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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자유게시판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사
배해규 추천 0 조회 131 14.10.01 14: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부고속도로 개통 내일 40주년] 기공식 9일전 '1·21' 터져… 박정희 "전쟁 나지않는 한 착공하라"

윤영호 파견단장의 회고
하루 3교대 일하며 공기단축, 언땅은 짚깔고 불질러 녹여
최대 난코스 대전 70㎞구간… 토사 쏟아져 가장 많은 희생

경부고속도로가 7일로 개통 40주년을 맞는다.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서울~수원 간 공사를 시작해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대구~대전 구간을 끝으로 완공했다. 서울 양재동(당시)에서 부산 금정구 구서동까지 428km를 잇는 대역사(大役事)였다.

공사비는 429억7300만원이 들었고, 연인원 892만명,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km당 약 1억원이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서울과 부산의 운행시간은 15시간대에서 5시간대로 획기적으로 줄었다. 우리나라 1호 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완공한 경인고속도로(29.5km)지만,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바꾸고 경제성장의 발판 역할을 한 것은 경부고속도로였다.

"전쟁 나지 않는 한 공사하라"

1967년 11월 육군본부 조달감실 윤영호(85·당시 42세) 대령은 "내일부터 청와대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지원할 태스크포스인 '청와대 파견단'을 만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할 때 ‘청와대 파견단’으로 보좌한 윤영호씨(신영기술개발 회장)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당시 1군사령부 박찬표(86·당시 43세) 중령, 육본 공병감실 방동식(80·당시 37세) 소령, 건설부 사무관 박종생(당시 50세·2007년 작고)씨 등과 함께였고, 윤씨가 단장 역할을 했다. 80년 준장으로 예편해 현재 건설업체 신영기술개발㈜을 경영하는 윤씨는 "국토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중요한 과업에 참여한 것 자체로 나는 행운아였다"고 말했다.

다음날 청와대에 출근하자 박 대통령은 윤 대령에게 "나와 함께 고속도로 한번 만들어 봅시다"고 말했다. 첫 임무는 건설비를 추정하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 지시를 받고 5개 기관에 은밀히 추정액을 제출토록 했는데 건설부(650억원), 서울시(180억원), 현대건설(289억원), 육본 공병감실(490억원) 등 제각각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이만한 공사를 해본 경험이 없어서 추정조차 중구난방이었다.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단거리 고속화도로를 하도급으로 시공해본 경험이 전부였다. 윤 대령이 종합 검토 후 360억원이 적정선이라고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육군 공병대를 투입해 비용을 더 절감하라"고 지시했다.

1970년 7월 7일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이한림 건설부장관 등이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경부고속도로 준공 테이프를 끊고 있다.
다음은 노선을 확정하는 일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집무실 곳곳에 지도를 펼쳐놓고 직접 자를 대고 선을 그으며 계획에 몰두했다. 윤 대령도 100만분의 1부터 1200분의 1까지 지도를 구해 품에 끼고 살았다. 먼저 서울~수원 간 32㎞의 노선을 확정하자 박 대통령은 다음날 관계 장관회의를 소집해 용지 매입을 일주일 안에 마치라고 지시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1964년 박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해 '아우토반'을 시찰한 것이 계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이 '아우토반'을 기반으로 경제 부흥을 했다는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이 시속 160km의 속력으로 아우토반을 달려본 뒤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67년 4월 제6대 대선 공약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제시했다.

야당과 언론, 지식인들은 국가재정 등을 이유로 시기상조라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을 불과 9일 앞둔 68년 1월 21일에는 북한의 124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하는 '1·21사태'까지 발생했지만 박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공사를 진행하라"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고 윤씨는 전했다.

험난했던 건설 과정

공사는 서울~수원, 수원~대전, 대전~대구, 대구~부산 등 4개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됐고, 시공에는 현대건설 등 16개 건설업체와 3개 군 공병대가 투입됐다.

막상 공사를 시작하니 모든 것이 부족했다. 장비는 물론기술자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보유한 중장비는 대부분 한국전쟁 전후에 들여온 노후장비였고 고장나기 일쑤였다.

공기 단축을 위해 하루 3교대로 잠잘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 겨울에는 언 땅 위에 짚을 깔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르고, 트럭 꽁무니에 버너를 매달아 반복운행을 하면서 땅을 녹인 다음 지반을 다졌다.

 


한번은 윤 대령이 새벽 5시 수원 구간 공사 현장에 나갔더니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이 몸이 아픈데도 죽을 먹고 현장에 나와 있었다. 당시 현대건설은 전체 시공의 40%를 맡았다. 윤 대령이 "새벽같이 나오셨네요. 부지런하시네요"라고 인사하자

 

 

정 사장은 "내가 뭐가 부지런합니까. 나보다 더 일찍 나와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라고 했고, 누구냐고 묻자 "이병철(삼성 회장)이요!"라고 답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현대건설 중기사업소 과장으로 공사에 장비를 공급하는 업무를 맡았다.

 


최대 난코스는 대전 공구 약 70km 구간이었다. 인명 피해도 잦았다. 특히 충북 옥천군 금강휴게소 인근에 위치한 당재터널은 지층이 퇴적층이라 가장 어려운 공사였다. 터널을 뚫기 위해 발파를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해 공사 진척이 더뎠다. 이 공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 험난한 과정만큼 1970년 7월 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박 대통령도 눈물을 쏟아내며 "이 도로야말로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로써 이뤄진 하나의 민족적인 예술작품"이라고 감격에 겨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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