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57년 발간한 <Why I am not a christian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세속적 강제력은 보다 확고해지고, 하나님의 강제력은 보다 줄어든다.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면 붙잡힌다고 생각할 근거는 더욱 많아지고, 붙잡히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처벌하실 거라고 생각할 근거는 점점 더 줄어든다. 오늘날에는 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조차도, 도둑질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믿는 경우가 거의 없다. 때맞춰 참회하면 된다고. 어쨌거나 지옥이란 것은 그다지 확실하지도 않을 뿐더러 옛날처럼 그렇게 뜨거운 곳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글에 대해 많은 기독교 엘리트들이 역설적인 내용으로 '나는 왜 기독교인인가'라는 반박의 글들을 쏟아냈습니다. 이 싸움은 현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그치지 않는 논쟁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의 끝이 어디이고 어느 편이 승리했느냐는 질문은 너무 진부할 뿐입니다. 다만 보다 분명한 것은 러셀의 지적대로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세속적 강제력은 보다 확고해지고, 하나님의 강제력은 보다 줄어든다"는 말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서 자행되고 있는 많은 사건들이 반기독교적 행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은 결국 종교적 배경과 갈등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기에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영적 싸움의 전사로서 무장해야 할 것이라는 압박감을 갖습니다.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세속적 강제력이 하나님의 강제력보다 더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Hans C. Andersen)의 유명한 동화 <The Ugly Duckling 미운 오리새끼>는 매우 기독교적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이 땅 위의 피조물인 인간세계에 들어와 인간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태생이 백조인 어느 새끼 백조 한 마리가 어쩌다 오리의 무리 속에 살면서 점점 커나가는 도중에 일반 오리와는 다른 생김새와 자태로 인해 미움을 받고 왕따 당하면서 결국은 오리가 아닌 백조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태생이 백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반기독교 정서가 시대사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대문명문화의 흐름 위에서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인으로서 무리들로부터 미움받고 왕따 당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거센 탁류의 물결을 역행하지 못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채 너무 쉽게 섞여버려 힘을 못쓰고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그러지고 뒤틀려 혼탁해진 세상에서, 세상은 교회를 향해 전혀 다른 두 가지 측면에서 공격을 해옵니다. 먼저는 세상에 교회의 위대한 힘을 드러내 과시하므로 기독교의 영향력을 구사할 수 있도록 세를 키우라는 요구입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요 7:3-4)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공격은 지난 2월에 88세로 하늘의 부름을 받은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라 일컫는 이어령 교수의 말처럼 "책이 페이스북을 못 이기고 철학이 블로그를 못 이기고 클래식 음악이 트로트를 못 이기는 시대, 자신이 공들여 쓰는 책 한 권이 SNS의 한 줄 글을 이길 수 없는 시대"(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김지수)를 살아가는 현대 지성의 고민을 들춰내며 인간의 무력함을 폭로하듯 고발한, 눈물 한 방울의 진실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시대에서 기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윽박질러 숨통을 틀어쥐는 횡포로 교회를 짓눌러 압박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입니다.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악한 사람이 돌이켜 착한 일을 열심히 하여 점점 좋은 사람으로 발전 진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자신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 은혜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탄생,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래서 새로 거듭난 영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뭔가 달라졌다는 새로운 정체의식을 깨닫습니다. 내 안에 옛자아가 죽고 '나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자아'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나는 평범한 게 싫습니다. 일반적인 상식 선에서 말하는 대화들은 지루하고 지겹고 고루하여 머리에 쥐가 납니다. 그렇다고 임펙트하게 번쩍 하는 섬광을 발해 주위를 놀라게 하겠다고 생쇼를 부리며 안달하는 인위적 비범(?)은 더욱 역겹습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많이 접하는 단어가 '공정과 상식'입니다. 공정은 원칙이고 원리이며 끝없이 추구해야 할 인간의 도리이기에 봐줄만 합니다. 그러나 상식이 거론될 때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특히 교회가 스스로를 일반인 기준의 상식 선 안에 스스로 자물쇠를 채우고 안주하려 하는 모습에는 교회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 세상에서는 상식선만 유지해도 칭찬받을 일이겠으나 교회가 스스로 상식 수준에 머무는 것을 목표처럼 내세우는 것은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일이 되고 맙니다. 사실 성경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 상식을 초월하여 뛰어넘는 비상식적인 일과 사건 그리고 그러한 괴짜 인물들로 기적의 역사를 펼쳐내고 있습니다. 상식이 진리 안에 포함될 수 있지만, 진리가 상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신문 오락 면에서 상식 퀴즈 문제를 풀어나가는 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인 것입니다. 이 진리는 살고 죽는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No Bingo!
요즘은 미운 오리새끼처럼 '상식 선 안의 무리'들로부터 삐죽히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숨어버리는 듯한 약간 어리숙한 인물들이 가장 매력 있는 존재로 내 눈 앞에 클로즈업되고 있습니다. 거의 완전에 가깝게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매력은 당장 첫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또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뒤돌아서서 또 한 번 보고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첫 눈에 그의 완벽함을 보았으므로 더 이상 볼 게 없습니다. 이제 그 이상은 오히려 그의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그래서 보통의 상식과는 다른 개성의 사람들은 한 번에 질리지 않고 보면 볼수록 또 보고싶고 그래서 음미하듯 천천히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되는 매력이 있어 아주 오래오래 내 기억 안에 자리잡게 됩니다. 이 시대에 알아주는 사람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도록 어필하고 싶다면 세인들로부터 적당히 미움도 받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상식 선에 머물지 말고 상식을 뛰어넘는 개성과 매력의 시대를 열어가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처럼 말입니다.
Abraham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