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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19장 16~22절, 마태복음 6장 33절, 신명기 6장 5~9절, 전도서 12장 13절,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예수께 물었다. "어느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표준새번역>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표준새번역>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처럼 몇몇의 자만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착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는 질문이나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신앙생활 뭐 이쯤하면 제법 잘 하고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계명을 잘 지키고 있으니 어디서든 계명에 대한 질문에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살인할 일도, 간음할 일도, 도둑질할 일도, 거짓 증언을 할 일도 만들지 않는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 어느정도선까지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렇게 나쁜 자녀는 아닌듯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적당히 네 이웃을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지내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정도면 충분해 보입니다. 이정도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계속가다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대, 굳이 무슨 선한 일을 더 해야 하는건지,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여쭤보는 이유는 칭찬을 듣고 싶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신앙생활에서 완전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면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칭찬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칭찬도 찾아오고, 때론 비판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칭찬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무엇인가 신앙생활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받고 싶은 칭찬이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받고 싶은 칭찬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소중하고 귀한 질문을 한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질문을 신중하고 조심스레 질문하지 않습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당당합니다.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더 붙입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전 이미 다 한 거 같은데요!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 아닙니까?" 답정너라고 하지요. 답은 정해져있으니 너는 대답만하면 된다는 신조어입니다. 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진짜 예수님의 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그를 꾸짖거나 다른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처럼 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오히려 마가복음 10장 2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우리가 생각할 땐 교만해보이고 건방져 보이는 그 사람을 왜 예수님은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을까요? 첫째로, 그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둘째로, 계명을 잘 알고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이야기했을 때 잘 알고 있었고, 숙지했기에 지켰음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왔던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키우시는 분들은 아실겁니다. 자녀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때 -부모가 보기에는 아직 더 해야할 일이나 부족한 점이 많아 보이지만- 아직 잘 모르는 것 뿐이니 그저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가르쳐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 사람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저 사람처럼 오히려 예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당하게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부족한건지 알려달라고 질문했으면 좋겠습니다. 실상은 어떻습니까? 가수 김수희의 '애모'라는 곡의 가사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만 서면 왜 그리 작아지는지요? 말씀을 살아내지를 못하니, 계명을 지킬 마음이 없이 살다보니 괜한 죄책감에 쭈볏쭈볏하면서 '죄인 코스프레'를 하면서 자신 없이 서 있는 모습을 너무도 쉽게 보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해야하는 것처럼 배운 것같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저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으로 긍휼만을 요구해야 하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왠지 하나님 앞에서는 한마디 대꾸도 해서는 안 될 것 같고, 말씀 앞에 서면 한없이 부끄럽고, 어색하고, 쑥쓰럽고 조용히 침묵하게 되는 모습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다시금 힘을 얻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녀여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진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저 한 사람의 당당함이 우리는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이름을 '부자청년'이라고 임의로 정하기도 하고, 이어나오는 마태복음 19장의 후반부를 보면서 "그래!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워!그래서 내가 부자가 안되는거야!"라고 애써 동의하면서 저 '부자청년'에 대한 질투심을 마음껏 드러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진짜 질투가 나는건 예수님 앞에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모습일텐데 말입니다.
그럼 그렇게 사랑스럽게 눈여겨보시며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한번 기울여 보시겠습니까? 그 한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 3가지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첫번째로 가서 소유를 팔기를 요청하셨습니다. 두번째로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13번째 제자로의 초청을 그 한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얼마나 사랑스러우셨으면 12명의 제자 이외에는 다른 이들에게는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으셨던 제자로서의 제안을 하셨을까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한 사람이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주 안타까운 결론입니다. 그 한 사람, 그 젊은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줄 몰랐습니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줄 필요까지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굳이 따를 마음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근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이 이 젊은이의 근심과 오버랩이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근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 버리고 싶지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젊은이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가 재산이 많았다는 기록이 더욱 재밌는 것입니다. 굳이 재산이 많았음을 기록하면서 그가 근심하고 돌아간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넉넉한 재산을 기초로 해서 계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웃사랑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도 공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초를 다 내려놓으라고 하시니 어찌 근심이 안 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재산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젊은이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의도적으로 제외한 계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십계명 중 하나님과 관계한 1~4계명입니다. 이웃 사랑 전에 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기초,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제외하고 다른 계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재산이 많았던 젊은이의 모든 기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재산'이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기초로 하지 않은 모든 신앙생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행하는 이웃사랑은 그저 형식적이며, 간편한 배려와 구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도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재산이 많았던 젊은이를 향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가 기초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나를 따라오면 알게 될 것이다. 니가 얻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기초를 둔다는 것을!"
지금 여러분은 신앙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믿음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신념이나 종교관, 나의 종교행위나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구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이라고 한다면,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기초를 반드시 '하나님 사랑'에 두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처럼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먼저가, 이 기초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초를 든든히 쌓는 것입니다. 그 기초 위에, 그 바탕 위에서 수많은 계명들을 지켜 나가는 삶이 시작되고, 말씀이 삶이 되는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초를 튼튼히하고 견고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기초위에 세워진 교회가 진정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모세가 가장 많이 외친 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이 기초에 대한 외침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입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초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믿음은 곧 삼천포로 빠지는 것을 모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신명기 6장 6절부터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것은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시편 91편 14절 저자의 외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가 나를 간절히 사랑하니, 내가 그를 건져 주겠다. 그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를 높여 주겠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기초로 할 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되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본인의 기초를 언제나 하나님 사랑에 두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초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정의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해야만 진짜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정의로울 때 얼마나 그리스도인이 잔인해 지는지 역사를 통해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는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행하는 사랑은 자신의 만족과 의를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며, 한계가 있는 사랑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땅끝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 한 영혼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우리는 많은 믿음의 선배들과 선교사님들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네.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해야만 진짜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변화는 과학이나 문명의 발전을 통한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변화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자신이 기초로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고,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선택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그 방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아갈 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산이 많은 젊은이에게 자신이 생각한 기초였던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중요한 결정을 선택하라고 사랑스럽게 눈여겨보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시 처음부터 "너는 하나님 사랑이 부족하구나!너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아!" 라고 말해 주었으면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는 질문에 "넌, 하나님 사랑이 부족해!"라고 말한다면 그 젊은이는 근심하지 않고 화를 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핵심을 찔리면 화부터 나오는 습관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마주할 때 나오는 아픔을 화로 승화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오기를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 나 하나님 사랑이 부족하다! 부족해!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이런 인간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래서 사랑스럽게 눈여겨보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직 모르면 예수님께 가서 배우면 됩니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예수님께 가서 채우면 됩니다. 잘 이해할 수 없다면 예수님께 가서 질문하면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기초가 없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신앙의 기초가 무엇인지,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지 아직 헷갈리시는 분들께 오늘 본문은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사랑'을 깨닫기 위해 제자로 초청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아닌 우리가 가진 모든 기초를 버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다른 기초를 다 뜯어내야 합니다. 그것은 반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초이며, 반석입니다. 오늘도 그 기초를 배우고, 그 기초를 튼튼한 반석삼아, 진짜 '이웃사랑'으로 나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되는 귀한 주인공이 바로 당신이 되기를!
Jesus replied: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first and greatest commandment. <Mattew 22:37~38, NIV 2011>
Now all has been heard; here is the conclusion of the matter: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is is the duty of all mankind. <Ecclesiastes 12:13, NIV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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