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속 씨름경기의 태동기(1980∼1985) |
근대이후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국민체격이 현저히 상승되었고, 이 시기부터 씨름 선수들의 체 력과 체급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경기규정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씨름의 인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
1970년대 |
씨름경기는 일반 구기 스포츠종목(축구, 농구) 및 투기종목(권투) 등의 인기 스포츠에 가려 그 인기가 쇠퇴하였다. |
1972년 |
KBS와 대한씨름협회의 공동주최로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를 개최하여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 함에 따라 씨름이 그 인기를 찾았다. |
1974년 2월 12일 |
국내 최초의 실업팀인 부산공동어시장 씨름 팀이 창단. 직업적인 씨름선수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
같은 해 5월 29일 |
일본 스모연맹이 한국 씨름협회의 씨름인을 초청하여 일본 스모와 교류를 시작하는 등의 다양한 형태의 발전을 가져왔다. |
1980년대 |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각종 스포츠의 활성화 방안과 함께 프로스포츠의 붐을 타고 국내 씨름계도 프로 화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
1981년 12월 10일 |
현대준공업 씨름단이 창단되고, 일부 씨름인과 KBS인사를 주축으로 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당시 KBS스포츠 해설위원인 이규항 아나운서와 씨름인 김태성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오 늘날 민속씨름이 태동하는 시발점을 맞았다. |
1981년 |
부산구덕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8회 대통령기씨름대회 기간 중 교통사고로 대구에서 입원중인 씨름해설위원 김태성씨가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합장에 나타나 이규항 해설위원은 김태성씨의 씨름 열정을 확인하고, 적극적 인 설득과 이해로 씨름인 김해수씨, KBS 김제길씨, 이명환 부장 등이 주축이 되어 오늘날 민속씨름을 태동키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하였다. |
1982년 4월 |
씨름인 김태성씨와 KBS스포츠 해설위원인 이규항씨 등의 노력의 결과로 민속씨름이 발족하였다. |
1982년 11월 30일 |
민속씨름협회” 사회단체로 등록하여, 초대회장으로 허완구 씨를 추대하였다. |
1983년 2월 15일 |
민속씨름협회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움직임은 1983년 2월 15일 첫 관계자 회의를 소집하여 앞으로의 추진계획과 대한씨름협회와의 관계정립, 선수확보 방안 등을 논의하였으며, 민속씨름의 흥행을 높이기 위해 지역간대결방식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민속씨름협회가 탄생되면 현존하는 대한씨름협회와의 관계가 미묘해지고, 현재 각 직 장에 소속되어 있는 선수들과 아마추어 선수들을 끌어들이는 방안과 얕은 선수 층을 보강하는 방안 등의 많은 어려 운 점이 있을 것으로 보여졌다. |
1983년 2월 19일 |
중앙일보 1983년 2월 19일자에 의하면, 민속씨름의 출범을 준비중인 민속씨름협회가 오는 3월중 잠실체육관에서 1천만원대의 거액을 상금을 내걸고 화려한 개막 전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큰 관심을 모았다. |
1981년 11월 |
KBS와 전 씨름인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 민속씨름협회는 지난 1981년 11월에 창립, 현재 서울시 교육위 원회에 등록된 단체로서 고유의 민속경기인 씨름을 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해 민속화를 추진하였다. |
[- 이때 민속씨름협회 -] 민속씨름협회는 현재 대한체육회 가맹단체인 대한씨름협회가 주관하는 씨름대회가 비록 아마추어 경기라고는 해도 예부터의 관습대로 황소(약3백원)가 걸려 있는 것을 감안해서 이를 파격적인 상금으로 공식화하는 것이 보다 실질 적인 중흥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민속씨름협회의 입장이다.
특히, 86년 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우리고유의 민속경기인 씨름경기를 소개할 수 있도 록 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저변인구의 확대와 보급을 위해 연령 및 직업뿐 아니라 등록 비, 등록선수를 구분하지 않고,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원칙을 정해 민속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없이 통합경기를 치르게 함으로써 민 속씨름경기의 태동을 예고하였다. 따라서 민속씨름협회는 허완구씨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전국 13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년 10∼12회의 대회를 개최할 예정인데, 프로복싱처럼 신인선발전도 함께 실시해 3∼4개의 체급별로 랭킹(품위)제도를 만들었으며, 체급별 대회 와는 별도로 단오절이나 추석절에는 자격에 제한이 없이 누구나 자유로이 출전할 수 있는 ‘천하장사(가칭)대회’ 를 갖기로 결정했다.
한편, 경기방식에 있어서는 현재 씨름경기가 시작 전에 샅바를 잡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단점을 보완하 고, 편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샅바 잡기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잡고, 일어나 실시하도록 하였다. 특히 밀어 내기 기술은 반승의 승점을 주었으나 이번 대회부터는 승부로 인정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등위에 오른 선수들에게 는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해 상금을 배분하는 원칙을 세웠다. |
1983년 4월 9일 |
그러나 이와 같은 민속씨름협회를 대한씨름협회는 인정할 수 없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대한씨름협회 전갑식 회장이 4월 9일 이사회를 소집하여 민속씨름협회 허완구씨를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 를 채택하였다.
협회의 이 같은 급작스런 결정은 민속씨름을 주관하는 민속씨름협회와의 마찰이 공식적으로 표면화된 된 것으로 오는 4월 14일의 개막전을 앞두고 있는 민속씨름계는 상당한 어려움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민속 씨름과 아마추어의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갈등은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
1983년 4월 14일
~17일 |
민속씨름과 아마추어 씨름과의 갈등 속에 민속씨름이 국내의 야구, 축구에 3번째로 민속스포츠시대를 선언 한 모래 위의 민족제전이 민속씨름이 출범하여 1983년 4월 14일∼1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 회 및 4월 체급별장사대회를 대한씨름협회와 KBS의 주관하에 공동으로 주최하고 화려한 개막식과 함께 공식경기에 들어 갖으며, 언론 매체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방영하여 씨름경기의 새로운 한 장을 열었다. |
1983년 4월 14일 |
한국민속씨름협회가 주최한 제1회 천하장사(天下壯士) 씨름대회에는 1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충체육 관에 1만5천 여명의 관중이 모여들어 절반은 수용할 수 없어 경기장 관람석에서 관람할 수 없는 최고의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
이와 같은 씨름 인구의 급 증가는 관람위주의 스포츠로 변화를 가져왔고, 관람위주의 경기 규칙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대회에서 천하장사에게 1,500만원의 상금이 주어졌으며, 경기시작 전ㆍ 후 전통민속행사로서 농악, 고전무용, 북청사자놀이, 명창들의 노래 등을 출현시켜 관중들의 흥을 자아내 씨름경기 가 현대스포츠의 프로화된 스포츠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대회의 천하장사는 이만기 선수였는데, 당시의 쌀 한 가마니가 4만원 정도였으니 그 상금의 액수는 상당히 높은 가치가 있었고, 각 체급별 장사에게는 3백만원의 우승상금이 지급되었으며, 체급 우승자는 태백장사 박진 태(75kg이하)ㆍ금강장사 손상주(85kg이하)ㆍ한라장사 최욱진(95.1kg이하)ㆍ백두장사 이준희(95.1kg이상)로 4체급의 장사가 탄생하였다. 우승한 장사에게는 씨름판 상징 컵을 제작하여 천하장사 및 각 체급의 우승자에게 상징적 의미로 부상으로 지급하 였는데, 이 상징 컵은 2단의 층과 몸체를 받치는 우리나라 전통의 건물형태를 본뜬 팔각 받침대로 구성되었으며, 물 한말 정도의 용량을 담을 수 있는 사발까지 총 높이는 110cm, 무게 72kg, 사발의 직경70cm, 제작비용 460여만에 달하는 우리나라 사상최대의 대형트로피가 천하장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민속씨름이 출범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씨름위원회의 경기일정 을 무시하고, KBS 방송시간에 맞추기 위해 경기일정을 마구 바꾸는 바람에 경기진행이 엉망이 된 것이다. 1일의 경 우 오후 4시부터 예정된 방송시간에 맞추느라 신인선발전 잔여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금강장사급 경기가 끝나지 않자 먼저 3-4위 전을 뒤로 미루고 결승전부터 경기를 가져 관중들은 맥빠진 경기를 보아야 했다.
특히, 많은 상금이 걸린 경기이기 때문에 선수들은 매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그야말로 진지했다. 그러나 막상 석연 치 않은 심판 판정으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있어 선수들의 항의가 잦았다. 첫날 청룡군 금강장사급 경기에서 최 창옥(부산공동어시장)은 김삼식(경남대)에게 먼저 첫판을 따낸 후 둘째 판에서도 김삼식을 먼저 쓰러뜨렸는 데도 오히려 주심은 김삼식의 승리를 선언하고 셋째 판에서 최창옥이 경기장 밖으로 밀려 있는 김삼식에게 공격을 하여 성공시키자 이 번에는 장외의 경기를 인정하는 판정을 했다. 이에 김삼식은 5분간 경기장에 눌러앉아 침묵의 항의 를 했고, 관중들도 야유를 퍼붓는 등의 분위기가 생성되자 협회는 주심을 경기도중 하차시키고, 다른 심판으로 교체 하는 등의 경기 전반에 미숙함을 보였고, 심판자질의 미숙함과 경기규정이 미비함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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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4월 19일 |
대한씨름협회는 주심의 심판 판정의 오심 및 경기규정을 보완하기 위해 대한씨름협회 제1차 이사회를 개최 하여 씨름의 활성화와 더불어 발전하는 씨름의 경기규칙상 문제를 점차 개선해 나아가자는 주안점을 갖고 샅바싸움 의 벌칙을 강화하고 선수가 샅바 잡는 규정을 위반하였을 때는 주의와 경고를 주고, 주의 2회는 경고 1회로 간주하 며, 한 회에 경고 2회는 1패로 하였다. 그리고 3회 경고시는 실격으로 하는 것과 모든 개인 결승전은 승부가 결정될 때 까지 경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경기규칙의 일부를 개정하였다. |
1984년 7월 19일 |
제3차 상임이사회를 열고 심판 판정에 관한 규칙을 수정 보완하였는데, 그 규정은 심판 판정에 있어 주심 1인과 부심 2인이 판정하는 제도를 주심 1인과 부심 3인이 판정토록 원칙을 세우고, 주심 판정이 애매하며, 부심을 요청할 경우나 주심판정후 부심의 이의 제기가 있을 경우는 주심과 3부심, 심판위원장이 경기장 중앙에서 합의판정을 해야하며, 의견이 상반될 경우 다수결원칙에 준하며, 심판위원장은 합의판정 내용을 공식발표 하고, 주심은 공식판정에 의거 판정을 선언하였다. |
한편, 민속씨름협회와 대한씨름협회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는 가운데, 제1회 천하장사대회를 계기로 대한씨 름협회 전갑식 회장이 대회공식석상에서 민속씨름협회 회장 허완구씨를 만나 화환을 걸어주며 민속씨름의 단합을 굳게 약속함으로서 갈등의 와해분위기가 조성됨. 특히, 전갑식회장은 개회식이 끝난 후 대한씨름협회가 한국씨름의 발전을 위해 아마선수들이 민속씨름에 출전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렸던 만큼 두 개의 단체를 하나로 해서 단합된 협회의 면모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씨름협회의 전갑식 회장이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사태한 가운데 열린 회장기 쟁탈전국 장사씨름대회가 31개팀 350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열전을 펼치는 가운데, 민속씨름협회와 대한씨름협회의 통합을 앞두고 씨름계의 관심을 모았다. |
> 변혁의 시기 |
1983년 3월 |
우리나라 씨름이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고, 1983년 3월 민속씨름 위원회의 출범과 초대 회장으로 허완구씨 를 추대하여 민속씨름의 출범하였다. |
1983년 9월 5일 |
대한씨름협회에 민속씨름위원회를 설치하여 통합하고, 통합회장에 허완구씨를 추대하여, 씨름 전반의 조직 이 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
1984년 1월 |
난무하고 있는 씨름경기 기술용어 제정위원회를 발족하고, 한국학회 자문을 받아 54가지의 기술용어 를 확정하여 한글학회에 인준을 얻는 등의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한씨름협회와 민속씨름이 통 합되어 한국씨름경기의 최대 발전기로 도립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각종 아마추어 경기를 비롯한 민속씨름 경기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이와 같이 1980년대는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국민들의 체격이 현저히 상승되었으며, 선수들의 체력과 체급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중매체를 통한 씨름경기의 방영은 관람위주의 스포츠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 이러한 변화는 씨름경기규정의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며, 씨름선수의 대형화 시대를 열었으나 현재와 같이 민속씨 름과 아마추어 씨름이 분리되어 경기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모든 경기의 구분은 두었지만 선수들의 경기출 전은 구분이 없이 민속과 아마추어가 출전이 가능한 민속씨름경기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