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의 10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건이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빛을 본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천주교의 암흑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Justification by faith) 진리는 참된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죄의 짐이 무거워 참된 평강을 누리지 못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를 더욱 중하게 여겨 성경지상주의를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많은 진리의 보화가 드러났다. 그 중 하나가 "만인제사장"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과 계시록 1장 6절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루터는 이 놀라운 진리를 선포는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천 년 이상 전통적으로 내려 온 성직자 계급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만찬에 대해서는 쯔빙글리와 논쟁을 할 정도로 중요한 이슈로 여겼지만, 만인 제사장에 대한 논쟁이나 철저한 연구나 실행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세례 혹은 침례에 대한 것도 재세례파가 나올 정도로 중요 이슈로 여겨졌다.
후에 칼빈은 "직업소명설"로 "만인제사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중세 교회는 소명을 수도사나 성직자에게 한정하였다. 종교 개혁 이후에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라는 진리가 선포되자, 모든 성도들이 성직자가 될 수가 없기에 그들의 세속적인 직업을 성직으로 격상시켰다. 그리하여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 제사장직분을 수행한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은 "제사장 나라"였다. 모든 지파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하여 "제사장 나라"에서 "제사장 지파"가 되었다. 원래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모두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구약에서의 제사장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죄 속죄를 받고 또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직분이다. 아론의 제사장 체계가 있기 전에도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사귐을 갖는 제사장 직분이 있었다.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도 제사장직분을 수행했다.
출애굽기에 이르러서는 가족의 가장이 자기 식구를 위해 제사장이 되었다. 출애굽기 12장 3절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 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구약 모두에서 하나님의 갈망은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드려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지는 것이다.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된다.
성경에 없는 가장 큰 비진리는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뉘는 계급제도이다. 성직자만이 예배를 주도하는 성직이고 평신도는 레위지파처럼 성전에서 일꾼처럼 잡무만 하는 하찮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사실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 성직을 감당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령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내적 인식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구한다.
에베소서 4장에서 더욱 분명한 이상을 보게 된다. 주님께서 교회들에게 주신 은사들은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자와 교사이다. 이들은 주님께서 이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 그들은 이제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사역을 실행한다. 온전케 된 성도들은 그 사역의 일을 수행하는데, 곧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학교이다. 이것은 신학교가 일부 사람들을 성직자로 만들어 계급제도를 심화시키는 학교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 특히 거듭난 아버지들을 자신의 가정에서 제사장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제사장 학교가 필요하다. 구약의 제사장도 25세에서 30세까지 제사장 훈련을 철저히 받았다. 명목상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역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제사장 학교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3차에 이르는 사역 여행을 통해 많은 교회들을 산출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 바울은 그곳에서 정착하여 담임 목사의 역활을 수행하지 않고 장로들을 세워 교회를 목양하도록 했다. 이러한 시스템이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이뤄졌고,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실행되었다.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사역 여행에서 구브로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말씀을 선포하여 많은 사람들을 얻었다(행13장). 사도행전 14장에 이르러 그들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더베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그들이 전한 지역은 주로 갈라디아 지방이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길리기아 다소가 나오고 더 남쪽으로 가면 그들을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들은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다시 역행하여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웠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
그들이 택한 장로들은 믿는 성도들 중에 비교적 믿음이 자란 성도들이었다. 오늘날 기독교 시스템과는 완연히 다르다.
장로의 자격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 자세히 나온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 3:2)
한 아내의 남편은 그 집의 가장이고 자녀들의 아버지이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딤전 3:4-5).
장로 혹은 감독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아버지이다. 그들의 집은 온전히 구원을 얻었다. 온전히 구원을 얻은 자신의 집에서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면 자신과 자신의 집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행 16:31). 자신은 구원을 얻었으나 자신의 집이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은 장로가 될 수 없다. 온전히 구원을 얻은 가정에서 교회의 예배가 시작되고 복음이 전파되면 서너 가정이 더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면 온 집이 구원을 얻은 두 세 장로들이 함께 교회를 책임지고 목양을 한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드러난 초대 교회의 시스템이다. 사도들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순회하면서 세워진 교회들을 권면하고 온전케 하였다.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자 이러한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집에 있는 교회에서 화려한 건물로 옮긴 것이다. 오늘 날 대형 교회의 모습이 시작된 것이다. 황제가 기독교에 호의를 가지자, 세속권력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으로 물밀듯 밀려 들어왔고, 이방 종교의 누룩과 실행도 분별없이 기독교 안으로 혼합되는 비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구별된 초대 교회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세벨의 가르침인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되었고 니골라 당이 지배하는 기형적인 시스템이 형성된 것이다. 성직계급과 대형화 된 예배당이 사탄의 독성인 권력추구가 타락한 인간 본성을 부추겨 타락한 세상 정치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중세교회사는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경건함은 사라지고 끝없는 암투와 음모, 권모술수와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헤게모니 투쟁만 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개신교도 성직계급과 예배당을 주축으로 하는 시스템으로 헤게모니 투쟁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교권과 이권으로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의 질타를 받고 있는지!
우리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귀담아 듣고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이 좌우편에 앉기를 간청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 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 20:25)
오늘날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고관들의 형태와 비슷한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성도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이 아닌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성직계급과 대형 건물로 조합되면 자신도 모르게 권세를 부리고 섬김을 받는 위치가 될 위험성이 있다. 성도들 위에 군림하여 독재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이미 주님께서 간파하시고 우리에게 경고하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말씀을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될 것이다.
오순절 이후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 시스템은 이집 저집에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이다. 아버지가 제사장이 되어 예배하는 가정 교회가 가장 성경적인 모임인 것이다. 그곳에는 교권도 없고 이권도 없으며 참된 목양과 사랑이 넘친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어머니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산출되는 것이다.
교권과 이권이 없이 진실된 사랑과 목양이 있는 교회의 모습은 집에 있는 교회로 표현되었다. 유대인들은 10명 이상이 되면 항상 회당을 세웠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 16:5).
저의 집은 로마에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을 말한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고린도전서 16장에도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나온다. 이 때는 그들이 에베소에 있었다. 또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나온다. 브라스가와 아굴라는 가는 곳마다 그 집에 교회가 있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 4:15)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빌 1:1-2)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가 골로새 교회였다. 집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초대교회의 패러다임이었다. 집에 있는 교회에서 아버지인 빌레몬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예배를 인도하고, 어머니인 압비아는 영적인 내조를 하며, 아들인 아킵보는 영적인 군사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었다.
하늘의 식양에 따른 참된 교회생활을 다시 회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