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성민의 요람
 
 
 
카페 게시글
경노효친 스크랩 그리운 고향 마을 `다리`들에 얽힌 추억[모셔옴]
sarmy 추천 0 조회 32 08.11.06 23: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리운 고향 마을 '다리'들에 얽힌 추억

 

 

 

 

‘다리’는 소통(疏通)이고 사연이다. 산골짝 ‘징검다리’에도 추억이 묻어있고, 광한루 오작교(烏鵲橋)에도 사랑의 애틋함이 있다. 진천 ‘농다리’에는 변함없는 전통이,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는 불사이군의 충절이,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콰이강‘의 다리에는 수만의 연합군 포로들의 원혼이, '외나무다리'에는 질시(嫉視)와 반목의 미움이, ‘브룩클린교’나 ‘퐁네프’의 다리엔 젊음의 고뇌(苦惱)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 다리 위에서 별리(別離)에 아파하고, 그리움에 가슴 저려하고, 기다림에 목을 늘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 사연(事緣)을 새기는 쪽은 그 ‘다리’를 건너다니는 사람들의 일이었고, ‘다리’는 그제나 이제나 변치 않는 오연(傲然)함으로 세월(歲月)과 세상으로의 통로구실을 일관하고 있다. '다리' 위를 왕래(往來)하는 인간들이 물욕(物慾)과 사랑을 찾아 사연을 만들고, 고뇌(苦惱)를 자초할 뿐 무심(無心)한 '다리'는 무욕의 세월을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 '다리' 위로 무욕(無慾)의 삶을 이고 가는 이들도 있다.

 

 

 

섶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른 새벽, 물안개 자욱한 ‘섶다리’를 건너는 야윈 노파(老婆)의 발걸음이 잽싸기만 한 것은 겉치레 따위 욕심(慾心)이나 세상사(世上事) 근심걱정까지 무게 나갈 것들을 모두 덜어내었기 때문이다. 천상천하(天上天下) 무슨 감투에도 미련을 가져본 일이 없고, 스러져가는 오막살이 흙벽 방에서 여생(餘生)을 마치더라도 대처(大處)마다 즐비한 아파트에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은 꿈속에서조차 가져본 일이 없다. 무슨 패배주의적(敗北主義的) 사고 때문이 아니고, 모두가 내 분수(分數)를 넘어서는 것인데다, 모두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기 때문이다.

 

노파의 신색(身色)을 살펴본다. 닷새 만에 나서는 장맞이 길, 노파(老婆)의 머리 위에는 ‘아욱’이나 ‘오이’ ‘시금치’와 ‘열무’ 같은 제철 채소(菜蔬)들이 한 보따리 가득하고, 그것도 모자라 손에는 지난 며칠 짬짬이 뜯고 캔 도라지며, ‘산더덕’, ‘잔데’ 같은 산약초(山藥草) 보퉁이까지 들려있다.

 

 

 

뒷마을 섶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일장에서 이것저것 사서, 이고 지고 귀가하는 길이다)

 

 

 

 

 

둥치 굵은 교목(喬木)을 교각(橋脚) 삼아 소나무 가지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등걸위에 흙을 다져 만든 ‘섶다리’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노파(老婆)의 허정걸음에도 ‘휘청 삐걱’ 무너질 듯 몸을 떤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손자 녀석 과자 값이라도 만들 요량으로 다리를 건너는 노파의 행보(行步)는 조금도 동요(動搖)됨이 없이 단호하다. 아무리 부실(不實)해 보여도 여름철 ‘큰물(홍수)’이 아니라면 허물 수 없다는 것을 경험(經驗)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일장날 온 동네가 섶다리를 건너는 광경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리위로, 가축은 냇물로 건너고 있다)

 

 

 

 

 

햇볕이 한창 따가워진 여름 초입의 냇가, 어쩌면 더위가 훨씬 반가운 아이 들의 신나는 물장구를 시샘한 하늘이 짓궂은 소낙비를 퍼붓는다. ‘으차차차’ 고함을 지르는 녀석들이 찾아드는 곳은 시내를 가로지르는 길지 않은 ‘무지개다리’ 밑이다.

 

차곡차곡 돌로 쌓아올린 그 ‘다리’는 햇볕도 피하고 비도 긋는 피신처(避身處)이기도 하지만, 어른들 몰래 모여든 아이 녀석들이 저들만의 비밀(秘密)을 쌓아가는 ‘아지트’이기도 하다. ‘다리’를 받치는 석축(石築)만큼이나 많은 녀석들의 비밀은 세월이 쌓이며 어느새 신화(神話)가 되기도 한다.

 

한줄기 소낙비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다리’ 밑에서 나올 즈음이면 하늘 저편으론 신기(神奇)하게도 무지개 한 줄금 걸쳐진다. ‘우와 ~’ 함성을 지르며 무지개를 좇아 텀벙대는 아이들의 표정(表情)엔 비 그친 뒤의 해맑은 하늘빛이 가득하게 되비친다.

 

저물녘, ‘이내(저녁나절에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을 말하는데, ’남기‘라고도 함)’가 밀려드는 들판 한 켠, 작은 시내 위에 걸쳐진 ‘널다리’엔 초저녁의 한가로움이 그득하다. 하루종일 치른 들일의 고단함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農夫)들은 ‘널다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흙 묻은 장화(長靴)며 삽자루, 땀내 나는 얼굴까지 껍질을 벗겨내듯 빡빡 씻으며 하루를 정리(整理)한다.

 

 

 

강을 가로지르는 '섶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농사일이 별 볼일 없어졌다지만, 웃자라기 시작한 벼들에 이삭이 패고 낟알이 여물면, 농부들은 그래도 풍성(豊盛)한 들녘을 터전삼아 살아온 자신의 인생도 나쁘지만은 않았다며 애써 자위(自慰)하리라. 그렇게 ‘널다리’엔 물이끼만 끼는 게 아니라 세월을 곱씹어온 이 땅 농부들의 회한(悔恨)까지 푸른 이끼 사이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널다리’의 ‘널’은 ‘널빤지’를 말하는 것으로 ‘널다리’란 이 ‘널빤지’를 깔아놓은 다리를 말하며 판교(板橋)라고도 한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널뛰기’의 판자와 죽은 사람을 안치(安置)하는 관(棺)도 ‘널’이라고도 한다.

 

 

 

널뛰기의 '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땅바닥 가마니 뭉치에 걸친 기다란 송판이 '널'이다)

 

 

 

 

 

옛적 필자의 향리(鄕里)에는 이곳저곳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외나무다리’란 한 개의 통나무로 놓은 다리를 말하는데, 독목교(獨木橋)라고도 한다. 필자가 향리에 거주할 당시에는 조그마한 도랑이나, 넓은 하천(河川) 중간에 물이 흐르는 물길에는 ‘외나무다리’가 빠짐없이 가설(架設)되어 있었다. 무거운 볏짐이나 ‘똥지게’를 지고 건너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고, 다리로 놓은 나무둥치가 부식(腐蝕)되어 무너지면서 짐을 진체 개울에 넘어져 다치기도 했었다.

 

예부터 우리 속담(俗談)에는 “외나무다리에 만날 날이 있다”, “원수(怨讐)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남과 원수가 되면 피하기 어려운 곳에서 만나는 일이 반드시 생긴다는 말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子(孔子) 曰 讐怨莫結 路逢峽處 難回避”라는 말이 있다. “원수를 맺지 말라, 좁은 길(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럽다”는 말이다.

 

 

 

외나무 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의 외나무다리. 길이 80여m)

 

 

 

 

문자 그대로 외나무다리는 외로운 다리다. 사람이 건너가도 한 명이고, 달빛이 내려앉아도 한 뼘이다. 그래서 그 옛날 떠나간 그 님이 생각나는지도 모른다. ‘복사꽃’ ‘능금꽃’ 그늘에 어리는 ‘눈썹달’같은 달이 뜨면, 새파란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속삭이던 그 시절 그 추억(追憶)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님도, 그 밀어(密語)도 싸늘한 별빛과 함께 사라진 지금까지 그 때 그 추억을 못 잊어하는 것은 ‘눈썹달’을 속 빼닮은 그 님과의 다짐과 맹서(盟誓)가 너무나 알뜰하고 진실했기 때문이다. 한때 최무룡이 불러 히트한 가요 ‘외나무다리’의 가사를 음미해 보고 넘어간다.

 

 

 

 

 

 

 

외나무 다리

 

 

최 무룡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못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어여쁜 눈썹 달이 뜨는 내고향

둘이서 속삭이던 외나~무다리

헤어진 그날 밤아 추억은 어디

싸늘한 별빛 속에 숨은 그님을

괴로운 세월 속에 어이 잊으리

 

 

 

 

 

 

삶의 외줄같은 외나무다리는 대체적(大體的)으로 초겨울에 태어나 봄이 되면 죽는다. 인생사(人生事) 모두가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외나무다리의 죽고 살고는 자연(自然)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봄이 되어 해동(解凍)이 되면, ‘눈석임물’이 섞이고 여름이 되어 강물이 불어나면, ‘외나무다리’는 발붙일 곳을 잃는다. 한바탕 홍수(洪水)가 지기라도 하면 형체(形體)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가을이 지나고 강물이 줄어 유순(柔順)해지는 초겨울이 되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나와 다시 어기영차 힘을 합쳐 ‘외나무다리’를 놓는다. 뗐다, 놓았다 하는 것이 번거롭지만, 목숨 같은 농사(農事)가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 어쩔 도리(道理) 없이 다시 놓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무섬 외나무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 소재)

 

 

 

 

외동읍(外東邑) 각 마을에는 또 이곳저곳 ‘돌다리’들도 많았다. 통학로(通學路)에도 군데군데 조그마한 ‘돌다리’가 있었고, 나뭇길에도 우물길에도 수없이 많은 ‘돌다리’들이 있었다. ‘견치돌’로 제법 모양을 갖춘 것도 있었으나, 대개의 경우 자연석(自然石)을 얼기설기 놓은 것들이어서 홍수라도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때마다 사라진 돌을 하류(下流)에서 찾아내어 다시 다리를 만들기도 했었다. 필자가 향리에 거주할 때는 몰지각(沒知覺)한 사람들이 원성왕릉(元聖王陵)의 석조물(石彫物)을 뜯어 자기 집 앞개울에 ‘돌다리’를 놓기도 했다.

 

 

 

돌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필자에게는 외동읍(外東邑) 연안리(淵安里)에 위치한 7번국도의 ‘연안교’도 추억의 현장이 되고 있다. 지금의 ‘다리’가 아닌 1950년 후반의 ‘다리’였을 때다. 당시의 7번국도 입실(入室) 이북 외동읍 관내에는 연도의 동리마다 한 두 개씩의 교량(橋梁)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긴 ‘다리’가 연안리에 있는 연안교(淵安橋)였다.

 

필자가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닐 때는 거의 해마다 한 번씩 홍수에 이 연안교 다리가 끊어져 차량(車輛)과 사람들의 통행에 많은 고생을 안겨주었고, 이때마다 이 ‘다리’와 개울에는 심심찮은 구경거리가 등장하여 하학길마다 넋을 잃고 구경에 몰입하곤 했었다.

무너진 교량(橋梁) 옆 둑을 파헤쳐 임시로 만든 방천길로 버스나 화물차(貨物車)가 물가에 내려서면 육중한 '지에무씨 도라꾸'(GMC ; 미국 GM사 제작 군용트럭으로 전쟁 후 민간에서 불하받아 화물트럭으로 사용하고 있었음)가 이들을 쇠줄로 묶어 개울을 건너 건너편 둑 위에까지 끌어내 주고 적절한 수고료(手苦料 ; 견인비)를 받아 챙기곤 했었다.

 

곡예와도 같았던 GMC의 견인작업(牽引作業)도 볼만 했지만, 일본제 ‘당꼬즈봉’을 입은 외동지서(外東支署) 지서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교량보수(橋梁補修) 작업을 지휘하던 모습도 필자들을 뚝방에 퍼질고 앉아 턱을 고이게 만든 원인(原因) 중의 하나였다.

 

 

 

1953년도 '지에무씨 도라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휴전이 된 후 잉여 군용트럭을 민간에게 불하한 것이다)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간다. 녹음(綠陰)이 짙어가는 시냇가엔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운율(韻律)에 맞춘 듯 놓인 징검다리가 정겨웠다. 과년(過年)한 처자(처녀)가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콧노래를 부르며, 중간쯤 건너뛰어 가는데, 건너편에서 다가오던 총각 하나가 슬며시 물 위로 비켜선다. 고무신에 양말도 신지 않은 ‘일복’차림에 가랑이를 걷어 올린 차림이라 물에 내려서도 무엇이 젖을 것은 없었다.

 

 

 

징검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처자는 되돌아가자니 그렇고, 버티고 있을 재간(才幹)도 없어 ‘징검다리’에서 내려선 총각(總角)을 지나쳐 그대로 건너간다. 총각의 얼굴 옆을 지나치면서 저고리 속 속살을 엿보이기라도 한 듯 부끄러움에 젖어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 하다가 간신히 건너간다. 그러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성큼 걸음을 떼어놓다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총각은 여전히 물 위에 내려선 채 이 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서 있다.

 

기우뚱대며 건너는 처자가 무사히 건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뒤뚱대는 율동미(律動美)와 오동통한 뒷모습을 놓치기 싫어서였기도 했을 것이다. 처자는 속으로 ‘별꼴이 반쪽이야’라며 찬바람 일으키고 돌아서지만, 콩닥거리는 가슴은 쉽사리 진정(陳情)되질 않는다.

 

그렇게 그 때의 ‘다리’는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세월과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며 소통이며 교감(交感)의 통로였다. ‘다리’의 구조(構造)가 어떻던, 재질(材質)이 어떻던, 조형미(造形美)가 어떻던, 모든 ‘다리’에는 그만의 사연(事緣)이 흔적으로 남아 있었고, 그리움과 애틋한 ‘로맨스’와 별리(別離)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님을 기다리는 아낙의 간절함이 배어있었고, 추억과 운치(韻致)와 염원이 배어있기도 하다. ‘널’ 한쪽, 돌 하나하나에 배어 있던 인정과 인생사 희로애락(喜怒哀樂)들이 마을과 마을을 넘나들며 단절 없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옛적 우리들의 선조들이 만든 다리에는 얽힌 전설도 많다. 창녕의 만년교는 나이만큼 건너면 '다리'가 아프지 않다는 전설이 있고,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 인왕동에 있던 효불효교(孝不孝橋)는 한 여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결실이 얽혀 있다. 지금은 터만 남은 효불효교지(孝不孝橋址)의 개요와 설화의 내용을 소개한다.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뒤쪽 남천변, 논 옆에 작은 안내판이 있다. ‘효불효교지(孝不孝橋址)’라는 간판이다. 다리는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설화만 전해지고 있다. ‘효불효교(孝不孝橋)’라는 이름은 신라시대 이곳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일곱 형제가 강 건너 사는 한 사내와 사랑에 빠진 홀어머니를 위해 고민 끝에 다리를 만들었던 것이 효(孝와) 불효(不孝)를 동시에 한 행위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어머니에게는 효도(孝道)를 했지만, 돌아가신 선친(先親)에게는 불효를 했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근거가 없는 설화(說話)일 뿐 옛 문헌에 의하면 부근에 있는 월정교(月精橋)와 함께 기록돼 있는 일정교(日精橋)가 정확한 이름이라고 한다. 효불효교(孝不孝橋)의 사연을 보탠다. 지금부터 1,500여년 전인 신라시대 때, 지금의 경주시 인왕동 남천(南川)변에 살던 과부가 남편을 일찍 여의고 며칠마다 한 번씩 밤중에 얼어붙은 차가운 남천을 맨발로 건너가서 외간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이 광경(光景)을 목도한 일곱 아들들은 어머니 몰래 하루 종일 그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아 드렸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버선을 벗지 않고 짚신 신은 발로 내를 건너고 되돌아 올 수 있었다는 전설(傳說)이다. 그리고 그 후 어느 때 현지(現地)의 주민들이 그들 일곱 형제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孝心)과 부득이했던 불효(不孝)를 기리는 뜻에서 그 자리에 제대로 된 다리를 축조(築造)했다는 것이다.

 

현지에서는 이 다리를 ‘쑥기떡 어미 다리’라고도 하고, 아울러 이 다리의 모태(母胎)가 되는 ‘징검다리’를 일곱 형제(兄弟)가 합심해서 놓았다 해서 칠성교(七星橋)라고도 한다. 비슷한 전설은 전라남도 벌교(筏橋)에 있는 ‘선근다리’에도 전해지고 있다.

 

 

 

경주시 인왕동 ‘효불효교지(孝不孝橋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발굴 당시의 모습)

 

 

 

 

그리고 앞서 기술한 ‘섶다리’는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 주천강 지류에 있는 ‘섶다리’가 가장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이 80여m로 긴 나무를 걸친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들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에 놓인 ‘섶다리’와 주변경관(周邊景觀)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東洋畵)를 연상케 하지만 보통 여름철 홍수(洪水)로 무너지면 그 수명이 끝난다. 놓고 허물어지고, 또 놓고를 반복(反復)하는 다리이지만 오랜 세월 이어온 주민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

 

 

 

주천강 ‘섶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또 앞에서 기술한 농다리(농교·籠橋)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중부고속도로(中部高速道路)변에 있는 ‘진천 농다리’가 대표적이다. 구곡리 ‘세금천’에 놓인 옛 다리로 전체 길이가 93.6m, 너비는 3.6m에 이른다. 자연석(自然石)으로 만든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됐고 가장 길다. 작은 돌을 촘촘히 쌓아 만들었는데도 유실(流失)되지 않고, 오랜 세월 버티도록 만든 선조들의 기술력(技術力)이 놀랍다. 전체 모양도 마치 ‘지네’가 몸을 비틀면서 물을 건너는 듯 한 형상(形象)을 띠고 있어 이채롭다.

 

 

 

진천 ‘농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다리보다도 필자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다리는 고향마을 동천강 상류의 ‘징검다리’와 '섶다리'였다. 당시의 ‘징검다리’는 앞쪽 어느 파일에서도 소개한바와 같이 우선 무엇보다 상경하애(上敬下愛)의 미풍양속이 적나라(赤裸裸)하게 실현되는 현장이었고, 양보(讓步)와 정이 넘실거리던 우애(友愛)의 가교였다. 그리고 그 '징검다리'에는 가슴을 도려내는 이별(離別)과 서러운 이농(離農)이 있었고, 넓디넓은 아버님의 등에 업혀 거뜬하게 건너는 감격(感激)이 있었으며, 비록 이루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애틋한 짝사랑의 역사들이 수도 없이 펼쳐지곤 했었다.

 

 

 

'갑분이' 누나가 시집가던 마을 앞 '섶다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군데군데 만들었던 '섶다리'에 얽힌 사연(事緣) 또한 그 다리의 무게만큼이나 알알이 배어있다. 지금은 아무런 형체(形體)도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조 세조(世祖) 당시에 만들었던 외동읍(外東邑) 신계리의 형산강 상류 '섶다리'는 충신 '이징옥'의 혼백이 서려있어 지금도 마을 이름을 '상섶'과 '하섶'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원성왕릉(元聖王陵) 앞 동천강에 가설했던 그 옛날 '섶다리'에는 필자들이 코흘리개 때 만나기만 하면 시커먼 광목 통치마자락으로 필자들의 콧물을 닦아주고, 삶은 감자를 쥐어주던 아래 아랫집 '갑분이' 누나와 소꼽동무 '계순이'네 큰언니가 울며불며 가마를 타고 시집가던 다리였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울면서 떠난 '계순이' 큰 언니는 그 '섶다리'를 걷어내고, 콘크리트다리를 놓은 이듬 해에 무슨 몹쓸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