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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지혜의 산, 명지산을 오르다
1. 일자 : 2009. 5. 15 (토)
2. 장소 : 명지산 (1267m)
3. 행로 및 시간
[익근리 주차장(09:09) -> 승천사(09:27) -> 명지폭포 갈림(09:55) -> 명지폭포(09:58) -> 삼거리(10:21) -> (좌측) -> 계단1(11:00) -> (된비알) -> 이정표(11:19, 명지산 1km) -> 계단2(11:34) -> 백둔리 갈림(11:43, 명지산 0.2km) -> 전망바위(11:45) -> 정상(11:50) -> (노란제비꽃, 얼레지 군락) -> 화채바위/명지4봉(12:23,1078m) -> 이정표(12:36, 익근리 4.4km) -> (중식, -12:50) -> 삼거리(13:18) -> 와폭(13:34) -> 승천사(14:05) -> 주차장(14:20)]
< 명지산 산행을 준비하며 >
금요일 오후 사업부 단합행사의 일환으로 청계산을 다녀왔다. 옛골에서 매봉 삼거리를 왕복하는 단순한 코스였는데, 나름 오늘 명지산 산행을 위한 워밍업의 의미를 부여했다. 사실 오늘 명지산 산행은 다음 주 공룡능선 종주를 위한 준비 산행 성격이 강하다.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소청에서 1박하고 공룡을 넘어 설악동까지 가자면 14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니, 명지산 같은 깊은 산에서 가파른 계곡과 능선을 오르내리며 몸을 산에 적응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 일부러 비교적 길고 험한 코스의 산을 잡았다.
수 많은 산 이름 중 ‘명지(明智)’란 이름은 가평에 있는 이 산이 유일할 것이다. 이름 만으로만 보면 예쁘고 명석할 것 같은 여자아이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사실 명지산은 경기도 ‘넘버 2’의 위치에 있는 1267m 높이의 큰 산으로, 100대 명산 반열에 당당히 올라 있는 산이다. 산림청 자료를 살피니 ‘하늘금이 예쁜 명산은 아니지만 깊은 맛의 산’이고 봄철 산나물산행의 적지이며, 정상 부근에서 바라 보는 산국(山國)의 파노라마가 멋진 산이라 소개되어 있다.
산행 들머리로 인근리를 선택했으며 정상에 올랐다 다시 익근리로 내려올 생각이다. 산행시간은 자료마다 틀린 데, 길게는 6시간 10분(산림청 자료)에서 짧게는 5시간(120 명산)이 예상된다. 승천사를 거쳐 명지폭포 갈림을 지나 계곡과 능선길이 갈리는 삼거리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나, 이후 가파른 계곡 오르막과 지능선을 통해 정상에 접근한 후 우측 능선을 타고 하산할 예정이다. 통상 익근리 코스는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이용해 화채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설악 공룡능선 트레이닝을 위해 일부러 더 힘겨운 계곡/지능선 길을 선택했다.
먼 길을 홀로 자가용으로 이동하는 것이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토요일이 장인어른 생신으로 저녁 약속이 되어 있어, 시간 효율 때문에 금전적 비용과 운전의 피로를 희생하기로 한다. 산행 출발 열흘 전인 5월 5일 날 미리 찍어 둔 명지산 지도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며 산행 준비를 마무리한다.
< 희망사항 >
지난 주 오케이마운틴에서 명지산을 다녀 온 산꾼의 산행일기를 읽었는데, 온통 야생화 천국이었고 몇 몇 사진은 꽃 이름을 아는데 유용한 정보가 되어 줄 것 같아 고마웠다. 오늘 내게도 명지산에서 짧은 봄을 맞는 들꽃들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고 바래 본다.
들머리 익근리의 고도가 200m 수준이고 명지산 정상이 1200m가 넘으니 1000m 이상을 치고 올라야 하는 길고 험난한 코스다. 험한 산 길을 걸으며 그간 나의 등산 실력을 점검해 보고 싶다. 실력 향상 판단의 지표로 완주 후의 몸의 피로도를 삼아 본다.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이지만 내 몸은 내가 안다. 스스로의 솔직한 느낌으로 판단해 보자.
최근 아이들 공부 문제로 집사람의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그 불똥이 내게도 튀고 있다. 집사람은 평소 내가 아이들 학업문제에 너무 무신경하다고 불만이 많다. 오늘 밝은 지혜의 산에서 아이들 학업 성적 향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단초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산에 일상의 고민을 가져 가 보아야 답을 얻기는 쉽지 않고 머리만 복잡해 진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혜의 산의 효험을 한 번 기대해 보자.
< 명지산 가는 길 >
최근 패턴이 되어 버린 백반 집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를 몰아 가평으로 향한다. 날씨는 연무가 약간 있으나 비교적 맑은 편이다. 춘천고속도로 화도IC에서 국도로 빠진다. 청평 부근 북한강에 물안개가 옅게 피어나는 모습이 보인다. 언제 보아도 멋지고 젊은 날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풍경이다. 대성리를 지나고 가평 시가지를 지나 예전에 와 본 적이 있는 연인산 도립공원 입구를 지나 한참을 더 가니 익근리 주차장이 나타난다. 평촌 출발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멀리 산을 올려다 본다. 어디가 어딘지 지금은 모르겠다. 명지산은 군립공원이어서 인지 주차장과 입장료가 무료이다. 무언가 초대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
< 명지산 등산 지도 / 들머리에서 본 산 줄기 >
< 익근리에서 삼거리 >
잘 가꾸어진 들머리 꽃밭을 지나 포장도로를 잠시 걸으니, 길은 좌측에 계곡이 흐르는 전형적인 등산로 초입으로 들어선다. 계곡의 물소리가 제법 거세다. 올 봄은 예년과 달라 날씨도 추웠지만 비도 많이 내렸다. 때문에 농산물의 생장이 늦어 농민들은 울상이고 서민들도 오른 채소 가격에 가계 부담이 커졌다. 반면 산불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고, 산과 계곡에서는 이렇게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 산꾼도 있다. 마치 제철이 아닌 시기에 맛난 과일을 먹는 기분이다. 인간사도 이와 같아 그늘이 있으면 새로운 양지도 생겨나는 법이다.
계곡을 끼고 도는 모퉁이를 돌아서자
승천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승천사로 향하는 길에는 병꽃 이외에도 피나물/노란제비꽃으로 추정되는 노란
들꽃과(작고 길다란 모양의 노란 꽃도 많았으나 이름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분홍빛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금낭화가 지천이다. 금낭화를 실제로
보기는 처음인데 무척 화려해 보였다. 돌아와 꽃말이 ‘붉은
입술’이라는 것을 알고,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몇 발자국 걷고 들꽃 살피고 다시 걷는 바람에 길의 진척이 한없이 느리다.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걸은 연후에야 승천사 사천왕문을 지난다. 그 뒤로 커다란 미륵불이 서 있는 승천사에 도착한다(
< 피나물 / 금낭화 / 별꽃 >
승천사의 절집 규모는 출발 전 예상했던 것보다 크고 배치도 인상적이다(
< 오름길에 승천사 / 내림길에 다시 본 승천사 >
승천사를 지나도 등산로는 여전히 넓다. 차도 다닐 수 있는 규모다. 산 길이 이리 넓다는 것은 위쪽에 무언가 사람을 끌만한 것이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명지폭포일 것이다. 명지사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수목이 다양하고 울창한 지역인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누군가 길가 나무에 정성스레 이름표를 붙여 놓았다. 종류가 너무 많아 머릿속에 다 넣지는 못해도 ‘세로로 층(줄)이 처 있는 층층나무’와 ‘한 밑동에서 여러 가지가 분기된 성어나무’와 ‘반듯하고 줄기에 돌기가 돋은 다릅나무’가 특징적이어서 사진을 찍고 머리 속에도 흔적을 남겨 놓는다. 훗날 이 나무들을 다시 볼 때 오늘의 기억의 단초들이 그늘과 나와의 관계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 명지산의 나무들 >
꽃과 나무와 벗하여 허염 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명지폭포 갈림에 도착했다(09:55). 익근리에서 2.6km를 걸어왔다 한다. 대개의 경우 오름 길에 길에서 떨어진 폭포 이정표를 접하면 ‘내려 올 때 들리지 뭐’하고 외면하는 것이 통례인데 오늘은 다르다. 안내산악회가 주는 시간의 압박도 없고, 갈림에서 명지폭포까지의 거리도 고작 60m다. 아니 들릴 수 없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니 누대에 걸쳐 생성된 듯한 푸른 이끼가 낀 바위를 지나게 되고 그 뒤로 세찬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가 늠름하게 서 있다. 귀에 꽂은 이어폰의 소리도 잠재울 만큼 물소리가 거세다. 암갈색의 바위와 폭포가 내뿜는 하얀 포말, 진한 녹색의 물빛, 연녹색의 나뭇잎과 폭포 위 하늘의 푸르고 흰 빛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기운을 만들어 내고 있다. 들리지 않고 그냥 지났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명품 경관이다. 주위 분들에게 부탁하니 2장의 사진을 찍어 주신다. 둘 다 잘 나왔는데 한 장의 사진에는 내 아킬레스건 ‘올챙이배’가 너무도 선명하다. 나머지 한 장도 똥배는 선명하나 그래도 보아 줄 만하다. ‘배 나온 산꾼’ 무언가 언밸런스 하다. 뱃살빼기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 것 같다.
< 명지폭포에서 >
한참이나 명지폭포의 전경을 감상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폭포를 지났는데도 길은 여전히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다. 이유를 모르겠다. 산 길이 이리 넓어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명지폭포 고도가 420m, 일차 목적지인 삼거리 갈림의 고도가 600m, 이후 좌측 계곡 길로 오르다 만나는 첫 이정표의 고도가 760m, 이후 엄청난 된비알을 넘으면 1267m 명지 산 정상에 닿을 것이다. 오늘 유독 고도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들머리의 고도가 200m, 정상과는 무려 870m 정도의 고도 차를 이겨야 하는데, 최근 들어 찾은 산 중 가장 큰 고도차이기에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계곡이 좁아지는 대신 작은 와폭들이 보이는 큰 길을 20여분 오르자, 삼거리가 나타난다(10:21). 앞에 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작은 폭포도 보인다. 익근리 출발 1시간 10분이 소요되었다. 계획대로의 행보다.
< 삼거리에서 정상 >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길을 잡는다. 이저까지와는 다르게 비탈진 오르막길이다. 명지산 제 2봉인 남봉으로 향하는 길과 만나는 고도 760m 이정표를 목표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20분 정도를 걸어 이 정도에서 이정표가 나올 것이라는 지점에 도착하니 갈림길의 흔적은 있으나 안내판은 없다. 폐쇄해 버린 것 같다. 대신 아주 작은 5개의 점박이가 붙은 흰 꽃이 나를 반긴다. 너무 작아 가까이서, 카메라도 근접으로 놓고 사진을 찍었는데, 집에 와서 확대해 보니 뿌엿게 보인다. 오히려 작고 해상고가 낮은 사진이 더 선명하다. 웬 조화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근접촬영은 가급적 피해야겠다.
목표가 허무하게 사라지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된비알이 나타난다. 입구에서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직장 동료들인 듯 보이는 무리의 사람들이 뒤처지기 시작한다. 평상복에 손에는 물통 하나씩을 든, 어제의 우리 사업부 직원들과 닮은 모습들이다. 체력과 산행 경험의 유무에 따라 줄이 길게 들어서더니 뿔뿔이 흩어지고 앞서 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르는 행위를 포기하고 있다. 그들을 하나 둘 제치는 재미로 천천히 된비알을 오른다. 길에는 녹색의 기운이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현저히 줄어드는 것 말고는 별 변화가 없다. 고도 850m 즈음에 길다란 나무계단이 나타난다(11:00). 통나무로 만든 계단인데 제법 길다. 덕분에 단숨에 고도를 1000m 가까이로 높인다. 계단을 힘겹게 딛고 올라 서자, 분홍빛 고깔제비가 나를 반긴다.
한숨 쉬고 다시 오르는 길은 가파름이 더해 진다. 아! 이래서 명지산은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상까지 1km가 남았다는 이정표에 도착한다(11:19). 삼거리를 통과할 때가 10:21분이었으니 0.8km를 걷는데 1시간이 소요되었다. 길의 사정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백둔리 갈림/ 명지산 정상 풍경 >
고도가 1000m가 넘어서니 계절은 완연히 초봄으로 변한다. 나무의 잎은 아직 돋음의 흔적도 없다. 고도가 식생에 미치는 영향을 몸으로 확인한다. 다시 또 다른 나무계단 앞에 선다(11:34). 고도는 이미 1100m를 넘었다. 이 계단을 올라서면 정상이 머지 않았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출발 전 오늘 명지산 산행은 공룡을 위한 트레이닝이라 생각했다. 일부러 된비알 길을 택했고 길은 예상대로 거칠다. 생각 외로 몸이 개운하다. 어제 오후에 짧게나마 산행을 했고 지난밤 숙면을 취하지 못했는데도 별 어려움 없이 예까지 왔다. 다음 주 넘을 공룡능선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 오르며 이온음료를 자주 마셨고, 2번에 나누어 카라멜과 초코바로 영양을 보충한 것도 피로를 이기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오늘의 좋은 경험을 잘 기억해 두어야겠다.
저 밑에서 커다란 외침이 전달된다. “화채바위 멀었습니까?” 웬 뚱딴지, ‘화채바위는 반대편입니다. 조금 더 가면 정상이 나옵니다. 어서 오십시요”라고 대답한다. 밑에서 ‘속았다. 돌아갈까? 정상이 근방이란다 가자’하는 이야기들이 들린다. 아마도 화채바위까지만 가서 돌아갈 요량이었나 보다. 그래도 지금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걸으며 명지산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니, 그들이 동료들보다 더 좋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긴 계단의 끝 지점에 백둔리로 갈라지는 길의 이정이 서 있다(11:43). 밑에서 올려다 보는 나무의 가지는 한겨울인 냥 앙상하다. 이제 정상까지는 0.2km만이 남았다. 긴 오르막의 끝이 보인다. 잠시 후 올라 선 본능선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보는 인근산과 명지산 정상이 근사하다.
< 고깔제비 / 외현호색 / 노란제비꽃 / 얼레지 >
마지막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꽃 길이다. 평지가 나타나고 정말로 들꽃들이 많아진다. 온통
외현호색 군락지다. 오르며 간질 나게 보이던 들꽃이 갑자기 흐드러지니 정신이 없다. 볼 것이 너무 많아서이다. 정상부에서 조망되는 딱 트인 조망도 좋다. 정상 바위를 둘러 올라선 명지산 정상은 작은 바위지대다(11:51). 명지산 1km 이정표에서 언제 정상에 오르나 걱정했는데 불과 30분만에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정표상의 거리에 오류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삼거리에서 1km 이정표까지의 거리 측정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명지산 정상에서 1 / 화악산 전경 >
정상에서의 조망은 연무인지 방무인지로 인해 기대만큼 선명하지는 않지만 장쾌하다. 출발 전 읽은 산행 안내서에서는 명지산이 ‘정상 부근에서 바라 보는 산국(山國)의 파노라마가 멋진 산’이라 소개되어 있었는데, 황홀할 정도는 아니지만 고된 오름 짓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히 멋지다. 동쪽 멀리 화악산이 보인다. 좌측으로는 명지산군에 또 다른 봉우리들이 마루금을 그리고 있다. 장엄한 광경이다.
높은 산의 정상에 서면 모두가 멀리를 보게 된다 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멀리를 보아야 하는데 인간사에서도 이치이다. 등산이 주는 감동과 기쁨은 몸의 피로와 괴로움보다 크다 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한계에 다다르는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면서 꿋꿋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 명지산 정상에서 2 / 하산 길의 얼레지 군락 >
< 정상에서 삼거리 >
< 명지산의 또 다른 봉우리들 / 하산 길 이정표 >
5분여의 휴식과 탁 트인 조망은 심신의 피로를 씻어준다. 출발 전 계획대로 별 어려움 없이 2시간 40분만에 정상에 올랐다. 하산 길 초입의 이정표 간판이 어지럽다. 익근리 방향의 표지는 하나인데, 반대편은 ‘명지2봉, 상판리, 백둔리, 적목리’등으로 어지럽다. 어쩌면 내가 택한 익근리가 이 산의 주 들/날머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이름 모를 고수들이 재야에 많이 있듯이 말이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자 길은 언제 그랬냐 싶이 평지 능선 길로 변한다. 길가에 노란제비꽃이 자주 눈에 들어 온다. 봄 산에 피는 노란빛깔의 꽃들의 이름을 구별 짓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피나물과 노란제비꽃은 더욱 그렇다. 노란제비꽃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즈음 피는 노란꽃이라는 의미에서 그 이름이 명명되었다 한다. 피 나물보다는 이름이 멋진 것 같아 노란꽃을 보면 노란제비꽃이라 부르고 싶어 진다. 부근에는 얼레지도 지천이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나 여인’이다. 색이 보라색이니 부잣집에서 권태로움을 못 이기고 사랑을 찾아 집을 뛰쳐나온 귀부인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 본다. 처음에는 한 두 송이가 외롭게 피어 있어 사진에 담았더니 이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길 좌우가 얼레지 군락이다(12:07). 1000m 높이의 고산에서 주로 목격되는 초봄의 전령사를 이리 흔하게 볼 수 있음은 분명 호강이다.
황홀한 얼레지 군락을 지나 화채바위를 향한다. 길은 하산 길 초반에 고도를 많이 내려서서 그런지 평지 수준의 능선이다. 누구나 이런 길을 좋아한다. 12시 20분을 넘어서자 고도는 1100m 이하로 떨어진다. 화채바위가 1078m이니 부근일 것인데 찾기가 쉽지 않다. 잠시 전 지난 출입금지 표시와 ‘명지4봉’이라는 낡은 표지판이 땅에 뒹구는 것을 보고 이곳이 화채바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미친다. 가뜩이나 볼거리가 부족한 명지산에 그나마 있는 명소마저 없애 버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화채바위를 지나자 길은 다시 내리막 지능선으로 변한다.
이즈음 고도 1000m 이상의 높이는 여전히 겨울의 분위기다. 잠시 더 고도를 낮추자 나무의 잎들이 돋아난다. 익근리까지 4.4km 남았다는 이정표 부근에 작은 공터가 보인다. 앉아서 점심상을 편다. 마지막 남은 이온 음료를 마시고 김밥 한 줄을 뚝딱 해 치운다. 간간이 올라 오는 산꾼들의 표정에 힘겨움이 묻어난다. 이 길도 가파르기는 오전에 오른 길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명지산은 힘겨운 산이야!
식사를 마치고 별 특색 없는 지능선과 계곡길을 거쳐 40여분을 걷자 오전에 지났던 갈림에 다시 서게 되었다. 삼거리는 참 묘한 매력이 있다 한다. 걸어 논 길을 빼 놓고는 둘 중에 한 길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삼거리 갈림에서 한 길을 선택했고 그 때 선택하지 않은 길은 돌아서 그 뒤편으로 확인했다.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두 길은 별 차이가 없었다. 흔히 사람은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하거나, 이미 한 일을 후회한다고 한다. 전자가 주로 남성들이 갖는 특징인데, 이는 헤어진 첫사랑을 남자가 더 오래 기억하고, ‘그 때 그 일을 했어야 했어’라는 후회의 말을 남자들이 더 많이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반대로 후자는 여성들이 갖는 특징인데,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으며 팔자 고첬을 텐데’하는 말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 떤 다시 삼거리에 섰다. 오전에 가졌던 불안감이 없어지고 몸은 더 가벼워졌다. 기분도 상쾌하다. 갈 길은 멀지만 길 사정은 그야말로 ‘꽃 길’이기 때문이다.
< 삼거리에서 익근리 >
오전 경험으로는 익근리까지는 3.8km. 길이 좋아도 1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다. 천천히 걷자. 출발 전 고민했던 아이들 공부에 대한 해법은 찾지 못할 것 같다. 지혜의 산도 자식 교육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해 주지 못하나 보다.
명지폭포 가기 전 멋진 와폭이 눈에 뜨인다(13:34). 맑은 물의 흰 포말이 다시 나를 그리로 이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아예 배낭을 벗고 세면을 한다. 탁족의 유혹도 있지만 아직은 물이 너무 차다. 짧은 휴식이 몸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는다.
명지폭포를 지나 승천사까지는 길고 지루한 길이다. 부근을 지나는 젊은 연인들의 길안내도 하고 오전에 지나친 야생화도 다시 보고 하고도 많은 시간이 지나 승천사에 도착한다(14:05). 미륵불과 절집이 빚어내는 풍경은 여전히 멋지다. 5시간이 넘는 긴 등산이 마무리되고 있다. 곧 익근리 주차장에 도착한다(14:20).
< 명지폭포 부근 와폭에서 >
< 에필로그 >
최근 재미나게 읽은 ‘산을 걷다’라는 책의 저자인
고수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의 산물이다. 나도 오늘 명지산을 오르며 힘겨웠지만 들꽃과 나무들과의 데이트가 즐거웠고, 그 즐거움은 내 기억 속 한 켠에 자리잡을 것이다.
출발 전 밝은 지혜의 산에서 들꽃들의 향연도 즐기며, 다가올 설악 공룡능선 종주를 준비하며 내 등산 실력을 평가해 보기로 했는데, 여러모로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더 겸허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산을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즐거웠던 명지산 산행을 이것으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