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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소설 창작 방법론.
1. 잘 읽어야 잘 쓴다.
이승우 | 2003-03-01
너무 당연해서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쓰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읽어야 한다. 잘 쓰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잘 읽어야 한다. 잘 쓰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잘 읽은 사람이다. 자기가 경험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100권도 모자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흔하게 본다. 우리는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 사람이 100권 이상 분량의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읽지 않고 살아 왔다면, 단 한 권도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이다.
경험이 없이도 쓸 수 있다. 그가 읽어 왔다면.
하지만 읽지 않고는 쓸 수 없다.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경험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읽기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환영할 만한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최소한 이 정도는 읽었어야 할 책들을 읽지 않았거나 아예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은 환영할 만한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읽지 않고, 읽는 건 무시하고 쓰기만 하겠다? 글쎄, 나는 믿지 않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아마 천재일 거다. 천재들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천재들이 어떻게 소설을 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쓰기가 특별한 재능을 타고 태어난 유별난 신분의 사람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니다. 예컨대 한 몇 개월 학원 다녀서 딸 수 있는 자격증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몇 개월 테크닉이나 배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소설쓰기가 테크닉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어떤 점에서는 따로 배울 테크닉 같은 게 없다는 것이다.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소설 창작 방법에 대한 모든 것은 소설 속에 들어 있다. 백 명의 작가에게 물어 보라. 당신은 소설 공부를 어떻게 했는가? 백 명 모두 소설을 통해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 소설 창작의 교과서가 따로 없다. 좋은 작품이 곧 교과서이다. 그러니까 소설 창작 방법론의 첫장은 읽기이다. 읽은 사람만이 쓴다. 잘 읽은 사람만이 잘 쓴다.
느리게 읽기
잘 읽는 방법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느리게 읽기이다. 속독의 유용성에 대한 코멘트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또 속독이 유용한 것도 사실이다.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고 더구나 정보의 확보가 곧 경쟁력인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정보를 얻거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독서일 때 이야기이다. 정보를 얻거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사람은 없다. 정보나 지식을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소득일 뿐이다. 백과사전이나 전문 서적을 읽는 편이 정보와 지식의 습득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은 하나마나한 소리이다.
느리게 읽기가 빨리 읽기보다 더 어렵다는 건 느리게 읽기를 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은 마치 오래 밥을 씹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고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의 페달을 아주 천천히 밟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다. 음식은 식도를 타고 넘어가려 하고,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고 자전거 페달을 느리게 밟다 보면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하루에 책을 여러 권씩 읽어내는 사람은 존경스럽지만, 만일 그 사람이 소설쓰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소설쓰기를 원하는 사람이 소설을 그렇게 읽는 것이라면, 그것은 백해무익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그다지 좋은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미 작가가 된 사람들 중에는 선배 작가들의 좋은 소설을 여러 번 베껴 썼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베껴 쓰기 자체에 무슨 마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느리게 읽기의 한 방법이기 때문에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꼼꼼하게 천천히,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심지어 문장 부호 하나에 집중하는 책읽기. 단어와 문장, 심지어 문장 부호 하나하나의 쓰임새를 음미하는 책읽기. 소설쓰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소설을 아주 천천히 꼼꼼하게 읽고 있는 사람은 이미 소설쓰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생략한 사람은 지금 무언가를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소설쓰기를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다.
2.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2003년 4월 1일.)
할 말이 있는 사람이 마이크를 잡는다. 할 말이 없는 사람은 마이크를 잡을 이유가 없거니와 실은 잡아서도 안 된다. 할 말이 없는 사람의 마이크는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세상과 인간에 대해, 세상과 인간을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한다는 것이다. 할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말을 할 욕구를 느끼지 않고, 따라서 소설을 쓰지 않는다.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근원적으로 소설가는 자발적인 이야기꾼이다. 누군가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기 때문에, 남들이 듣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할 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소설가가 된다. 어떤 작가는 한 편의 소설을 쓰고 나서, 바로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소설을 쓰려는 욕구를 느끼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불만과 의혹, 욕망과 의도가 말을 만들고 소설을 쓰게 한다. 이청준은 그것을 복수심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지배와 해방-언어사회학서설3).
소설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이론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거울은 사물을 비추되
거울 자신의 욕망과 의도에 따라 비춘다. 욕망도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은 거울은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다. 그럴 의욕이 없기 때문이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거울이 이 세상에 대해 불만과 의혹, 욕망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소설은, 어떻게 말하든 소설을 쓰는 사람의 세계 해석이고, 그 해석의 뿌리는 그의 욕망과 의도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겠다고 하면서 무얼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쓸 것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을 느낄까? 그저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러면 그는 왜 소설가가 되고 싶을까? 소설가가 무슨 대단한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라는 건 다 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소설을 쓰겠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말이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소설을 쓰기 때문에, 쓰는 동안 소설가로 불리우는 것이다. 무얼 쓸지 모르겠는 사람은 쓸 것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무얼 써야 할지 모르면서 무언가를 쓰는 것은 할 말도 없으면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것과 같아서 당사자와 주변을 짜증나게 하기 쉽다.
우선 하려고 하는 말은 절실한 것이어야 한다. 적어도 누군가 들어 주기를 기대한다면, 그런 요청이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크기나 무게가 아니라 깊이이다. 말을 하는(소설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말하려는(쓰려는) 내용을 얼마나 핍절하고 간절하게 여기고 있는가이다. 자기 자신도 절실하지 않은 이야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에 귀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그러기 전에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내용에 성의가 더해지기 어렵고 그러다 보면 제 꼴을 갖춰 풀려나갈 가능성도 없다고 해야겠다.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절실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다는 아니지만, 그것의 한 처소는 기억이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퇴적이 아니고 편집된 과거이다. 편집의 과정에는 잘라내기와 붙여쓰기와 축소와 과장과
오려붙이기가 포함되어 있다. 치명적인 기억은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고 잘라내졌을 수도 있다. 때로는 드러내기가 두려울 수도 있다. 그것은 말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말할 때, 소설로 쓸 때 신중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또한 하려고 하는 말은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소설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이다. 이미지가 아니라 물질이다. 아무리 고상한 사상이나 관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구체를 얻지 못 한다면 소설이 되기 어렵다. 이미지는 시로 족하고 사상은 철학을 만족시킨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들, 이미지나 사상,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혼에 다름 아닌 그것들에 실체를 부여하는 육화(肉化)의 과정이다. 막연한 것, 추상적인 것, 모호한 것,
자기 자신도 아직은 무언지 확실하지 않은 것, 그런 것을 가지고 소설을 시작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써나가다 보면, 지금은 모호하고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모양인가가 만들어지겠지, 어떻게 되겠지, 하고 기대하지 말라. 어떻게 되지 않는다.
3. 발상에서 소설이 태어난다. (2003년 5월 1일.)
나무는 씨앗에서 태어난다. 식물의 씨앗 속에는 뿌리와 줄기와 잎이, 가능성의 형태로 이미 들어 있다. 씨앗 속의 뿌리가 나무의 뿌리가 되고 씨앗 속의 줄기가 나무의 줄기가 되고 씨앗 속의 잎이 나무의 잎이 된다. 소나무는 소나무 씨에서 나왔기 때문에 소나무이고 잣나무는 잣나무 씨에서 나왔기 때문에 잣나무일 수밖에 없다.
씨는 미래의 나무를 품고 있다. 겨자 씨를 뿌려 놓고 야자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야자수 씨에서 겨자가 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자연의 법칙은 그렇게 막무가내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발상은 소설의 씨앗이다. 씨앗이 미래의 나무를 품고 있는 것처럼 발상은 한 편의, 훌륭하거나 시원찮은 작품을 품고 있다. 소설 창작이 자연 법칙에 충실하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연 법칙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일기조차도 제 스스로 쓰지 못 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날 경험했던 일 가운데 인상적인 것을 선택해서 쓰는 것이 일기이다. 그런데 무얼 써야 할지 몰라서 자기 엄마에게 물어 보는 아이들이 꽤 많다고 한다. 아이 엄마가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잖느냐, 그걸 써라, 하고 알려 주면
아, 그래, 그걸 써야지, 한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쓸거리를 제공해 주는 그 자상한 어머니의 태도는 바람직한 것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글쓰기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치명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찾고 궁리하고 선택하는 것부터가 글쓰기이다. 아니, 그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글의 성격과 수준과 성향의 상당 부분이 이 단계, 즉 발상의 단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발상이 차지하는 비중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일기는 아이의 일기가 아니라 아이 엄마의 것이다.
이걸 소설로 쓴다면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소중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 세상에 씌어진 모든 좋은 소설들의 작가는 그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이 세상에 씌어지지 않았거나 씌어졌으되 시원찮은 모든 소설들의 작가는 그 순간을 소중하게 포착하지 못 했거나
아직 그런 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물론 과장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순전한 과장만은 아니다. 나무를 품고 있지 않은 씨는 없다. 정해진 발상법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모티프를 찾는 방법이 다르고, 또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쓴 모든 작품의 발상법이 다 똑같으란 법도 없다.
책을 읽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르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이걸 써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행에서 겪은 어떤 일이 모티프를 제공하기도 하고, 신문 한 귀퉁이에서 읽은 어떤 기사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중에, 혹은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는 중에 그럴 듯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다. 화장실에서, 만원 버스 속에서, 심지어는 꿈에서 깨어난 직후에 그런 단서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의 머리 속으로는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매우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은 붙잡아 두지 않으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감처럼 떠오른 것들은 또 그만큼 쉽게 잊혀지기도 한다. 뭔가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올라서 흡족해했다가 나중에 그걸 되살려 보려고 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속상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나 자료를 메모해 두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다. 주변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다 소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을 썼다고 해서 다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그러나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착상의 단서를 잡아내는 일이다. 거미줄을 친 거미만이 잠자리를 잡는다. 사물과 현상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지속적인 독서와 사유(나는 그것을 문학적 자장이라고 표현하는데)를 유지하는 사람이 소설의 씨앗을 찾아낸다. 세상의 모든 일이 만만하지 않은 것처럼 소설 역시 만만하지 않다. 좋은 소설을 얻기 위해서는 소설의 자장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자장 안에서 놀아야 한다.
20년 동안 소설을 써 온 작가도 좀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고 있으면 소설 쓰기가 어려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걸 잘 만지면 소설이 되겠구나 싶은 착상이 잘 떠올라 주지 않아 버린다. 그럴 때는 기분이 참담해진다. 그런 참담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소설을 생각하고 소설 쓰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소설을 쓰다 보면, 쓰고 있는 동안 또 다른 발상들이 나를 찾아온다. 소설 쓰기를 계속하는 한 소설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4. 소설을 다 써 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밑그림을 그려라. (2003년 6월 1일.)
「파인딩 포레스터」라는 영화에는 두 명의 소설 천재가 등장한다. 세상을 등진 채 고층 아파트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괴짜 소설가 윌리엄 포레스터와 그를 만나 잠재되어 있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16세의 흑인 고등학생 자말 월라스가 그들이다. 포레스터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타자기를 두드리라고 권한다. 생각하지 말고 의식하지 말고 내면의 충동에 따르라고, 춤추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충고한다. 자말은 포레스터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리고 천재를 증명한다.
이 영화는, 은연중에 소설 천재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고, 천재가 아닌(예컨대 내면의 충동에 따라 춤추듯이 자판을 두드린다는 걸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 한) 많은 성실한 문학 청년들을 절망하게 한다. 영화에 나오는 그와 같은 방법은 아마도 소설 천재들의 글쓰기 방법인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소설에 신동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 했다. 다섯 살 때 작곡을 했다는 음악가도 있고 열 살도 되기 전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다는 수학자도 있다. 그러나 열 몇 살에 걸작을 쓴 소설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 했다. 소설은 신동이 없는, 있을 수 없는 장르이다. 소설은 풍부한 체험과 깊은 사유와 신선한 상상력이 조화롭게 섞여 이루는 하나의 몸이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술의 습득만도 아니다. 삶이, 삶에의 두껍고 깊은 참여가 소설을 만든다.
우연에 기대고 영감에 의존하는 소설쓰기에 대한 환상은, 당신이 천재가 아니라면, 갖지 않는 것이 좋다. 가끔씩은 그야말로 우연히 그럴듯한 영감이 떠올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대개 영감은 단편적인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소설이란 지속적이고 입체적인 사건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영감과 우연, 또는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어떤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내 소설이 어디로 갈지 나도 모른다. 일단 이미지가 떠오르면 첫 줄을 쓴다. 그리고 영감에 맡긴다. 참 멋있게 들리는 말이다. 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 보면, 이 말은 마치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왜냐하면 할 필요가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가 섬기는 신이 할 말을 그의 입에 넣어 줄 테니까) 설교대에 오른다는 신비주의적 종교인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이걸 쓰면 소설이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걸 붙잡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막연한 생각을, 어떤 형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는 일이다. 소설가는 신비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궁리하고 추리해야 한다. 소설은 막연한 생각이나 실체가 없는 이미지가 아니라 정교한 조형물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정교한 조형물을 쌓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막무가내로 대들겠는가.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필요하다. 설계도는 축소되어 있지만 생략되어 있지는 않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도 역시 설계도가 필요하다. 소설의 설계도도 역시 축소되어 있을지 몰라도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그 역시 천재겠지만, 그렇게 하면 영감을 방해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감은 치밀한 설계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밑그림을 잘 그려 놓았을 때 영감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경험을 한다. 설교 준비를 치밀하게 열심히 한 사람의 입에 하나님이 더 좋은 말을 넣어 준다고 나는 믿는다.
쓰다가 중단한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설계도나 밑그림 없이, 자신의 재능이나 우연한 축복만을 기대하고 무작정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발상은 떠올라서 출발은 하고 보았지만, 어떤 길을 통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 한 상태이니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미리 알고 출발한 사람은 길을 잃어버릴 수가 없다. 나에게는 쓰다가 도중에 중단한 소설은 한 편도 없다. 다만 아직 쓰지 않은 소설들이 있을 뿐이다. 설계도를 만드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설계도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 더 많아야 한다. 말하자면, 소설을 다 써 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
5.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2003년 7월 1일)
쓰다가 만 소설,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소설, 수습이 안 된 채 끝나는 소설, 앞과 뒤가 사뭇 달라서 혼란스러운 소설들은 대개 밑그림 작업을 거치지 않고 집필된 소설들이다. 설계도 없이 지어진 건축물이 불안한 것처럼 이 작품들도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밑그림은 치밀하고 세밀할수록 좋다. 코가 엉성한 그물에는 작은 고기가 걸리지 않는다. 축소는 하되 생략해서는 안 된다. 가령 당신이 어떤 인물에 대해 밑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고려할 항목들이 얼마나 될까. 이름, 직업, 나이, 결혼 유무, 결혼했다면 자녀가 있는가 없는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독신주의자인가, 아닌가, 대학을 다녔는가, 안 다녔는가, 다녔다면 전공은 무엇인가, 운전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키와 몸무게, 시력, 고향, 부모들의 성향, 성격, 버릇, 외모상의 특징……. 할 수 있는 한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 생각해 두는 것이 좋다. 소설쓰기는 본질적으로 고상한 일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이다.
완성된 소설에 나올 내용을 미리 다 만들어야 하고, 완성된 소설 속에 나오지 않을 내용도
밑그림에는 들어 있어야 한다. 정작 작품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정밀한 구조물로서의 소설을 완성시키고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데 긴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한 인물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면서 몸무게와 키와 시력과 취미와 태어난 곳과 사는 동네와 자동차 운전 능력 여부 따위와 같은 자질구레한 내용들을 설정해 놓았다면,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직접 그런 내용이 서술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인물의 어떤 행동이나 그 행동을 하는 순간의 심리 상태를 그릴 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예컨대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의 움직임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움직임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밑그림은 치밀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어야 한다. 추상적인 밑그림은 작품을 추상적으로 만들거나 아예 작품을 완성하지 못 하게 한다. 소설가 전상국은 자신이 작성했던 밑그림 중에서 끝내 작품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소개하고 있다.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그리고 그 이유를 추상적, 관념적 발상과 막연한 아우트라인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예컨대 ‘명분을 위해 사는 삶, 요령주의, 권모술수, 한국적인 것의 파괴’ 같은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소설의 밑그림은 언제 누가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했다, 는 문장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생각으로는,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의 꼬리에 질문을 갖다 붙이는 끊임없는 질문의 연쇄를 통해 스스로 길을 터가는 방법. 하나의 질문은 하나의 대답을 만든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다시 다른 질문을 배출한다. 질문과 답의 되풀이가 일정한 회로를 만들면서 부분에서 전체로 확대되고, 마침내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한다.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다. 질문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교도소에 갇힌 수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고 하자. 어떤 죄수인가? 하는 질문이 곧바로 나온다.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세상이다. 교도소라고 다를 리 없다. 그 사람은 그곳에 왜 들어갔을까? 하고 물어야 한다. 살인을 했는가? 도둑질? 사기?……. 무슨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 답하는 순간 소설의 방향이 만들어진다. 그 범행이 우발적이었는가, 계획적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의해 다시 또 방향이 틀어진다. 그 사람이 살인범이라고 가정하자. 그는 누구를 죽였을까? 친척이거나 친구, 동업자이거나 애인, 혹은 아무 상관없는 행인이 희생자로 선택될 수 있다. 그 선택에 의해 소설은 한 번 더 방향을 튼다. 그리고 희생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다른 사연이 만들어질 것이다. 예컨대 살인의 동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어디서 죽였는가? 아파트일 수도 있고, 길거리일 수도 있고, 산 속일 수도 있다. 어떤 아파트-길-산인지가 나와야 하고, 왜 거기 갔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살인이 일어난 시간은? 새벽일 수도 있고, 밤일 수도 있고, 한낮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날씨가 흐렸을 수도 있고 비가 왔을 수도 있고 바람이 몹시 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죽였는가, 하는 질문도 많은 가능한 길들을 펼쳐 놓는다. 흉기를 썼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흉기를 미리 준비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흉기는 칼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칼이라면 어떤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고, 누구의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고, 어떻게 구한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다. 상대가 반항을 했는지의 여부도 물어야 할 것이고, 목격자가 있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그 목격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꼬마인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그 목격자가 진술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진술을 했다면 누구에게 유리하게 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질문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다른 질문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튀어나온다. 튀어나오는 질문들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대답이 멈추고, 소설도 멈춘다. 귀찮더라도 대답해 주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처음에는 윤곽도 잘 보이지 않던 그림들이 윤곽을 형성해가고, 선이 분명해지고, 선명한 부분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제 몸에 맞는 색깔이 칠해지고, 그리하여 하나의 큰 그림, 소설이 완성된다.
보르헤스의 소설 중에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비유하자면, 소설의 밑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을 만들며 미로의 정원을 완성하는 것이다. 소설은 미로의 정원과 같다. 肩寬?없으면 정원이 아니다. 밑그림은 정원에 미로를 만드는 작업이다
6.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 현실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 (2003-08-01)
흔히들 소설을 현실의 반영이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소설도 그 시대와 사회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것들이 그런 것처럼 소설 역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다.
소설을 씀으로써 작가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역사를 자연스럽게 그 안에 담는다. 물론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씌어진 소설도 있고, 미래의 특정한 시간을 배경으로 하여 씌어진 소설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에 그려진 과거와 미래 역시, 엄밀히 말하면 현재의 시간과 공간(작가의 현재의 세계관)이 투사된 것에 다름 아니다.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 속에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소설 속에 현실을 담는다. 현실을 그리기 위해 소설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 소설쓰기를 통해 현실을 그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현실은 어떻게 소설이 되는 것일까.
우선 인정해야 할 진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옮겨 적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실을 찾고 옮겨 적는 작업은 역사가들이 한다. 우리는 역사가들의 저술을 통해 지나간 시간의 ‘현실’들과 만난다. 우리가 의자왕에 대해 알고,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알고, 6. 25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역사가들의 사실 그리기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왕,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 우리가 알고 있는 6. 25 전쟁은 실제 있었던 사실들의 전부일까? 그럴 리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또한 안다.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루에 겪은 모든 일을 그대로 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특정한 공간에 있는 사물들을 그대로 베끼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소설을 통해 현실 전부를 있는 그대로, 일어난 사건 그대로 모조리, 충실하게 그려내겠다는 욕심이 불가능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설을 통해 현실을 그린다고 할 때 그 현실은 어떤 현실일까. 필요한 것은 경험의 충실한 베끼기가 아니라 그것의 적절한 가공이다. 가공하지 않은 재료는, 그 재료가 아무리 그럴 듯하다고 하더라도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예술이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자연이지 예술은 아니다.
우리가 소설을 통해 반영하는 현실은, 우리가 ‘보는’ 현실이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의식이 동반된 정신 활동이다. 귀 있는 자가 듣는 것처럼, 눈 있는 자가 본다. 누구도 자기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쓸 수 없다. 무엇이 보이느냐(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글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상파들을 기억할 일이다. 그들은 자연, 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일의 불가능함을 포착한 이들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을 탄생시킨 것은 사진기와 휴대용 물감이었다고 한다. 휴대용 물감이 생기면서 비로소 그림 도구들을 가지고 야외로 나갈 수 있었던 그들의 눈에 비친 자연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보면 어느새 풍경의 색깔이 바뀌어져 있는 경험을 했을 것이고, 그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카메라가 순간의 빛을 포착하는 것처럼 한 순간의 인상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요컨대 사물에 고정된 불변의 모양과 색깔이 없다는 것. 있는 대로가 아니라 보는 대로 존재한다는 것.
현실을 ‘있는 대로’ 베끼지 말고 ‘보는 대로’ 가공해야 한다. 현실 경험을 가공하지 않고 충실히 옮겨 적으려는 작가의 욕구가 장황하고 진부하고 지루한 소설을 만든다. 생각해 보라. 그 작가는 왜 모조리 다 쓰려고 하는 것일까. 자기만 따로 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본 것이 없기 때문에 있는 대로 쓰려고 하고,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차별화된 시선에 의해 ‘있는’ 현실의 어떤 것은 배제되고 어떤 것은 선택된다.
가을에 대해 쓸 때, 가을의 모든 재료들을 다 동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에 따라, 주제에 따라, 필요한 것만 취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가령 가을을 감사와 접목시키는 경우와 고독, 또는 독서에 연결시킬 때 취사 선택될 수 있는 재료들이 같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다 쓰려고 하지 말고 필요한 것만 써야 한다. 어차피 다 쓸 수도 없는 일이다. 현실을 ‘있는 대로’ 베끼지 말고 ‘보는 대로’ 가공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이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무의미하기도 하다.
소설의 재료인 이 납작한 문자 매체를 가지고는 사물이나 사건 현장을 눈 앞에서 보는 것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독자들의 관심 역시 그런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문학의 문장은, 실용문과 달라서 정보의 직접적이고 빠른 전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문학은 간접적이고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 할 수 있는 한 소통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이다. 호수는, 내 마음의 상태를 은유한다. 호수라는 우회로를 통해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이 지연 효과가 사용 설명서나 신문 기사와 똑같은 문자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 문장들을 문학으로 만든다. 은유가 없으면 문학이 없다.
창세기의 신은 흙으로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 흙은 사람이 되었다. 흙은 재료이다. 일상과 현실도 재료이다. 흙이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 순간에도 아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일상과 현실 역시 비록 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아직 소설이 아니다. 흙이 사람이 되기 위해 신의 숨결이 필요했던 것처럼, 일상이나 현실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도 은유, 또는 환상이 필요하다. 일상이나 현실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은유나 환상. 그런 것들에 의해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어서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우리들의 일상은 돌연 낯설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은 소설이라는 걸 썼다고 할 수 있다.
7. 육화의 방식 - 이야기와 인물. (2003-09-01)
소설이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말은, 물론 맞는 말이지만, 소설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소설은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야기이다. 이야기 없이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떤 빛나는 감각이나 어떤 심오한 사유도 이야기를 통하지 않고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갖지 않은 어떤 심오함, 어떤 고상함도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심오함이나 고상함이 소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들이 이야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무슨 수로 소설과 상관한단 말인가.
이야기는 소설의 육체다. 형체가 없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볼 수가 없다. 추상은 구체를 통해서만 인식되고 관념은 형상을 통해서만 식별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른바 형상화, 형체가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눈에 보이도록 형체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관념을 눈에 보이도록...관념이 먼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가 인카네이션(incar-nation), 즉 육화이다. 영(靈)인,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만져질 수 있도록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왔다는 사상이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온 하나님, 즉 예수를 통해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이 교리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카네이션의 작업이다. 육화. 관념에 육체 입히기. 여기서 육체는 이야기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관념이 어떻게 소설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은 관념이다. 이것은 영과 같아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머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 명제는, 온갖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실체를 획득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그림이고, 주장이 아니라 이야기여야 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하는 주장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보여 주는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육체를 이루는 것은 살과 피와 신경과 뼈들이다. 이야기라는 육체를 만드는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이다. 시간과 공간(상황) 위에서 인물들이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이야기를 산출한다. 아니, 이 움직임이 곧 이야기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다. 공간은 인물에게 처소를 제공하고, 시간은 인물에게 움직임을 제공한다. 시간이 만물을 움직이게 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정지한다. 당연히 이야기도 멈춘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시간이라는 동력을 필요로 한다.
마땅한 공간과 시간의 배치는 이야기의 활력을 위해 중요하다. 이야기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무대로 했을 때와 도시의 지하철 안을 무대로 했을 때 이야기의 방향이 같을 수 없다. 조선 시대를 택했을 때와 현대를 택했을 때, 새벽과 한낮, 겨울과 여름, 눈오는 날과 비가 오는 날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은 이야기의 방향을 상당 부분 결정해 버린다.
이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소설은 인물이다, 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야기는 시간이나 공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소설 창작을 위해 밑그림을 그릴 때, 가장 많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인물 설정이다. 시간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 독창적인 소설 속의 인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령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데미안』의 데미안, 『적과 흑』의 쥘리앵……. 인물이 이야기를 주도한다. 인물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소설 세계를 펼친다. 인물은, 많은 경우에, 작가의 대리인이다.
인물이 곧 작가 자신은 아니지만,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인물 속에 들어가거나 인물 뒤에 숨거나, 혹은 인물을 방치하거나 경멸하거나 함으로써,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드러낸다. 그 드러내기의 방식이 교묘해서 잘 눈치채지 못 할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인물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유념할 것은 전형적인 인물과 개성적인 인물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우선 특정한 집단이나 신분의 유형화된 성격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교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나 학교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나 몸을 파는 여자들에게는 각각의 특징적인 성향이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들의 몸에 밴 습관이나 태도,
가치관 같은 것을 고려해야 하고, 이 경우 소설은 현실의 인물을 반영하는 쪽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군인이라고 해서 다 똑같다고 할 수 없고, 이 세상의 모든 초등학교 교사가 모두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몸을 파는 모든 여자가 동일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은 집단의 일원이지만, 그러나 또 독립된 우주이다. 인물의 개체적 특성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인물, 요컨대 성격의 창조라는 과제에 도전하게 만든다.
또한 소설 속에 그려지는 인물은 한 작품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인물이 평면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은 인물을 움직이게 만들고, 인물의 태도와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따라서 인물은 시간과 함께 이동한다. 하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이 납득할 만한 근거 없이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든가, 돼지고기를 싫어하던 사람이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는다고 나온다든가, 소박하고 단순한 성격으로 설정된 사람이 온갖 장신구를 다 갖추고 나타난다면 독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정된 조건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운명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9남매의 막내인 열두 살짜리 초등학교 여자아이를 묘사할 때 당신은 그 아이가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의 말을 하게 해야 하고, 그 아이의 조건과 환경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해야 한다.
인물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은 생김새나 신체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다. 눈이 어떻다든지, 코가 어떻게 생겼다든지, 입술이 어떤 모양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신체의 특징적인 부분을 묘사함으로써 그 인물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다. 이 방법은 좀 지루하고 고루하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하다. 말버릇이나 특징적인 몸짓, 또는 습관을 이용하여 성격을 드러내는 방법도 좋다.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 소개하는 방법도 괜찮다. 사건에 반응하는 그만의 개성적인 태도를 보여 줌으로써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더 좋다.
권하고 싶은 한 가지 방법은 주변에서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을 선택하여 소설 속에 이용하는 것이다. 가상의 인물을 막연하게 설정하고 써나가다 보면, 그 인물의 성격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명쾌한 서술이 어려워지고, 일관성 유지가 힘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가 잘 아는 실제 인물을 염두에 두고 쓰면, 그 인물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그 사람을 떠올리면 되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피할 수 있다. 데뷔작을 쓸 때, 나는 내 은사 가운데 한 분을 거의 그대로 베껴서 한 인물을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교적 선명하고 일관성있는 인물 만들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8. 누구에게 말하게 할 것인가 - 화자의 문제. (2003-10-01)
다음 질문에 대답해 보라. 목포가 가까운가, 수원이 가까운가. 대답할 수 있는가? 목포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고 수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다고 답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목포라고 대답한 사람은 왜 목포가 수원보다 가깝다고 생각한 것일까? 수원이라고 답한 사람은? 그것은 그가 서 있는 위치 때문이다.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예컨대 광주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목포는 수원보다 가깝다. 그러나 서울이나 인천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수원이 목포보다 가깝다. 기준은 언제나 그가 서 있는 자리이다.
다시,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여기에 방이 있고 문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 방 안쪽에서 방 바깥쪽으로 움직인다. 그럴 때 그는 (방에서 밖으로) 걸어나오는가, 걸어나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당신(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당신이 방 안에 있다면 ‘그가 걸어나간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방 밖에 있다면 ‘그가 걸어나온다’고 말할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언제나 기준이다. 그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사실을 전해 주는 사람(말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이다. 그러니까 움직이는 사람이 있고, 그가 움직이는 걸 본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인물)가 어떻게 움직였는지(사건)를 직접 본 것이 아니고, 그걸 직접 보고 전해 주는 사람(화자)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말하자면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를 통해 말해진 이야기이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허구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통해 서술된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그것을 기술하는 자의 역사이다. 사건의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싸움을 했다. 우리가 그 싸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그 싸움을 목격한 사람의 서술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그것은 전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된 싸움이지 싸움의 본질은 아니다. 아니, 싸움의 본질이 있는가? 그런 건 없다. 열 명의 화자는 열 개의 싸움을 기술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된 싸움이다. 말하는 사람은 사건을 전하면서 은밀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의도를 집어넣는다. 말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되지 않은 사건이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건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건과 함께 그 사건을 옮기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도 함께 듣는 셈이다. 이것이 소설이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지만,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말해진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려고 할 때, 그러니까 허구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할 때, 먼저 상정해야 하는 것은 누구의 입을 빌려 말할 것인가, 이다. 물론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작가이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는 직접 말하는 대신 누군가를 내세워 말하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 숨는다. 작가는 작품 밖에 있다. 작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독자 역시 작품 밖에 있다. 작품 안에서, 작가를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가 화자이다. 자, 그러니 결정하여야 한다. 누구에게 말하게 할 것인가. 그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일 수도 있고, 사건에 참여하지 않은, 사건 밖의 존재일 수도 있다. 원칙은 없다. 준비된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화자를 선택하면 된다.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등장 인물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을 화자로 선택할 때, 소설은 1인칭 시점이 된다. ‘나는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고 하자. 여기서 ‘나’는 작가가 아니고, 작가가 만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작가는 자기가 만든 이야기 속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주인공이거나 주변 인물인)을 택해 이야기를 대신 하게 한다. 1인칭 시점은 인물-화자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하다. 반면에 이야기가 ‘나’의 조건과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가령 전라도 출신의, 공부는 잘 못 하고 노래는 잘 하는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1인칭 화자로 설정했을 때, 소설은 그 아이의 조건과 능력을 벗어난 이야기를 전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규칙이다. 1인칭 시점은 화자로 선택된 인물의 내면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과 화자의 처지와 조건에 제한된다는 약점을 동시에 지니는 시점이다.
화자가 사건 밖에 있다는 것은, 등장 인물로서 사건 속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 밖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이라고 쓸 수 없다.
화자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 또는 그녀라고 호칭한다. 3인칭 시점이다. 3인칭 시점을 택했을 때, 작가는 화자에게 신적인 전지전능을 부여할 수 있다. 말 그대로이다. 화자는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인물들에 대해서든 사건의 진행에 대해서든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없고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지만, 모든 인물들을 공평하게 취급해야 하는 이 시점의 특성상 내면의 깊이를 그리는 데는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가의 지나친 개입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킬 수도 있다.
화자가 이야기 바깥에 있되, 신적인 전지전능을 갖는 대신 특정한 인물의 안에 들어가는 시점을 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작가는 한 인물의 입장이 되어 그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만을 들려 주게 된다. 효과는 등장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내세운 1인칭 시점과 거의 유사하다. 누구에게 말을 하게 할 것인가는 작가의 선택이다. 각각 장점이 있고 단점도 있다.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그 이야기를 구상한 사람의 몫이다. 작가는 작품 바깥에 있고, 작품에 우선한다.
9. 어울리지 않는 장식은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좋은 문장의 조건(2003-11-01)
소설은 이야기이고, 그러나 이야기만은 아니고, 세계에 대한 작가의 입장, 즉 세계관이 들어가야 하고,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 속에 적절하게 용해되어야 하고, 그래서 마치 추어탕 속의 미꾸라지가 그렇듯 이야기에 완전히 녹아들어 작가의 생각이나 의도가 보이지 않아야 하고, 독자는 다만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전달받아야 한다. 이야기는 관념을 품어야 하고, 관념은 이야기를 향해 열려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재미있는 이야기든 심오한 생각이든 작가는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고 독자는 그것을 어떻게 전달받는가?
여기에 ‘자유’라는 제목을 단 조각이 하나 있다고 하자. 학생모 차림의 젊은 청년들이 깃발을 들고 함성을 지르고 있다고 하자. 이 조각 작품 역시 작가의 어떤 생각과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재료는 돌이거나 청동이다. 조각가는 돌이나 청동을 잘 다루어야 한다. 표현하려고 하는 관념이 훌륭하고 형상이 근사하다고 해서 좋은 조각품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 훌륭한 관념, 그 근사한 형상이 돌이나 청동에 잘 표현되었을 때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 돌이나 청동을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소설의 재료는 언어이고 문장이다. 어떤 고상한 생각이나 어떤 근사한 이야기가 좋은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 조각가가 돌이나 청동을 잘 다루어야 하는 것처럼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문장을 잘 다루어야 한다. 문장은 소설의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다. 소설의 기본을 이루는 것도 문장이고, 소설을 완성시키는 것도 문장이다. 소설이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를 가늠하는 첫 번째 기준이 문장이고, 소설의 격과 차원을 운위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마지막 기준도 문장이다.
소설을 쓸 때 우리가 이용하는 문장의 양식은 대체로 서사와 묘사이다. 더러 설명을 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논증을 써먹기도 하지만 그러나 소설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와 묘사이다. 서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글이다. 묘사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글이다.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기술하고, 묘사는 공간의 양상을 기술한다. 서사는 시간적인 글쓰기이고 묘사는 공간적인 글쓰기이다. 서사는 움직임이나 행동에 대해 말해 주고,
묘사는 모양이나 양상에 대해 그림을 그려 보여 준다. 서사는 동사를 필요로 하고 묘사는 형용사를 필요로 한다. 작가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묘사 위주의 소설을 쓰거나 서사 위주의 소설을 쓰기는 하지만 묘사만으로 된 소설, 서사만으로 된 소설은 없다. 묘사만으로 일관된 글은 실감을 자아내지만 지루해지기 쉽고, 묘사가 빠진 채 서사만으로 씌어진 글은 속도감을 주는 대신 스토리 위주라는 인상을 줄 가능성이 높다.
묘사와 서사, 대화와 설명이 서로 섞여서 소설의 문장을 이룬다. 심지어는 한 문장 안에 이 요소들이 한꺼번에 들어가기도 하다. 따라서 묘사냐 서사냐를 따지고 신경 쓰고 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따지고 신경 써야 할 일은 좋은 문장을 쓰는 일이다.
좋은 문장의 첫 번째 조건은 정확성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문법적으로 정확해야 하고 논리적으로 정확해야 한다. 올바른 어휘를 구사해야 하고 주술 관계를 올바르게 써야 하고 문장 성분들을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부정확하여 의미의 혼동을 야기해서도 안 된다. 흔히 문법학자는 문법을 만들고 문학가는 문법을 파괴한다고 하는데, 완전히 옳은 말은 아니다. 문학가라고 해서 문법에 맞지도 않는 얼토당토않은 문장을 함부로 쓰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문법으로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전하는 데 한계를 느낄 때 어쩔 수 없이 기존의 문법에 없는 문장을 사용한다는 뜻이지 문법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법은 글을 쓰는 이가 걸어가는 길이다. 문법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문법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다 걸어 보고 그 끝에 이른 사람일 것이다. 장식적인 문장, 표현의 효과를 의식한 문장은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다음 조건이다. 정확한 문장만을 구사하다 보면 자칫 글이 건조해지기 쉽다. 소설 문장이 다른 문장과 다른 것은 단순한 의사 소통 수단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설명하는 글이나 설득하는 글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의사를 분명히 알리면 그만이다. 사실의 정확한 전달과 의사의 빠른 소통이 유일한 목적이므로 되도록 직접적이고 분명한 어휘와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정확한 전달과 빠른 소통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길을 열 걸음에 가기도 하고, 한 마디면 될 말을 여러 마디 말로 나누어 전하기도 한다. 간접적인 어휘들, 우회하는 표현들, 상징적인 장치의 도입 등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애매 모호하거나 막연한 문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애매 모호한 문장이라는 것은 담고 있는 의미, 즉 내포가 흐리멍덩해서 그 문장이 지시하는 바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문장을 말한다. 막연한 문장이라는 것은 담고 있는 의미, 즉 내포가 지나치게 넓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은유적인 문장은 의미의 전달을 지연시키긴 하지만 의미의 전달을 방해하는 문장은 아니다.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 하는 장식으로서의 문장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문맥이 잡히지 않는 문장,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문장, 문법적으로 틀리고 논리적으로도 오류인 문장, 아예 문장이 되지 않는 문장을 장식적인 표현으로 가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장식은 하지 않은 것만 못 하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고 표현의 효과를 높이는 문장을 쓸 줄 안다면 이제 필요한 일은 자기만의 문장을 갖는 것이다. 소설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발상이고 남다른 시각이고 자기만의 문장을 구사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소홀하게 다뤄질 수 없다.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창조 행위는 새로움과 변별성을 요구한다. 누구나 하는 말을 누구나 하는 방식으로 늘어놓는 문장에 이끌릴 리 없다. 평범하고 상투적인 표현을 무엇보다 경계해야 한다. 몇 줄만 읽어 보아도 누구 소설인지 금방 알아 맞출 수 있는 작가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독특한 자기 목소리를 문장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기 문체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문체는 글을 쓰는 이의 개성과 체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문체를 선택할 것인가. 문체 사이에 옳음과 그름, 우월함과 열등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적합한 문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의 체질과 개성에 맞는 문장을 개발하는 일이 문장 훈련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10. 강을 건너는 이야기를 써라 (2003-12-01)
흔히 소설은 유기체에 비유된다. 소설이 유기체라는 것은, 여러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조직이라는 뜻이다. 조직은 모임이고, 모임이되 질서 정연한 모임이다. 소설 창작에서 가공과 조작이 필연적인 것은 그런 이유이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소설도 인공이다. 아름다운 산천 앞에 서서 사람들은 더러 ‘예술이다!’라고 감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연은 예술이 아니다. 자연이 예술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가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누가 작품이라고 말하겠는가. 신의 작품이라면 혹시 몰라도 사람의 작품은 아니다. 사람은 자연을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인공이다. 따라서 이야기들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삽화들은 인과 관계에 따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체가 그런 것처럼,
소설의 육체 또한 그래야 한다. 아니, 소설이 하나의 육체이다. 그 과정에서 현장감이라고 할 만한 효과가 생겨난다.
소설을 쓰는 것은 길찾기와 같다.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은 약도(밑그림)를 가지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모험에 다름 아니다. 당신이 숲을 떠나 성에 간다고 가정해 보자. 숲은 이쪽이고 성은 저쪽이다. 숲은 당신이 지금 있는 곳(현실)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성은 당신이 가야할 곳(목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데 숲과 성 사이에 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강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강은 지금 당신이 있는 곳도 아니고, 당신이 가야 할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곳과 저곳이다. 그러나 당신은 강을 무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곳과 저곳 사이에 강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성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지 않고 성에 이를 수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은, 비록 강이 당신의 중요한 관심 사항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강을 향해 걸음을 내딛도록 유도한다.
소설을 쓸 때 조급한 사람들은 자기가 정해 놓은 목적지만을 향해 한 눈 팔지 않고 내달리려고 한다.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자기가 하려고 하는 중요한 이야기에 비해 시시하고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을 거치지 않고 숲에서 곧장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격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강을 지나지 않고 성에 다다를 수 없는 것처럼 과정을 무시하고 결말에 이를 수도 없다. 숲과 성만 써서는 안 된다. 강을 건너는 이야기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어떤 찻집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소설로 쓴다고 하자. 당신의 관심은 그 특별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 특별한 사건은 당신의 소설에서 아주 중요하다. 당신은 그 사건을 통해서 중요한 진실, 혹은 심오한 사상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럴 때 당신이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당신의 소설 속의 인물이 그 찻집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먼저 그곳에 가야 한다. 그러니까 그가 그곳에 어떻게 왜 갔는가를 먼저 써야 한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 갔을 수도 있고 차를 마시기 위해 갔을 수도 있고,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갔을 수도 있다. 그가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변심한 애인일 수도 있고, 20년 만에 만나는 스승일 수도 있고,
빚쟁이일 수도 있다. 그가 그곳에 차를 마시러 간 것은 그 집의 차 맛이 유난히 좋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찻집에서만 내는 특별한 차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가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그 찻집에 들어갔다면, 그 이유는 자기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일 수 있고, 꼭 봐야 할 프로그램이 바로 그 시간에 방송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혼자 갔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어울려 갔을 수도 있다. 가자마자 사건을 목격했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차를 마시다가 그랬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건 당신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신은 훨씬 중요하고 훌륭한 그 특별한 사건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것에 비교할 때 그런 것 따위 뭘 하러 갔느냐, 누구랑 갔느냐, 가서 뭘 하고 있었느냐는 시시하고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시하고 하찮더라도, 그것이 바로 강이다. 당신이 그 특별한 사건(성)에 이르기 위해 건너야 할 강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되면 몸을 적시게 된다는 사실도 함께 유념해야 한다. 몸에 물을 묻히지 않고 강을 건널 수는 없다. 몸에 묻은 물이야말로 강을 건넜다는 증거이다. 당신은 몸에 물을 묻힘으로써만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혹시 당신은 몸에 물을 묻히지 않고 강을 건너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가령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틀린 생각이다. 그 경우에 강을 건넌 것은 비행기나 배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다만 비행기나 배에 타고 있었을 뿐이다. 몸으로 건너야 한다. 발이 젖고 머리가 젖고 입 속으로 물이 들어갈 때 비로소 강을 건넜다고 할 수 있다.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 쓰기는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흙을 손에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압축과 비약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압축되지 않고, 될 수 없고, 비약할 수도 없다. 강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그리하여 물이 당신의 몸 속으로 스미게 해야 한다.
11. 시간이 만든 소설, 공간이 만든 소설 (2004-01-01)
소설이 될 만한 뭔가가 떠오르긴 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할 때 참고할 만한 몇 가지 유형을 생각해 보자.다 그런 건 아니지만, 발상이나 소재가 그 안에 이미 소설의 완성된 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소재나 발상에 따라 더 잘 어울리는 소설의 유형이 있다는 뜻이지, 어떤 소재는 반드시 어떤 유형으로 써야 한다는 무슨 규칙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은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이 만드는 소설이 있고, 공간이 만드는 소설이 있다. 물론 시간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나 공간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씨줄과 날줄이다.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존재가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만든 좌표 가운데 어느 한 점을 점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소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유형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중요한 소설과 공간의 형상이 중요한 소설을 나눌 수 있다.
시간의 축에 있는 소설적 요소는 움직임, 사건, 기억, 회상 등이다. 이것들이 이야기를 만든다. 모든 이야기는 시간의 산물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이야기도 멈춘다. 움직임이나 사건, 기억과 회상에 의지하는 이런 소설은 서사 위주의 소설이 되기 쉽다. 사건이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형성되려면 인물이 움직여야 한다. 인물이 움직이려면 마땅한 동기가 주어져야 한다. 소설 속에서 인물은 합당한 동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른바 리얼리티, 혹은 개연성 확보의 문제이다.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리얼리티나 개연성을 증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 현실 속에서는 성수대교가 무너지기도 하고 중학교 3학년 애가 죽은 엄마 옆에서 6개월 동안 먹고 자기도 한다. 실제로 일어났고, 직접 경험했다고 한 일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현실의 경험은 개연성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증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이야기나 죽은 사람과 6개월 동안 한 방에서 지내는 사람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할 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 속에서는 몰라도 소설 속에서는 어떤 시시한 사건도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다. 역설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더 소설 같고, 소설이 더 현실 같은 이유이다.
인물을 움직이게 한다? 인물을 움직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극을 주어야 한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물이 움직여야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령 누군가에게 편지가 온다고 생각해 보자. 혹은 전화나 전보. 그리고 전해지는 내용이 누군가의 부음이나 사고 소식이라고 가정해 보라. 그걸 전해들은 사람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아주 흔하고 판에 박힌 하나의 소설 유형이다. 발신자가 있고, 그 발신자는 인물에게 어떤 임무를 부여한다. 이제 인물은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어딘가로 이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다. 고향에서 전화가 온다.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은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삼촌이나 할아버지, 또는 마을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죽었거나 위독하다고 알려온다. 그 사람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고향으로 내려올 것을 요구한다.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고민에 빠진다. 고민의 내용은 고향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다. 그런데 그는 왜 고민을 하는가.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사정이 가야 한다는 당위와 싸운다. 싸움은 치열할수록 좋다. 이제 우리의 인물은 그 싸움이 진행되는 사이사이에 고향에 갈 수 없는 사연의 내막을 독자에게 노출한다. 회상과 기억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사연은 기차나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까지 분산되어 소개된다.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고민과 갈등 끝에 고향에 이르고 문제를 해결하든가 화해를 이끌어내든가 한다. 그렇게 하여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있던 자리로 돌아오면서 소설이 끝난다.
사건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짜여진 소설들은 흔히 이런 패턴을 모방하거나 변용한다. 이와는 달리 공간 자체가 말을 하는 소설이 있다. 이런 소설에서는, 물론 여기서도 인물과 사건과 이야기가 없을 수 없지만, 분위기와 이미지와 상징과 묘사가 상대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령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함으로써 일정한 소설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소설들은, 그 버스 안을 세계, 또는 사회의 축소로 인식시킨다. 교실 안의 학생들을 등장시킨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버스나 교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계,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이루고 있는 특정 집단, 혹은 신분을 대표한다. 이른바 전형적인 인물.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우의성을 띄며 상징의 빛을 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터널 빠져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터널의 우의성을 이해한다. 이런 소설에서는 공간에 놓인 소도구들 하나도 그냥 놓이지 않는다.
소파가 있다고 하자. 시간이 만드는 소설(이야기가 중요한 소설)에서는 소파는 단순히 사람이 앉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 그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공간이 역할을 하고 묘사가 중요한 소설에서는 소파가 그저 단순한 도구일 수 없다. 도구 이상이다. 그것은 낡은 소파, 붉은 소파, 우단 소파 등의 배치를 통해 고유한 상징성을 확보하게 된다. 권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기다림을 표시하기도 하고, 열정을 표현하기도 하고, 폐기 처분 직전의 처지를 상징하기도 할 것이다. 안개나 비도 그냥 내리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내릴 만할 때 내리고 표현할 이미지가 분명할 때 내린다. 그것들이 만드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소설의 몸을 이룬다. 때때로 공간이 곧 캐릭터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경우이다.
12. 전략을 세워라 - 선택과 배치 2004-02-01
화초는 물을 주면 저절로 자라난다. 어떤 사람은 소설 쓰기를 화초 기르기처럼 생각한다.
이를테면 단순한 이미지, 모호한 관념에 의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은, 지금은 희미하지만 쓰다 보면 어떻게 될 거라는 식의 (물을 주면 화초들이 저절로 자라나듯)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기야 물을 주는 것도 정성이라면 정성이다. 그렇게 해서 한 편의 소설이 써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해서 써지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밑그림 그리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말한 것처럼,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중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포기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소설 쓰기는 ‘기르기’ 보다 ‘만들기’ 쪽이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는’ 것이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다. 소설이 저절로 자라나는 식물이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형상을 부여받는 조형물이라는 인식은, 소설 창작의 모든 단계에서 거듭거듭 상기되어야 한다.
조형물을 만들 때 고려할 원칙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우선 선택이 중요하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겹쳐 있다. 선택은 취하기와 버리기의 작업이다. 우리 앞에는 재료들이 많이 있다. 때로는 너무 많이 있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 이것도 생각나고 저것도 떠오르고, 또 다른 것도 그럴 듯해 보여 혼란스러워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아무 단어든 쳐 보라. 수천 개의 웹 문서가 순식간에 뜬다. 가령 ‘사생활’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고 클릭하면, 그 단어가 들어 있는 온갖 문서들이 한꺼번에 모니터의 창을 가득 채운다. 인터넷의 바다 위를 떠돌던 잡다한 문서들이다. 심지어는 ‘사생 활동’ 같은 단어들, ‘교사 생활’, ‘의사 생활’ 같은 단어들까지 끼어 있다. 조그만 관련이라도 있다 싶으면 그 인연을 앞세워 얼굴을 내미는 형국이다. 우리는 그 많은 관련 문서들 가운데서 꼭 필요한 몇 개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버린다.
소설 쓰기의 과정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생겨난다. 어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앉으면 우리의 머리와 몸과 기억과 감각의 바다를 떠돌던 이런저런 관련 소재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가령 ‘사생 활동’이나 ‘교사 생활’ 같은 것까지 치고 올라온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사생 활동’이나 ‘교사 생활’이 ‘사생활’과 관련 있다는 건 명백한 오류이다. 자모음의 조합에 속고 있는 것뿐이다. ‘사생활’과 ‘사생 활동’, ‘교사 생활’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인터넷 검색 엔진이 자모음 조합의 유사성에 속아 엉뚱한 문서들을 토해내는 것과 같은 실수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도 번번이 일어난다.
언뜻 보기에 그럴 듯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울리지 않는, 또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어울리지 않는 에피소드나 사건이나 상징이나 진술이 들어 있는 소설들은, 대개 선택의 과정을 소홀히 한 탓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작품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든지 소설이 갈팡질팡한다는 독후감을 불러내게 된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취하기보다 버리기가 더 어렵다.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일수록 그렇다. 내가 경험했으니까 이것은 참이다, 라는 생각이 강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것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게임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참거짓 가려내기가 아니라 그럴 듯하게 꾸미기(조형)이다. 그럴 듯하지 않은 참이 아니라 그럴 듯한 거짓이어야 한다. 그럴 듯하지 않은 참은 소설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거나 소설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래서 요긴한 것을 고르는 안목과 요긴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과감함이 요청되는 것이다.
선택한 것들을 배치하는 일은 그 다음의 과제이고, 더 중요한 작업이다. 재료들을 놓는 자리와 순서에 따라 조형물은 달라진다. 가벼운 것을 아래 놓으면 안정감이 없고, 옆에 놓아야 할 것을 앞에 놓으면 모양이 사나워진다. 크기와 부피, 모양과 색깔을 고려하고 드러낼 것과 감출 것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하나의 조형물을 탄생시킨다. 아무리 아무렇게나 그냥 만들어진 것 같아도 아무렇게나 그냥 되어진 것은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앞에 쓸 것과 뒤에 쓸 것에 대한 고려를 신중히 하여야 한다. 많이 드러낼 것과 조금 드러낼 것에 대한 숙고도 필요하다. 어느 시점에서 얼마만큼 드러낼 것인가도 중요하다. 같은 재료를 주고 소설을 쓰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같은 소설을 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들뢰즈의 성찰에 의하면, 사물들은 본래적인 성격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과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뜻이 정의된다. 가령 ‘입’은 강의실, 마이크와 배치될 때 ‘말하는 기계’가 되고, 식당, 음식과 배치될 때 ‘먹는 기계’가 되며,침실, 연인과 배치될 때 ‘섹스하는 기계’가 된다. 우리가 선택한 재료를 무엇과 연결하고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사뭇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판을 읽는다는 말을 한다. 한 수씩 두지만, 한 점을 착수할 때마다 전체 판을 머리 속에 그린다는 것이다. 이 수 다음에 상대가 어떤 수를 둘지, 그 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리고 그 다음 수는 무엇이 될지 수많은 경우의 수를 다 헤아린다는 것이다. 한 수가 중요한 것은, 그 한 수가 전체 바둑의 모양, 또는 승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둑 기사는 한 수 한 수를 둘 때 전체 바둑과의 통일성을 생각하고 다른 수와의 연결성을 생각한다.
전략 없이 바둑을 두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전략 없이 소설을 써서도 안 된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바둑 기사처럼 치밀하고 정교해야 한다. 바둑을 두는 사람에게 바둑판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소설이 하나의 세계이다. 바둑 기사가 바둑 한 판을 경영하듯 소설가는 소설판을 경영하는 것이다.
하나의 재료(사건, 인물, 일화, 이미지, 상징, 진술 등)를 배치할 때 그것이 전체 소설을 이루는 데 적절하게 기여하는지(통일감),다른 재료들(사건, 인물, 일화, 이미지, 상징, 진술 등)
과 잘 어울리는지(연결성) 살펴야 한다.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설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소설가는 전략가여야 한다.
13. 긴장을 배치하라 (2004-03-01)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설이 달라진다는 말을 지난 호에 했다. 선택된 소재들은 적절히 배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배치의 방법이라고 할까, 구성의 원리라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일상 대화에서도 우리는 소박하고 단순하긴 해도 나름의 전략을 구사한다. 가령 부모에게서 용돈을 타내려고 할 때 대뜸 돈 주세요, 해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기분 좋아할 만한 말을 하고, 부모가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댄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를 상정해 보자. 어떤 여자가 자기 애에게 충고를 하려고 한다. 주제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다. 그녀가 선택한 말의 소재는 이런 것들이다.
1)옆집의 철수.
그 아이는 지난 학기말 시험에서 1등을 했다. 들어 보니 책상에 앉으면 다섯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일어나지를 앉는다고 한다.
2)대학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거기 다니는 학생들은 얼마나 많은가.
3)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고시에 패스한 친척 어른의 예.
4)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의 의미.
5)1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20대의 삶이 결정된다. 2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30대의 삶이 결정된다.
6)공부의 효과. 존재의 값이 높아진다. 친구들, 선생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7)아들의 습관. 쉽게 만족한다. 친구들을 너무 좋아한다. 결심은 하는데 끈기가 약하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한다. 대개는 소재 때문이 아니다. 이런 정도의 소재는 누구나 찾아낼 수 있다. 문제는 이것들 가운데 어떤 걸 선택하고, 어떻게 순서를 만들어 연결지을 것인가에 있다. 요컨대 플롯이다. 플롯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긴장감이다. 긴장감은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듣도록(읽도록) 하는 힘이다. 긴장이 없으면 듣지(읽지) 않는다. 들어도 건성으로 듣는다. 끝까지 관심을 갖고 듣거나 읽게 하는 것은 재미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재미가 없으면 누가 듣겠는가. 누가 읽겠는가.
그런데 재미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무엇이 재미있는 것일까? 웃기는 것일까, 울리는 것일까. 무서운 것일까, 싸우는 것일까. 누구는 사랑하고 헤어지는 멜로드라마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007 영화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야구 경기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바둑이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개그 콘서트가 재미있다고 한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대상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사람마다 재미를 느끼는 대상이 각각 다르다.
재미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잘 생각해 보면 재미는 긴장감의 다른 말이다. 긴장할 때 우리는 재미를 느낀다. 긴장하게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재미있다고 말한다. 놀이 기구를 탈 때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현상,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 ‘재미있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가슴이나 머리에서 일어난다. 그럴 때 우리는 재미있다고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긴장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읽거나 보지 않는다.
긴장은 추리를 요구한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추리이다. 긴장은 알고 있는 것과 알아야 할, 그러나 아직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나온다.
다 알려 주면 추리가 필요 없으니 재미없고, 너무 알려 주지 않으면 추리가 안 되니 재미가 없다.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교묘한 게임이 소설쓰기이다.
발생할 사건은 그 앞에서 어떤 기미를 보여 주어야 한다(복선). 사건의 진전이나 해결을 위해 실마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힌트). 복선과 힌트를 적절히 활용하여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한다. 사실은 동원되는 모든 이야기는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 대한 복선이고 힌트여야 한다. 드러내되 감추면서 드러내는 전술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요체는 궁금증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하나의 궁금증이 해결되는 순간 다른 궁금증이 생기도록 하는 것. 궁금증의 지속적인 생산이 중요하다. 소설쓰기는 이처럼 정교한 작업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사전에 복선이나 힌트를 주지도 않았으면서 난데없는 우연적 사건으로 소설을 끌고 가거나 어이없는 사건을 갑자기 등장시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 기계 장치를 타고 나타난 신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맡기는 일이야말로 무책임한 일이다. 소설은 플롯과 추리의 무대여야 한다. 어이없는 사건의 전개나 안이한 해결보다는 차라리 의미있는 (긴장감이 있는) 갈등을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낫다.
**내 소설에서 마지막에 불을 지르는 것보다....그 갈등을 유지하는 것이 나을까?
긴장은 구체의 영역이다. 그래서 플롯의 또 다른 원리는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적인 것들은 긴장으로부터 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은 돈 주세요, 하지 않고 책값 주세요, 한다. 아니, 그것도 추상적이다. 조금 더 구체적이려면 참고서와 시집을 사야 하는데 돈이 필요해요, 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도 충분하지 않다. 설득력이 있으려면, W사에서 나온 수학 참고서 7천 5백 원, N사에서 나온 과학 참고서 7천 원, 문학 시간에 선생님이 권한 서정주의 시집 한 권이 5천 원, 하는 식으로 목록을 제시해야 한다. 구체가 진실을 대변한다. 용돈 주세요, 책값 주세요, 하는 것보다 책의 목록을 대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전쟁과 평화, 죄와 고통……. 이런 단어들로부터 감흥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당신의 독자가 긴장하기를 바란다면 현장을 보여 주는 편을 택해야 한다.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고 자기 팔도 하나 잃은, 살가죽밖에 남지 않은 검은 얼굴의 소년이 진흙탕 속에서 빵을 건져 먹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긴장은 속도와 관련 있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극적 긴장을 보여 주어야 하는 순간에 오히려 슬로우 비디오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를 생각해 보라. 빠른 전개가 아니라 정교하고 유니크한 전개여야 한다. 구체는 속도감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 구체는 시간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날짜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시간 단위로, 시간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분 단위로, 분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초 단위로 바꾸는 것이다. 단위가 바뀔 뿐, 속도는 느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소설이 구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추기와 보여 주기의 전술을 제대로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 지하에도 물이 흐른다 - 상징과 은유 (2004-04-01)
소설을 거울에 비친 것으로 인식하는 의견에 우리는 꽤 익숙해져 있다. 이른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생각.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세계가 그 하나이고, 거울이 다른 하나이다. 세계가 있고,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있다. 세계는 복잡하고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세계는 둥글기도 하고 갸름하기도 하고 반짝거리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딱딱하기도 하고 물렁물렁하기도 하고 반듯하기도 하고 삐뚤빼뚤하기도 하고 깊기도 하고 높기도 하다. 둥글기만 한 것도 아니고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고 반듯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깊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소설은 종잡을 수 없는, 이것이면서 저것인, 그러나 이것만도 아니고 저것만도 아닌, 무정형의 세계를 비춘다. 그러나 세계가 그렇다고 소설 속에 비친 세계마저 종잡을 길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통해 반사되는 순간 세계는 일정한 형태를 얻는다. (얻어야 한다) 무정형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 소설 쓰기인 까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거울의 반사면이다. 거울은 감정도 욕망도 생각도 없는 죽은 물체가 아니다. 거울은 세계를 비추되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따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형태를 부여해서 비춘다. 거울을 통과해 나온 세계는 거울의 반사면(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되고 재구성된 세계이다.
어떤 거울은 예쁘게 비추고 어떤 거울은 날씬하게 비춘다. 거울이 다 같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거의 같지만 그러나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거울의 표면이 다 다르니까 비추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세계를 정리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역할은 작가의 세계관과 욕망과 체험이 맡아 한다. 세계를 반영하는 소설이 다 다른 것은 그것을 비추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욕망이나 체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계를 무시하고는 소설을 생각할 수 없지만 (왜냐하면 세계를 비춰야 하니까), 또한 작가의 세계관이나 욕망이나 체험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되고 재구성될 때만 (왜냐하면 세계를 다르게 비춰내야 하니까) 소설이 생겨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사건이나 현상을 그저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독자들은 대개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야?’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 반응의 속내에는 적어도 세 가지 생각이 숨어 있다.
‘무슨 소린지, 혼란스럽군’이 그 하나이고, ‘그 정도는 나도 알아’가 다른 하나이고, ‘그러니까 그게 당신에게 무엇인지를 말해 봐’가 또 다른 하나이다. 예컨대 소설 독자들은 맨-현실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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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자까님의 홈피에서 퍼왔음당.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 말들이라....
첫댓글 좋은 자료네. 이 뒤로 더 있을 것 같은뎅. 더 퍼오징?
여기에 올리신 이승우의 소설창작론은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라는 제목으로 마음산책에서 2006년 출간되어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전 인터넷으로 구입했었지요.
아~ 재미있네, 꿇어앉아서 강의들은 기분인데.. 넘 재미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