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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으로 사회를 재건하자
경희대 조 박사와의 대담
1997년 11월
- “형의 대학에서 아우의 대학에 잘 오셨습니다!” 이케다 SGI회장이 조 박사 일행을 창가대학 기념강당에서 맞이했다. 첫 만남. 그러나 만난 순간,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따스함이 서로 오고 갔다.
“나는 귀 대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SGI회장이 이렇게 말하자 조 박사는 “이케다(池田) 선생님의 이야기는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래의 세계를 재건하려는 존귀한 행동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박사는 유창한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다.
조 박사는 한국 유수의 명문교인 경희대학교·학원의 창립자. 한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경희대학교는 1951년에 창립. 올 가을 한국의 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창가대학과 교류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케다(池田) SGI회장 오늘은 양 대학뿐만이 아니라 일한(日韓) 그리고 한일(韓日)의 '민중'과 '민중'의 우호를 향한 거대한 물결을 일으키는 역사적인 첫걸음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하늘은 청명하게 개인 멋진 가을날입니다. 국화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조 박사를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박사는 교육자이며 대학·학원의 창립자이십니다. 나는 창립자로서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잘 압니다.
조 박사 (SGI회장이 박사에게 주신 장편 시(詩)) ‘새로운 천 년의 여명(黎明)’ 너무도 감격했습니다. 특히 한일(韓日)의 ‘백 년의 지기’뿐만이 아니라 ‘천 년의 지기’를 목표로 향해 가자는 말씀에 감명 했습니다. (지난 달 인도의 ‘아시아협회’로부터 SGI회장에게 수여된) ‘타고르 평화상’ 축하드립니다. 이케다 선생님 내외분의 건강을 기원 드립니다.
SGI회장 황공합니다. 나도 그렇지만 박사께서도 예전에는 몸이 약했었다고 들었습니다.
SGI회장 부인 그 점도 아주 비슷하네요. 남편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때문에 오늘 일은 오늘 중으로 반드시 해 둔다”는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 박사는 이번에 간사이 창가학원을 방문.(10월 30일) 그 인상을 “참으로 기대하고 바라는 교육이 지금 창가학원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고 말했다.
SGI회장은 “학생들은 대단히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교육에서 ‘가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학생들은 민감합니다. 인간의 위대함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고 하며 방문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박사에게 선물한 시 ‘새로운 천 년의 여명’에 이렇게 씌어 있다.
불굴의 용자는 동지를 규합하여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탄압의 투옥에도 정의의 불길은
더욱 불타오르고
냉철한 지성의 빛은
감옥의 어둠 속에서
조국과 인류의 미래를 전망했다
조 박사
경희대학교 전신인
신흥대학교를 설립함은
‘6·25’ 동란의 이듬해
1951년
박사는 사자후했다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두 번 다시 그 미명(美名)에 속지는 않겠다
전쟁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정복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정치에서 교육으로
- 대담에서도 박사가 대학을 창립하게 된 계기가 화제로 되었다.
박사는 “처음에는 정치가가 될 생각이었습니다”고 말하며,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대한민국 국회 내의 정치단체(공화민정당)에 소속하여 법률전문요원 겸 조사국장으로서 기획입안 부문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을 소개했다. 또 당시의 선거에서는 후보자의 이념이나 정책보다도 출신이나 연고관계를 보고 투표하는 경향이 강해 국회의원의 질이 낮았다고 지적했다.
박사 동란이 한창일 무렵, 29살의 젊은 청년에게 국방위원장을 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느꼈습니다. 정치라는 것은 잘 아는 사람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장래성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고 갈지 모른다. 당시는 글을 읽고 쓰는 것도 모르는 국민의 비율이 70%를 넘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결의했습니다. 좋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나 한 사람이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간을 육성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리고 교육의 세계로 발을 내딛었던 것입니다.(신흥대학을 설립)
- “교육으로 사회를 재건하자.” 그 굳은 신조가 서로 공명했다. 현재 조영식 박사의 '밝은 사회문제 연구소'는 75년에 발족하여 인간중심사상에 입각한 협동, 봉사정신의 '밝은 사회운동'을 전개하여 현재 35개국으로 넓혀지고 있다.
또한 박사는 1961년의 군사혁명 직후, ‘5·16동지위원회’(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의 모임) 회장이 되라는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교육부에서 대학총장이 취소되는 처분을 받은 것을 언급. 이사회에서 폐교하지 않을 수 없는 취지를 이야기하자 모두 반대하고 졸업생도 반대의사를 전하러 찾아왔던 일, 교육부에 무상으로 대학을 넘겨주려고 교섭한 끝에 교육부가 잘못을 인정하여 대학은 존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소개했다.
또한 SGI회장이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의 요인은 무엇인가"하고 묻자 함께 자리한 '밝은 사회문제 연구소'의 황병곤 소장이 조 박사의 저서에 간접적인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그 저서란 1962년의 <우리들도 풍요롭게 살 수 있다>이다.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의 근대화를 중심으로 하는 ‘새마을운동’(새로운 마을 만들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여 성공했는데, 그 이면에는 대통령이 박사의 저서를 몇 번이나 읽고 그 이념을 채용한 것이 배경이 되었다고 했다. 박사를 (대통령 관저가 있는) 청와대로 불러 번영할 길을 알기 위한 질문을 대통령이 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가르침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 부친은 한반도의 북부 평안북도에 광산을 채굴하여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광산주(鑛山主)였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두 번의 큰 실패를 경험하고 그 때마다 실패를 교훈으로 살리자고 했다.
박사는 십대 시절의 추억으로서 ‘돌탑’ 에피소드를 피력했다.
박사 어느 여름날의 일입니다. 아버지와 둘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때, 큰 강 부근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가리키며 '생각하는 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째서 실패했는가?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는가.” 이것을 생각하면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두 번 실패를 했지만 계속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성공했다. 똑같은 실패라도 생각하고서 실패하는 것과 본능적으로 행동하여 실패하는 것은 다음 결과가 다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숙고(熟考)하고 인내 강하게 생각하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하다"라고 말입니다.
SGI회장 좋은 말씀입니다. 나는 일본의 많은 사람들에게 박사의 존귀한 인생을 전하고 싶습니다.
- 박사가 태어난 고향은 현재의 북한에 해당한다. 대화는 박사의 ‘월남극’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박사는 대한민국(남한)으로 월남. 이 때에도 ‘아버지의 가르침’인 ‘숙고(熟考)’가 인생의 명암(明暗)을 가르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박사 제2차 세계대전 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미래를 전망할 수 없었을 때 아버지에게 상담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잘 생각하여 결심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부하시고서 1946년 봄에 타계하셨습니다. 그 후 약 1년 생각을 거듭한 끝에 대한민국(남한)으로 오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의 조국은 자유가 있는 나라로 하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가치창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가치창조를 위해서는 자유가 불가결하겠지요. 지금도 그 때 결단을 잘 내렸다고 절실히 생각합니다.
SGI회장 어떻게 대한민국에 월남하시게 되었습니까?
박사 평양에서 원산을 거쳐 태백산맥을 넘어 왔습니다. 나침반 하나로 다만 오로지 남으로 남으로. 올해 그 오십 주년이 되었기에 당시 걸었던 길은 38도선 바로 앞까지 아내와 아들 둘과 함께 더듬어 보았습니다. 이 때 세 군데에 ‘자유를 찾아서’라고 돌에 새기고 왔습니다.
SGI회장 혼자서 하셨습니까?
박사 그렇습니다.
SGI회장 부인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박사 아내는 임신 중이어서 어머니와 함께 나중에 내려 왔습니다. ‘남한에 있는 남편의 아이가 뱃속에 있다’고 하면 무사히 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SGI회장 그런데 언제 어떻게 재회하신 것입니까?
박사 그런데 그것이 힘들었습니다. 아내는 37도선을 넘을 때, 평양으로 되돌아가라는 군대의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몇 번이나 한국으로 넘어오려고 했는데,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개성에 있는 미국군의 보호시설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 아는 분이 나에게 연락을 해 주어 내가 마중간 것입니다.
- 박사는 “이 때 월남하겠다는 판단은 옳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교육에 심혈을 쏟는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세 가지 정행(正行)’
- 또한 박사 자신이 행동을 결단해 가는 데 중요시하는 가치기준을 소개. 이것은 ‘삼정행(三正行)’이라 부르는 ①올바로 안다, ②올바로 판단한다, ③올바로 행동한다 는 세 가지 기준이다. 박사는 "이 세 가지가 올바르게 완수된다면, 자연의 섭리에 들어맞는 한 불가능은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원래 ‘아버지의 가르침’입니다. ‘생각하라 생각하라’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몇 번이나 그렇게 하여 전진해 왔습니다”고 감회를 담아 술회했다.
학생을 지킨다
- 이 자리에는 SGI회장이 황 소장에게 “학원장(조 박사)에게 꾸중들은 적은 없습니까?”라고 질문. 소장은 웃으면서 “제가 처음 학원장을 만난 것은 타이완대학 4학년 때입니다. 이후 40년간 섬겨 왔습니다만 한 번도 꾸중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조 박사의 “평화는 개선(凱旋)보다 존귀하다”를 말하고 ‘덕(德)’으로 모두를 감싸 가는 박사의 인품을 소개했다.
학생운동이 한창이었을 때의 일. 과격파 학생들도 있었다. 교수들은 그들을 퇴학시키는 쪽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최후까지 학생측에 서서 교수들을 설득하여 학생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많은 대학에서 학생과 대학 측의 대립으로 폭력사건이 일어났지만 경희대학에서는 한 사람의 낙오자도 나오지 않았다.
이에 경희여자고등학교의 홍승준 전(前) 교장도 맞장구를.
“경희학원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학원장은 열 번까지는 용서해 준다.(웃음) 그러므로 모두 되돌아오는 겁니다.” 언제나 철저하게 ‘학생측에 선다’ ‘대학은 학생을 위해 있다’. 이것이 창대 창립자의 뛰어난 행동이기도 하고 신조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봄에 경희대학의 캠퍼스를 수놓는 벚꽃 캠퍼스는 산(고황산)의 일부를 개간하여 건설되었다. 홍 전(前) 교장은 이 산이 1950년 전후 (신흥대학 설립 당시)는 황폐하여 민둥산이었다는 것을 술회했다.
홍 전(前)교장: 그러한 장소에 학원장은 스스로 상의를 벗고 때로는 러닝 셔츠 차림으로 한 그루 한 그루씩 나무를 심고 꽃을 심고 돌 하나 하나를 날라 환경을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은 푸른 산으로 태어나 바뀌어져 있습니다.
우리 ‘경희인’은 학원장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에도 꽃에도 학원장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경희 금강산’이라는 정원을 만들 때도 바위를 쌓아올리는 현장에도 가시어, 모두 위험하다고 걱정하면 “나의 생명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교장이었을 때, ‘문화세계의 창조’라는 건학정신을 새긴 탑 옆에 학생들과 교화인 목련나무를 심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을 지나가던 학원장은 차에서 내려 웃옷을 벗고 함께 나무를 심었고 함께 식수의 의의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 목련은 지금도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에게도 꼭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SGI회장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천 년의 비전
- 또 홍 전 교장은 “이 곳을 방문하기 전에 <21세기를 여는 대화> <인간혁명> 등 많은 저작을 읽어보았습니다. 학원장과 이케다 선생님은 철학적으로 매우 유사하십니다. 선생님이 세계를 위해 싸워 온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회견은 역사적인 만남입니다. 여기서부터 21세기의 문이 열려진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과 같이 SGI회장과 조 박사의 이념에는 공통된 부분이 많다. 일례로서 SGI회장은 올해 9월 경희대학에서 열린 평화국제회의에서 조 박사가 ‘인간사회의 현실과 새로운 천 년을 향한 비전’을 주제로 한 기조강연을 언급.
“강연을 자세히 배견했습니다. 매우 놀랐습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강연에서 박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선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것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의 미래는 내일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 결국, 미래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비전 속에 있다.”
회견에서도 박사는 “문화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근본”이라고 하고, 이것이 건학정신인 '문화세계의 창조'에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훈장
- “훌륭한 부인이시군요.”
대화하는 도중 박사의 부인 오명길 여사에게 친절히 마음을 쓰며 칭송하는 SGI회장 부부. 반세기 이상을 박사와 고난을 함께 하고 대학 경영을 재정 면에서 지원한 것은 오 부인이었다.
SGI회장은 회견 중에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설립 당시 경영은 어려웠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교직원에게 줄 급여가 부족했다. 월급날 하루 전, 돈을 구하기 위해서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맡기러 갔다. 다이아몬드 반지. 그러나 전당포 주인은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라고 말하며 돈으로 바꾸어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울면서 돌아오는 도중 앞이 보이지 않아 전봇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 흉터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어머니의 훈장’이라 부른다.
SGI회장 귀 대학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느낍니다.
박사 지금은 도덕이 무너져 어느 대학도 사막과 같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이케다 선생님은 이처럼 훌륭한 청년을 육성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선생에게는 수많은 노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SGI회장 황송합니다. 대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스의 철학자의 명언에 “간난(艱難)보다 더한 교육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십대인 시절에 이 말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노고하면 노고한 만큼 크고 위대한 인간이 된다. 지성만이 아니라 그것도 갖춘 전 인격적인 교육은 노고에 의해 행해진다. 따라서 노고를 스스로 구하고 노고와 싸워 간다고 결심했습니다.
또 “파도는 장해를 만날 때마다 그 완고(頑固)함의 도를 더한다”라는 말이 나의 모토입니다. 예를 들어 바위에 부서질지라도 파도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부딪혀 옵니다. 인간도 장해 앞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거나 지면 안 됩니다. 장해가 있으면 있을수록 전력으로 부딪쳐서 앞으로 앞으로 타고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정신을 지주로서 삼아 나는 전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보다도 조 박사님이야말로 훌륭하고 견실한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그 큰 노고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도 나 나름대로 미래를 준비해 왔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관을 창립했습니다. 동양철학연구소, 민주음악협회, 창가학원, 창가대학, 초등학교, 유치원……
창가학회의 회관도 전국, 세계에 있습니다. 어쨌든 일하고 일하고 일해 왔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일어서서 지금, 일본 제일로 되었습니다. 대학에 대해서는 아직도 큰 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너무도 발전했기에 질투가 있었습니다. 박해도 있었습니다. 이상(理想)을 버리고 배반하는 자도 있습니다.
완성된 결과만을 훔치려는 비열한 자도 있다. 실망도 했으나 이것도 인간의 천성이라고 나는 달관하고 있습니다. 초연하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너무 급속하게 발전하면 그것이 거꾸로 화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의 고도성장도 그러했습니다. 단숨에 이룩해야 할 경우도 있으나, 자기답게 자기의 힘에 맞게 견실하게 발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시적인 변명이 아니라 이상을 향해 어디까지나 오래 지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파괴’를 멈추지 않으면
박사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도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실망도 합니다. “내가 모두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 해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21세기는 대단히 어려운 세기입니다. 본격적인 변화의 시대입니다. 변화는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라 하여 막연하게 (미래에)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성이 파괴된 어처구니없는 세기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 박사는 지금 역사의 기로에 있다고 강조. 과학기술로 인간의 수명연장도 가능하게 되고 IQ(지능지수)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을 잃은 ‘사이보그’나 본능대로 살아가는 ‘원인(猿人)’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인간성이 파괴되지 않도록 무언가 역사의 방향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기에 지금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이케다 회장과 나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도의 석존이 성도한 땅인 붓다가야를 박사가 방문하고 보리수 아래에서 명성(明星; 샛별)을 우러러보면서 시를 만들었다는 것도 소개했다.
우정은 바다를 건너
SGI회장 박사는 그저께(10월 30일) 오사카의 간사이 창가학원에서 (일본의 에도시대의 국학자인) 가모노 마부치와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만남(1763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박사는 간사이에서 두 사람의 단 한 번의 만남이 메이지유신이라는 시대변혁의 운동으로 발전했다고 소개. “나도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기분으로 도쿄에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똑같은 에도시대에 귀국의 ‘통신사’와 일본의 학자의 아름다운 우정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1682년, 한국의 홍세태와 일본의 히토미 가쿠잔과의 만남> 에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즉시 서로의 견식을 인식하고 깊은 우정을 맺었습니다. 일본의 학자 가쿠잔은 귀국의 통신사를 진심으로 경애했습니다. “당신은 박학하며 인격은 위대합니다. 발군(拔群)의 총명함과 비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귀국의 통신사도 “옛날부터 말 한 마디로 백 년의 우정을 맺는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나와 당신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우정을 서로 깊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박사와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대화한지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실한 귀국의 통신사는 일본으로 떠나는 사절에게 기탁하여 그리운 일본의 학자 가쿠잔에게 우정이 흘러 넘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과 일본에서 시를 주고받고 즐겁게 서로 대화했던 것을 항상 떠올립니다. 아, 당신과는 나라가 다르고 멀리 만리 길이라 산과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가쿠잔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어 있었다. 그 편지는 이전에 두 사람의 대화에서 동석(同席)한 가쿠잔의 아들에게 전해졌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훌륭한 학자로 자란 아들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절구시 세 수와 함께 깊은 감사의 답장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우정의 드라마도 이전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메이지 이후의 일본은 귀국에 대해 너무도 거만하고 무례한 태도를 계속해서 취해 왔습니다. 이것을 바꾸지 않으면 일본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가서는 세계평화를 위해 영원히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나는 박사와의 만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귀국과의 '우정'의 마음을 일본에 넓혀 갈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박사 지금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국의) 과거는 잊도록 합시다. 미래지향적으로 나갑시다. 힘을 합하여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갑시다.
- “이케다(池田) 선생님의 말씀대로 인류는 한 가족이 되어야만 합니다. 선생님의 ‘인간혁명’과 나의 ‘인간중심주의’는 글자는 다르지만 사상은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조 박사. 박사는 일반적으로 서양은 사물을 '분화(分化)'하여 분석적으로 본다. 그것에 비해 동양은 사물을 '거시적'으로 본다고 지적.
‘태양과 인간’ ‘태양과 달’ ‘달과 인간’. 무엇 하나 고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사물의 관계성을 볼 때, 입체적·유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본질은 간파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지금도 핵무기나 화학무기를 개발하고, 무기를 매매하는 나라가 있다. 영구평화를 위해서는 ‘가치관의 기준’을 바꿔야만 한다. ‘마음’을 바꿔야만 한다. 문화주의, 인간주의, 보편적 민주주의로 나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동북아시아에 지역공동체를
- 더욱이 유럽이 EEC(유럽경제공동체)에서 EC(유럽공동체), 그리고 EU(유럽연합)를 향한 결속을 강화했듯이, 앞으로의 세계는 ‘배타적 국가주의’가 아닌 ‘지역적 국가주의’를 향해 가야만 하며 ‘공생’이 중요하다고 강조. 특히 일본과 중국과 한국이 힘을 합하여 동북아시아에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21세기는 ‘세계시민사회’를 지향해야만 하며 전쟁 없는 ‘하나의 세계’를 향해 ‘팍스 유엔(유엔에 의한 평화)’이 기축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 때, 1980년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소련에 강연으로 초청되어 4백 명의 세계지도자를 앞에 두고 ‘제3민주혁명과 신세계질서’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여 평화를 향한 신념을 당당히 말한 에피소드가 소개되었다. 러시아어로 번역된 강연은 35만 부 인쇄되어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부되었다. 이것이 페레스트로이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날 박사 부부의 방문을 기념하는 ‘벚꽃’이 마키구치(牧口) 기념정원에 식수되었다. 박사는 ‘르네상스 나무’라고 이름짓고는 “어떻습니까?”라고 웃음 지으며 말했다. ‘문화 대은(大恩)의 나라’에서의 방문자인 조 박사. SGI회장은 “다마가와(多摩川)의 이름도 한국어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고 언급하는 등, 일본 각지에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한반도와 인연이 깊음을 강조했다.
“이번에는 이케다 선생님의 차례입니다. 꼭 한국에 와 주십시오”라고 조 박사가 말했다. SGI회장은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찾아 뵙고 싶습니다. 그 때에 오늘의 대담을 계속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고 답했다.
방명록에 조 박사는 이렇게 썼다.
그 말이 이 날의 ‘마음의 공명’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천 년의 지기와 21세기를 재건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