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석마을은 신태인읍 초입에 있다. 태인으로 연결되는 1번 국도와 신태인으로 가는 30번 국도를 이용하여 갈 수 있다. 하지만 한적한 도로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정우면으로 연결되는 701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된다. 정읍 수성동에서 출발하여 정우면을 거쳐 신태인읍까지 연결되는 701번 지방도를 ‘정신로(井新路)’라고 한다. 이곳을 운전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읍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진강을 건너면 내석마을이 포함된 신태인읍 구석리(九石里)에 도착한다.
구석리 남쪽으로는 동진강의 본류인 태인천과 그 지류인 용호천이 합류한다. 이곳의 지형은 남쪽으로 뻗어 있는 이른바 곶(串)의 형태여서 바닷물의 영향을 받았던 시절에는 그 형태가 더 도드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곳을 예로부터 돌고지, 돌구지, 돌꼬치 등으로 불렀다. 나중에 마을 이름이 한자화되면서 ‘구지’는 구(九)가 되면서 구사(九士)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이곳 신태인읍 구석리(九石里)는 내석(內石)마을, 구사(九士)마을, 남계(南溪)마을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구사(九士)와 내석(內石)의 이름을 조합하여 지금의 구석리(九石里)가 된 것이다.
구석리의 3개 마을 중에 내석마을은 ‘안돌고지’라 하였고, 남계마을을 ‘바깥돌고지’라고 부른다.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신태인읍에 해당하는 태인현 북촌면에 상석곶리(上石串里)와 하석곶리(下石串里)가 기록되어 있다. 위치상 상석곶리(上石串里)는 내석마을에 해당하고, 하석곶리(下石串里)는 남계마을에 해당한다.
내석마을은 신태인 백산(栢山)의 산자락이 남으로 뻗어 이루어진 구릉지에 형성된 마을로 동진강을 바라보고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형 농촌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진주강씨(晉州姜氏)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진주강씨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내석마을에 김씨 일가가 이주하여 산에 석주를 세우고 집을 지으려 했으나 개(강아지)가 그곳에 똥을 싸고 사라지자, 이곳이 정착할 곳이 아니라 하여 산외면 오공리로 이주하여 지금의 김명관 고택이 되었다고 한다. 김명관(1755~1822)은 조선 정조 때인 1784년에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태인현 흥천면 청석골(지금의 태인면 오봉리 청석마을)에도 김씨 일가가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강아지들이 똥을 싸는 것을 보고, 이곳은 강씨들의 터라고 여겨 포기하고 산외면 오공리로 명당 터를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강아지와 강씨가 연결되는 이야기가 두 마을에 공통으로 전해져 온다는 것이 신기하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산외면 오공리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룬 광산김씨 김명관의 이동 경로가 짐작되기도 한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전라도 태인현의 북촌면 내석마을을 점찍고, 다시 동쪽으로 흥천면 청석골을 거쳐 첩첩산중의 산외면 오공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내석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강갑수가 처음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이때부터 내석마을에 강씨들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서쪽 산자락에는 진주강씨 문중의 재실(齋室)이 있는데, 이 건물은 강갑수씨가 입암 대흥리의 보천교 건물을 뜯어다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보천교가 일제로부터 탄압받아 건물이 해체·매각되는 시기는 교주 차경석이 사망한 1936년 이후로 볼 수 있으니, 강씨 재실도 그 무렵에 이건(移建)되었을 것 같다. 마을 어르신께 물어서 어렵게 찾아간 강씨 재실은 문이 잠겨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담장 밖에서 어렵게 사진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보천교 건물의 일부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때문에 이 마을을 찾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