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33
(신사참배 반대운동 1)
1934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논쟁에 휘말린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 하느냐 하는
양자 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 운동으로 인한 탄압보다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으며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탄압이라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 박탈과 신앙 양심을 유린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로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의 수난이었으며
따라서 신사참배는 일제하에
용의 주도하게 준비되었다.
일제는 기독교 학교에서도
천황숭배를 요구하자
선교사들은 일요일의 행사참여나
일요일의 교사 시험 실시는
기독교도로서 양심이 허락지 않기에
선교사들은 반대한다는 뜻을 전했다.
또한 기독교 학생들에게
그저 프로그램의 하나로 하는
의식에 참가시켜 천황폐하의 사진에
경례하는 것 같은 명령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일본은 신사참배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을 전쟁으로 보내기 위해
강제 동원하고 1938년 조선어 사용금지,
1939년 창씨개명, 징병령,
국민 징용령(노동력 이용을 위해) 등
여러가지로 한국인들을 힘들게 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길들여진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한국 민족과
한국교회가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라고 외쳤다.
신사의 본질
지금도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도 심기가 불편해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총리는
신사참배를 하거나 신사에 공물을 보내고 있다.
살짝 어려울수도 있으나 일본의 신사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먼저 신도란 일본 민족의 정신생활의
기본이 되는 일본 고유의 사상으로
일본의 가장 실질적인 신은
현재 살아있는 일본의 천황이다.
신도는 고대 일본인의 가미(신)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기원되며
가미는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자연현상 혹은 자연물의 경이적인 것에
사용하고 이러한 가미에 대한 신앙은
고대 일본의 정치권력의 발달과 함께
중앙집권화 되는 과정에서 정치신화가
형성되면서 천황의 권력이 절대화 되어갔고
천황의 조상신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인물이나 역사적 영웅을 신사에
봉제하여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으며
그것이 천황중심주의와 신도를 옹호하기 위한
깊숙한 연계속에서 출발하였기에
천황제와 군국주의가 강한 결속을 가지고
제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 이용되었다.
1877년 일본은 신사를 종교로부터 분리시킨 후
신사참배를 종교가 아닌 것으로 이용했다.
이와같은 일에 우찌무라 간조와
우에무라를 비롯한 일본의 양식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천황제는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반대했지만
일본 기독교의 대부분은
천황제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 국가에 대한 예의로 받아들였다.
한편 신사를 교파로 삼고있는
일본의 교파신도를 한국에 침투시켜
포교를 통해 한국민을 신도화 하는
작업을 하면서 전국에 크고 작은
무수한 신사를 건립한다.
이같이 신사참배 강요를 준비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국민정신 총동원을 구실로
한국인 전체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다.
신사참배를 한국인에게 강요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교파신도와 국가신도를 구분하여
국가신도는 결코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신사참배는 일본제국에 대한
국민의예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파신도이든 국가신도이든
모두 분명하게 종교적인 색깔을 강하게 담고 있었다.
일본은 신인 천황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로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다.
이 천황에게 국민은 죽음으로써 충성해야 하며
천황의 조상신들을 모신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것은
일본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신사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아니라 주장하지만
일본에서 출판된 많은 책에서
신사는 종교임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