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때론 사람의 인생을 180도 바꾸기도 한다. 여기 서슴없이 “씨름은 내 운명이었노라”하는 남자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모래판의 제왕’, ‘타고난 승부사’로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끝없는 씨름열정에 ‘역시 어쩔 수 없는 씨름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언변에는 막힘이 없다. 거대한 체구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구수한 우리네 사투리도 그렇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시원함이 묻어나온다. 그는 현재 인제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4월의 화창한 어느 봄날, 천하장사 이만기(47)를 만났다. 이만기편은 상·하로 나누어 게재한다.
◇승률 86.5%의 사나이
이쯤 되면 이만기는 어떤 선수였을까,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다. 일단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과히 무적이라 불릴 만큼 모래판 위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를 제패한 그는 현역시절 통산승률만 86.5%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자랑한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7년 동안 우승만 47차례. 그 당시 일년에 씨름대회가 9번 정도 열렸다는 것을 감안하고 해외장사, 설날장사 대회 등의 기타 대회까지 포함해도 소위 싹쓸이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의 씨름은 화려했다. 씨름은 자신보다 더 큰 덩치의 상대방을 기술로 넘어뜨리는 데 바로 그 묘미가 있는 법. 이만기의 씨름은 그 원칙에 부합했다.
특히 1983년 4월 1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제1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은 기술씨름의 진수를 보여준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뒤집기의 달인으로 일컬어지는 최욱진 장사와의 피 말리는 혈투 끝에 초대 천하장사에 오른 이만기는 이 대회 이후 일약 무명에서 스타로 우뚝 서게 된다.
◇운명처럼 다가온 씨름
이만기는 1963년 의령에서 태어났다. 5남 2녀의 평범한 가정에서 늦둥이로 태어난 이만기는 또래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만기는 씨름과 별 무관한 삶을 사는 듯 했다. 그런 그의 인생이 큰 전환점을 맞았다. 공부로 성공하기 바랐던 집안에서 그를 마산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기대를 잔뜩 지고 마산 무학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다. 이때까지도 이만기는 자신이 씨름을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마산으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씨름과는 특별한 인연 없이 살았어요. 씨름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죠.”
당시 마산은 모희욱, 권영식, 김성률 등 기라성 같은 씨름선수들을 배출하는 등 전국씨름을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무학초교에는 씨름부가 없었다. 그런데 이만기가 전학을 오자마자 전국소년체전에 씨름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된다. 그리고 무학초가 씨름부 특별학교로 선정된다.
“왜 하필 내가 전학간 학교에 씨름부가 지정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처럼 씨름과 엮어지려고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이만기는 특별활동 시간에 씨름부를 선택한다. 물론 주변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그의 큰 형님도 체격이 작은 동생이 씨름을 하겠다고 하니 “잘 할 수 있겠냐”며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때 씨름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도 하고많은 특별부 중에서 왜 씨름부를 선택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제 체구가 많이 작았어요. 마산중학교에 입학 당시 반 66명 중에서 제 번호가 8번이었거든요. ” 이만기의 씨름은 그렇게 우연으로 시작됐다.

◇대학 1학년 이기는 방법을 깨우치다
그렇게 시작한 씨름이지만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워낙 작은 체구이다 보니 신장에서 밀렸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점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키와 몸무게가 1년에 10㎝,10㎏ 정도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초·중학교 시절에는 워낙 신장의 차이가 나다 보니 주로 작은 기술을 익혔어요. 뒤집기나 파고 들어가는 기술을 구사했죠. 그런데 신장이 받쳐주기 시작하니깐 그때부터 점차 드는 씨름으로 변형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남대로 진학하고서도 이만기는 좀체 빛을 보지 못했다. “저보다 덩치커고 체구 좋은 선수들이 많았죠. 그때 선배들의 경기를 보고 많은 것을 배웠죠.”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만기는 어렸을 적부터 씨름을 잘했을 거라고 생각할테지만 특별히 그런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초·중·고 시절 개인전에서 우승한 적이 단 한번도 없을 정도였다. 이만기 스스로 “단체전에서는 나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개인전에서는 별로였다”고 할 정도니.
당연히 그의 목표는 개인전 우승이었다. 그런데 그의 생애 첫 우승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대형사건일 줄이야.
이변의 서막은 경남대 진학한 바로 그해 8월 대구에서 열린 KBS장사씨름대회에서 시작됐다. 이만기는 이 대회서 개인전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8강전에서 이승삼과 시쳇말로 쌍코피 터지는 혈전 끝에 이겼다.
그때 그는 약간의 가능성을 엿봤다고 했다. “뭐랄까요. 기분이 남달랐어요. 그때서야 비로소 이기는 법을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이듬해 민속씨름계에 일대 파란이 터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