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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집념으로 일어선 문성동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문성동 새마을지도자 홍 선 표
성공내용
오랜 절망에서 깨어난 문성마을은 “의존하지 말자 그리고 앞장서자”라는 구호아래 지도자 홍선표씨의 헌신적인 지도로 67년부터 마을 앞 하천을 이용하여 수리시설을 완비하였고 6,500수의 양계와 9만주의 상전으로 연간 1,600만원의 부업소득을 올렸으며 농로 1,800m와 126m의 대 교량건설 등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마을주민의 힘으로 추진하여 알찬 내일의 꿈을 키워 가고 있다.
마을현황
○ 가 구 수 : 96호
○ 인 구 : 592명
○ 경지면적 : 62ha
가난의 굴레를 벗기까지
우리 마을은 경북 영일군 기계면 소재지에서 2km 지점, 장방산 산록에 위치한 인구 592명 96호의 산촌 마을이다.
지금과 같이 개발되기 전엔 겨우 62ha의 농경지로 매년 숙명처럼 찾아오는 한발과 싸워왔었다.
호당 0.7ha의 영세농으로 주민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였고 삶의 의욕조차 잃어 왔었다.
나는 이 낙후된 마을에서 스스로 백정(白丁)의 근원이 된다는 동장 직을 맡고부터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마을이 되어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리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박이나 일삼고 무언가 해 보려는 의욕은커녕 실의와 나태에 빠져 겨우 600여명의 동민들이 서로 헐뜯고 시기하며 단합이 안 되는 고질적인 주민들의 정신 개조가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낡고 병든 윤리관을 타파하고 놀고먹는 사람 없애기 운동을 펴는 한편 이들에게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있는 자극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하늘만 쳐다보며 지내던 농사 방법보다 주민들의 힘으로 한해를 몰아내자는 수리시설 계획에 먼저 생각을 돌렸다.
67년도 대 한발로 모한포기 심지 못한 마을 주민들은 냇가로 몰려나가 한해극복을 위한 양수장 설치에 의견을 모았고 집수암거 작업을 편 것이 다행히도 성공을 거두게 되어 주민들은 영구적인 한해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천수답 중 한해 상습지인 12정을 상전으로 과감히 전환하고
둘째, 양수 시설을 해서 천수답을 수리 안전답으로 전환하며
셋째, 농사만으로 안 되는 생계 유지비를 부업으로 해결하도록 양계와 양잠사업을 병행할 것을 합의하였다.
나와 홍순락 씨가 뜻을 합해 부락민을 설득하고 계몽하는 데 앞장섰다.
천수답 상전 화 사업
-양잠 농가 40호가 40만원 수익-
본격적으로 우리 마을이 일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동안의 지도 계몽 기간이 경과한 67년 봄부터였다.
67년 봄 이 해야 말로 오늘의 문성 마을을 발전시킨 해요, 새마을사업 잉태의 해라 할 수 있다.
67년 봄에 천수답 12정보를 상전으로 전환하는 데 역사를 시작했다.
“천수답이든 말든 벼농사를 지어도 못 먹고 사는 형편인데 논에 뽕나무를 심어 뽕만 먹고 살 것이냐”고 노인들은 노발대발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난에 천수답일망정 논에 뽕나무를 심으면 식량부족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고 야단이었다. 더구나 일정 때 뽕나무를 심어서 실패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반대는 대단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새 영농방법에 비교적 이해가 빠른 몇몇 젊은 층을 설득하여 그들과 힘을 합해서 잠업 수익성과 잠업의 밝은 전망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납득시켜서 가까스로 동민들의 찬의를 얻어 논둑을 뭉개고, 퇴비를 넣고, 상묘 90,000 그루를 심는 일을 끝냈으나 역시 그 성패에 대한 자신을 못 가졌고 그러기에 걱정은 대단했었다.
그러나 첫 사업이었던 만큼 정성을 다하여 애써 가꾼 보람이 있어 효과년도인 70년에는 양잠 농가 40호에 180상자를 소잠해서 250만원의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 금년에는 280상자를 소잠해서 1,500만원의 소득을 올림으로서 상전이 논농사에 비할 바가 아닌 수익성이 높은 영농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앞으로 상전이 20정으로 늘어나게 됨에 따라 효과년도인 76년부터는 500장을 소잠해서 2,500만원을 내다보게 되었다.
동민들은 작은일 하나가 성공한데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큰일을 위한 단합에 너도 나도 잘 따라주었다.
한편 양잠 수입에 재미를 본 동민들은 올 가을에 4정보의 상전을 늘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20정의 천수답을 수리 안전답으로
가뭄 잘 타기로 유명한 우리 마을은 67년 한발도 예외 일 수는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앉아만 있을 수가 없으니 마을 앞 기계천 하상 이라도 한번 파보자고 권유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전동민이 이 작업에 매달리니 다행히도 하늘이 도운 탓인지 지하수가 풍부한 것을 발견하고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환성을 울렸다.
우리가 이제부터 살길은 기계천 지하수를 마을 앞 밭들까지 끌어 올리는 데 있다고 의견을 모우고 2단계 작전으로 양수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양수기를 설치하자는 의견의 일치는 보았지만 96만원 이라는 사업비 조달은 큰 문제였다.
그토록 가난하던 마을이 이제 겨우 용기를 내어 일하려는 의욕은 움트기 시작했으나, 100만원에 가까운 돈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마을에서 갹출한 돈은 불과 12만 원 정도 이것도 겨우 터빈씩 양수기 2대를 구입하고 발동기 30마력짜리도 면소재지 정미소에서 구걸하다 시피 빌려 오기는 했으나 하천보다 높은 산마루까지 물을 끌어 올려야 하는 송수관 설치 자금이 또 어려운문제로 등장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모양인가, 가을 추수만 끝나면 갚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외상으로 송수관 파이프를 사왔다. 그래서 제1단계로 16정보의 수리안전답을 고생 끝에 조성했고 제2단계로 100마력짜리로 확장해서 30정보의 논을 수리안전답으로 조성했다.
양수장을 설치하고 송수관을 매설하는 데 서로 의견이 충돌되고 말다툼이 생기고 불평이 일 때 마다 그 고충은 말 할 수 없었고 송수관 매설이 끝나고 시험 송수를 할 때 수압에 못 이겨 터진 송수관을 옷을 찢어 틀어막기도 했었다.
이러한 고생의 덕으로 이제 우리 마을은 40여 톤에 불과하던 미곡 생산 실적을 102톤으로 증산하기에 이르렀다.
양 계 사 업
-연간 120만원의 양계 수입-
우리 마을은 도시와의 거리가 멀고 여름이면 홍수를 이루는 기계천이 가로막혀 양계를 하는 데는 대단히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러나 양잠 수입 효과 연도까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수익의 순환이 빠른 양계사업을 생각했다.
65년도 500마리를 내가 직접 사육하여 동민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여 재미를 보고 있었으므로 67년에는 10호에서 2,000수를 길러 40만원의 소득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계분으로 뽕밭 거름을 하니 일거양득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21호 6,500수의 양계로 연간 120만원의 부업 소득을 올리고 있다.
양계 농가가 급속히 늘어남으로 사료도 공동으로 구입하고 계란도 공동으로 판매하는 이른바 협동체제를 갖추어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는데 서로 돕고 힘을 합하여 해결해 나갔다.
이와 같이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고 마을이 점차 기반을 잡게 되자, 소득 면에서도 70년 전국 평균을 상회하는 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새마을의 열풍
“집집마다 지붕 개량, 오솔길이 찻길 되고, 밤이면 전깃불로 밝은 부업하는 동네.”
이것이 우리 마을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끈기와 인내로 극복하고 수행하면 실패 없이 서공하게 되자, 마을은 절망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단결과 협동 정신이 큰 보람을 알게 되어 지도자의 선도에 따라 과감하게 실천할 줄 아는 용기도 갖게 되었다.
완전히 정신 개조된 새 사람으로 탈바꿈 하게 된 것이다.
전국적으로 실시한 70년도 새마을사업이 오늘의 문 성동을 만드는 계기가 될 줄이야.
한번 뭉친 주민의 힘은 무서웠다.
새 사람으로 개조된 정신 상태에서 새마을사업으로 새 동네를 만들자고 나섰다.
이제 남에게 뒤진다. 든 가 못한다는 것이 없이 무엇이든 타동네 보다는 앞장서야 한다고 모두가 극성이었다.
나는 70년 11월 4일 청도군 신도 부락과 경남 사천군 수청리, 충남 논산군 와야리 등 선진지 견학을 하고 돌아와 여러 차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좌담회를 열어 더 훌륭한 마을을 만들자고 굳게 다짐했다.
이보다도 어려웠던 과거의 역경과 싸워 이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남보다 새마을 사업에 앞장서자고 했다.
우선 마을 지도층에 있는 몇 사람을 내가 다녀온 선진지를 견학하게 해서 새마을사업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70년 10월부터 농한기를 이용하여 마을 환경개선부터 착수 했다.
다른 부락에 앞서서 1,800m의 차도를 개설했다. 국도에서 기계천 까지 꼬불꼬불한 논둑길을 폭 5m로 800m를 바르게 확장하고 기계천을 건너 마을까지 1,000m의 좁은 오솔길을 마을 한가운데로 뚫어 큰길을 만들었다. 양쪽으로 짐수레가 드나들게 골목 간선 길을 넓게 정리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길을 내는 데 가장 큰 난관은 길에 편입되는 748평의 토지가 문제였다.
용지 보상을 하려면 50여만 원이 필요 했지만 염출 방도가 없었다.
동 개발위원들과 같이 편입 용지 지주들을 방문하여 부락 발전을 위해 희사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너무나 일방적인 피해라고 펄쩍 뛰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협조를 구하여 드디어 가장 많은 땅이 편입된 부락유지 홍 순락씨의 문전옥답 220평을 희사 받게 되자, 다음 지주 17명은 여기에 감동되어 순조롭게 승낙하고 말았다.
동민들은 피곤을 모르고 추운 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등에 애기를 업은 부인들 까지 공동작업에 빠지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움을 느꼈다.
이제는 리어카 40대를 공동으로 구입하여 비료와 사료를 운반하는 큰 길이 된 것이다.
다음 사업으로 착수한 것이 여름 장마에 피어난 버섯 같은 초가지붕의 개량 사업이었다.
스레트 회사와 세 번 나누어 지불하기로 계약한 후 115동을 스레트와 기와로 깨끗이 갈고 페인트로 곱게 단장하기도 했다.
또한 어둡고 불편하던 부엌을 시멘트로 개량하고 사과상자를 뜯어 만든 한이 있어도 제마다 찬장과 조리대가 놓여져 식품 위생 관리가 한결 좋아지게 되었다.
3개의 공동우물을 보수하고 시멘트로 칸을 막고 오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지붕을 만들고 뚜껑을 덮게 하여 위생적인 식수 관리를 하게 되었으며 공동 빨래터를 마련하여 부녀자들의 힘을 덜어 주기도 했다.
어느 집이던 담벼락도 모두 깨끗이 보수하고 항시 지저분하던 퇴비장도 시멘트로 칸을 막아 마당과 완전히 구분해서 소를 매도록 했다.
우리 마을은 이제 단결된 모임을 통해서 또 하나의 전진을 기약하기에 이르렀기에 자주 모여서 의논하고 연구하여 서로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기 위한 건평 30평의 마을회관을 짓고 사무실 응접실 창고 회의실을 겸하여 쓸 수 있는 다목적 회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겨울에는 가마니 짜기 비단 짜기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
대통령 각하를 모시고
이와 같이 7개월간의 농한기를 이용해서 우리 마을이 행한 새마을사업의 실적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시멘트 335대를 바탕으로 9개 종목에 달하는 480만원 상당의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71. 8. 5 우리 부락의 새마을사업을 대통령각하께 보고 드리게 되었다.
더욱 어깨가 무거워 지는 중책을 느끼면서 새로운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71. 9. 17 대통령 각하께서는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이 모인 우리 마을에서 “문성동 새마을사업은 환경 개선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의 정신 문제가 본받을 만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은 한층 더 용기를 갖게 되었고 대통령각하를 모신 영광을 깊이 후손에게 물려주고 욕되지 않는 선조가 되어야 갰다고 굳게굳게 다짐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우리는 대통령각하께서 하사하신 184만원으로 전기를 가설하여 밝은 전등 밑에서 농가 부업을 장려하여 더욱 소득을 올리며 문화의 혜택을 즐기고 있다.
또한 종합식품 주식회사가 직영하는 양송이 재배사에 짚을 판매하고 취로하여 농외소득을 올리는가 하면 삼흥제사와 자매결연을 맺어 원잠종 사육을 시작했다.
126m 교량 사업
기계천 하폭 126m를 연결하는 대역사가 숙제로 남아 고심하든 중 군비 400만원을 지원받아 교량 사업에 필요한 자재를 구입하고 노력과 현금 300만원을 동리에서 부담하여 72. 6. 25. 이 공사를 착공하였다.
기초 작업부터 착수했으나 기술자가 없어 고심하든 중 인근에 사는 하청업자가 우리 동민의 용기와 의욕에 감탄하여 자기의 거푸집과 기술을 지원하기에 이르러 공사를 급진전하였다.
그러나 우기가 닥쳐 한 달 동안 애써 파놓은 공사가 하룻밤 사이에 매몰이 되어 없어지기도 했으나 우리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작업을 했다.
교각이 하나, 둘, 서고 교체 스라브가 착착 진행이 되고 있기는 했지마는 연일 계속되는 중노동에 주민들은 지치고 나는 몸이 달았다. 후회도 수없이 했다. 그러나 끝내 이 교량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내 한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각오하고 지쳐 쓰러진 동민들의 터진 손을 잡고 위로 격려하며 사방을 뛰어 다녔다.
당초 이 공사를 10월로 완성시킬 계획 이었으나 뜻하지 않은 수해에 부딪쳐 공사는 12월이 되어서야 완공을 보게 되었다.
비만 오면 섬처럼 고립되던 우리 마을에 기적이 아닌 기적이 이루어져 폭 5.4m, 길이 126m에 달하는 당당한 중력식 교량을 우리의 피땀으로 완공하였다. 비가와도 신을 벗지 않고 통학 길을 즐겁게 오가는 우리의 후세들을 볼 때 나는 한없이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80년대 1,500천원의 소득목표를 향하여
이와 같이 우리 마을이 계속해서 일을 하며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큰 뜻을 품고 중단 없이 계속만하면 75년도엔 호당 소득 65만원, 80년대 1,500천원의 소득목표를 보고 있어, 머지않아 알차고 근대화된 살기 좋은 낙토에서 우리의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우리 부락의 금년도 농가소득은 48만 5천이 넘고 있어 잠업과 부업이 잘만 되면 소득에서도 정말 알찬 부락이 되리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마을에서는 앞으로 하천부지를 개간하기로 했다. 이 하천 부지 4ha을 개간하게 되면 당년수확으로 개간비를 충당하고 익년도 부터는 1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라 수 있을 것이며 현재 300주의 밤나무를 1,000주로 확대 증식하고 또한 상전을 4ha로 확장해서 3,0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꿈꾸고 있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시작에서 오늘까지(내무부)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