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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 제시어: 아파트
# 1.
언젠가 나는 아파트를 훔친 적이 있었다. 나는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최대한 판단을 미루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성급한 판단은 나를 끝도 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엔 인과관계가 있다. 나는 당시의 내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옳고 그름 따위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시의 내 행동은 제법 정당한 것으로 생각됐다.
당시 나는 지방에서 서울로 갓 상경해 집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집들은 모두 촘촘한 거미줄처럼 인과관계 속에 엉켜있었고 그 속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절망감을 느끼려던 찰나, 한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40대 안팎의 나이처럼 보였고 얼굴 곳곳에 주름이 강줄기처럼 뻗어있어 전체적으로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는 나에게 다짜고짜 내게 다가와 “저의 집을 훔쳐주시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잘 못 들었는지 재차 반문했지만, 그는 한결같이 자신의 집을 훔쳐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에게 “그건 범죄인걸요.” 하고 따져보았지만, 그는 내 말 따윈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집요하게 자신의 집을 훔쳐 달라고 요구했고 그 방법을 상세히 내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는 내게 훔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간단합니다. 제가 없는 틈을 타서 제집에서 들어오셔서 뭐든지 맘대로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나는 그가 내게 범죄를 권유하고 있다고 자각할 틈도 없었다. 아니, 그의 눈을 보면 나는 정당한 권리를 받은 입주자와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벌어지는 일에 대해 최대한 판단을 미루고자 하는 내 습관은 남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는 내게 도어락 비밀번호와 집 주소, 자신의 퇴근 시간 등이 적힌 쪽지를 건넸다. 오래전부터 계획해 온 듯한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3일 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남자의 집에 발을 들이기로 했다. 그는 강남 한복판에 있는 40평의 고급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는 무료한 시간을 무료한 신문으로 달래는 경비 아저씨를 지나 그의 집인 13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현관문을 열고 입성에 성공했다.
집의 분위기는 남자 혼자 산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집은 깔끔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질감을 줄 정도로 휑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행동을 해야만 나는 이 집을 훔친 것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속으로 작게 읊조렸다. 한참을 둘러보면서 나는 남자의 서재로 보이는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책장도 없이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러나, 책상 위에서 남자가 내게(?) 남긴 것처럼 보이는 쪽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엔 BOSS 스피커와 SONY CP 플레이어, ‘브람스 메들리’라는 CD가 있었다. 남자는 내게 음악을 들을 것을 권유하는 걸까. 나는 집을 훔치는 일과 음악을 듣는 일에 대한 인과관계를 파악하고자 했지만, 서울 집들의 인과관계처럼 정확한 범위를 상정할 수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스피커를 틀고 플레이어에 연결해 CD를 집어넣었다. CD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스피커에서 ‘브람스 교향곡 제4번’이 고래의 외침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나는 책상에 앉아 잔잔하고 서정적으로 흐르는 브람스의 노래를 들었다. 그것 말고는 내가 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뒤이어 ‘바이올린 협주곡’이 나왔다. 나는 서로 상응하는 바이올린의 화음을 들으면서 지금 내가 있는 아파트라는 곳을 생각해보았다. 아파트와 사람, 시장 등 무수히 많은 요소가 얽히고설켜 있는 서울의 아파트는 그 누구에게도 온전히 자신을 주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온전히 아파트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고 아파트는 단지 무수한 인과관계 속에서 기회가 되는 사람에게 자신을 잠시 내어줄 뿐이다. 나는 브람스를 들으며 남자가 왜 자신의 아파트를 훔쳐줄 것을 바랬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도 같았다. 그도 매일 이곳에 앉아 자신과 아파트의 관계 따위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훔쳐짐(?)으로써 자신만의 정답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가 퇴근하기 전에 집을 나섰다. 나는 아파트와 브람스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지만 둘 사이 어떤 인과가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세상의 곳곳엔 인과관계가 거미줄처럼 엉켜있지만 나는 그 둘 사이의 판단을 최대한 미루고자 다짐하며 나의 아파트를 찾고자 했다.
# 2.
<아파트 재개발 회의 소집>
일시: 2005년 12월 5일
장소: 욱일아파트 노인회관
* 아파트 재건축과 관련하여 소유주 분들의 의견을 청취하고자 회의를 소집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 바랍니다.
노인회관이 북적였다. 언뜻 고성이 오가기도 하는 듯하다. 아빠를 따라 온 난 멀뚱멀뚱 어른들의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다. “이 아파트 재개발하면 우린 어디가서 삽니까? 재개발하고 나서 들어오는 비용은 누가 감당하냐구요!”동네 미용실에서 한 듯한 풀린 파마에 유광 자주색 패딩을 입은 아줌마가 소리쳤다. 그녀의 옷 색깔만봐도 지독해보였다. 내 짧은 인생 경력으로 판단했다. 아, 건들면 안 된다. 부녀회장은 지지 않고 응수했다. “재개발 되면 집값 보상해주는데 뭐가 문제예요? 재건축 확정나면 집값 천정부지로 솟을텐데 뭐가 문제냐구요!” 이 아줌마도 범상치 않다. 재건축 찬성파와 반대파가 나눠져 언성이 오갔다. 곧 티비에서 본 국회의원들처럼 서로를 잡아 뜯을 기세였다. 회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회의에 지쳐, 졸린 눈을 비비며 난 아빠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재건축 문제를 둘러싼 주민들의 실랑이는 그렇게 10년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결국 아파트 재건축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엄마 아빠는 요새 축쳐져 풀이 죽어보인다. 나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뒤로 이사를 한 번도 안해봐서 재건축을 하면 이사 한다고 마음이 실컷 들떠있었는데 내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우리 아파트만 뺀 채, 주위 부지가 모두 재개발에 들어갔다. 아침만 되면 이어지는 공사 소리와 인부들의 고함 소리 때문에 늦잠을 잘 수 없었다.아파트 공사 기간동안 난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2년을 지내니 아파트가 모두 완성되었다.몇십 층에 달하는 아파트 사이 속 5층 구형 아파트, 이것은 마치 아파트 숲속의 외딴 오뚜막 같았다.
요즘 난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게 됐다. 가령, 옆동 아이들이 집에서 뭘하고 노는지, 밑집 아저씨는 몇시에 거친 가래를 내뱉는지 등이다. 관음증은 아니다. 그냥 그들의 소리가 우리 집까지 전해져 온다. 내가 어렸을 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아파트가 나와 함께 나이를 먹으며 들리게 되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그때 재건축을 했었어야 한다고. 재건축 논의 당시에도 연식이 꽤 되었던 아파트인데, 기회를 놓치고 더 낡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새출발의 기회를 놓친 아파트는 그자리에서 가만히 늙어가고 있었다. 외벽을 다시 칠하고 아스팔트를 다시 깔았어도, 그 근본은 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일뿐이었다. 그 뿌리를 바꿔야하는데 뿌리를 바꿀 기회는 날린 채, 썩어가는 이파리들에 물만 주고 있었다. 그 때 그 자주색 패딩 아줌마가 떠올랐다. 이곳을 재개발하면 자기들은 어디에서 사냐는 아줌마. 그녀는 아직도 이 곳에 살고 있을까. 남겨진 사람들만이 이 늙고 고장난 아파트를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 3.
아마도 90년대 후반의 뉴욕 맨하탄. 그곳에 자리한 한 커피숍. 창문엔 노란 커피 잔과 함께 ‘Central Perk’라는 초록색 로고가 붙어있다. 창문너머로 서빙 알바를 하고 있는 레이첼과 커다랗고 포근한 소파에 둘러 앉아있는 그녀의 친구들이 보인다. 모니카, 피비, 챈들러, 조이 그리고 로스. 왁자지껄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카페는 벌써 문 닫을 시간. 그냥 헤어지긴 아쉬운 여섯 친구들은 모니카의 집으로 향한다. 커다란 거실, 여섯 친구가 모두 앉고도 남을 아늑한 소파, 뉴욕의 밤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 청춘의 낭만 안에서 여섯 친구들의 밤은 깊어간다.
2010년대 초반 경기도의 어느 도시. 그곳에 자리한 한 커피숍. 창문엔 미소를 띤 천사 로고가 붙어있다. 창문너머로 우유거품을 만들고 있는 내 모습과 열심히 떠들고 있는 친구들이 보인다. 사장님이 없는 날인가 보다. 나는 일하면서 간간히 친구들의 자리로 가서 같이 수다를 떤다. 왁자지껄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카페 마감시간.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남은 이야기와 웃음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선다. 어디든 들어가 앉을 수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그러나 금요일 밤은 어디든 인산인해. 다행히 자리 하나가 비어있는 곳이 있다. 후다닥 달려간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과 작은 의자, 지글지글 끓고 있는 닭발. 어디선가 불어오는 담배향기 가득한 바람 속에서 우리들의 밤은 깊어간다.
2019년 경기도의 한 사무실. 출근하자마자 커피 두 잔을 마신 나는 오늘도 무표정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본다. “지잉-” 문자가 왔다. ‘행복주택 청년-16형 당첨을 축하드리며 계약기간 내에 계약체결 하시기 바랍니다.’ 웃음이 저절로 났다. 누가 뺏어가는 것도 아닌데 서둘러 부동산 전자계약 사이트에 들어가 계약금을 전송했다. 친구들에게 알리자 나보다 더 기뻐하며 축하해줬다. 이제 우리도 아늑한 집에 모여 담배냄새 대신 향초의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밤이 깊도록 청춘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며칠 뒤 입주 전 사전 점검을 위해 연차를 내고 나의 아파트로 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언어의 속임수에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16형은 16제곱미터를 뜻하고, 16제곱미터는 약 4평을 뜻한다. ‘형’과 ‘평’, ‘ㅎ’과 ‘ㅍ’의 4배 차이는 내 환상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청약에서 신혼부부랑 붙으면 백전백패.” 신혼부부가 선택하는 공간을 피해 많은 청년들은 16형으로 우회한다. 이 말을 듣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신청한 내 잘못이다. 다음날 나는 계약을 취소했다. 눈물을 머금고 위약금을 내면서 독립의 꿈을 다음으로 미뤘다.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맥주 한 캔을 사와 넷플릭스를 틀었다. 몇 년 전 보다 만 미드 프렌즈를 틀었다. 나의 ‘최애캐’ 카페 서빙 알바를 하던 레이첼은 어찌어찌하다 30살에 굴지의 패션기업 랄프로렌의 부장님이 되어있었다. 나의 ‘최애 홈 스윗 홈’ 모니카의 아늑한 아파트는 알고 보니 할머니가 증여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내 꿈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환상의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
# 4.
콰과과강! 며칠 째 지하철 5번 출구로 나오면서 듣는 소리다. 낡은 아파트를 재건축 한다나 뭐라나. 어쨌든 저 소리 때문에 불편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리도 일부 막고 있고, 지나갈 때마다 이는 뿌연 먼지와 굉음.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내년이면 졸업이니까. 대학원까지 5년 내내 학교만 다녔다. 이룬 것 하나 없이 도피성으로 온 대학원에서도 단지 졸업만 바라볼 뿐 미래는 어둡다. 그런 내게 겨울마다 찾아오는 소확행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붕어빵이다.
자취방 골목 입구에 있는 천막 하나. “아저씨 붕어빵 천원어치 주세요”, “또 왔구나, 어서오렴” 겨울이 5번 찾아올 동안 나는 이 허름한 천막 아래서 파는 붕어빵을 매번 사먹었다. 붕어빵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두 번 사먹다 보니 주인장의 따뜻함이 나를 매번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다. “자 오늘도 하나 더 넣었다. 4개 넣었으니까 맛있게 먹으렴” 천원에 세 개인 붕어빵에 덤 하나 얹어준다고 난 이곳을 5년 째 오고 있다. 그러면서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었다. 소싯적엔 나름 잘 나갔더랬는데, 어느 순간 실직을 하고 일용직과 붕어빵 장사를 병행한다고 했다. 최근엔 저 굉음 뿜는 공사 현장에도 들락날락 하는 모양이다. 슬하에 막 걷기 시작한 딸 하나와 받아쓰기 백점 맞는 아들 하나가 있단다. 애들 생각하면 이렇게 퍼줘서 되나 싶지만 주인장은 매번 학생에겐 덤 하나를 얹어준다. 어쨌든 나에겐 그 덤으로 3마리로 부족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으니 됐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날도 서양사개론을 듣고 지루한 일주일을 끝냈다. 붕어빵 안 먹은 지도 일주일 됐나? 오랜만에 붕어빵 먹으면서 주말을 맞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어김없이 지하철 5번 출구로 나왔다. 오늘은 굉음도 없고 뿌연 먼지도 없고, 거리도 장애물 하나 없이 널널했다. 모든 게 내 주말을 이렇게 반겨주는구나! 기쁜 마음으로 골목에 접어 들었을 때, 허탈한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필 그날 붕어빵 가게를 닫았다. 주인장이 일용직을 전전하다보니 매 번 여는 것은 아니었지만, 겨울엔 막일거리가 없다보니 자주 여는 편이었는데 하필 오늘! 아마도 저 굉음 뿜는 공사현장에 갔나보다. 그렇게 내 행복한 주말의 시작은 삐끗했다.
실망감을 앉고 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평화로운 주말의 시작은 없었다. 그 굉음 뿜는 공사 현장에서 시끄러운 앰뷸런스 소리가 하루 종일 들렸다. ‘저 아파트 완공되면 내 기필코 노상방뇨라도 하리라’ 지금까지 먹은 먼지와 들은 굉음 모두 한 번에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다른 주의 시작, 5번 출구의 아파트 건축은 잠시 중단됐다. 공사장에서 인명사고가 있었더랬다. 7명이 추락했고, 사망했다고. 그리고 나의 소확행도 그 날로 멈췄다. 더 이상 붕어빵 천막은 열지 않았다. 덤 하나 때문에 다른 붕어빵 집을 다 사양하고 매 번 오던 집이었는데. 그렇게 5번 째 겨울은 갔다.
그리고 6번 째 겨울, 아파트도 멀끔히 다 지어지고, 나도 졸업한다. 허나 붕어빵 주인장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냥 바랄 뿐이다. 어딘가에서 덤 하나를 얹어주며 선한 미소를 짓고 있노라고. 왠지 눈물이 흐른다. 역시 겨울은 춥고, 졸업은 슬프다.
# 5.
‘섬망(譫忘)’. 죽음에 가까워진 환자가 겪는 환각 증세.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몇 개월동안 나는 섬망증 환자를 종종 보곤 했다. 섬망증 환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집에 가자”였다. 죽더라도 살던 집에서 죽고 싶다는 것. 호스피스 병동만 15년을 지킨 담당 의사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느 때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주무시듯 죽고 싶다는 무의식이 환각 증세로 표출되는 거야.”
우린 언제부터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어야만 했을까. 지금이야 아파트가 가장 흔한 주거형태지만 80년대까진 일명 ‘빨간 벽돌집’이라 불리던 개인 주택이 가장 흔했다. 이때만 해도 집과 죽음은 가까웠다. ‘병들고(질병), 병간호를 받고(돌봄), 죽음을 맞이(임종)’하는 모든 과정은 집에서 이뤄졌다. “집은 개인의 서사가 녹아 있는 공간이잖아요. 서사의 맺음말이 죽음이라면 죽음으로 가는 과정 역시 집에서 이뤄져야죠.” 송병기 서울대병원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90년대까지만해도 병원에서 죽은 환자는 17%에 불과했다.
90년대 후반, ‘효율성’이 시대의 화두가 됐다. 자본주의는 주거문화와 생활패턴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위로 솟은 아파트가 빨간 벽돌집을 대체했다.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와 자식들까지 동시에 사회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집에는 죽어가는 노인을 돌볼 사람이 남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이 틈을 교묘하게 파고 들었다. 자본주의는 집이 담당하던 ‘질병∙돌봄∙죽음’의 기능을 빼앗아 자본의 논리를 주입하고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환자를 살리기 위한’ 병원은 ‘고객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으로 탈바꿈했다. 각종 요양시설이 등장해 돌봄을 담당하고 장례식장은 타인의 죽음으로 돈을 번다. 주택이란 하나의 장소에서 죽음을 준비하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매단계마다 병원과 시설 사이 어딘가를 왔다 갔다 방황한다. 아파트는 더 이상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이 아니다. 아파트 사회에서, 죽음과 주거는 멀어졌다.
‘질병∙돌봄∙죽음’의 분리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뒤집어 놨다. 주택 사회에서 죽음은 정상적이었다. 슬프긴 하지만 죽음 역시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사회에서 죽음은 비정상적(abnormal)이다. 주거와 죽음의 분리로 인해 우린 주거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걸 낯설어 하게 됐다. 주거공간은 ‘정상존재’의 전유물이 됐다. 병들고 아파 임종을 앞둔 ‘비정상존재’는 그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시설에 모아둬야 한다. 그렇게 죽음을 앞둔 많은 이들은 집이 아닌 병원과 시설 사이 어딘가로 내몰린다.
어쩌다 아파트와 죽음은 양립할 수 없는 단어가 되었는가. 웰다잉(well-dying)문화는 휘황찬란한 고급시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빨간 주택이든 아파트든, 임종을 앞둔 이에게 ‘편안하게 죽을 장소’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아파트로부터 죽음을 소외시키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 6.
중학교 때 일이다. 같은 반이었던 a는 옆 고등학교 남학생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사랑을 나눴다고 했다. 돈도 없는 미성년자에게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최고의 낙원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이지만, 그 아이의 무용담이 없었다면 모를 일이었다.
나도 아파트에서 남모를 행위를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난 엘리베이터 cctv가 장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엄마의 거짓말 때문이었는데, 엄마는 나에게 cctv가 있어 내가 뭘하는지 다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엘리베이터에 타면 춤을 추거나 코를 파곤 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cctv가 가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 진동에 의해 괜스레 몸이 부르르 떨리며 오줌이 마렵곤 했다. 21층이었던 우리 집은 내가 참기엔 너무 멀었다. 나는 곧장 바지를 내려 소변을 봤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2가지였다. cctv는 가짜였고, 우리 아파트는 44세대가 살고 있었다. 누가 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렵다. 나는 적어도 5번은 엘리베이터에서 볼 일을 보았다. 참을 때의 조급함이 없었고, 남들 모르게 한다는 짜릿함이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오늘 친구를 집에 데려왔니. 엄마는 집이 더럽다며 친구 데려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자랑스럽게 나는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말했다. 믿기 싫은 눈치를 보이던 엄마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오줌 쌌니. 차마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나의 대답을 듣곤 엄마는 동네 창피하다며 혼을 냈다.
내가 들켰던 이유는 cctv가 진짜였기 때문이다. 경비 아저씨가 강아지의 소행이라고 생각해 cctv를 확인했고, 그 화면에는 내가 있었다. 아마 cctv가 없었더라면, 경비 아저씨가 몰랐더라면, 엄마가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엘리베이터 오줌싸개범‘일지 모를 일이다. 나의 오줌은 그 오줌을 치운 경비원 아저씨, 이웃 주민들, 우리 가족 모두에게 피해를 줬다. 오해를 받은 이름 모를 강아지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맘놓고 계속해서 소변을 보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나의 잘못을 쉽게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최근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에서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윤성여씨가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20년의 억울한 옥생활은 아무도 보상해줄 수 없다. 윤성여씨의 20년은 그의 가족, 우리 사회 모두에게 피해를 줬다. 실제 범인인 이춘재가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들키지 않는다는 안일한 이유로 타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개인의 이기적인 마음은 우리 사회가 지켜보고 주의해야 할 것이다.
# 7.
과거 마셜 맥루한은 커뮤니케이션에서 송수신되는 ‘메시지’의 효과에만 집중하던 과거의 연구들을비판하며, 그 유명한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격언을 남겼다. 이는 미디어 자체가 인간 감각의 확장이기 때문에, 모든 미디어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스마트폰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 이후 인간사회는 기존과는 아예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맥루한의 논의를 ‘매체결정론’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부터 내가 ‘주거결정론’이라고 이름붙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작금의 한국에서 아파트를 소유한다는 것은 일종의 ‘성공’의 지표로 생각된다. 그러나 역사적 시각으로 바라볼 때 본래 아파트의 건축 목적은 노동 계급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이었다. 개발독재 시기를 거쳐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한정된 도시공간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개입이 필요했다. 그러한 정책적 결과물이 바로 아파트로, 그것은 제한된 공간에 다수의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배치시킬 수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문제는 아파트의 속성이 이웃과의 단절에 있다는 것이다. 아파트 거주자는 자신이 원한다면 한없이 폐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단순히 누군가 옆집에 산다고 해서 ‘이웃’으로 여겨야 할 필요는 없다. 자신 역시 옆집에 대해 ‘이웃’으로서의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 단절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거공간 ‘외부’보다는 ‘내부’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고, 시나브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러한 가족주의가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을 저해하고, 나아가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을 결여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아파트는 평 수에 따른 구분은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동질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일단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중산층’으로 여기게 되며, 현관문을 걸어잠구고 개인과 가족의 생존에 집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계급 간 연대의식은 붕괴되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는 강화된다. 결과적으로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져야할 노동 계급이 파편화되어 체제에 대한 종속성이 심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주거 방식은 사람들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변화시킨다(‘주거결정론’).
그러나 ‘아파트 사회’의 미래가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의 한국처럼 아파트 분배 문제가 지속적으로 해소되지 못한다면,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의 계급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사회구조적 모순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끌어올려낼 것이고,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본주의가 과연 이 도전을 막아낼 수 있을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막아내는지 흥미롭게 지켜보자.
# 8.
다섯 살 무렵에 살던 곳은 5층짜리 집 몇 동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아파트 단지였다. 개나리였던가 진달래였던가, 그런 흔하디흔한 꽃 이름이 붙여진 작고 오래된 단지였다. 내가 살던 집이 몇 동이었는지 몇 호였는지 조차 기억에 흐릿하다.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그런 구별을 위한 숫자들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 유치원 하교 시간에 맞춰 활짝 열리는 현관문들은 꼬질한 때가 묻은 아이들이 밥 짓는 냄새를 찾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무렵에서야 겨우 닫혔다. 내 집, 네 집을 구별하는 예의범절 같은 건 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구덩이만 보면 달려드는 땅굴쥐 마냥 내키는 대로 이 집 저 집을 들락거리며 간식을 얻어먹고 발자국을 찍어댔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아름드리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크고 예쁜 벚꽃나무는 지상 주차장 한 구석에 있었다. 그 아래는 언제나 우리 차지였다. 아무개네 아빠가 회사 야유회에서 썼던 커다란 은색 돗자리 하나가, 비 오는 날을 빼면 항상 그 자리에 깔려 있었다. 우리는 봄이면 거기 누워 내리는 꽃비를 맞으며 나름의 감상에 젖었고, 여름이면 아무개네 엄마가 가져다준 수박을 먹으며 신선놀음을 했다.
작은 아파트 단지에 널찍한 지하 주차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우리가 차 한 대(옆 동네 친구까지 데려올 적에는 두 대)를 위한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건 어른들에게 꽤나 큰 불편함을 줬을 것이 틀림없다. 차 댈 자리가 하나 줄었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운전석에선 잘 보이지도 않는 콩알만한 사람이 주차장 한구석에서 왔다갔다 굴러다니고 있다니. 운전대를 잡기 시작한 지금의 나로썬 상상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으로 뻔뻔스럽게 우리들의 공간을 침범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 어떤 어른도 그런 우리를 다그치지 않았다. 계절이 몇 번 흐르고, 자그마한 평상 하나가 돗자리를 대신했다. 그 다음부터 아이들의 공간은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둘둘 말리지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더 흐르고, 나의 부모님 역시 강남교육 열풍에 탑승해 강남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3,000세대가 함께 사는 대단지였다. 깔끔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경비아저씨들이 주민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화단과 수목들은 철마다 가지가 쳐지며 정갈하게 관리됐다. 단지에 진입할 수 있는 차량은 입주민 소유로 등록된 것이거나 그들 지인들의 것으로 제한됐다. 헬스장이니 노인정이니, 입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실로 예의발랐다. 아파트 곳곳은 아이들이 예의범절을 지킬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친구 집에 출입하려는 아이는 아파트 현관에서 인터폰을 누르고 정중히 자신의 신상과 교우관계를 밝히며 들여보내줄 것을 허가받아야 했다. 입주민에게만 출입 가능한 시설을 이용할 때면 친구들은 잠시 죄인이 됐다. 눈칫밥 얻어먹는 군식구마냥, 초등학생답지 않게 조용조용 걷고 숨 쉬었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은 아파트 중앙에 있는 네모반듯한 놀이터로 한정됐다. 우리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아이다워야 했다. 화단에 펴 있는 진달래 꿀을 빨아먹겠답시고 손을 뻗으면 잘 교육받은 경비아저씨들이 다가와 점잖게 우리를 말렸다. 우리가 아이다울 수 있는 시간은 어른들이 출근을 마친 아침 8시부터 어른들이 퇴근하는 저녁 7시까지였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없는 딱 그 동안만 자비로웠고, 그 시간을 넘겨 소란스러운 가정에는 여지없이 관리사무소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파트 거주 가구 수가 1,000만을 돌파하면서, 한국 가구 절반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시대가 왔다. 서울에서는 40%가 넘는 가정이, 세종시에선 무려 70%가 넘는 가정이 아파트에 거주한다. 작고 낡은 단지들을 허물고 들어선 신식 단지들은 세련된 규칙과 매너를 아이들에게 요구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한 관리규약이 허용하는 시간과 범위 안에서만 천진난만할 수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자신의 책 <책으로 가는 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에게는 거듭 바보 같은 짓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세계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일까,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항상 거침없이 무례하다. 여기저기 손때를 묻히고 오래된 창고를 뒤엎어 놓으며 어른들의 규칙이 지배하는 영역을 과감하게 침범한다.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어른 세계의 룰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비춰진다.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 날 것 그대로의 아이다움을 위한 공간은 있을까. 어른들의 ‘살기 편함’을 위해 아이들이 아이다움을 억누르는 것은 당연해졌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공간을 허물어뜨려도 핀잔 듣지 않았던 어린 날의 작고 낡은 무법지대가 그리워진다.
# 9.
‘바스락’. 풀을 빳빳이 먹인 베개의 산뜻한 촉감이 내 얼굴을 감쌌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흰 이불이 사각사각 움직이는 기분 좋은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베개 사이에 파묻힌 고개를 들어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큰 창문을 통해 빌딩 숲 사이로 노을이 지는 모습이 보였다.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어둑어둑해지는 석양 사이로 방 안의 다른 물건들이 자신의 깔끔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먼지 한 톨 없는 조명등부터 반듯하게 접혀져 있는 샤워 가운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고도 언제나 청결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이 곳, 난 호텔이 좋다.
내가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정리’의 업무를 대체해주기 때문이다. 난 휴식의 공간에서 별다른 추가 업무 없이, 편안히 정돈된 공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집에서는 추가 업무의 연속 선상이다. 지금처럼 당장 침대에 누워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로 집에 들어와도, 내 눈앞엔 치워야 할 숙제가 먼저 보였다. 빨래통에 가득 찬 수건과 비워지지 않은 재활용 쓰레기들. 빨래를 널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면 그제서야 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누워서 고개를 돌리면 다른 정리가 나를 반긴다. 아침에 급히 먹고 나간 요거트 잔해들과 퀘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이불들. 이 밀려든 추가 업무를 처리하느라 나의 휴식의 시간이 뒤로 늦춰진다.
하지만 내가 호텔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인 청결한 ‘서비스’는, 사실상 나의 추가지불로 인해 받는 일종의 돈의 댓가이다. 나는 이 객실의 이용료 외에 추가로 11%의 서비스료를 부담했다, 이 청결함을 위해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다. 만일 그 금액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느끼는 추가 업무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더불어 석양 뷰를 자랑하는 호텔의 큰 창문 역시, 새벽녘엔 찬 바람을 한껏 느낄 수 있는 허술한 유리 단열재에 불과하다. 주거시설이 아닌 호텔은 집처럼 난방이 따뜻하게 유지되지도 않는다.
온기가 없는 숙박 시설. 마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기차의 역사 내에서 지속적으로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호텔 전월세’. 정치권은 서울 시내의 부족한 부동산을 대체하기 위해 호텔방을 주거용으로 바꾸는 대책을 내놓았다. 서울 시민들에게 ‘아파트에 대한 환상’을 낮추겠다는 정책이다. 이 모두가 60평대의 따뜻하고 편안한 보금자리에서 거주하는 이들의 시선에서 비춰진 오류가 가득한 해석에 불과하다. 주거 시설의 따뜻함이 없는 숙박 시설. 여행객이 잠시 쉬어가는 이러한 숙박 시설은 주거시설을 대체할 수 없다.
# 10.
“아 또야?” 이사 온 지 벌써 2년째다. 20년을 빌라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되면서 좋았던 점은 더는 주차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하 2층까지 넉넉하게 주차장이 있었기 때문에 주차난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입주민이 늘어 난건지 차들이 늘어 난건지 현재 주차장 입구에는 자동차들이 가득하게 주차되어 있다. 차가 통행하는 곳에 위험하다고 현수막까지 걸어놨는데 여기에 주차하는 입주민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 이런 상황을 관리하는 사람은 왜 없는 것인가...
화가 난 나는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후... 제가 몇 번을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렇게 딱지를 붙여놓으면 뭐해요? 사람들이 듣지도 않는데...다른 방법은 없나요?” 답답한 마음에 나는 경비실에 민원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고 딱지를 붙여놓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저희도 답답하네요”
퇴근하고 신경이 곤두선 가운데 결국 민원전화도 소용없음을 알고 맥주 한 캔을 꺼내 TV를 켰다. 평소처럼 뉴스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나온 보도로 나는 마시던 맥주를 내려놨다. “아파트 주민들의 갑질로 평소 스트레스에 시달린 경비원 A 씨는 ··· 결국 목숨을 끊었습니다.” 내가 조금 전에 전화를 한 행동도 갑질인가? 아니 그럼 이런 민원상황을 경비실 말고 어디에 문의해야 하는 거야. 관리비를 낸 입주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합리화를 해봤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돌덩이 하나가 툭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마음이 뒤숭숭한 채 뒤척이며 어렵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당일 출장으로 인해 평소 출근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나왔다. 그 속에서 입구를 막고 있는 차를 힘겹게 옆으로 옮기고 있는 경비원을 발견했다. 저녁에 들어가기 힘들었어도 아침에 나올 때면 편하게 주차장 입구 통로에서 나올 수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항상 이렇게 밤사이에 입구를 막은 차를 치워주고 계셨구나...갑자기 수십 번 민원전화를 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경비원과 마주칠까 봐 고개를 푹 숙인 채 허둥지둥 차를 탔다.
주차장을 나오자 이른 새벽 5시부터 나오셔서 분리수거장을 치우고 아파트 거리를 치우고 계신 경비원들이 눈에 보였다.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어제 뉴스가 떠오르면서 평소에 내가 얼마나 무심했는지 깨달았다. 나만 고충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 고충만 알아달라고 경비원에게 떼를 부리고 있었다. 그날 퇴근길 저녁 붕어빵과 함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저...죄송합니다. 아침에 차 옮기시는 거 봤습니다.. 평소 민원전화 많이 한 게 마음에 걸려서...” 멀뚱히 말을 듣고 있던 경비원은 환하게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하이고 뭐 이런 걸 다 주신 답니까. 그 정도는 민원전화도 아닙니다. 욕이란 욕을 다하시는 주민들도 있는데.. 뭐 일하다 보면 참 너무하다 싶다가도. 이렇게 챙겨주시고 감사하다고 반갑게 인사해주시는 주민들 보면 또 힘 얻고 살아가는 거죠”
그날 이후 나는 경비실에 종종 들러 인사를 드리곤 했다. “아 302호 님, 저번에 주신 커피 다른 경비원분들도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유난히도 추운 겨울, 마음만은 따뜻함이 가득한 채 흘러가고 있었다.
# 11.
“셋, 둘, 하나. 아싸 내꺼!” 맞벌이 부모님이 집을 비우실 때면 나는 친구들과 아파트 놀이터에 모이곤 했다. 가장 좋아하던 놀이는 땅 따먹기. 모래 바닥에 커다란 네모를 그리고 여러 조각을 낸 뒤 땅을 선점하는 놀이다. 나는 주로 가장 크고 가운데에 위치한 땅을 노렸다.
우리 집은 2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친구들이 한 집에 오래 살 때 나는 이리저리 집을 옮겨 다녔다. 새로운 곳으로 옮긴다는 사실이 나는 자랑스러웠다. 이집 저집이 내 집이 된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또 이사를 간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이사를 다녀도 항상 우리 집은 네모났다. 네모난 아파트에 다닥다닥 붙은 문을 열면 또 네모난 공간으로 이어졌다. 네모난 벽에 둥근 장식을 붙이는 것은 금지되었다. 엄마는 내가 벽에 무언가를 붙이려고 하면 나를 혼내곤 했다. 어린 나는 엄마가 동그라미를 싫어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느새 아무리 집을 옮겨 다녀도 다 비슷해 보였다. “엄마는 네모를 좋아해? 왜 항상 네모난 집들을 찾아다녀?” 엄마에게 물었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나는 결심했다. 커서 절대 네모난 집에 살지 않을 것이라고.
이사가 이어지자 친구와 멀어지는 일이 잦았다. 외로워하는 나에게 엄마는 햄스터 한 마리를 선물해주었다. 햄스터도 네모난 집에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둥근 쳇바퀴였다. 햄스터는 네모난 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둥근 쳇바퀴를 돌리고 돌렸다. 우리 집에 쳇바퀴가 있다면 그것조차도 네모난 모양일 것 같았다. 둥근 쳇바퀴를 가진 햄스터가 부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햄스터는 좀처럼 쳇바퀴에서 나오질 못하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무서움에 나는 엄마에게 햄스터를 남에게 줘버리자고 떼를 썼다.
이집 저집을 다니는 것에 익숙하던 나는, 그게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듯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에도 열댓 곳의 집을 다닌다. 달라진 점이라면 더 이상 나는 현관을 넘을 수 없다. 살만큼 다 살아봤다는 것일까. 어느새 아파트에 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네모는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어릴 적 내가 문득 두려워한 네모난 쳇바퀴는 더 이상 내가 들어올 수 없도록 쌩쌩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삼, 이, 일.’ “문이 열렸습니다.” 네모난 엘리베이터, 네모난 치킨 상자. 나는 다른 네모의 쳇바퀴에 들어오게 되었다. 수없이 네모난 상자를 배달하면 어릴 적 땅 따먹기 했던 작은 공간 정도는 진짜 내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엘리베이터 층 숫자와 땅 따먹기 판에 썼던 숫자가 겹쳐 보였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못하고 가만히 발만 내려다보았다.
# 12.
이사를 했다. 새 집은 너무 좋았다. 우리가 엘레베이터 있는 집에 살다니, 아파트라니... 모두가 감격의 감격의 감격을 하며 몇 년간 정든 빌라를 산뜻하게 떠났다. 가족들의 주책은 끊이질 않았다. 모기가 극성이던 밤마다 집이 너무 넓어 모기가 안 잡힌다며 웃음 섞인 짜증을 낸다. 엄마가 불러도 대답 없다며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집이 넓어서 잘 안 들리나봐~' 하며 깔깔 웃는다. 시간 따라 움직이는 볕이 그대로 들어오는 까닭에 창 밖만 봐도 기분이 많이 나아진다. 엄마는 바로 옆에 있는 문화센터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매일 뒷산을 오른다. 반려견에게도 넓은 운동장이 생겼다. 많은 것들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중이다. 이 아파트는 여섯 번의 이사 끝에 정착한 마지막 우리 집이다.
최초의 집은 신도림역에서 구불구불한 골목을 15분 정도 걸어야 나오는 반 지하였다. 유년 시절은 석관동의 한 빌라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엔 성내역에 있는 시영 아파트에서 이 년간 살았다. 재개발 될 아파트로 이사 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반에서 재개발을 반대하는 애는 나 밖에 없었다. 가장 친했던 은지는 어차피 아파트가 다시 지어지면 만나게 될 텐데 무슨 걱정이냐고 했다. 경기도로 이사를 가고서도 가끔 은지에게 친구들의 소식을 들었다. 이사 온 집은 바로 앞에 개천이 흐르는 역북동의 한 빌라였다. 하교길엔 빨래터에 들러 발을 담그고 다슬기를 잡았다. 내 키보다 큰 풀들을 헤치면서 당시 유행했던 'OO에서 살아남기' 흉내 내는 게 재밌었다. 밤엔 개구리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 소리를 가만 듣는 걸 좋아했다. 엄마아빠는 가로등 하나 없는 그곳의 밤이 싫다고 했다. 그 뒤로 귀신 나오던 상가, 비가 줄줄 새던 빌라 5층에 살았다.
가끔은 이게 핀 볼 게임처럼 느껴진다. 쇠구슬처럼 우리 가족은 서울과 경기도 여기 저기로 튀었다. 모든 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구슬이 아무리 벽을 쳐도 견고한 게임 틀은 그대로다. 거쳐온 나의 집들은 그 자리에 다 그대로인 것처럼.
언젠가부터 내 방 큰 창문에 거미가 줄을 치기 시작했다. 몸통이 엄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징그러운 놈이다. 침대에 누우면 거미가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는게 바로 보인다. 가만 놔두니 꽤 크게 집을 짓는다. 쟤는 몇 번의 이사 끝에 이곳에 온 걸까 생각한다. 서울과 용인을 전전했던 시간은 내 한 몸 편히 뉘일 곳을 찾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거미가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이 꼭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인다. 25년동안 우리 가족은 일곱 개의 집에서 살았다. 그걸 떠올리면 허락 없이 남의 집에 집을 짓는 거미를 나는 쉽게 쫓아낼 수 없다.
# 13.
“gōngyù 이거 ‘공유’라 발음하는 게 맞아?” “꽁위라 읽는데, 단어 빨리 외우려면 그냥 사람들이 한 건물을 공유하면서 사는 게 아파트잖아? 그렇게 외워, 단어 위에 성조 붙인다 생각해.”
내가 누구랑 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집 안팎으로야 ‘가족’이 답이 되겠지만 현관 비밀번호를 치기 전까진 낯선 사람들이랑 다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혼자 사는 거라고 떠들어대도 나의 생존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무엇을 얻으려든 우린 남들과 가진 것을 교환하면서 살아간다. 목이 말라 물이 마시고 싶을 땐 생수를 파는 사람을 찾아가 값을 지불해서 얻어낸다. 우물을 파겠다며 혼자 맨손으로 땅을 파진 않는다. 사람들은 집에서 생활하는 삶을 산다. 그러니까 주거 공간이 있는, 잠은 집에서 자면서 생활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내 영역이자 옆집과 윗집 이웃이 있는 아파트 빌딩의 일부 공간이다. 양계장엔 닭장이 있고, 닭장 안에는 닭둥지가 있다. 자기 영역이지만 공동 공간의 일부이다. 나 혼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인지하면서 사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일단 집은 내가 쉬고 싶은대로 쉴 수 있는 안식처라 내 방식대로 행복감을 만끽하고자는 욕구가 솟는다. 내가 내 아드레날린 분비를 자극하고자는 것이 곧 남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는 것이라는 것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베란다에서 흡연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을 듣고, 엘리베이터에 새로 붙은 경고문을 읽고, 담배꽁초 때문에 아파트에 화재가 났다는 기사 링크를 공유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닭둥지 사이에 철조망이 설치 되어있다고 옆 둥지 닭이 날개짓해서 날리는 털이 이웃 닭 둥지로 안들어갈리가 없다.
아파트가 남이랑 같이 사는 공간이라고 와닿았던 건 고등학생 때였다. 학교를 가려고 집 문을 나서면 출근하는 앞집 이웃분을 꼭 마주쳤는데, 눈 마주친 게 어색하다 느낄 틈도 없이 늘 먼저 “Hi there”라고 인사를 건네셨다.언제든 우연히 마주칠 때면 인사를 주고 받고, 소소한 잡담도 하게 되었다. 옆 둥지에 다른 닭이 이사왔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그 전 둥지 주인이 다른 닭이라고 알고 있어서다.
# 14.
양 손바닥이 넘칠 것 같다. 음미하듯 눈을 감고 양 손에 담긴 찰랑대는 것들을 입에 털어 삼켰다. 황금빛 비린내가 입 안 가득 기분좋게 헤엄친다. 한동안 기능을 하지 못했던 윗니와 아랫니가 드디어 상하작용을 재개한다. 쫀득한 식감과 터질듯한 풍미에 굶주렸던 감각이 살아나고 감겼던 눈이 활짝 열린다. 창가에놓아둔 볼록 거울을 본다. 두 볼 가득 부지런히 씹고 있는 내 얼굴이 반갑다.
포만감에 기운을 차리니 내 방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내 침대 벽 너머의 방에서 TV 소리와 여동생의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동생은 21살 대학생으로 지금은 여름 방학 중이라 늘상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만 본다. 예전에는 종종 같이 보자며 나를 찾았지만 요새는 통 저 혼자 보고 웃어댄다. 숨 넘어 가듯 웃어대는 소리에 맞춰 나도 함께 소리내어 웃는다. 같은 순간 같은 웃음을 공유하니 TV를 함께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큰 소리로 웃자여동생의 기척이 뚝 끊긴다. 이젠 같이 웃기도 싫냐. 정 없긴.
식사 후에는 몸을 움직여줘야 한다. 내 방처럼 넓이가 제한된 곳에선 제자리 달리기가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회색이 된 흰 운동화를 신고 끈을 조인다. 제대한 다음 날 엄마가 백화점 1층 매대에서 사줬던 나이스한 운동화다. 두 발이 준비됐기에 두 주먹을 달걀처럼 가볍게 쥔다. 무릎을 가슴까지 올린다는 생각으로 힘차게 발돋움한다. 아니나다를까 내가 운동을 시작하자 응원가가 들리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밴드부인 남동생이 내 운동을 응원하는 소리다.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남동생은 내가 달리기 운동을 하는 내내 묵직한 연주로 내 방 전체를 울린다. 기특한 동생의 마음에 난 더 힘을 내 제자리 위를 내달린다.
오랜만에 격하게 달린 탓인지 바닥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목이 마르다. 창가에 놓아둔 물병이 생각난다. 볼록한 물병에는 물이 반쯤 차있을거다. 두 손바닥을 바닥에 짚고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두 손으로 물병을 들어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물을 들이 붓는다. 금빛 물이 쏟아진다. 아, 비리다.
지난 2일, 구천동의 한 소형 아파트에서 20대 청년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숨진 청년의 입 안에서는 부패된 금붕어 10여 마리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자신이 기르던 금붕어를 먹고 질식사한 것입니다. 고인은 6개월 전 화재로 부모와 두 동생을 잃고, 자신도 심한 화상을 입게 되어 그 후칩거생활을 지속해왔습니다. 같은 동 주민의 말에 따르면 그는 갑자기 크게 웃거나 큰 소리로 뛰어다니는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해 이웃들의 불만을 들어왔다고 합니다. 옆집 주민 A씨는 청년의 웃음 소리에 공포를 느껴 경비원에게 민원을 수차례 넣었고, 아랫집 주민 B씨는 층간 소음에 대한 보복으로 우퍼 스피커를 설치했습니다. 이웃들의 반발에도 청년의 이상 행동은 나날이 심해졌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T대 심리학 교수는 숨진 청년의 행동이 이웃과의 소통을 원하는 몸부림이었을거라 지적했습니다. 쓸쓸한 죽음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외로운 청년이 다다른 그곳에서 이제는 무리와 함께 금빛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고 있길 바랍니다.
# 15.
민들레아파트 6동 304호에는 가수가 살았다. 그는 지독한 연습광이었다. 단지 문제는 내가 303호에 사는 것, 낡아빠진 아파트의 벽은 소리를 차단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가 지독한 음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했다. 싸구려 자재를 쓴 벽 너머 매일같이 들려오는 노랫소리. 잘 부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고백하건대, 그는 노래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벽에 딱 달라붙어서는, “아이 참, 엄마. 진짜 옆집 완전 민폐야.”하고 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그와 나는 이상하리만치 생활 패턴이 겹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목소리가 나의 억울한 일상이 되어버린 순간에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나는 헤비한 록을 부르는 그의 생김새를 멋대로 상상했다. 멀대같은 키, 휘황찬란한 염색 머리에, 혀 피어싱 같은 것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그런 편견어린 생각들 말이다. 머릿속에서 괴물 하나를 탄생시킨 나는 지레 겁먹어 옆집을 찾아가지 못했다. 대신 언젠가 복도에서 만날 일이 있다면, ‘저기요. 당신 노래 정말 못 부르고요, 시끄러우니까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한 마디 꼭 건네겠다고 다짐하며 애꿎은 베개를 퍽퍽 쳤다.
다 늘어진 티셔츠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다가 복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시끄러운 음악에 파묻혀있던 그는 의외로 작달만한 키에 수더분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매사 성실하게 살아왔을 것 같은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는 정말 외양처럼 재미없는 첫 인사를 건넸다. “네, 처음 봬요.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를 만나면 꼭 따져 묻겠다던 포부는 쪼그라들었다. 하필 만나도 이런 타이밍이라니, 정말 이런 것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면접에서 떨어졌다. 가운데 앉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싹 올린 심사관이 생각난다. 옆 사람에게 동기와 포부에 대하여 묻던 그는 나에게 물었다. “지원자는 장을 볼 때 어떤 순서로 봅니까?”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곧, “안쪽에서부터 필요한 것들을 사고 그 다음 식료품을 사서 계산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나의 대답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들어가자마자 있는 것은 식료품 코너인데, 장을 본 적은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 이후로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흐르듯 질문을 던졌으리라. 식료품이 바깥쪽에 있으니 나오면서 사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나의 주장은 그들에게 중요치 않았다. 여하튼, 나는 이 황당한 이유로 원하는 회사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나는 막상 시트콤의 주인공이 되자 엄마에게 전화할 용기조차 나질 않았다. 그냥 침대에 몸을 내던지고 엉엉 울었다.한참을 울다 지쳐 누워있는데, 옆집에서 또 분위기를 깨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선곡은 강산애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여전히 노래는 엉망진창이었다.
‘막막한 어둠으로 별빛조차 없는 길일지라도 포기할 순 없는 거야 걸어 걸어 걸어 가다보면’ 음도 안 맞는 주제에 오늘은 가사까지 여러 번 버벅인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안온한 나의 루틴을 괴롭히던 그 투박한 소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音이었다.
어느 날, 그의 노래가 끊겼다. 흥, 드디어 깨달았구나.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집 문 앞에 포장이사 딱지와 가스점검 고지서가 쌓여갈 때쯤, 나는 그가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행선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낡은 벽을 맞대고 서로의 생존을 확인했었다. 그것은 일종의, 담배를 꼬나물고 서로의 인생을 도닥이는 동료애 같은 거였다.
그 후로 두 해가 지났고, 나는 여전히 303호에 살고 있다. 그가 떠나고 다른 이들이 몇 번 이사를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과 통성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알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이내 그 자리를 비웠다. 나의 옆집에는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적막을 꿰뚫는 목소리가 나에게는 들린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가수는 또 다른 아파트에서 옆집을 괴롭히고 있을까? 낡은 벽을 기대고 우두커니 앉아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그 엉망진창인 음 위로 나는 비스듬히 야윈 몸을 뉘었다.
# 16.
“어디 사냐는 질문, 최고의 브랜드 네임으로 답하세요.” “2221년 SS시즌 한국 아파트쇼 개최”
일 년에 두 번, SS 시즌과 FW 시즌, 한국의 아파트쇼는 각국의 갑부들을 끌어모으는 연례 행사다. 한국은 오랜 기간 아파트를 지어온 역사를 거쳐 아파트 건설 강국으로 거듭났다. 좁은 토지 면적과 높은 인구 밀도라는 한국의 ‘한계’를 딛고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2000년대에 오랜 기간 경기 침체를 겪던 한국은 2100년대에 들어서며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성장’ 없는 ‘분배’는 없다는 기조 아래 무한한 성장을 새로이 꿈꿨다. ‘명품 아파트 강국’으로 거듭난 덕분에 매년 GDP 증가세는 놀라울 정도다.
특별히 전망이 좋은 곳은 해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파트 쇼’ 지역이다. 시즌마다 ‘명품 아파트’ 브랜드들은 새로운 시즌의 ‘아파트 유행’을 만들고 그에 맞춰 아파트 헐고 짓기를 반복한다. 한국은 ‘아파트 쇼’를 주최하고, ‘아파트 펀드’를 운용한다. 각국 부자들은 시즌마다 한국에 와 ‘쇼’에 참관한다. 해당 시즌 아파트에 일주일에서 한달 간 거주하며 투자 상담을 받는다. 이들의 환심을 사서 펀드에 투자하게 하고 전세계 전망 좋은 빈 땅을 개발해 삐까번쩍한 아파트를 지어내면서 한국은 수익을 올린다. 주로 저개발국가의 싼 땅을 매입해 아파트를 짓는 방식이다. 땅과 인건비가 싼만큼 펀드 수익률이 보장된다. 높은 수익률을 위해 아파트 주변에 최고급 보딩스쿨, 교통수단 등도 함께 개발한다. 덕분에 저개발국은 고용률을 높이고 경제성장이 가능해지니 서로에게 ‘윈윈’인 거래다.
한국 땅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공간에는 모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지역에서도 주민들의 합의를 거쳐 아파트 헐고 짓기가 반복된다. 여러 채의 아파트를 갖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아파트가 유행을 따르고 가격을 올릴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비싼 집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미개발 지역으로 고립되었다. 고층 아파트 전망에 미개발지역이 걸리면 아파트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개발 지역은 점점 바깥으로 밀려났다. 고급 아파트 지역에서 먼 곳에 고립되어 더 이상 개발되지 않는다. 높은 인구밀도와 오염물질, 질병 때문에 점차 슬럼화 되고 있다.
한국의 수익구조가 모두 ‘아파트 펀드’에 집중된 탓에 미개발 지역은 더이상 정부의 관심사가 아니다. 최근 문제는 미개발 지역에 유행하는 전염병이다. 고급 아파트 지역 운영의 부산물로 많은 오염 물질이 방출됐다. 정부는 그 오염 물질이 미개발 지역으로 방출된 것을 전염병의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다. 다만 그 사실을 대중에 공개 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고급 거주 지역’ 거주자를 대상으로 방역을 위한 세금을 걷겠다고 했다. 반발이 심했지만 ‘분배’를 이야기하는 진보 정당의 목소리에 간만에 국회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사실 아파트쇼 시즌에 맞춰 전염병이 퍼지면 좋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지만 모두 이것을 직접 언급 하지는 않는다. 이 시대 인권 의식이 한 층 더 상승했다는 흡족함이 고급 거주 지역에 퍼졌다. 다음 달 부터는 미개발 지역 상공에 소독약을 뿌리는 헬기가 하루에 두 번씩 왕복할 예정이라고 한다.
# 17.
구룡. 구룡의 이름은 그냥 구룡마을에서 태어나 붙여졌다. 어머니는 그를 낳자 마자 집을 나갔고 알코올중독인 아버지는 가뭄에 콩 나듯 집에 들어왔다. 갓난아기였던 그를 돌본 것은 옆집 할머니였다. 2020년 현재 구룡은 언뜻 보기에 불편한 곳 없어 보이는 평범한 40대 후반의 남성이나, 그가 걷기 시작하면 왼쪽 다리를 절뚝이는 것을 누구나 쉬이 알 수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다니기 시작한 공장이었다. 더 많은 일당을 준다는 얘기를 듣고 공사판으로 옮긴 것이 화근이었을까. 한창 팔팔할 나이 24세에 그는 고층 아파트를 짓는 공사장에서 철근을 옮기다 그만 떨어져 버렸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더 이상 온전한 다리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구룡은 아내의 도움을 받아 둘이서 택배 기사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일…루미…스..테이크, 아니 일루..미스테..이트!” 요즘 아파트 작명은 누가하는지, 알 수 없는 외계어가 난무하는 걸 보면 세종대왕이 노할 일이다. 찾아 갈 배송지를 더듬더듬 네비게이션에 한 글자씩 입력하던 구룡은 생각했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라서 구룡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입주자의 안전을 위해 택배 트럭의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입주자 회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경비원은 저 멀리 상하차 ‘전용’ 구역을 가리켰다. 오늘 들러야 할 아파트 건물이 스물 두 동... 아내와 한숨을 푹 쉬며 차에서 택배를 하나 둘씩 내리는데 구룡은 ‘전용’ 공간에서 ‘일루미스테이트’ 저 빛이 나는 높은 곳에 사시는 분들과 분리되었다는 왠지 모를 소외감과 절망을 느낀다.
구룡은 아파트 지하에 위치한 입주민 ‘전용’ 편의시설부터 돌기 시작했다. 입주자 전용 독서실, 헬스장, 수영장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완벽한 왕국을 건설했다. 그야말로 지상 파라다이스인 것이다. 이쯤되야 자신도 이런 공간을 ‘전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다 싶다. 누가 상하차 공간을 전용하고 싶겠는가, 쳇하고 구룡이 볼멘소리를 낸다. 다음으로는 각 세대의 문 앞에 택배를 돌리는 순이었다. 다리는 불편하지만 어디 가서 힘으로는 안 꿀릴 자신이 있다는 구룡은 철저한 분업시스템을 도입했다. 구룡이 수레에서 무거운 짐을 엘리베이터에 옮기는 동안 그의 아내는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는 역할을 했다. 5분이나 흘렀을까. 상자를 모두 옮기고 꼭대기층부터 배달을 할 참으로 17층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를 마주한 것은 짜증과 분노가 가득 찬 얼굴들이었다. 책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학생, 유모차를 끌고 나가는 아주머니, 서류철을 든 회사원까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줄줄이 서 있는 모습에 구룡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구룡과 그의 아내는 짐짓 모른 체하며 지나가고 싶었으나 자신들을 매섭게 노려보는, 무시 섞인 그 눈빛들을 견딜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며 구룡과 아내는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사과하며 서둘러 박스들을 마저 옮겼다.
한 주가 지났다. ‘일루미스테이트’에 사는 주민들은 입주자 회의에서 ‘택배기사 엘리베이터 사용금지’라는 새로운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고야 말았다. 절뚝이는 다리로 끝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구룡은 결국 며칠을 앓아 누웠다. 아파트 공화국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판자촌, 구룡마을에 사는 그는 창 밖으로 보이는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바라본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아파트들과 ‘왕’처럼 군림하는 입주민을 보호하는 것은 이들 왕국의 ‘룰’이었다. ‘타워팰리스’, ‘일루미스테이트’… 너도나도 저마다의 왕국을 건설하는 가운데 두터운 성곽 밖의 이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 18.
고등학교 때였나, <사회·문화> 과목이 기억나는데, 그때 나는 시장경제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선생님 이름도 기억이 안 나지만 키가 조금 크고 말랐던 남교사였던 것만 대충 떠오른다. 그는 교과서에 나오는 수요·공급 그래프 얘기를 하면서 설명을 풀었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원하는 수요가 많아지면 물건에 대한 공급이 오르고, 그 둘이 만나는 접점에서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게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정식화한 사람이 애덤 스미스라는 경제학자이고, 이를 그럴싸한 용어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한다는 사실도 덤으로 배웠다. 물론 중간고사에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에 형광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했다.
내가 이 순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런 고리타분한 교과서 내용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 질문했던 한 친구 때문이다. 그 아이는 아파트 얘기를 꺼냈다. 자기 아버지가 아파트 짓는 일을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아파트를 갖고 싶어 하니까 아파트 만드는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높지 않냐고 했다. 그러면 공급이 높아지기 전에 높은 가격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그렇다고 대답해주었고, 그러자 아이는 그런데 아버지가 해고됐다고 했다. 그리고 공급을 늘리려면 노동자가 필요한데, 아버지의 봉급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왜 도리어 자르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질문을 받고 잠시 뜸들이던 선생님은, 이내 그건 공급과잉 때문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이미 너무 많은 공급이 진행돼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단가를 맞추기 위해 노동자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재미있어 졌는데, 반 아이들 몇몇이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는 말들을 일제히 해버렸던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에 저 <시장경제>의 말에 뭔가 받아들이기 이상한 구석들이 넘쳐났던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이지만, 나는 시장경제를 믿지 않는다. 과거에는 협소한 몇몇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적인 이유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지금은 그냥 수치적으로 헛소리라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쟁점은 <그 체제가 헛소리임에도 왜 자꾸 유지되는가?>이다.
3D(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업종은 매우 고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피한다. 하지만 시장의 논리대로라면 필요하기 때문에 높은 단가를 받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재미있는 건 쥐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저런 일을 하면 훗날 병원신세를 질 수밖에 없으니, 그 위험수당으로 고임금을 받아야할 것 같은데, 내실을 따져보면 위험수당은 나발, 기본적인 4대 보험도 없이 현장에 투입되기 일쑤다. 그 잘난 수요·공급 그래프는 어디 간 것인가?
3D일을 하는 노동자가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높은 시급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것 말고는 입에 풀칠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합리적 선택>이란 용어에 있어서, 노동자에게 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라는 형용사 자체가 올 수 없다. 경제학은 반쯤 농담이다. 현대의 시장경제학은, 이렇게 구성된 가격이 타자와의 활발한 교환행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수요·공급그래프로 이전되고, 그럼으로써 가격의 합리적 조정이 벌어진다고 본다. 순진한 생각이다.
그런데도 자본의 나팔수들은 노동유연화 운운한다. 이미 유연성으로는 국가대표 체조선수급인데, 여기서 뭘 더 유연해지란 건가? 노동자더러 인간이 아니라 문어가 되란 얘기인가? 비정규직인 우리 아버지는 작년부터 퇴사수순을 밟고 있다. 회사가 차를 뺏어가고, 물류창고 쪽으로 일을 돌렸다. 거기서 아버지가 얼마나 버틸까?
# 19.
아침마다 택시를 손수 닦으며 인사해주었던 택시 아저씨,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던 건지 계단에 수십 개의 박스를 한가득 쌓아놓은 4층 할머니, 계단과 계단 사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오래된 갈색 장롱에 숨겨둔 비상키 그리고 작은 철장 안에 살고 있었던, 지나갈 때마다 눈과 코 사이를 한 번씩 만져주면 그렇게 좋아했던 택시 아저씨네 토끼 빵이. 초등학생 때 내가 살았던 5층짜리 아파트의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억이다. 우리 집은 5층이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항상 반복되는 그림이었다. 엄마는 몇몇 이웃의 과한 관심을 부담스러워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이웃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좋아했고, 엄마가 만든 전을 이웃과 나눠먹을 때면 내가 가서 드리겠다며 신나했다.
‘공용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현관에 들어오면 엘리베이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24층을 누르면 빠른 속도로 그곳에 데려다 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30층짜리 아파트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간혹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게 된다면, 쭈뼛 쭈뼛 눈치를 보다가 인사를 놓친다. 아, 윗집은 젊은 부부와 초등학생 남자아이, 4살짜리 여자아이가 살고 있다. 층간 소음으로 몇 번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알게 되었다. 윗집의 가족 구성은 어떤지 아는데, 얼굴은 모른다. 한 번은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부탁을 했고, 두 번째는 인터폰으로 통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위층에 엘리베이터가 섰다가 내려오면 긴장한다. 혹시라도 첫 대면의 날이 될까봐.
한국인에게 아파트란 ‘내 집 마련’ 꿈의 대상이다. 그런데 꿈이라는 것에 비해, 치솟는 가격에 비해, 아파트가 주는 느낌은 좋지만은 않다. 아무리 외관상 좋은 아파트라도, 칸칸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닭장’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으며, 빽빽이 들어서 있는 그것들을 보면 마음이 삭막해진다. 층간 소음으로 일어나는 범죄가 매년 발생하고, 경비 노동자의 사망 사고가 벌어지는 곳도 아파트다. 외관상으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초등학교 때 살았던 아파트보다 더 크고, 새것이지만 나에게 더 ‘집’ 같았던 곳은 이전에 살던 곳이었다. 너무 친해지다 보니 생기는 감정적인 마찰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사람냄새’ 가득했던 곳이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같은 모양의 창문을 가지고 있고, 같은 이름의 아파트, 같은 숫자를 가진 동을 읊지만, 정작 서로는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저 여러 개의 컨테이너 박스를 위로 쌓아둔 것 같은 괴이한 모양이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스위스에 지어진 집을 소개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스위스 어느 풍경 좋은 시골 목초지에 지어진 집인데, 건축가와 집주인은 그 집이 최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설계를 기획하였고, 전통적으로 그 지역에서 쓰였던 헛간을 그대로 남겨두는 구조를 택했다. 또한 지역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현지 시공팀을 고집했으며, 집을 완공한 이후에는 하루 동안 주민들에게 집을 개방했다. 이들에게는 집이 ‘내가 절대 침해받지 않아야 하는 공간’이나, ‘투자 대상’ 혹은 ‘과시용’이 아니었다. 집을 마치 하나의 생명처럼 대했고, 그 집이 지역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은 스위스와 달리 땅은 좁고 인구는 많기에 아파트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형태의 주거공간이 되었다. 모양이 개성이 있다거나, 자연친화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우리 집’이라는 점은 스위스의 그 집과 같다. 나는 아파트를 볼 때마다, 칸칸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각 집마다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상상한다. 각 가정의 삶이 가득한 이 아파트에서,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들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들이 우리 집과 벽을 맞대고 살고 있는지는 알고 싶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두 살 되어 보이는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나에게 인사해준 적이 있다. 나도 그렇게 윗집과 인사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아파트가, ‘우리 집’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20.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차 창가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 그리고 초가집들이 어우러져 있는 풍경. 엄마는 오랜만에 들린 고향이 반가운지 보이는 집마다 족족 손가락을 뻗어 보이며 ‘누구누구 댁’인지를 입에 올리며 그들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몇십 년 전의 동네 이웃들을 기억해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하긴, 옛날에는 옆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고 지낼 정도로 그사이가 가까웠다고 하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엄마의 옛 이웃 소개가 끝나갈 때쯤,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할아버지의 초가집에 도착한다. 투박하면서도 예스러움이 느껴지는 초가집 한 채는 고층 아파트가 주는 느낌과는 분명 다른, 깊고 오묘한 느낌을 준다.
엄마와 달리 나는 태어나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다. 이사도 여러 번 다녔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집은 없다. 서울의 집,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생존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을까. 벌집 같은 아파트는 이웃 간의 물리적 거리는 좁혀주었지만, 심리적 거리는 좁혀주지 못했다. 집에 숟가락 개수가 몇 개인지는 알 턱이 없고, 내 이웃이 뭐 하는 사람인지, 가족은 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괜히 물어봤다가는 오지랖 넓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쉬우므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편이 낫다. 그래도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이사하면 떡 돌리며 인사를 나누던 문화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마저도 옛날얘기가 되어버렸다. 가끔 벽을 뚫고 들려오는 싸움 소리에 ‘사람 사는 집 다 똑같구나’하는 생각을 곱씹게 될 뿐이다.
나와는 사뭇 다른 성향을 가진 엄마는 이웃들에게 관심도, 정도 많다. ‘촌사람’이어서 그렇다나. 하지만 그간 잦은 이사 탓에 이웃들과의 관계는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한 집에 둥지를 틀게 되면서 엄마는 자연스레 앞집, 옆집, 윗집, 아랫집의 소식을 줄줄이 꿰게 되었다. 하루는 밖에서 돌아온 엄마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같은 층에 사는 아저씨 한 분 돌아가셨대” 하는 것이었다. 평소 보이던 아저씨 대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주머니가 그 자리를 대신해 의아하긴 했었다. 하지만 별스럽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고인이 되셨다고 한다. 늘 스포츠맨의 차림새에 건강해 보이던 분의 부고 소식은 더없이 갑작스러운 소식으로 다가왔다. 비록 그 아저씨와 나 사이에는 0.1초간의 짧은 눈 맞춤, 그리고 1초도 채 안 될 것 같은 인사, ‘안녕하세요’가 다였지만 충격은 꽤 컸다.
엄마의 ‘오지랖’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그분의 죽음을 모를 뻔했다. 세상을 뜬 아저씨의 유품을 그의 가족들이 2~3일에 걸쳐 정리하는 걸 보았다. ‘그래도 가족이 있어서 다행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매달, 이 사회에는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를 ‘무연고 사망’이라고 칭한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 몸은 수개월이 지난 뒤, 코를 찌를듯한 냄새를 풍기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한 줌의 재가 될 수 있다. 인구과밀의 도시 서울, 빽빽하게 들어선 벌집 아파트들 속 누군가는 오늘도 타인의 온기를 잃어버린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 21.
오늘은 수학 학원을 가는 날이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 놀이터에서 논다고 했는데...” 칭얼거렸지만 엄마는 받아주지 않았다. “너 지난번에 수학 시험 50점 맞았잖아. 수학 학원 빠질 생각 하지마.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왜 분수의 덧셈 뺄셈이나 사각형의 넓이를 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영어 학원은 바로 집 앞에 있지만 수학 학원은 학원 봉고차를 타고 15분은 가야 도착한다. 아마 학원에 갔다 오면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호한 엄마의 얼굴을 뒤로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승강기 버튼을 누르자 꼭대기 층에 있던 승강기가 천천히 내려왔다. 최대한 학원을 늦게 가고 싶어서 이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야속한 승강기는 어느새 1층에 도착했고, 터덜터덜 아파트 밖을 나섰다. 그 순간, “쿵” 갑자기 무언가가 뒤로 떨어졌다. 뭐지? 소름이 돋았다. 왠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할 것 같았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형태가 아닌 사람이 있었다.
J는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깼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몸이 덜덜 떨렸다. 이미 20년이 지난 일이다. 새벽 5시. 출근 시간은 멀었지만, 일어난 김에 준비를 시작했다. 20년 전, 살던 아파트에서 거주민 한 명이 투신 자살을 했었다. 학원을 가려고 준비를 하던 한 초등학생 뒤로 그 사람이 떨어진 것이 화제였다. 더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일이었다. 어린 J는 시신을 본 직후 혼절했다. 일어나 보니 병원이었고 울고 계신 어머니와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모가 옆에 계셨었다. 어머니는 학원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며 자신을 책망하셨다. 그때 이모가 덧붙인 한마디. “그래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아파트값 떨어지면 어떡하니?”. 출근 준비를 위해 양치질을 하다가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세면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조카 앞에서. 그런데 집값 걱정이라니. 지금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이모의 얼굴과 시신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다 지난 일이야. 몇 번의 심호흡을 해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그 사건 후 J가족은 예전에 살던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원래는 같은 동네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고층 아파트 근처에 갈 때 마다 J가 발작을 일으켜서 아파트에 살 수 없었다. J 가족은 변두리에 있는 단독 주택에서 거주하기 시작했고, J의 발작 증세는 점점 나아졌다. 전자레인지에서 먹다 남은 밥을 꺼냈다. J는 밥알을 씹으며 어차피 지금 월급을 모아서는 절대 서울의 아파트에서 살 수 없으니 이 정도 트라우마 정도야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혼자 밥을 먹다 보니 헛헛하여 텔레비전을 틀었다. ‘종합 부동산세’를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이걸로 돈을 버는 것이 죄입니까?” J는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또 아파트 얘기다. 이제 어렸을 때처럼 발작 증세는 없지만, 여전히 아파트에 관한 얘기를 지속하여 들으면 속이 좋지 않다. 요즘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황급히 텔레비전을 끄고 나갈 채비를 했다.
회사의 점심시간, J는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아 식사를 건너뛸까 하다가 그냥 먹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대화 주제가 부동산이다. J와 연배가 비슷한 A사원은 청약 주택 당첨만을 기다린다고 한다. “청약 주택 말고는 집을 구할 방법이 없어요. 사회 초년생한테는 전세도 사치죠.” J보다 5년 먼저 입사한 B사원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맞아요. 저도 서울에서 집 얻는 건 포기했어요. 요즘은 경기권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J가 속해 있는 팀의 팀장인 C팀장이 끼어들었다. “ 요즘 젊은이들 집 때문에 고민이 많지. 그래도 거거 다주택자들 규제하는건 너무 간 것 같지 않나?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그 것 밖에 없는데. A씨, B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돈 있으면 자기들도 그렇게 할 거면서. 열심히 산 게 죄가 되는 세상이라니까? J씨 갑자기 왜 그러는가?” J의 눈앞이 하얘졌다. 사시나무 떨 듯이 몸이 떨려왔다. “저... 오늘... 반차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C팀장은 갑작스러운 J의 요구에 당황했지만, 누가봐도 J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최근 들어 J의 몸이 꾸준이 좋지 않아왔기에 C팀장은 우선 J를 보내주는게 맞다고 판단했다. “자네 요즘 왜 이래? 건강 관리도 능력인거 알지? 일단 오늘은 들어가봐. 반차 처리해 줄테니.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지?”
J는 회사 근처에서 택시를 잡았다. 다 지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최대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더 이상 아파트 얘기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택시에서는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 아파트 재건축 조합장님께서는 왜 임대 아파트 혼합 건축을 반대하시나요?” “저희가 지금까지 버텨 온 게 무엇 때문인데요.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임대용 아파트가 함께 지어지면 그 임대 아파트 거주민들에게도 좋지 않을 겁니다. 그 요즘 휴거? 엘사?라고 하면서 놀림받는 다면서요. 그 애들한테 좋겠어요?” J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휴대폰에 있는 아무 노래나 틀고 창문을 열어 창밖을 보았다. ~캐슬, ~스테이트, 고급 아파트 단지들이 밖으로 보였다. 어지러웠다. 20층이 넘어가는 아파트들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 물결이 이모의 목소리와 뒤섞여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아파트 값 떨어지면 어떡하니?”.“아파트 값 떨어지면 어떡하니?” J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자신의 원룸에 도착하기 전까지 눈을 뜨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22.
‘아~싸! 맑스 베버 뒤르켐! 맑스 베버 뒤르켐!’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배운 ‘술 게임’은 ‘맑스, 베버, 뒤르켐’ 이었다. 21세기 사회학도는 ‘프라이팬’ 게임 리듬에 저명한 사회학자 이름을 갖다 붙여가며 놀았다. 그러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손쉽게 벌칙자를 골라낼 수 있는 ‘아파트’ 게임이나 무작정 함께 마셔야 하는 ‘공산당’ 게임을 하곤 했다. 그렇게 자본주의·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강의실이 아닌 술판에서 먼저 배웠다.
당시 선배들에게 대놓고 말할 순 없었으나 속으로 “참, 유난이다.” 싶었다. 전공에 귀천이 어디 있으련만, ‘사회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하나같이 씁쓸한 반응이 돌아오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가 저리 신이나 게임까지 만드나 한심했다. 웃긴 집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딱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누구 하나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처음 접했을 땐 매우 낯설었다. 첫 MT에서 배운 것은 반성폭력·권위주의였다. 당시 나는 권위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던 우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 집단이 술과 존댓말과 배려가 공존하는 미묘한 공간이라 느껴졌다.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과에서 겪었던 낯섦에 대해서 토로하자, “너넨 재미없는 집단이다.”라고 놀리곤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술자리에서 어떻게 재밌게 노는지 알려주곤 했는데, ‘병신샷’과 ‘러브샷’이 난무했다. 또 왕이 신하들에게 신체적 접촉을 권유하면서 까르르 웃곤 했다. 하나밖에 없던 친구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스스로 ‘병신샷’을 외치는 게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괜히 게임을 무마시켰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에서 장애인의 인권을 운운하면 정말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돼 의견을 덧붙이진 못하고 술이나 마시자며 회피했다.
당시 신입생이 되고 얼마 안 가 대학가에서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크게 문제가 됐다. 모교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의 대학에서 폭로가 끊이질 않았다. 단톡방의 존재 자체가 문제이기도 했지만, 학과 내에서 쉬쉬하려는 분위기가 만연하다는 점이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반성폭력을 주창하던 우리 집단도 단톡방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남학생 동기들의 단톡방에서 여학생의 외모를 쉬이 평가하고 있다는 걸 한 친구의 양심고발을 통해 알려졌다. 어쩌면 성희롱이 난무하는 다른 사례들에 비해서 그 수위가 낮지 않냐고 되레 반발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집단은 쉬이 넘기지 않았다.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이 문제는 여성학 교수님과 함께 논의까지 됐으니 말이다.
올해는 코로나라는 변수로 인해서 대학문화를 즐길 기회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 내 군기 문화, 성폭력 문화가 말끔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잔존하고 있다. 관습은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습관화될 때 바꿀 수 있다. 재미없는 사람들이 만든 게임과 규칙이 당장은 우습게 여겨질 수 있지만 나아가 한국식 권위주의 문화를 탈피하는 작은 시도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 23.
‘진짜 저 놈은 제정신이 아이다. 예쁜 의사 마누라를 떡하니 두고 와 바람을 피노?’ 우리 엄마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며 주말 저녁마다 TV를 향해 거친 말을 쏟아 부었다. 거실에서 울려 퍼지던 엄마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나도 어느 샌가 엄마 옆에 앉아 감자칩을 먹으며 드라마에 흠뻑 빠져버렸다. 소위 사짜 직업인 돈 잘 버는 의사, 심지어 외모마저 완벽한 아내 지선우와 이룬 행복한 가정을 두고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는 이태오.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는 스토리다.
결국 태오는 부족함이 없던 행복한 가정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젊은 여다경과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그 행복은 역시나 길지 않았다. 여다경에게 버림을 받은 태오의 곁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행복의 조건을 다 갖췄던 태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인간이 이렇게나 욕망 앞에서 멍청한 존재가 된다니. 그저 욕망 때문에 자신이 가지 모든 것들을 날려 버리다니. 정말 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바랄게 없던 그는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바람을 핀 것일까.
그의 멍청한 행동은 ‘요구(要求)’의 이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요구를 욕구와 욕망으로 구분한다. 종종 우리는 욕구와 욕망을 혼동해서 쓰곤 한다. 그러나 욕구와 욕망은 분명 다른 존재다. 가령 배가 고파 밥을 먹으려는 것은 욕구다. 반면 즐기기 위해 캐비어, 샥스핀 등 진귀한 음식을 찾는 것은 욕망이다. 더위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입으려는 것은 욕구이지만, 사치를 위해 에르메스, 샤넬을 찾는 것은 욕망이다. 이처럼 욕구는 ‘생리적 요구’로서 노력하면 어떻게든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정신적 요구’로서 어떻게 해도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이미 행복한 가정을 이룬 태오의 생리적 욕구는 충족되었고, 그 이상의 것을 바라던 탐욕스러운 욕망이 그를 망친 것이다. 그렇게 욕망은 종종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폭군의 모습으로 둔갑한다.
부동산 문제 또한 인간의 부를 향한 욕망으로 인해 탄생했다. 그 중에서도 아파트는 대표적인 투기 수단이다. 아파트 값이 매년 오르고, 눈 앞에 아파트는 이렇게 많은데 정작 내 집은 없는 아이러니한 현상은 태오의 불륜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주거환경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다. 그러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아파트를 10채, 20채씩 보유하고 있는 것은 탐욕스러운 욕망이다. 좋은 교육 조건과 편의 시설이 몰려 있는 서울에 살고 싶은 욕망, 불로소득인 부동산을 이용하여 한탕 해보고 싶은 욕망이 맞물린 것이다. 사람들 개개인의 욕망이 극대화되어 탄생한 주거문제는 결국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그 안에 있다.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면 해결책이 보인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만 맴돈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주거문제'가 그렇다.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근본적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부동산 문제는 수요 자체를 억제하지 않으면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단순히 현 상황을 해소하는 것이 아닌,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보유세 인상’은 수요를 억제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미 우리 사회의 분열은 시작되었다. 태오의 마지막처럼 우리 사회가 파멸에 이르지 않게 하는 해결책이 시급한 때이다.
# 24.
그야말로 명품 단지. 우리 아파트의 정체성이다. 도보 3분이면 되는 초역세권, 초, 중, 고등학교, 대형마트, 백화점에 유명 학원가까지 없는 게 없는 우리 ‘다이아몬드 캐슬’. 아파트 이름에 걸맞는 입주자인 교수님들, 의원님들, 사장님들도 아파트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신다. 그런 우리 아파트에 단 하나, 흠결이 존재한다. 5층부터 15층까지 입주해있는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다.
처음 정부의 소셜믹스 정책 얘기가 나왔을 때, 설마 그 믹스의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개한 분양 대상자들이 모인 입주 설명회에서 건설사 대표는 눈치를 보며 주절댔다. 15층까지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살기는 할 테지만, 입구도, 비상계단도 모두 철저히 분리되어 있을 것이라고. 나 참, 어이가 없고 열불이 나서 얼굴이 다 뜨거웠다. 그 사람들하고 겹치는 생활 공간이 분명히 생길 텐데 어찌 책임지려고? 아니 애초에, 왜 다 같이 믹스돼서 살아야 하는 건데? 그들이 내는 돈과 우리가 내는 돈이 엄연히 다르고 그들의 위치와 우리 위치가 완전히 다른데.
불만족스러웠지만 마주칠 일이 없는 구조라고 장담하는 건설사 대표의 말을 믿고 입주했다. 아니나 다를까, 단지 내 키즈카페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임대 주민을 마주쳤다. 살고 있는 동과 호수를 물어 본 점원이 이 곳은 분양 주민들만 이용 가능하다고 친절히 설명하자, 그 사람은 교양도 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신분 차별하냐, 자기 애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난동을 피우던 그 사람은 카페 정책이라며 어쩔 수 없다는 점원의 일관된 태도에 씩씩대며 자리를 떴다. 카페를 나서며 점원에게 슬쩍 웃어보이며 말했다. “어휴… 힘드시겠어요. 참 경우 없는 사람들 많아요, 그쵸?”
얼마 전에는 우리 아파트 이름이 뉴스에 걸렸다. 음식 배달 기사에게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게 했다며,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는 귀족의식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며 뉴스 댓글 창에 주민들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 계단을 걸어 올라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별 사소한 것을 가지고 유난들이었다. 음식 냄새 때문에 엘리베이터 타는 사람들이 겪을 불편함을 배려하는 우리 아파트의 품격 있는 규칙들 중 하나일 뿐이다. 가만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돈 있는 이들을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그러니 도무지 돕고 싶지도, 믹스돼서 살고 싶지도 않은 거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 사건으로 우리 아파트의 명망을 끌어내리려고 또 혈안이 될 게 눈에 선하다. 이 일 때문에 가격이라도 떨어지면 난 정말… 상상만 해도 혈압이 올라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오늘 새벽, 우리 동 11층 임대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 모두 잠에 든 터라 대피가 그리 신속하지 못했다. 그래도 17층부터 35층까지 모든 가구는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무사히 대피했다. 문제는 15층 임대 가구들이었다. 임대 층의 비상계단은 1층부터 15층까지만 이어져있도록 건축돼있어서, 옥상 대피가 불가능했다. 임대 주민과 분양 주민을 분리하려는 건설사의 아이디어였다. 하필이면 11층에 불이 나 15층 사람들이 11층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비상계단까지 불이 퍼져 있었다. 결국 유독가스 때문에 15층 주민 몇 명이 죽었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도 사람인데. 하지만, 이 문제로 아파트 건축 구조를 탓할 언론과 대중들을 생각하면 그 안쓰러운 마음도 싹 가신다. 법에 저촉 되지도 않는 비상계단 구조를 물고 늘어질 테지만, 진짜 문제는 구조가 아니다. 사망의 진짜 원인은, 자기 집 화재 경보기를 제 때에 점검하지 않은 1107호 주민이다. 다이아몬드 캐슬의 대표로서, 우리 아파트의 위상을 떨어트린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내일 비상회의를 개최하겠다는 메시지를 17층부터 35층 주민이 모인 단톡방에 전송했다. 이 진짜 원인이자 사태의 책임자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내일 결정이 날 것이다.
# 25.
나의 첫 집은 아파트였다. 4층짜리, 5층까지 있었지만 4는 재수가 없는 숫자여서 4층이 없는 낮은 아파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빠 회사의 사택. 그 중에서도 단지 입구에서 봄이면 벚꽃이 만개해있는 오르막길로 10분쯤(아니 5분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은 시간 개념이 잘 없으니까) 올라가야 있던 7동은 회사에서 사무직에 있는 직원들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른 동과는 다르게 화장실도 입식이었고 욕조도 있었다. 7동의 엄마들에겐 그게 나름 자랑스러웠던 일인 것 같다. 그들은 다른 동과는 어울리지는 않았고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백화점에 장도 보러 다니고 서로 애를 봐주기도 하고 서양음식이라며 카스텔라나 피자 같은 것들을 구워 나눠먹기도 했다. 진짜 피자였는지 그냥 피자모양을 한 빵이었는지는 이제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서양’음식을 해먹는다는 자체가 중요했던 것 같다.
내가 5살 때쯤 사택을 떠났지만 그 후 5년 정도 더 나는 아파트에 살았다. 사는 집은 전세였지만 어린 나이에도 얼핏 들어 부모님이 아파트를 한 채 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가격이 오르지 않아 팔긴 그렇고 오빠와 내가 좀 더 크면 그리로 이사갈 수도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뉴스에서 한창 IMF로 떠들어대던 어느 날 밤, 아빠가 밤에 만취해서 모르는 아저씨들과 함께 몰려왔다. 차장님을 연신 불러대며 아빠를 껴안으며 울던 그 아저씨들과 그 사이에서 함께 울던 아빠. 그 사이에서 나는 뭣도 모르면서 다 큰 남자들이 다 운다는 공포감에 함께 울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아빠에게 해고할 후배직원들의 명단을 뽑으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그에 불복한 아빠는 결국 사표를 써야했다고 후에 전해들었다. 우리집에 함께 몰려왔던 그 후배직원들은 아빠 뒤를 따르겠다며 울었던거라고. 왜 그랬을까.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가족은 커녕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감이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아빠는 그 후로 한 번도 그 직원들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동안 내 삶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빠의 퇴직금으로 우리는 또 한 번 다른 아파트에 전세로 이사를 했으며, 아빠는 하루종일 집에 있었고 엄마와 아빠가 자주 다퉜다는 것 외에는.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아빠는 주식으로 퇴직금과 저축을 몽땅 날린 것도 모자라 어마어마한 빚을 남겼다. 오빠와 나는 할머니집으로 보내졌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나의 아파트에서의 삶은 끝이 났다. 1년 후 다행히 우리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며 우릴 책임지는 걸로 결론을 냈다. 이 후 500/30, 1000/40, 2000/30… 매 번 다른 보증금과 월세의 다세대주택들이 우리를 반겼고 우리는 그 상황에 적응했다. 어쨌든 집은 있는 거니까. 오히려 아파트의 삶이 잘 기억나지도 않는 꿈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아파트가 뭐 대수라고. 그냥 집이 다 똑같지 뭐.
그 후로 나는 대학에 입학하며 서울로 상경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는 일주일에 한두 번 통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날도 반 정도는 의무적으로 엄마와 통화를 하던 중에 엄마는 갑자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때 그 아파트는 어떻게든 쥐고 있을 걸 그랬나싶다.”
“그럴 돈은 있었나? 세입자한테 전세금을 못 줘서 집도 넘긴거라며?”
“그건 맞는데… 니는 아파트 살 때 안좋더나?”
“내야 뭐 어릴 땐데 좋고말고 할 게 있나?”
“엄마는 참 좋았거든. 아파트는 처음 살아봐서. 씻을 때 춥지도 않고 뜨거운 물 안 끓여도 되고. 놀이터도 있어가 니랑 오빠 놀기도 좋고.”
“그게 뭐야. 별 것도 아니네.”
“나중에 니는 꼭 아파트 살아라. 알았나? 취업하면 쓸 생각만 하지 말고 열심히 벌어가지고.”
“요새 아파트가 얼만데? 월급 모아서 어느 세월에 아파트에 사는데?”
“그래도. 아파트 살아라 아파트. 엄마처럼 살지말고.”
‘그냥 집이 다 똑같지 뭐.’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난 말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아파트란 어떤 존재였을까.
# 26.
제 25회 한국어능력검정시험 문제지
A 파트는 독해 영역입니다. 제시문을 읽고 문제에 대한 답을 고르세요.
제시문 (1)
“엄마 나 오늘 친구 집에 놀러갔다왔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현이가 새로 사귄 친구 성빈이와 놀다 왔다고 자랑을 했다. 전에 학교에 갔을 때 본 성빈이는 참 부티나는 친구였다. 잘생긴 얼굴에 옷도 명품을 입었다. 분명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을텐데 우리 현이가 기 죽으면 어떡하지 문득 걱정이 됐다. “와 우리 현이 재밌었겠다~ 근데 성빈이는 어디 산대?”, “아 성빈이는 여기 옆에 ‘내’ 아파트에 살아!”. 내 아파트가 어디지? 요새는 친구들끼리 아파트도 찜하고 노나? 다음 날도 성빈이와 놀기로 했다는 현이를 차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나는 어제 현이가 ‘내 아파트’라고 부른 이유를 알아챘다. ‘내 아파트’가 아니라 ‘L H 아파트’였던 것이다. ‘임대 아파트였잖아? 부모가 분수도 모르고 애 명품 옷 입혔던거야?’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아니, 그럼 우리 현이가 그 동안 임대 아파트 사는 애랑 놀았던거네?’ 성빈이와 놀고 들어온 현이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A )". 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시문 (2)
정부가 오늘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공급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공공임대주택을 11만호 이상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공급 분의 대부분이 오피스텔과 빌라를 매입해 개조한 것이라 수요가 아파트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정책이 발표되자 서민들은 이제 자기 집도 못 사고 평생 임대료 내면서 살라는 뜻이냐며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거리 인터뷰에서 만난 시민 장 씨는 “내 집 없이 임대료 내면서 사는 것도 서러운데, 심지어 임대 아파트도 아니고 임대 빌라에 들어가서 살라고 하니까 화가 나죠”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한 여당 의원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내 집 마련, 아파트에 대한 환상을 버리셔야 합니다. 임대주택도 살기 좋아요. 내가 어제 가봤더니 우리 아파트랑 별 차이도 없더만 뭐.”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해당 의원은 현재 서울의 고급 신축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문제 1) 제시문들을 읽고 5명의 친구가 토론을 하고 있다. 다음 중 제시문의 내용을 가장 이해하지 못한 친구는? (답 : ⑤)
① 무 : 제시문 (1)의 (A)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성빈이와 어울리면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더 이상 같이 놀지 말라는 내용일거야
② 갑 : 우리 사회에는 임대 아파트 주민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적 편견이 존재해
③ 을 : 임대 아파트나 임대 주택에 들어가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거야
④ 병 : 정부는 임대가 아닌 ‘내 집 마련’을 하고 싶어하는 서민들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⑤ 정 : 정부의 임대 주택 공급 확대로 부동산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
<해설> 한국 사회에서는 부동산을 대표적인 부의 축적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얼마나 좋은 집에 사는가가 마치 계급과 같아 ‘좋은 아파트를 사는 것’은 삶의 최종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임대 주택 주민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만연한 것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임대 주택 공급을 늘리는 대책은 실질적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27.
이사 온 지 3개월도 채 안되지만, 옆집 윗집 아랫집 사정이 눈에 훤하다. “다녀올 게” 매일 같은 시간에 들리는 이 소리는 옆집 1705호 사는 아저씨가 출근한다는 이야기다. 1703호 사는 집에는 어린이집 가기 싫어하는 애가 있다. 할아버지가 손주를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신발은 벗어 던지고, 울며 불며 가기 싫다는 애를 한 손으로 꽉 잡고 엘리베이터까지 데려간다. 윗집은 중학생 애들이 발걸음이 쿵쿵 대고, 아랫집 아저씨는 1시간엔 한번씩 베란다로 담배를 피러 나온다.
서로서로 배려하는 게 기본인데, 이 아파트 사람들은 배려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고통을 나만 겪는 건 아니다. 아파트 게시판과 엘리베이터에는 서로 쪽지들이 난무한다. ‘13층에 호수는 안 밝히겠습니다. 밤마다 노래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요.’, ‘802호 한 밤 중에는 화장실 물 좀 조심해서 내려주세요’, ‘담배 좀 나가서 피워주세요’처럼 호소문들이다. 심지어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욕설 쪽지들을 보면서도 나도 끄덕여진다. 나 혼자 배려하면 뭐하냐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이 들지만, 난 그 사람들과 똑같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최근 재택근무를 계속하게 되며 이런 자잘한 스트레스가 더 커졌다. 고전적이지만 해결 방법은 식도락이다. 예전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해결했어야 했지만, 이젠 그렇게 에너지 낭비할 필요도 없다. 책상에 앉아 주문만 하면 맛집 음식이 조리, 반조리로 배달된다. 옆집, 윗집의 시끄러운 소리에도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문으로 넘어오는 잿빛 연기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다. 오늘은 어떤 음식을 먹어볼까 하는 생각에 일어난다. 음식을 집에서 배달해 먹으니 정리해야 할 상자가 늘지만, 포장지를 풀며 맘속에 응어리를 푼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달랐다.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부스럭 소리에 불쾌하게 잠에서 깼다. 평상시보다 더 심하게, 심지어 내 집 문 앞에서. 참다 못한 나는 결국 한 소리 하려고 문을 열고 나섰다. 아침부터 남의 집에서 소란 피우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저희 집 앞을 청소하는 김에 아가씨 집 앞도 좀 치우려구요.” 아주머니는 화난 내 얼굴도 무색하게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했다.
자연스레 집 앞을 확인하니 과거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집 앞에 가득했던 상자와 스티로폼, 비닐들이 사라져 있었다. 재활용 장소까지 번거롭게 매일 나가는 게 싫어 집 앞에 모아두던 재활용품, 쓰레기들이 다 없어진 것이다. 공동 공간에 안일하게 생각하며 재활용품을 방치한 게 배려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며 낯이 뜨거워졌다. 난 아파트 다른 사람들처럼,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도 더 불편한 행동을 했다. 아주머니의 웃는 얼굴이 내 눈에 비치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28.
우리 집 고양이 루미는 집안의 서열 정리자다. 누가 가장 인기 있고, 권력자인지 루미의 마중 인사가 알려준다. 아파트 번호키를 누를 때, 선거의 개표 방송은 시작된다.
기호 1번: 빠르게 띵띵. 틀렸다. 다시 쉴 틈 없이 띵띵띵띵. 철컥, 문이 열린다. 항상 급하게 누르다 번호를 틀리는 사람. 두 번 시도후에 문을 여는 사람, 바로 나다. 문을 열자 마자 루미가 뻬꼼 보인다. 어느새 두 앞발을 쭉 뻗어 중문에 대고 야옹야옹 울고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호 2번: 아주 아주 천천히. 독수리 타법으로 띵—-띵—-띵—-띵. 철컥, 문이 열린다. 걸어 들어와 중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다. 거실에서 “나 왔다!” 소리쳐도 털 끝 하나 보이지 않는다. 루미는 자기 집에서 편하게 숙면 중이다. 아빠의 귀가 소리임을 안 것이다.
기호 3번: 1시간 뒤, 일정하고 정확한 속도로 띵-띵-띵-띵 철컥, 문이 열린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중문을 열자, 루미는 잠결에 스멀스멀 나온다. 냥! 소리 내며 머리를 엄마 다리에 슥 비빈다.
개표 결과: 1등은 바로 나, 2등은 엄마, 아빠는 4등이다. 3등은 루미가 차지했다.
이렇듯 고양이는 아파트 출입문 번호키를 누르는 속도로 가족을 구분한다. 번호키를 누르는 것조차 각자의 속도가 있듯, 인생에서도 자신만의 속도가 존재다. 다른 개성과 특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같은 구조, 같은 생김새의 아파트에 우리는 동일하게 우겨 넣어진다. 아파트에 살겠다는 욕망으로 개성 표출 욕구를 잠시 묻는다. 창문 하나, 문 하나, 같은 벽지, 같은 바닥, 같은 조명을 수용한다.
사회는 아파트처럼 정해진 관습과 틀로 우리를 구속한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연애는 항상 비밀이 되어야 한다. 공무원은 문신을 하면 안 된다. 회사원은 항상 단정하게 어두운 계열의 양복을 입어야 한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기 위해, 결혼 자금을 위해, 피규어를 모으기 위해 잠시 참는다. 사회가 정한 규칙의 틀에 몸을 꼬겨 넣는다. 아파트에 살겠다는 욕망, 각자 인생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낸다.
같은 틀에서 생존하려는 인내와 억압속을 열어본 적이 있다. 아파트가 아니라 집 안으로 들어가면 진풍경이 펼쳐진다. 분명 똑같은 아파트인데 내부는 천차만별이다. 골프를 좋아하는 민수 집 벽장은 색색깔의 골프공으로 가득했다. 바닥에는 소음 방지 골프 연습 매트가 깔려 있다. 커피를 좋아하는 유나 집은 커피향으로 가득했다. 또 옷을 아끼는 만큼 옷 방을 따로 만들었고, 스타일러도 두대나 있다. 집안보다 밖에서 많이 생활하는 내 집은 침대와 큰 스피커 하나가 전부이다.
사회 구조에 굴하지 않고 ‘내가 행복한 삶’을 위한 방법을 최대한 모색하는 우리 모습이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직업을 갖지 못해 불행하다는 고민이 올라왔다. 그때 답을 해준 법륜 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 본인의 현실을 탓하지 마세요. 현재 상황에서도 충분히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묶어 두는 것 같은 현실은 더 뚜렷한 자신만의 개성을 발현할 기회가 된다. 벽돌 시멘트 바닥 사이에서 꽃을 피워 행인에게 더 찐하고 깊은 감동을 주는 저 노란 풀꽃 민들레처럼.
# 29.
12만 9천 원. 신발치고는 비싼 가격이다. 10만 원이 넘는 신발은 처음 신어봤다. 쥐꼬리만 한 아르바이트 월급 때문에 한 달 내내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배송만 늦추는 법.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가죽, 감각적인 나이키 로고, 그리고 세상 편안한 착화감. 나의 ‘에어포스 1’은 기대를 충족하고도 남았다. 이런 신발을 내가 또 살 수 있을까? 새 신을 신고 한번 뛰어봤다. 때마침 친구에게 술이나 한잔 마시자고 연락이 왔다. 그래, 기분이다. 설레는 맘으로 신발을 신고 출격했다.
친구를 만나자마자 신발을 확인했다. 친구도 똑같은 에어포스 1을 신고 있었다.
“너도 똑같은 신발 샀네?”
“무슨 소리야, 네 신발이랑 내 신발은 엄연히 다르지!” 친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다시 친구 신발을 유심히 봤다. 내 신발에는 없는 자그마한 디테일이 하나 눈에 띄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빨간색 “Supreme” 로고였다.
“진짜 다르네? 뭐야 얘는? 콜라보 제품이야?”
“맞아. 이번에 나이키랑 슈프림에서 합작해서 나온 한정판이야. 지금 리셀가가 50만원이 넘어.” 친구가 으스댔다. 저 조그만 로고 하나에 가격이 4배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제품 질이나 착화감은 뭐 달라진 게 있는 거야?” 내가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없어. 근데 봐봐 로고가 들어가서 진짜 예쁘지? 일반 에어포스 1이랑은 급이 달라.” 친구가 신난 듯이 떠들었다.
‘급이 다르긴…. 저것만 있으면 뭐해, 50만 원 값을 해야지.’ 혼자서 구시렁대었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괜히 친구의 신발에 눈길이 계속 갔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내 시선은 사람들의 신발에 향했다.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보이지 않던 수많은 에어포스 1들이 보였다. 그렇게 예뻐 보이던 내 신발은 누구나 신는 그저 그런 신발이었다. 이런 신발을 보고 신났었던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새하얗게 빛나던 신발은 탁해 보였고, 큼지막한 나이키 로고도 너무 촌스러웠다. 날아갈 듯이 가벼웠던 내 신발은 벽돌처럼 무거웠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잠들기 전 휴대폰을 켰다. 포털을 열자 실시간 검색어에 1순위에 있는 ‘휴거’가 눈에 띄었다. 갑자기 무슨 때아닌 휴거 소동인가 싶어 클릭했다. 최근 시세보다 저렴하게 분양받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휴먼시아 거지’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자매품으로 ‘LH에 사는 거지’의 줄임말 ‘엘사’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저소득층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걱정해 단지 이름 변경을 추진하는 사례도 많다. 아파트 외벽에 부착된 간판만 바꾸고 나머지는 똑같이 놔두는 작업이지만, 부동산 가격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건물을 새로 짓거나 시설을 업그레이드해야지, 저렇게 간판만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나? 참 이상한 세상이다. 다 쓸데없는 허영심 때문에 저러는 것이지. 근데 그 슈프림 신발이 얼마라고 했지? 너무 비싼데…. 중고나라에는 없나?
# 30.
“꼬로록...”
점점 숨이 차올랐다. 발끝을 뻗어보려 발버둥 쳤지만 무리였다. 딱딱하고 차가운 벽을 느끼고 더 이상 힘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너무 답답해. 숨쉬기조차 힘들어진 나는 생사의 문턱에서 허망한 눈으로 회색빛 세상을 둘러봤다. 도대체 누가 누굴 지킨단 말인가. 단단하게 지탱하던 다리의 힘이 점점 풀렸다. 눈앞이 흐려지다가 번개 맞듯 엄청난 순간의 고통이 나를 때렸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내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고 우리는 자유로웠다. 그중에서도 나는 특별했다. 굵직한 몸통과 하늘 높이 뻗어있는 나의 기개는 친구들 사이에서 단연 1등이었다. 하루는 몇몇 사람들이 나를 보러오더니 어느 날 나의 일부를 잘라갔다. 잘려간 녀석들은 커다란 성을 지탱하는 지붕이 되었다고 했다. 이후 내 앞에서 양손을 모으고 나를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유독 많아졌다. 사람들 사이에는 내가 그들을 지켜줄 거란 어떤 믿음이 있었다. 나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날의 고통은 그 당시 자랑이었지만, 훗날 외톨이가 되는 아픔의 씨앗이 되었다.
500여년이 지나 나에게는 ‘보호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와 동시에 내 친구들은 모조리 베어졌다.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원형 울타리가 생겼다. 나의 영역은 철저히 제한되어 버렸다. 자유를 잃은 나를 비웃듯 새로운 녀석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세월이 무색할 만큼 나보다 굵고 단단하며 높고 거대한 네모들이었다. 이후 나의 위상은 하릴없이 꺾여갔다. 사람들은 네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상한 마음보다도 아픈 건 몸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발끝이 저려왔다. 거대한 몸을 받치기 위해 발을 뻗쳐도 차가운 벽에 닿는 일이 잦아졌다. 네모들을 지탱하는 저 단단한 잿빛 바닥에는 숨구멍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던 그날엔 세찬 바람과 함께 폭우가 닥쳐왔다. 네모들 사이로 불어오는 엄청난 바람이 나를 덮쳤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빗물 아래서 발끝에 고인 물은 차오르기만 했다. 잿빛 바닥에서는 물이 줄곧 빠져주지 않았다. 남겨진 녀석들은 살결을 파고들어 나의 속살을 천천히 짓무르게 만들었다. 폭풍우 속에서 다리는 힘을 잃었다. 숨이 찬다. 다시 한 번 네모들 틈으로 불어 닥친 거센 바람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우지직. 엄청난 굉음과 함께 휘어질 줄 몰랐던 나의 단단한 허리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 곧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세상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연신 탄성을 내지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뽀얀 속살을 드러낸 채 조각난 내 몸뚱이를 구경하듯 쳐다봤다. 네모 안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사람들이다. 나의 다리는 처음으로 흙 옷이 벗겨진 나체 상태였다. 잿빛 바닥에 단단한 뿌리를 내린 네모들과 그곳에서 나온 사람들은 안쓰러운 눈으로 여전히도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저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 31.
네모의 꿈
1.
네모의 꿈을 살고 있다. 네모난 방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아파트를 지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 도시에서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 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다. 우리 사는 지구는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모르겠다.
2.
한 유명 작가가 방송에서 한국 사람들이 아파트를 좋아하는 이유로 ‘개인주의’를 꼽았다. 아파트가 익명성과 프라이버시를 보장하고 한국인은 그러한 단절된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걸 좋아한다는 취지였다. 틀렸다. 아파트는 유서 깊은 한국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의 결정체다. 네모난 아파트의 공고한 내부성은 속한 사람들에게 모종의 소속감을 주고 그 바깥 것들을 따돌린다. 사람들도 네모나진다. 획일화된 네모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모두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하고 가능한 가장 큰 집단에 속해야 한다. 브랜드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기왕이면 가구 수는 클수록 좋다. 무채색 옷이 아닌 원색 옷은 관심종자따위나 입는 것이다. 중국집에서 대부분 짜장면 시킬 때 혼자 볶음밥 시키면 넌씨눈 취급받기 일쑤다.
3.
다산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틸 것을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옳다거니, 역시 옛 성현의 천리안이다. “어디 사세요?”란 질문은 여전히 신분을 묻는 질문과 일맥상통이다. 소설가 이외수는 아파트를 ‘인간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닛’으로 정의했다. 네모난 콘크리트 캐비닛을 지배하는 건 오직 네모난 돈뿐이다. 얼마 전 양재천 주변을 산책하다 놀이 걸린 하늘에 떠 있는 로켓 풍선을 봤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카메라를 켰는데 줌 렌즈로 본 글자는 참으로 네모났다. “내 재산 강탈하는 임대주택 결사반대!!” 날카로운 글씨 모서리가 둥근 풍선을 펑 하고 터뜨릴 듯 아슬아슬했다. 잘난 어른들은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한다는 따위의 멋진 말을 늘어 놓으시는데. 아,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4.
네모난 아파트, 네모난 창 건너 풍경은 유일하게 둥그런 모양이었다. 높아야 5층인 귀여운 주택들 덕분이었다. 분홍, 초록, 빨강, 하양. 계절마다 변하는 산의 모습을 봤다. 산에 걸린 아침, 점심, 저녁, 밤의 하늘을 봤다. 일직선으로만 뻗어가는 삶이 잠시 정지하는 시간이었다. 재작년 재개발이 시작됐다. 쑥쑥 올라가는 네모난 철근 콘크리트에 오늘도 둥근 산은 가려져 간다. 네모의 꿈으로, 다시 잠들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