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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리그라피 이청옥 작가
별이 된 시인 윤동주, 오늘 캘리그라피를 만나다
강연 이청옥 작가 (윤동주캘리그라피전 작가)
안녕하세요? 이청옥입니다.
어쩌다가 오늘 이 자리에 제가 이렇게 서있나...생각해보면 모두 윤동주 시인 덕분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윤동주 시인이 돌아가신 후에 윤동주 시인 이름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저 인거 같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는 시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맞다. 부끄러움을 알았던 윤동주/ 그 사람을 만났던 이야기를 과장하고 포장해서 내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제가 어떻게 이전시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후 제가 윤동주를 만나가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고 제 작품들은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가장 솔직하고 진솔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시골아줌마에 작업만 하는 작가라서 이렇게 많은 선생님들앞에 서게 된 것이 영광이기도 하고 많이 떨리기도 하네요.
또한 저는 시인도 아니고 문학 평론가도 아니라서 윤동주 시인의 작품들을 문학적으로 잘 설명해 드릴 수도 없습니다. 아마도 여기 오신 많은 선생님들께서 윤동주 시의 문학적 의미라든지 그와 비슷한 내용을 기대하고 오셨으면 많은 실망을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시 준비를 하면서 윤동주에 대해 알아보다가 탄생100주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획을 윤동주의 시 100편을 캘리그라피 작품 100점으로 만들어 보자고 결심을 하고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감옥에 갇혀서 돌아가셨는데, 그의 정신인 시 조차 틀 속에 가두기가 싫어서 제 작품들은 표구를 최소화 하였습니다. 꼭 필요한 작품만 표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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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17년 12월 30일 탄생한 윤동주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29살에 돌아가신 윤동주시인의 72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중국의 용정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셨는데, 그 당시 경성에서 어린이 잡지를 매달 구독해서 볼 수 있었던 참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일본유학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1942년에 일본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히 윤동주 시인의 명석함과 윤동주시인의 집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동주시인의 사진은 이미 여러 번 보셨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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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머니를 많이 닮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시인을 알려져 있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때 아명이 ‘해환’ 이었고, 그의 동생이 ‘달환’이었고, 막내동생이 ‘별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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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시는 것이 아마도 ‘서시’ 일 것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으로 알려진 오른쪽 책표지가 보이시지요? 하지만 사실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최초본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원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책 제목 후에 시의 제목이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목이 없는 시가 있다. 그래서 서문이라고 이름 하듯이 서시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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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연희전문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모아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서 1부는 본인이 다른 1부는 존경하던 스승 이양하 교수에게 나머지 1부는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주었습니다. 정병욱이 윤동주의 육필시집을 받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본인의 어머니에게 맡겼고, 정병욱의 어머니께서 그 시집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대청마루 밑에 숨기고 마루를 봉했다고 하네요. 정병욱의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윤동주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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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친필원고는 8년 가까이 보관되어 있었고,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에 위치한 이곳은 ‘윤동주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란 이름으로 2007년 등록문화제 34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지금도 친필원고를 숨겨 두었던 마루가 그대로 보존되어 방문하면 직접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원래는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하고 싶어했다 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한 번 읽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AAA 9 서시 AAA 10 병원 AAA 11 별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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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시는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되어 각 나라에서 출판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윤동주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과 냉철한 시대의식 등이 어필되면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저자 이바라키 노리꼬가 1986년 출간한 [비운의 청년시인 윤동주]란 제목으로 쓴 수필에 [서시] [쉽게 씌어진 시] [아우의 인상화] [돌아와 보는 밤] 4편의 시의 전문이 인용되었고 해설까지 실렸습니다. 이 수필이 우익단체의 반대 속에서도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 많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이바라키 노리꼬 여사는 한국의 시인들을 일본에 알리는 역할을 2006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주도적으로 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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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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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면서 윤동주는 경성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도선증-배를 탈 수 있는 표]을 받기 위해서는 창씨 개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히라누마 도주] 라고 일본식이름으로 바꾼 후 괴로움에 지은 시가 [참회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참회록]은 고국에서 지은 마지막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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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록]을 한 번 읽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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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윤동주는 일본 동경의 릿교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제가 이번 2월 일본 문학기행 중에 찍은 릿교대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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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교대학의 식당입니다. 이곳에서 왠지 저 책상 어딘가에 반듯하게 잘생긴 한국인 청년이 수줍은 듯 한쪽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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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앞에는 잔디밭이 있었는데, 조선인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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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사입니다. 이분 덕분에 윤동주의 일본발자취가 지금처럼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시에 매료되어 윤동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낸 장본인입니다.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사의 친구분이 함께 오셨는데, 한국에 와 보신적 있으시냐? 는 질문에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사는 가끔이라고 하셨는데, 친구분은 자주라고 하셔서 깜짝놀랐습니다. 알고보니 욘사마팬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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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육필 원고로 쉽게 씌어 진 시입니다. 편지지를 한번 봐 주세요.
릿교대학의 상징이 인쇄 되어 있는 편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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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지금은 ***작업실로 바뀌었는데요. 윤동주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교내 문구점이었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편지지도 이곳에서 사서 사용을 하였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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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동양철학을 가르치던 강의동과 강의실입니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윤동주의 마지막시로 알려져 있는 쉽게 씌어 진 시에 언급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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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윤동주의 마지막시로 알려진 [쉽게 씌어 진 시]를 한번 읽어 보면 좋을거 같습니다. 윤동주의 시가 일본에서 출판되면서 일본에는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에노미야코 시인의 쉽게 씌어 진 시의 답 시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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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릿교대학의 도서관입니다. 릿교대학의 도서관은 거의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윤동주시인도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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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릿교대학에 있는 교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신자였고, 기독교 학교만 다녔던 윤동주는 아마도 이 먼 타국땅에서 틀림없이 이곳 교회에서 기도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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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말씀드린대로 일본에는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이 많이 활발하게 이루졌습니다. 윤동주의 기일에 맞추어서 윤동주 추모행사가 매년 있다고 하네요. 올해는 72주기 추모행사가 있었고 약 300명의 추모객이 모여서 다양한 행사를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일본분들 이십니다.
지금 사진은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사께서 강연하시는 내용을 경청하는 모습입니다. 이 추모모임은 한창희(일본동경공과대학-박사학위 중)청년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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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윤동주의 하숙집을 찾아보았습니다. 언덕 위 초등학교 근처였는데,지금은 하숙집터에 일본플라워디자인학원과 점자도서관이 새워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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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노테 선 다카다노바바 역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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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의 윤동주의 하숙집에서 예전에는 다카다노바바역이 보였다고 하네요. 언덕 위 하숙집엣 멀리 보이는 기차역을 보며 윤동주가 쓴 시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스런 추억]이란 시입니다. 이 시는 [쉽게 씌어진 시]와 함께 윤동주가 동경에서 마지막 남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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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윤동주는 점점 위협을 느끼게 되어 평소 존경하던 정지용의 조언을 받아 교토에 있는 도지샤 대학으로 옮기게 됩니다.
도지샤 대학의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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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샤 대학 내 교회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영어로 하는 성경공부를 빠지는 법이 없었다고 그의 후배 정병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교회도 다니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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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의 오른쪽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습니다. 시비에는 윤동주의 육필시 서시(편의상 서시)가 단정히 새겨져 있고 일본어 번역도 함께 새겨져있었습니다. 사실 일본 교내에 한국시인의 시비를 설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네요. 윤동주50주기 때 새워진 이 시비의 오른쪽에는 무궁화가 왼쪽에는 진달래가 심어져있었습니다. 설립의도가 남북의 평화와 일본과의 화해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1년에 1만명의 추모객이 내방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오른쪽에 보면 하얀통이 보이는데, 이곳에 추모객들의 방명록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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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시비 오른쪽에는 정지용의 시비가 있었습니다. 정지용이 압천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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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마지막 사진으로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사가 찾아내신 사진입니다. 우지강에 있는 아마가세 구름다리입니다.
윤동주가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 송별회를 위한 야유회였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합니다. 함께 찍은 여학생들의 증언을 직접 들으셨다고 하네요. 아마가세 구름다리 근처에 윤동주의 시비가 설립될 예정이라고 최근에 신문에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미 시비는 만들어져 있었고 설립할 장소 문제로 설립이 지연되어왔다고 하네요. 이제는 장소가 결정되었다는 기사를 얼마 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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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짐을 모두 정리해서 용정으로 보내고 며칠만 있으면 본인도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시모가모 경찰서에 잡히고 맙니다.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윤동주가 한 일은 기록에 의하면 윤동주는 원고더미를 옆에 쌓아놓고 그의 시를 일본어를 번역하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윤동주는 모든시를 한국어로만 썼는데, 일본경찰들이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의 시를 번역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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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참 가슴 아팠습니다.
시모가모 경찰서를 가운데 두고 앞에는 압천(윤동주의 통학로)
뒤에는 기찻길(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 사진을 준비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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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짐을 미리 받은 그의 아버지는 매일 용정역에 가서 열흘간 기다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소식 없는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도 참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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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있는 윤동주의 하숙집은 그 당시 약 70여명의 조선의 유학생이 함께 생활했다고 하며, 현재에는 조형예술단과대학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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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윤동주의 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시비가 있었는데, 참 아름다웠습니다. 역시 윤동주의 육필로 서시가 각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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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결국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다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생체실험을 했던 거 같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6개월만 더 살았어도 올해 탄생 100주년이니 100세 시대에 살아 계실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무슨 말인지 모를 외마디를 큰소리로 외치고 사망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과연 무슨 말이었을까요? 주여.... 아니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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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윤동주 한줌 재가 됩니다. 일본에서 화장되어 돌아오셨고 그 유골을 관에 넣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윤동주는 살아서 무명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여주신 분이 아들이 의사가 되길 바랐던 그의 아버지 셨고요. 그의 묘비에 [시인 윤동주지묘]라고 이름 붙여주십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윤동주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쓰려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비석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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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생가 사진입니다. 중국에서는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생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우리 땅에 모셔오던지 해야지 저런 이름으로 불려 지게 두는 것이 해방이 된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제 조국을 못 찾아드린 것 같아서 송구스럽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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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장례식에는 그이 시 두 편이 낭송되었는데 한편이 자화상이고 다른 한편은 새로운 길입니다.
[새로운 길]
AAA 51 [무서운시간] [새로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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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윤동주에게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 이었는지 그가 자신의 산문 [화원에 꽃이 핀다]는 작품에 명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을 내 두뇌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서 일일이 헤아려 세포 사이마다 간직해두어야 겨우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봄바람의 고민에 짜들고, 녹음의 권태에 시들고, 가을 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의 사색에 졸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나의 일 년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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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라는 시를 보면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물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는 표현을 보며 윤동주는 시인일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깨달은 제가 윤동주 시인에게 마음의 꽃 한송이를 바쳤던 작품입니다.
긴 시간 지루 하셨을 텐데,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