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백제본기 서설(序說)중에 나오는 이설(異說)에 의하면 형(兄)인 비류(沸流)와 동생(弟)인 온조(溫祚)가 고구려에서 주몽의 전처소생인 유유(孺留)가 태자로 세워지자 비류가 온조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남하하여 새 나라를 세우자고 설득하여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서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한다.(주.*1)
여기에서 패수니 대수니 하는 지명고와 역사적사실에 대해서 맞는지 여부는 지식이 짧아서 잘 모르겠으나, 미추홀 한가지의 지명만 책에 나오는대로 써 볼까 한다.
*******************************************************************
.....<중략>.....
미추홀로 남하한 비류와 온조는 도읍지를 물색하러 부아악(負兒嶽)에올라갔다가 의견이 엇갈려, 비류는 미추홀로 돌아가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으로 분립했다. 여기에 나타나는 미추홀, 부아악, 위례성이야말로 비류와 온조의 운명을 판가름한 역사무대(歷史舞臺)였다. 이들의 행방(行方)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 세 지점의 정확한 비정에서만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물론 학계의 정설은 이병도 박사에 따라,"해빈 미추홀(海濱 彌鄒忽)"을 인천(仁川)으로, "한산 부아악(漢山 負兒嶽)"을 북한산 인수봉(北漢山 仁壽峯)으로,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을 북한산 서록(北漢山 西麓)으로 여겨 왔다. 이에 따르면 "한산[漢山, 광주(廣州)]"을 "북한산(北漢山, 서울)"으로, "하남(河南)"을 "하북(河北)"으로 변경해야 한다. 이러한 변경해석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이것은 올바른 복원에 의해서만이 판명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사학계에서는 미추홀의 위치를『三國史記』(金富軾)에 따라 경기 인천(京畿 仁川)으로 비정함에 의심하지 않아 왔다. 그런데『三國史記』(AD 1145)보다 약 130년 후에 저술된『三國遺史』(AD 1275경)에서 승(僧) 일연(一然)의 미추홀 비정은 金富軾과 판이하게 다르다. 이로 미루어 볼 때,『三國史記』 만을 정당시(正當視)하고,『三國遺史』를 무시해 온 지금까지의 사학태도(史學態度)는 방법론상으로 극히 불공평한 처사였다.
이에 따라 양쪽의 비정에 있어서 어느 쪽이 정당한 것인가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바, 우선 미추홀과 위례성에 관한 비정 결과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김부식은 미추홀과 위례성을 "今仁州(경기 인천)", "未詳地名"으로, 僧 一然은 "仁州"와 "今稷山(충남 직산)"으로 비정했다. 그러면 김부식의 "今仁州"와 僧 一然의 "仁州"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僧 一然은『三國遺史』의 여러 곳에서『삼국사기』를 인용했던 점으로 보아(주 *4), 이것을 읽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지점의 위치를『삼국사기』와 다르게 비정했다는 것은 명백한 의식적인 태도로 보여진다. 한편 僧 一然은 "미추홀인주 위례성 금직산(彌鄒忽仁州 慰禮城今稷山)"이라 하여 "금직산(今稷山)"에만 "금(今)"을 사용했고, "인주(仁州)"에는 금(今)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동일문장 내에서 "금(今)"을 사용하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僧 一然의 인주(仁州)는 김부식의 "금인주(今仁州)"와 다른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僧 一然의 "인주(仁州)"는 충남 아산군 인주면(忠南 牙山郡 仁州面)으로 비정되며, 이에 대해서 몇 개의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로, 경기 인천(京畿 仁川)이 인주(仁州)의 지명을 갖게 된 것은김부식에게『삼국사기』 편찬을 명했던 고려 인종(高麗 仁宗)인 데 반하여(주 *5) 아산 인주(牙山 仁州)는 고려 초에 이미 성립되었다.(주 *6) 따라서 김부식의 "今仁州"에 대하여 僧 一然의 "仁州"는 "舊仁州(牙山 仁州)"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경기 인천에는 미추홀에 상응하는 지명이 없다. 반면에 牙山仁州에는 바닷가에 밀두리(蜜頭里)가 있으며,『계림류사(鷄林類事)』에서 용(龍)을 "미리[彌里,밀(密)]" 또는 "미(彌)"라 했고, "頭(tu)"와 "鄒(tu)"는 동음(同音)이므로 "밀두(密頭)"와 "미추(彌鄒)"는 동일 지명임이 분명하다.
세째로, 비류는 대수[帶水, 조강(祖江)]를 건너, 강화해협을 내려와서 "海濱 彌鄒忽"에 상륙했으므로, 이곳은 선착(船着) 가능한 포구(浦口)였을 것이다. 미추홀은 "토습수적(土濕水적)"하고 "부득안거(不得安居)"한 곳임에도 비류가 이곳에 정착하기를 희망했다는 것은 바로 이곳의 주운[舟運, 포구(浦口)]을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密頭里는 바로 密頭川(밀두개) 하구에 위치하는 해포(海浦)로서, 현재는 하구가 방조제(防潮堤)로 막히고, 상류에 냉정저수지(冷井貯水池)가 설치되어 포구의 기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나,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십 척의 중선(中船)이 들끊던 이 일대 최대의 파시(波市)였다고 한다. 이 일대의 지형도에서 알 수 있듯, 안성천(安城川)과 삽교천(揷橋川) 하구의 중간 지점으로서, 양쪽 하구에 사구(砂丘)가 쌓이더라도 그 중간 지점인 밀두천구(密頭川溝)에는 별로 쌓이지 않아, 간만(干滿)의 차(差)에도 불구하고 기포(寄浦)와 발선(發船)에 극히 유리했던 곳이며, 이곳에 인접된 공세리(貢稅里)가 조선시대의 공세창곶(貢稅倉串)으로, 경기남부(京畿南部)와 충남,북(忠南,北)의 삼도세곡(三道稅穀)을 서울(마포, 麻浦)로 조운하던 경기만 남부의 최대항구였다(주 *7)
이상의 검토로 미루어 보아, "해빈 미추홀(海濱 彌鄒忽)"은 僧 一然에 따라 아산 인주 밀두리(牙山 仁州 密頭里)로 보는 것이 지명고(地名考)나 지형조건(地形條件)으로나 비류의 상륙지점에 합당하다.
그러면 김부식은 어째서 미추홀을 인천(仁川)으로 비정했을까? 여기에는 당시의 정치적 배경이 관련된 듯하다. 즉, 효심(孝心)이 지극했던 인종(仁宗)은 인천(仁川)이 순덕모후 이씨(順德母后 李氏)의 본관지(本貫地) 임을 기리기 위해서 이곳을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지정하고, 인주(仁州)의 지명을 하사했다. 그리고 호장(戶長)에게까지붉은 가죽띠를 차게 할 정도로(주 *8) 편애심(偏愛心)이 강하자, 당시의 신하들은 이에 영합되어 미추홀을 인천으로 위비정(僞比定)시킨 듯하다. 이러한 추측은 위례성을 미상지명(未詳地名)으로 취급한데에서도 확인된다.
즉, 僧 一然마저 알고 있던 직산 위례성(稷山 慰禮城)이, 방대한 지지(地志)가 동원되었을 관찬사서(官撰史書)에서 "미상지명(未詳地名)"이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추측컨데, 직산(稷山)과 1백 리도되지 않는 아산 인주(牙山 仁州)를 경기 인천으로 비정함으로써 직산(稷山)과 2백 리 이상이나 떨어지게 되자,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서 위비정(僞比定)의 내막이 폭로될 것을 우려하여 직산 위례성을 아예 미상(未詳)하다고 빼어 버린 듯하다. 미추홀과 위례성은 비류와 온조가 분립한 불가분의 관계인만큼, 이 두 지점을 함께 비정한『三國遺史』의 경우가 보다 합리적인 것임은 물론이다. 아울러 이 두 지점과 부아악(負兒嶽)(주 *9)의 위치를 종합하게 되면, 미추홀의 위치가 아산 인주(牙山 仁州)이어야 함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 김성호님의 "비류백제(沸流百濟)와 일본(日本)의 국가기원(國家起源)" ****
*******************************************************************
(각주)
*1 삼국사기 백제본기 서설중에서
"...불여봉모남유복지(不如奉母南遊卜地) 별입국도(別立國都)
수여제솔당류(遂與弟率黨類) 도패대이수(渡浿帶二水)
지미추홀거지(至彌鄒忽居之)..."
*2 삼국사기 지리지 2권
"소성현 본고구려가소홀현 경덕왕개명 금인주 일운 경원 가소 일작미추
(邵城縣 本高句麗賈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 一云 慶源 賈召 一作彌鄒)
*3 삼국유사 기이 제이 남부여 후백제기(紀異 第二 南扶餘 後百濟記)
*4 최남선(崔南善)의 "삼국유사해제(三國遺史解題)- 증보 삼국유사(增補
三國遺史), 1954, 17-18쪽
*5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제십오) 인종 원년[高麗史(第十五) 仁宗 元年],
동국여지승람(권구) 인천도호부 건치년혁조[東國輿地勝覽(卷九) 仁川
都護府 建置年革條]
*6 신증동국여지승람(권이십) 아산현 건치년혁조[新增東國輿地勝覽(卷二十)
牙山縣 建置年革條]
*7 [이문희(李文熙):"신풍토기(新風土記)-공세창곶(貢稅倉串)"
한국일보 1982.2.19日字]
*8 신증동국여지승람(권구) 아산현 건치년혁조[新增東國輿地勝覽(卷九)
牙山縣 建置年革條]
*9 문헌비고 여지고(구)[文獻備考 輿地考(九)] 에 의하면 "용인 부아산 재동남이십리(龍仁 負兒山 在東南二十里)"
한국민속촌이 위치한 용인 신갈에서 그 옆을 흐르는 지곡리 하천을 따라 약 6km 가량 남행하면, 동쪽 상류에 아기 업은 모양(부아, 負兒)의 산이 보인다. 경안천(京安川, 한강 수계)과 안성천(振威川, 안성천 수계)의 분수계(分水界)로서, 평택평야(平澤平野)를 남면한 해발 404m의 광주산맥(廣州山脈) 남단(南端)의 말봉(末峯)에 해당한다.
여기에 올라 내려다보면 십신(十臣)이 비류에게 설명했던 백제본기서설(百濟本紀 序說)에 나오는 기록상의 지형조건과 완전히 합치한다.
유차 하남지지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
惟此 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한강) (광주산맥) (평택평야) (서해)
부아악(負兒嶽)을 인수봉(仁壽峯)에 비정해 가지고는 이러한 지형조건이 부합될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고, "하남지지"를 "하북지지"로 "북대한수"를 "남대한수"로 변경해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용인 부아산일 때는 원문기록을 조금도 변경할 필요가 없다.
용인(龍仁)은 한산군(漢山郡)의 속현(屬縣)이었으므로, 한산 부아악(漢山 負兒嶽)은 용인 부아산일 수밖에 없다.
역사의 복원은 경험세계 내에서 가능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 인수봉은 현재에도 등반사고가 빈발하는 직각암벽이기 때문에 루우프 등의 등산장비를 갖지 못했던 비류와 온조가 十臣을 이끌고 인수봉을 올랐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