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로 살아야지.’
1984년 12월 늦은 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족히 밤 10시는 됐을 시간이었다.
고3 겨울방학을 앞두고 친구 2명과 운동장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는 현대에서 오라칸다. 잘 됐제? 곧 울산 갈기다"는 성호.
당시만 해도 실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기업 취업(생산직)이 수월했다.
녀석은 아직도 울산의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고 있다.
“내는 의대에 입학했다. 하숙집도 구해야 하고... 학교구경도 미리 하고...
며칠 쉬다 서울 갈끼다"는 민규
지금 녀석은 꽤 유명한 정신과병원 원장이 돼있다.
가끔 그 친구와 술을 마시면 술값은 녀석이 낸다.
"우수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오늘 술값은 내가 쏠게. ㅎㅎ"
‘우짜노~ 친구야. 몇 년 동안 공짜술 잘 얻어마셨는데,
내가 술 끊어서 너네 병원 입원할 일 없다~~’
“성규 니는 우짤끼고~?”
“내는 우선 돈을 벌기다.”
“느그들 잘 해라이~~ 십년 뒤에 성공해서 웃으며 술 한 잔 하제이~."
"좋지. 우리 셋 중에 낙오자는 끼어주지 말자~"
그날 그렇게 호기롭게 약속했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이틀 뒤 아침 일찍 안방으로 건너갔다.
“아버지 저 취직했십니더~ 오늘 서울 갑니더.”
“잘 했데이. 어딜 가든지 밥 굶지 말고, 건강 단디 챙기거라."
아버진 7남매 중 유난히 막내를 귀여워해주셨다.
그런데 나와 눈 한번 맞추지 않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번듯한 직장도 구하지 못하고, 무작정 집을 나선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나 하신 듯...
“성구야~, 니 이거 가지고 가라이... 우리아들 배 곯지 말고~~.
선상님들 말씀 잘 듣고. 알았제?”
어머니는 속바지 깊숙이 숨겨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손에 꼭 쥐어주셨다.
수중에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몇 장과 옷가방 하나가 전부!
무작정 집을 나섰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다.
‘돈을 벌려면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가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찾은 곳이
경남 영산에 있는 부곡온천.
당시 부곡온천은 제주나 경주 다음 가는 관광지이자 신혼여행지였다.
낮에는 온천욕을 하러 온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밤에는 술집마다 손님들로 불야성을 이뤘다.
일자리는 생각보다 쉽게 구해졌다.
부곡온천에서도 왕래가 거의 없는 후미진 뒷골목, 3류 룸살롱의 웨이터로 취직했다.
흰색 와이셔츠, 검정색 바지, 검정 나비넥타이!
열아홉 살, 나의 첫 직장의 유니폼이었다.
취직도 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장밋빛 희망도 잠시,
일하는 날보다 공치는 날이 더 많았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니까 매상이 오를 리 없었고,
돈을 벌지 못하니까 시설투자는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었다.
지금도 유흥가 술집이라면 그렇겠지만.
당시 관광지야말로 예쁜 아가씨가 있어야만 손님이 찾아왔다.
잘 되는 술집에는 10명 이상의 아가씨가 상시 대기하기도 했다.
그러니 얼굴 좀 된다는 아가씨들이 3류 룸살롱을 피하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근무하는 술집의 인원은 계산과 주방을 맡은 사장님내외분,
그리고 지배인 한명, 웨이터 한명 뿐이었다.
아가씨는 멤버로 불리는 사람이 손님이 왔을 때 보내주었다.
(멤버는 지금의 보도방처럼 아가씨를 업소에 대주는 사람을 지칭한다
당시 술집주인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곡온천에 단 3명 뿐이었다.)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있어봐야 잘하면 회추를 온 분들 한 팀이 고작이었다.
(회추: 단체관광의 경상도 사투리?)
모처럼 나온 회추에서 술은 마시고 싶고,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고...
그래서 외곽의 허름한 술집을 찾은 것이 실수였다.
주인 -“모처럼 온 손님이다. 월세라도 낼 수 있게 바가지를 왕창 씌우자.”
지배인과 웨이터 -“월급도 없는데 팁이라도 실컷 받아야겠다.”
아가씨 -“잘 되는 가게도 아니니깐 팁이나 챙기면 그만이지.”
한마디로 단합(?)이 잘 되는 팀웍(team work)이었다.
이쯤 되면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지배인과 웨이터는 팁을 줄 때까지 손님이 부르지 않아도 수시로 방을 들락거린다.
"불편하지 않습니까? 필요한 게 없으신가요?“
아가씨는 팁이 나올 때까지 온갖 교태와 애교로 손님을 유혹한다.
술자리의 마지막은 더 황당했다.
아가씨들은 사장의 부탁으로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술을 버리기 일쑤고,
손님들이 어느 정도 술이 취했다 싶으면 웨이터는
마시지도 않은 양주 빈병 서너 개를 테이블 위에 슬쩍 가져다 놓는다.
결국, 술 취한 손님과의 싸움이 하루 장사의 마무리인 날이 많았다.
80년대에도 이런 문구는 분명 있었는데...
“손님은 왕이다.”
우리가게는
“손님이 봉이다??”
가게는 점점 기울어져가고,
“저건 아닌데...”싶어도 신참인 내가 말을 꺼낼 처지도 아니었다.
입사(?) 한 달이 지날 무렵, 나를 챙겨주는 형이 생겼다.
가게에 아가씨를 조달해주는 멤버, 나보다 20살이나 많은 민기형이었다.
월급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팁조차 받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민기형은 끼니마다 “성규 니 밥 안먹었제? 이리 온나.”
하면서 집으로 불러 밥을 먹여주었다.
그 형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성규야, 내 말 서운케 듣지 말거래이. 내 아무리 봐도 니는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다.
빨리 그만둬라.”
진정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게 느껴졌다.
“행님, 고맙습니더. 쪼매만 지켜봐 주이소~.”
민기형의 아픔이 나에게 기회가 됐다.
어느 날, 새벽에 일을 마치고 숙소로 가려는데 민기형이 찾아왔다.
“성규야, 내랑 밥 묵자.”
가끔 일이 끝날 시간에 맞춰 일부러 찾아와 우동을 사주곤 했다.
그날도 형을 따라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성규야, 지금부터 내 말 귀담아 잘 들어라. 내 사업 당분간 니가 맡아주라.
니 형수하고 조카도 좀 부탁하제이.”
“무슨 말씀인데예? 지는 아직 못합니더.”
“아이다. 니 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 그리고 니도 명심하거래이.
이 생활 오래하면 자의든 타의든 안 좋은 일 생길 수밖에 없다.”
사연인 즉, 손님들과 아가씨와의 다툼을 중재하다가 싸움을 하게 됐고,
그 와중에 손님이 크게 다쳤다고 했다.
같이 싸웠지만 형님만 교도소에 가게 됐다는 것이었다.
형님의 부탁이긴 했지만,
나도 이제 아가씨 10명을 직원으로 둔 어엿한 멤버(사장)였다.
멤버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 궁금하신가?
아가씨가 출근하면 일인당 2천 원씩, 팁을 받으면 20%가 내 수입이다.
아가씨들에게 일거리를 가져다주고, 보호와 관리차원에서 받는 게 수입원이다.
하루 수익이 적게 잡아도 출근비 2만원에 팁 지분이 10십만 원은 됐다.
줄잡아 계산해도 한 달 수입 360만 원 정도!!
이 돈에서 형수님과 조카의 생활비 250만원을 드리고도 110만원은 벌었다.
여기에 손님을 소개해 주면 술집에서 매상의 10%를 따로 줬다.
이건 내 개인수입이었다.
열아홉 나이로는 꽤 큰돈이었다.
한 달간 일을 해보고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꼭 아가씨들의 피를 빨아 돈을 버는, 한마디로 포주가 된 기분이었다.
전에 웨이터로 일하던 가게사장님과 협상을 하였다.
“사장님, 요즘 힘들지예? 제가 이 가게를 운영하고 월세 외에 매달 2백만 원을 드릴게예.”
“니가 뭘 안다고 술집을 한다꼬?... 글고, 내가 널 뭘 믿고 맡기노?”
말도 안 된다는 사장님을 일주일간 설득하여 가게 운영을 맡게 됐다.
** 룸싸롱의 시작
가게 이름부터 바꿨다.
손재주가 있는 고향친구에게 도움을 청해 벽지도 바르고 페인트도 칠했다.
가게 이름은 시트지를 간판에 덧씌워 사용했다.
가게 수리를 마치는 날, 직원들과 단합대회도 했다.
전에 같이 일했던 지배인, 웨이터 형님, 그리고 10명의 아가씨들...
돼지국밥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인사자리를 가졌다.
그동안 잘못된 점을 고쳐야겠다는 마음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행님들, 앞으로는 손님이 부르지 않으면 방에 절대 들어가지 마이소.
또, 팁 요구 절대 안됩니더.”
“아가씨들도 쓰레기통에 술을 버리지 말고 팁도 요구하지 마세요. "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반발이 거셌다.
“어이, 정사장! 그럼 우린 뭐 먹고 사노?”
“형님, 절 믿어주시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정사장 ~ 닌 어려서 몰라 그러는 갑는데, 술집에서 바가지 안 씌우면 뭐 먹고 사노?
부곡온천에 한번 술 마신 손님이 언제 또 온다꼬?"
그 후, 징그러울 정도로 형님, 누나들과 말다툼을 했다.
사장이 사장답지 못하다며 지배인에게 얻어맞기도 했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시작도 못 해보고 문을 닫을 판이었다.
“형님, 누나들 오늘 일 마치고 밥 먹으러 가입시더. 제가 한잔 살끼예 ~.”
새벽 4시 가게를 마치고 포장마차로 갔다.
“누나들 앞으로 출근비, 팁 비용 안 받겠심니더. 누나들이 받은 팁 다 하이소~.”
“정사장 니는 뭐 먹고 사노?"
가장 나이 많은 누나가 비꼬듯이 받아쳤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끼예.”
“형님들, 다음 달부터 월급 60만원 줄끼예.”
“임마, 장사도 안 되는데 니가 그 돈을 우째 줄낀데?”
“걱정 마이소 땡빚을 내어서라도 줄끼예. 대신 내가 원하는 것 들어주이소.”
첫째, 절대 손님에게 바가지 씌우지 마이소~
둘째, 손님에게 팁 달라고 하지 말고예~
셋째, 손님이 부르지 않으면 방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이소!
넷째, 형님들은 점심 먹고 내하고 영업하러 다닙시더~
그 시절 부곡온천은 바가지 씌우기,
아가씨들은 소속 멤버에게 돈 상납하기,
종업원들은 오후 5시에 출근하기가 일종의 룰이었다.
새벽 5시쯤 잠이 들고 아침 9시에 눈을 떴다.
영업 준비를 위해 명함을 만들고 찌라시(홍보물)도 만들었다.
점심식사 후, 형들과 부곡온천을 돌면서 비끼질(영업)을 했다.
마산 부림시장에서 털옷 몇 개를 구해서 광대 옷도 만들었다.
“행님들, 이거 입이보이소~”
“와이라노? 쪽 팔리게 저리 치아뿌라~~”
광대옷은 도저히 못 입겠다는 형들을 대신해 내가 입는 수밖에 없었다.
어이구 바보같은 형들 얼마나 따뜻했는데...ㅋㅋ
첫 달 400만원 적자가 났다.
월세, 월급, 관리비, 식대비...등등
모두 비웃었고,
사장 대우도 받지 못하던 내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400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구할 길은 없고... 염치 불구하고 민기형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니도 참 웃기는 놈이다~ 와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노~~
형수한테 말해둘 테니깐 줄끼다. 다음 달에도 안되믄 포기해라~ 김사장에게 넘기면 된다 ”
‘멤버’라는 자리는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큰돈을 받고 소속 아가씨들과 함께 팔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홍보와 영업에 매달렸다.
낮에는 온천과 길거리에서 광대옷을 입었고,
저녁에는 식당을 돌며 “누님예, 손님 좀 우리집에 보내주이소~.”
새벽에는 나이트클럽이나 스탠드바 앞에서
“손님~ 바가지 절대 씌우지 않는 좋은 술집 있습니더.”
두 달째 되는 날부터 손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술집으로 차츰 알려지면서 인근 상인들도 손님으로 왔다.
맥주만 마셔도 되고, 원하면 소주도 사다 주었다.
새우깡을 서비스 안주로 내어 드렸다.
출근비와 팁 지분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소문이 나면서
예쁜 아가씨들도 모여들었다.
물론, 외지에서 온 아가씨들이었다.
거기에도 상도가 있어서 다른 멤버에 소속된 아가씨들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가씨는 30명이 넘었고, 지배인과 웨이터도 6명이나 됐다.
월세와 형수님 생활비를 주고도 매달 1천만 원 이상 남았다.
두 달 뒤에는 인근 마을의 양옥주택 한 채를 전세로 얻어서
여관이나 단칸방에서 월세로 살고 있는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가족처럼 한 집에서 살다보니까 서로 더욱 가까워졌고,
예약을 해야 올 수 있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열아홉 살 술집 뽀이!!
술집은 어린 내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험한 곳이었다.
술과 여자, 돈과 쾌락, 배신과 싸움...
어두운 세상의 축소판이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맞서며 살았다.
그 시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본다.
단순히 부자로 살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을까?
가난 때문에 술집을 선택한 형들, 누나들과의 동고동락 덕분이었을까?
아닌 것 같다.
집을 떠나기 전날, 아버지의 말 없는 눈빛....
어려서부터 내 손을 꼭 붙잡고 동네를 다니면서
“제 막내아들입니다.”자랑하셨던 아버지셨다.
철이 들기도 전에 신문을 배달하고 고물을 주우며
제 앞가림을 하는 어린 아들이 허허벌판 세상으로 나간다는데,
아버진 그냥 묵묵히 듣기만 하셨다.
그리고는 한마디 하셨다.
“어딜 가든지 밥 굶지 말고, 건강 단디 챙기거라.”
오늘 문득, 30년 전 아버지 눈빛이 그립다.
첫댓글 참좋은글입니다 감사해요
아 잘 보고 갑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과 가까운 곳의 이야기인것 같고 자라난 환경도 비슷하여 많은 생각과 감동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