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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
김영하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후 일 년 반 만에 펴낸 장편소설로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올해로 데뷔한 지 19년, 독보적인 스타일로 여전히 가장 젊은 작가라 불리는 저자의 이번 소설에서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잠언들, 돌발적인 유머와 위트, 마지막 결말의 반전까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모든 것들을 만나볼 수 있다.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해오다 25년 전에 은퇴한 연쇄살인범 김병수. 알츠하이머에 걸린 70세의 그가 벌이는 고독한 싸움을 통해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체험에 대한 기록과 함께 인생이 던진 농담에 맞서는 모습을 담아냈다. 잔잔한 일상에 파격과 도발을 불어넣어 딸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하는 그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삶과 죽음, 시간과 악에 대한 깊은 통찰을 풀어놓는다.
과거의 기억을 줄곧 회상하지만 서서히 잃어가는 현재의 기억을 수시로 까먹는, 중증 알츠하이머병(치매의 원인 중 가장 흔한 질병으로 기억장애, 視空間(시공간) 기능장애 등의 다양한 인지기능의 장애와 이로 인하여 개인이나 사회생활의 제약을 가져오게 되는 질환)을 앓고 있는 어느 살인자 노인의 회고록 같은 이야기는, 삶을 관조하듯 ‘치매’ 소재를 익숙하게 차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치매가 살인자에게 덧씌워지면서 공포로 돌변하고 기록된다. 사람을 죽였지만 죽인지를 모른다. 살인마의 과거 기록은 줄곧 반추되고 전력을 과시하지만, 서서히 잃어가는 기억 속에서 현재의 삶마저도 갈아먹는 층위의 구조로 변하며 스릴러의 면모까지 갖춘다.
과거 친부를 죽인 열여섯 살부터 마흔다섯이 될 때까지 수없이 살인을 하고 도취돼 있던 김병수는 일종의 ‘살인의 추억’을 안고 사는 살인마다. 하지만 20여년이 흘러 70살 노인이 된 그는 살인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회한을 곱씹으며 편안히 여생을 즐길 법한 초로의 이 남자에게 찾아든 알츠하이머병은 그간의 인생을 전복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기억장애’에서 더 나아가 ‘기억의 죽음’이라 일컫는 병 앞에선 장사가 없다. 무섭도록 바로 전에 일과 행동까지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인은 그래서 적기 시작했다. 메모에서 시작해 일지를 기록하고 나중에 녹음기까지 갖추고 일상을 담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기억은 점차 잃어가고, 주변의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와 행동은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았다.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른 채..
그 옛날, 은희의 어머니를 죽인 죄책감에 어린 은희를 거두고 양녀로 키웠다. 그렇다고 애정이 돈독한 부녀지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알츠하이머병 수발을 자처하는 모습에 노인은 딸이 싫지는 않았다. 자기 고집이 세더라도. 그런데 딸 옆에 어느 한 놈이 나타나면서 노인은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동네에서 연이어 터진 연쇄살인 사건의 주범을 그로 인식하고 감시하기에 이른다. 딸이 그 놈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태로운 심경에 그를 처단키로 한 것. 과거 수많은 살인을 솜씨 좋게 저지른 전력을 다시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니었다. 과연 노인은 그를 처단하고 딸을 구했을까. 아니면 이 모든 건 기억의 몰락으로 인한 망상이었을까.
소설 '살기'가 독특하고 색다른 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표출 방식과 그 대상자에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적인 스토리와 알츠하이머를 앓는 가장도 연인도 아닌, 살인자 노인을 작중화자로 내세우며 인생의 회고록 같이 전개시킨다. 독특한 소재로 인해 김영하 작가 특유의 필체로 속도감 있게, 때론 시니컬하게 행간의 유머를 발산하며 노인의 인생사를 조망한다. 종국엔 우리네 삶과 죽음, 시간과 악에 대한 깊은 통찰까지 풀어놓는 재주 앞에 어느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추천한다.
“이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이다.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인생이 던진 악마적 농담. 두 겹의 악몽 혹은 두 겹의 감옥으로 이루어진, 웃을 수 없는 농담의 공포, 그것이 『살인자의 기억법』이 우리에게 건네는 악의적인 선물이다.“ - 권희철(문학평론가)
텍스트로 만난 ‘살인자의 기억법’은 짧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거나 짧지 않다. 단순히 기억을 잃어가는 한 노인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촌철살인의 대사와 인생의 잠언들이 풍경처럼 드리워져 있다. 짧은 텍스트임에도 문학적 사유는 '시'와 불경의 경구를 통해서 노인의 심경을 대변하고,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를 통해선 삶의 귀환과 역순을 말한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 비로소 우주의 먼지가 돼버린 노인의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기억의 몰락과 죽음이 가져다 준 노인의 인생 회한은, 결국 기억을 잃어간다는 자체가 섬뜩한 공포 자체로 다가오게 만든 것이다. 그의 살인의 추억은 유효한가. 과연 우리에게 추억이 배제되거나 첨가된 ‘기억’이란 무엇일까. 또 그것을 잃어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인생이 마냥 즐겁지만 않은, 이 책을 다시 들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