).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조언을 구할 때 그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며, 이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특별히 성령과 관계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게 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행 6:3;고전 2:6; 12:8; 엡 1:17; 골 1:9; 3:16; 약 1:5; 3:15-17).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에 대해서, 마태는 “그 행한 일로 옳다함을 얻느니라”라고 묘사했습니다(마 11:19). 여기서 '자녀'란 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롬 9:7,8). 그리고 '옳다 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카이오데'는 '바르게 선포되다', '옳음이 밝혀지다'는 뜻이며 원문상으로 이 말은 문두에 나와서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본절의 의미는 쉽게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대적들에 의해 곡해되고 비난 받으며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핍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씀대로 살려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며 그들에 의해 세계만방에 선포되고 옳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적용: 지혜의 근본이신 예수님으로 사는 법
성경은, 예수님이 지혜의 근본이시며 지혜라고 증거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지혜가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이신 예수님으로 사는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첫째,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합니다(요 15:7). 우리의 지혜로 산다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에서도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의 근본이신 예수님의 지혜로 살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지혜로 살려면 예수님 안에 거해야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로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합니다(요 15:7).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로 살려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요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