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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음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과 모 배천조씨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이 감응하였다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 하였다. 이 아명은 1907년 망명 후에 사용하던 이름이기도 하다. 본관이 순흥으로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 되고, 해주부에서 10여대를 내려오면서 세거한 향반의 자제였다.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가산이 유족한 부호로 관후한 성품을 지닌 자선가로 알려졌다. 그는 슬하에 태진, 태현, 태훈, 태건, 태민, 태순의 6남과 딸 셋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셋째 아들 태훈이 안중근의 부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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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6형제는 모두 문한(文翰)이 넉넉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안중근의 부친인 태훈은 특히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성균진사에 급제하였고, 일찍 개화 사조를 받아들여 개화파 박영효 등의 주도로 일본에 파견하려 했던 70여명의 유학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이들까지 탄압의 대상이 되자, 태훈은 고향으로 내려와 일가권속 70여 명을 이끌고 세거지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밑의 벽지인 청계동으로 이사, 은거 하였다.
안중근은 어릴 때부터 조부의 사랑을 각별히 받으며 성장하였다. 집안 서당에 초빙된 스승으로부터 사서삼경의 유교경전과 ‘통감’등을 수학하였고, 조선사와 만국역사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안중근은 학문 외에도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 숙부와 포수꾼을 따라 산을 타고 호연지기를 기르며 단총을 메고 수렵에 나서 사격술을 익혀 발군의 명사수가 되었다.
안중근의 나이 16세 때인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황해도 일대에도 소요가 크게 번졌다. 이 틈을 타 안중근의 고향인 신천지역일대는 동학당을 빙자한 원용일의 난군이 향리를 횡행하면서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관리를 잡아 죽일 뿐만 아니라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폭행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관군은 이들의 기세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패퇴하면서도 외국의 원병이나 기다리는 판이었다. 이 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이 위기를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단결하게 하고 격문을 돌려 의거를 일으켰다. 포수들을 불러모아 정병을 삼고 처자들까지 행오에 편입시켜 신천의려군을 편성, 이들 난군을 진압하는 의려장이 되었다.
특히 안중근은 어린 나이로 선봉장을 자원, 용전하여 2만을 호칭하는 난군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투시에 안중근은 붉은 옷을 입고 연전승첩하였으므로 동학소요군이 패퇴하면서 ‘천강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고도 하였다. 이 해에 안중근은 이웃 김홍섭의 딸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요절한 분도와 준생 두 아들과 딸 현생을 두었다. 동기로는 정근 공근 등 두 동생과 누이 성녀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