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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4-3회
복성이재-아막성-새맥이재-사치재-유치삼거리-매요마을-통안재
20220206
1.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날씨가 햇빛이 비치는 듯 흐리다. 백두대간 마루금 복성이재에 2년만에 다시 왔다. 복성이재는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와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설명안내판에 적힌 '변도탄'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북두칠성 중 복성(福星) 별빛이 빛나는 고개(福星峙)로 명당이라고 한다. 동쪽으로는 판소리 '흥보가'의 인물 흥보가 부자가 된 남원시 아영면 성리 흥부마을이 있고, 고개 너머 서쪽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는 3·1만세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인 백용성 조사의 탄생지인 죽림정사가 있다. 복성이재에서 머뭇거리다가 종주대원들이 모두 떠난 뒤 산길로 올라섰다.
이 구간을 4번 째로 산행하는데 남진과 북진 모두 경험한 곳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벋어내리는 산줄기여서 남진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부령에서부터 지리산으로 남진하는 산행을 하고 싶지만 아직까지 그렇게는 산행하지 못했고, 중간중간 구간을 산악회 사정에 따라 남진과 북진 산행을 반복하고 있다.
오늘 구간은 북쪽 봉화산에서 남쪽 고남산 사이를 잇는 산줄기로서 주로 고개들을 잇는 산줄기이다. 복성이재-새맥이재-사치재-유치재-통안재, 이 고개들을 잇는 산줄기에, 백제와 신라의 영토 쟁탈전이 벌어진 아막고원의 한 산봉을 에워싼 아막성터를 지난다. 그래서 어느 산악회에서, 아막성 안부를 내려섰다가 올라서는 능선에 철쭉군락지를 이룬 781m 산봉을 '아막성山'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산봉을 지나서 새맥이재로 내려서는 산봉 동남쪽에 솟은 시리봉이 오늘 구간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지닌 산봉이지만 시리봉은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 예전에 시리봉에 들러 보았지만 큰 특색은 없다. 그러나 시리봉은 그 품 안에서는 특색을 못 지니지만, 시리봉을 벗어난 산줄기에서 조망할 때는 하나의 등불처럼 반짝이며 이정표가 되어주는 고마운 산봉이다.
이 구간의 특색은 철쭉나무들이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봄날의 산행 때는 진분홍 철쭉꽃 물결에 도취한다. 또한 서어나무 군락지와 거제수 군락지를 확인할 수 있어서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치솟은 송림은 아니지만 우리 몸에 비교하자면 우리들의 고만고만한 키와 몸무게를 지닌 소나무들이 사치재에서 통안재까지 길게 펼쳐지는 송림은 산객들에게 마음에 편안함과 상쾌함을 선물한다. 사치재터널을 통과하는 광주-대구 고속도로는 백두대간 산줄기를 가르며 영호남을 잇는 도로인데, 사치재터널 북쪽 산봉에서 고남산 아래를 달리는 고속도로 풍경은 시원하다.
모래언덕고개를 지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유치삼거리에 이르자 눈발은 바람을 타고 펄펄 날린다. 유치삼거리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碑는 산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반봉건, 반외세의 깃발을 들고 천지를 개벽하여 만민평등을 실현하려고 일어선 동학농민군은 영남으로 넘어가기 위한 유치재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양도성으로 진격하려고 했지만 충남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조선의 천지개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끝내는 일본의 침략에 나라를 빼앗기는 망국의 비극을 겨레의 역사에 남겼다. 그들의 원혼들이 유치삼거리에 눈발이 되어 끝없이 떨어진다.
말의 허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말허리(馬腰)'라고 불리던 마을 이름을, 매화의 꿋꿋한 정기와 순결한 향기가 감도는 마을이라 하여 사명대사가 개명해 준 '매요(梅要)'마을을 지난다. 폐교된 매요초등학교, 퇴락한 듯 쓸쓸해 보이는 매요휴게소, 이 풍경을 대신하여 풍요로움과 낭만이 넘치는 마을, 순결한 매화 향기가 은은히 감도는 매요마을이 되기를 기원하며 길손은 그 앞을 지난다. 눈발은 계속 펄펄 날리고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을 이룬 황산(荒山)은 매요마을 앞 들판에 솟아 있다. 항아리들이 예쁘게 놓여 있는 장독대가 있는 집을 지나서 마을 뒤 백두대간 능선으로 올라섰다.
이제부터 통안재까지 고도를 높이는 산길, 소나무들이 눈발 속에서 늠름하다. 어린 시절 불렀던 동요를 웅얼거렸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오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소나무에 부는 바람 소리는 외로이 서서 휘파람을 부는 듯 나도 휘파람을 불면서 걷는다. 통안재에 이르는 길이 꽤 멀다. 계속하여 소나무 숲길을 오른다. 유치재를 넘어서 소나무숲 눈길은 이어진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 있는 나무처럼 오직 내 몸, 내 온몸으로 비탈길을 걸어오른다. 그래서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황지우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에서) 겨울나무가 자기 온몸으로 나무가 되어 푸른 봄날에 잎을 틔우고 끝끝내 꽃을 피우듯, 산객도 내 몸, 내 온몸으로 산길을 걷고 걸어서 긴 산행의 종착지에 이르는 목적을 이룰 것이다.
드디어 통안재에 이르러 이번 백두대간 구간을 마쳤다. 편안함으로 통하는 고개, 통안재에서 권포마을로 내려왔다. 황산대첩에서 이성계 장군이 승리할 때 동행했던 정도전이 '고남산의 기운을 얻어 권력을 펼치라'고 명명해 주었다는 전설이 있는 권포(權布)마을은 고남산 아래 편안하게 자리한다. 앞쪽에 펼쳐진 운봉평야와 지리산서북능선의 바래봉이 눈구름 속에 흐릿하다.
2.산행 과정
남원시 아영면 성리와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복성이재는 전형적인 명당 터로 전해진다.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전에 지역에서 조정의 양곡 관리를 맡고 있던 변도탄이 천문지리에 밝았는데, 어느 날 천기를 보고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였다. 이에 전란에 대비할 것을 나라에 상소했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고 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다.
그후 변도탄이 전란을 대비하여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이 북두칠성 중에 복성(福星) 별빛이 남쪽으로 비치기에 별빛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하다가 복성(福星) 별빛이 멈춘 이곳에 자리를 잡아 움막을 지었다. 그래서 이곳이 복성치(福星峙, 복성이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쌀가루로 만든 움막은 전란 때 군량미로 사용되어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전란이 끝난 뒤 변도탄의 충성심을 인정하여 나라에서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봉화산4.2km, 고남산15.5km, 성리 흥부마을1.5km. 그렇다면 통안재까지는 14.5km가 남아 있다.
아막성(阿莫城), 전북기념물 제38호.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
돌로 쌓은 이 산성은 아영고원 줄기에 자리한 산봉우리를 에워싼 것으로 둘레는 633m 가량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격렬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진 곳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이라고 불렀다. 성터는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동·서·북쪽 테두리에 성문터가 있다. 북쪽의 성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하게 쌓아 정교함을 보여준다. 북문터 부근에는 직경 1.5m의 돌로 쌓은 둥근 우물터가 있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기와조각,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 등이 쌓여 있다.
매봉과 치재 그리고 오른쪽 끝에 봉화산이 보인다.
남원시 아영면 성리 흥부마을과 그 왼쪽 매봉과 치재가 흐릿하고, 그 오른쪽으로 봉화산은 눈구름 속에 가늠된다.
바람이 없고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무덤 앞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
뒤쪽으로 시리봉이 보인다. 시리봉은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헬기장과 백두대간 산줄기를 살펴본 바위봉과 맨 뒤 오른쪽에 시리봉이 보인다. 시리봉은 백두대간 능선에서 비껴나 있다.
아래에는 광주-대구 고속도로 육교가 보인다.
사치재(498m)는 모래언덕고개라는 뜻으로 아실재라고도 불리며, 사치재 아래는 논과 밭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은 비안낙사(飛雁落沙) 형국이라고 한다. 사치재는 여원치를 거쳐 고남산-통안재-유치재-사치재-새맥이재-복성이재-봉화산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사치재에서 봉화산에 이르는 구간은 등산로 곳곳에 소규모 군락을 이룬다. 사치재는 북쪽으로 덕유산, 남쪽으로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중심 생태축이지만, 88올림픽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단절되었으나 현재는 '자연환경국민신탁'이 시민과 기업의 기금으로 매입한 국민신탁지에 환경부·한국도로공사·전북장수군이 함께 백두대간 복원사업을 2014년부터 연차적으로 실시하여 백두대간 생태축을 복원 중이다.
고속도로 준공비가 보인다. 예전 동물이동통로가 생겨나기 전에는 저곳을 통과하여 백두대간 능선으로 올라섰다.
복성이재 방향의 이정목에는 복성이재 7.2km, 고남산 방향의 이정목에는 복성이재 6.1km, 어느 이정목 거리 표시가 맞을까?
예전에는 이 마을을 통과하여 88올림픽고속도로 지리산휴게소 지하통로로 우회하여 백두대간 능선으로 올라섰다.
고려 우왕6년(1380년) 이성계 장군이 약관 17세의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 장소의 황산이 눈 앞에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오른쪽 산으로 이어지는데, 개인 농지 때문에 산객들은 대체로 도로를 따라가 매요마을을 통과한다.
이곳 유치는 영호남 통로인데 동학농민혁명(1894년) 당시 서쪽 장수군을 장악한 동학농민군이, 민보군과 수성군이 장악하고 있는 운봉현을 공격하기 위한 전투의 표적이 이곳 유치였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패배한다.
유치에서 '승전로'는 왼쪽으로 이어지고 매요마을 가는 '매요길'은 직진한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오른쪽 언덕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에 매요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오른쪽 언덕으로 빙 돌아서 매요마을 뒤쪽 산으로 이어진다.
지난 2020년 3월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2020년 9월 20일에 새로이 세워진 마을유래비
매요마을은 말의 허리 형국을 닮았다 하여 '마요(馬腰)'마을로 불렸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국을 유람하던 사명대사가 이 마을에 와서 매화의 꿋꿋한 정기와 순결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매요(梅要)'마을로 고치는 게 합당하다고 하여 이후 매요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정자와 샤워장에는 '말허리'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 백두대간은 마을 뒤쪽 구릉으로 이어진다.
뒤쪽 능선이 백두대간 마루금인 듯
매요마을0.3km, 고남산4.8km 거리 표시가 적혀 있다.
유치재에서부터 고남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은 계속적으로 고도를 높여야 하기에 몹시 힘이 들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올랐다가 내려서면 통안재이다.
백두대간은 곧바로 직진하는데 산객들은 대체로 왼쪽 임도로 내려가 고남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은 권포마을로 내려가고, 오른쪽 임도는 고남산 방향으로 오른다.
백두대간 복성이재-통안재 구간을 남진하여 통안재에서 끝낸다.
백두대간 산행을 마치고 임도를 따라 권포마을로 내려간다.
앞에는 지리산 서북능선 바래봉이 흐릿하게 보인다.
권포마을에서 지리산 운봉주조 홍보판매장로 이동하여 지리산 운봉막걸리를 구입하였다.
첫댓글 저는 자전거로 백두대간을 하고있어서 속속들이 다 가 볼수 없어 아쉬웠는데 마치 제가 걸은듯한 느낌이 드네요
14구간중 7구간 죽령까지 갔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백두대간을 자전거로 탐방하는 근력에 놀랍니다. 꼭 완주하시길 기원합니다.
죽령에서 천문대까지는 임도가 좋아서
자전거 주행이 괜찮아 보이지만
힘이 엄청나게 들 것 같아요.
상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보람과 행복한 날 가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