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숙인 은진 송씨 묘갈명(淑人恩津宋氏墓碣銘)
[생졸년] 1664, 현종5)~ 1728년(영조 4) / 향년 64
숙인(淑人)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정랑 남전(南躔) 공의 배위이다. 숭정(崇禎) 갑진년(甲辰年,1664, 현종5) 회덕(懷德)의 송촌(宋村)에서 태어났다. 을축년(乙丑年,1685, 숙종 11) 남씨(南氏)에게 출가하였는데, 남씨는 대대로 함창(咸昌)에서 살았다. 숙인은 65세 되던 무신년(戊申年,1728, 영조 4) 4월 6일 세상을 떠나 문경(聞慶) 입암(立巖) 건좌(乾坐)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숙인이 일찍이 아들 도철(道轍)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녀자로 기록할 만한 명망과 덕행은 없지만 내가 죽거든 반드시 당대의 문장가에게 명(銘)을 청하거라.”
하였다.
도철이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 나를 찾아와 묘문(墓文)을 청하며 울면서 “이것이 우리 어머니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글을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해도 더욱 힘껏 청하기에 마침내 그 가장(家狀)을 취하여 읽어보았는데, 정랑공이 지은 것이었다. 정랑공은 사람됨이 독실하고 질박하여 그 말에 꾸밈이 없으니 숙인의 어짊을 더욱 믿을 수 있다.
숙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의 대의(大義)를 대략 알았다. 부모가 특별히 사랑하여,
“네가 남자로 태어나 우리 집안을 크게 빛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15세에 모친 안 부인(安夫人)이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조부 현감공이 생존해 있었고 동생들은 나이가 어렸다. 숙인이 홀로 집안일을 맡아 조부와 동생들의 의복과 음식을 각각 알맞게 갖추었다. 송씨는 해마다 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숙인이 한번은 그 일을 맡아 주관하였다.
모든 친족들이 쌍청당(雙淸堂)에 모여 그 정갈한 제수(祭需)를 보고는 모두 칭찬하기를,
“아무개 집에 훌륭한 딸이 있다.”
하였다.
부친이 마마를 앓아 몹시 위독하였는데, 병이 옮을까 두려워 집안사람들이 숙인에게 나가서 피하기를 권했다. 숙인은 울면서 피하려 하지 않고 밤마다 한데 서서 하늘에 빌었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숨이 끊어질 듯이 가슴을 치고 울부짖었으며 3년을 하루처럼 한결같이 생활하였다.
한번은 화재가 일어나 불길이 빈실(殯室)로 옮겨 붙자 숙인이 불속으로 뛰어들어 신주를 안고 나오니, 들은 자들이 경탄하였다. 출가해서는 현감공 2대를 섬겼던 방법으로 시부모를 섬기니, 시아버지 도사공이 항상 “우리 집안의 어진 며느리”라고 칭하였다.
집안에 권속이 매우 많았으나 그들의 마음을 모두 기쁘게 하였다. 집을 다스림이 법도가 있었으니, 새벽에 일어나 청소하여 집안에 먼지 한 점 없었으며, 닭과 돼지를 기르고 오이와 채소를 심어 제수(祭需)와 빈객 접대에 항상 부족하지 않게 하였다. 집 앞뒤로는 과일 나무가 정연하여 볼 만하였으니 모두 손수 심은 것이다.
정랑공은 성품이 책을 좋아하고 생계를 꾸리는 데에 서툴렀는데 숙인은 남편으로 하여금 살림살이가 어떠한지 모르게 하였다. 정랑공이 64세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자, 숙인은 기뻐하면서도 슬퍼하며 말하기를,
“우리 시부모님이 생전에 이 일을 보지 못하셨다.”
하였다.
또 울며 말하기를,
“부모가 이미 돌아가시어 친정에 가서 문안하는 의가 없으니, 다행히 죽지 않고 산다면 오직 무덤에 한번 참배할 수 있을 뿐이다. 조만간 한 고을의 수령 자리를 얻으면 이 소망을 이룰 수 있겠지?”
하였다.
정랑공이 외지인 도성에서 벼슬살이를 하자, 숙인이 늘 돌아오라고 재촉하기를,
“나이가 이미 늙었으니 초야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시국이 변하여 정랑공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자 숙인이 몹시 기뻐하였다. 매번 한가할 때면 자녀들을 불러 좌우에 둘러앉히고 거듭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는데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우선시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 종중의 어른이신 우암(尤菴) 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말이 입에서 나올 때는 다시 헤아리라.’라고 하였으니, 이 격언을 너희들은 유념해야 한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부녀자의 직임은 술, 초수(醋水), 변두(籩豆)를 올리고 비단을 짜고 실을 꼬는 일이니, 무릇 자식이 되고 며느리가 되어 일삼는 바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숙인은 남보다 재능이 뛰어난 분이라 이 몇 가지 일에 본디 힘쓰지 않아도 모두 능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 일에 능한 사람이 또한 적지 않다. 숙인은 고금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견식이 뛰어나 능히 남편을 정도(正道)로 인도하고 자식들을 의(義)로 가르쳤으며, 또 늙어서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쇠하지 않았고, 그 말씀에 왕왕 글을 읽은 남자도 미칠 수 없는 바가 있었으니, 아! 명(銘)을 지을 만하다.
송씨의 선조 가운데 쌍청당(雙淸堂) 유(愉)가 있으니 이분이 이름난 조상이다. 그 후손 중에 군수를 지내고 호가 송담(松潭)인 휘 남수(柟壽)와 사간원 헌납을 지낸 휘 희진(希進)이 현감공의 조부와 부친이다. 현감공은 휘가 국사(國士)이다. 이분이 휘 규림(奎臨)을 낳으니, 바로 숙인의 부친이다.
안 부인(安夫人)은 부호군 근(謹)의 딸이다. 도사공은 휘가 극표(極杓)이다. 그 부친은 통덕랑 창하(昌夏)이고, 조부는 군수 영(嶸)으로, 의령(宜寧)의 명문거족이다. 숙인의 아들은 도식(道軾)과 도집(道輯)이 있고 가운데가 도철(道轍)이다. 딸은 사인(士人) 박형령(朴衡齡)과 송제태(宋齊泰)에게 출가하였다.
도식의 아들은 종태(宗泰), 종운(宗運), 종현(宗顯), 종욱(宗郁)이고, 도철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사위 박형령의 아들은 춘유(春囿)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은진 송씨 가문에 / 恩津之門
이 어질고 덕 있는 딸이 태어났네 / 生此碩女
내가 이 비석에 쓰노니 / 我書厥石
거의 길이 영예로우리라 / 庶幾永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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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숙인 …… 묘갈 :
이 글은 남전(南躔)의 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의 묘갈이다. 은진 송씨는 1664년(현종5) 태어나 1728년(영조4)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부녀자의 …… 일이니 :
《예기》〈내칙(內則)〉에 “여자는 열 살이 되거든 밖에 나가지 않는다.……비단을 짜고 끈을 짜서 여자의 일을 배워 의복을 장만하
고 또 제사를 보살펴 술과 초수(醋水), 변두(籩豆), 김치, 젓갈을 올려 예로 어른을 도와 제수를 올린다.”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