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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도 주님 안에선 즐거움이 되는 거지요” | |
[[제1288호] 2011년 8월 27일] | |
개척부터 건축까지 난관의 연속… 연단된 믿음으로 든든히 세워진 교회
- 김만중 목사 (광명교회)
광명시 철산동에 위치한 광명교회는 내년이면 창립 30주년을 맞이한다. 담임 김만중 목사는 요즘 목회 사역 틈틈이 지난 30년을 회고하며 책을 집필 중이다. 창립 30주년을 기해 ‘30년사’를 발간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돌아보니, 지난 세월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김 목사는 교회를 세우며 비록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 가운데 참 기쁨이 있었다고 말했다.
광명교회는 1982년 개척됐다. 당시 양평동 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던 김만중 목사는 교회를 개척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임지를 찾던 중 인근에 십자가가 거의 보이지 않던 지금의 광명시 철산동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는데, 전에 대치동 일심교회에서 목회하던 장주석이라고, 동기 목사가 있었어요. 어느 날 그가 내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 한 마리 비유를 얼마나 실감하느냐고 묻더군요.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 말이에요. 순간 좀 찔렸어요. 솔직히 기성교회 목사로 사역하며 잃은 양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지 크게 못 느끼고 있었거든요.” 이후 김 목사는 “예수님의 심정으로 목회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교회 개척을 결심했다. 기도하면서 장소부터 물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년 가까이 찾아다녀도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괜찮은 자리엔 이미 교회가 들어서 있거나, 아니면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서울 곳곳엔 십자가가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교회개척은 내 역량으로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포기하려던 즈음 기도하는 중에 신문에서 광명시 철산동에 교회를 분양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찾아가보니 아파트 단지 내 복합 상가인데 자리도 좋고 무엇보다 주변에 교회가 없는 거예요. 1920세대 가운데 교회가 딱 그거 하나였어요.” 흡족한 장소를 만났지만 교회를 개척하기까지는 산 너머 산이었다. 계약을 해야 하는데 돈 500만원이 없었다. 돈이 마련되지 않으면 깨끗이 마음을 접겠다고 생각했는데 기도하던 중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곧 그는 또 중도금을 마련하려 뛰어다녀야 했다. 처가는 물론 사방에서 꿀 수 있는 돈은 다 끌어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1982년 3월 28일 첫 예배를 드렸다. “참 감사한 것은 저희는 한 번도 저희 식구끼리만 예배드린 적이 없다는 거예요. 첫날 의자도 없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식구들이 모였지요. 그런데 어떤 부인이 찬송소리를 듣고 들어오셨어요. 이후 점점 교인이 늘어나 교회 밖 복도에 접이식 의자까지 놓고 예배를 드리게 됐지요.” 하지만 그의 앞에는 더 큰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목사는 1988년 교회 옆 유치원 건물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법적문제에 말려들어 3년간 전남 광주를 오가며 재판을 14번이나 치러야 했다. 이후 지금의 건물을 건축하기까지 그의 땀과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고 교인들의 기도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데 한 분이 나와 악수를 청하며 ‘목사님, 이 교회 전세입니까, 월세입니까?’하고 묻는 거예요. 그때 ‘아, 교회가 빚을 지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또 한 번은 전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내게 ‘땅 위에 제대로 지은 교회에 가고 싶지 상가교회에는 가기 싫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이 두 사건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가 않아요. 교회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러나 교회를 세울 마땅한 부지가 없었다. 당시 철산동은 구획정리가 다 되어있어 남는 땅이 전혀 없었던 것. “근처에 병원 부지인 주차타워가 하나 있어요. 전엔 그곳이 공터였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예배당을 지으면 되겠다 싶었지요. 우리 교인들이 새벽기도 끝나면 그 곳에 가서 기도하곤 했어요. 그런데 당시 광명시장이 우리 교회 교인이었는데 의논을 하니 그 땅은 절대로 사지 말라더라고요. 건물을 지을 수 없는 땅이래요. 그럼 이 앞에 있는 복개천 위에 예배당을 지으면 어떤가 물었더니 법적으로 복개 위엔 도로는 닦을 수 있지만 건물은 지을 수 없대요. 또 당시 근처에 쪽방 지역이 있었는데 몇몇 교회들이 그곳에 들어와 십자가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더라고요. 개발이 되면 교회 부지를 받기 위해서래요. 그래서 시장께 우리도 그럼 그렇게 부지를 마련해볼까 했더니 그것도 문제가 많으니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허허. 우리로선 방법이 전혀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 광명교회만큼 좋은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 주변에 없다.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 더 넓고 더 좋은 자리에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게 하셨다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은 절대 헛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건 바로 제 간증입니다. 처음 예배당 마련할 때도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하려니 힘들었고, 두 번째도 힘들었고, 또 세 번째로 이 건물을 지을 때도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2008년 6월 15일에 헌당식을 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너무 감사한 거예요. 고난도 어떤 면에선 즐거움이 되는 거지요.” 현재 광명교회 건물은 대지 500평 위에 지상 5층 지하 3층, 연건평 2200평 정도의 규모로, 장년만 1000여 명이 출석하고 있다.
집에서 쫓겨나 신학공부 시작해
예수님이 양을 품듯 교회를 섬기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지만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김만중 목사를 목회자로 부르신 과정이 녹록치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김 목사는 비기독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언제부턴가 스스로 교회엘 나가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별로 반대하지 않던 아버지께서 점점 교회생활에 열심인 그를 염려하셨던지 교회 나가는 것을 막으셨다. “교회에 나간다고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어요. 아버지께선 양반 집안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야단을 치셨지요. 제사나 명절 때마다 쫓겨났어요. 결국엔 그야말로 맨손으로 서울엘 올라오게 됐지요. 공장 기숙사 방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때 만났던 김동수 목사님께서 내 사정을 아시곤 ‘그렇게 지내면 어떡하느냐,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어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공부를 시작해서 신학을 하고 지금까지 목회활동을 하게 된 겁니다. 아직도 그분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광명교회 30년사는 은퇴를 앞둔 그의 목회인생을 정리하는 회고록이 될 수도 있겠다. 지난 30년간 든든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는 그의 전부를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광명교회가 유명한 교회나 대형교회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며 “지역사회에 필요한 교회, 교인들에게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한 교회,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만중 목사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이 떠올랐다. 김 목사의 눈물의 기도로 세워진 광명교회가 복음으로 광명시를 환히 밝혀나갈 것을 기대한다. /한지은 기자 |
첫댓글 제가 10년동안 모시면서 단 한번도 후회하거나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김목사님과 사모님은 진정 예수닮은 분이셨습니다. 이제는 저도 목사님 걸으셨던 그 목회의 길에서 목사님을 배워가며 예수 닮아 살아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목회의 스승이시고, 아버지가 되어주신 목사님을 존경하며, 더욱 강건하시기를 멀리서 기도합니다.
장로님~!!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