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씨(明氏)는 드문 성씨다. 그래도 명씨를 말하면 사람들은 바로 명계남이나 명세빈 같은 연기자를 떠오르니 아주 드문 성씨라는 느낌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2000년 인구조사에서 26,746명이었다니 아주 드물다고는 할 수 없다.
명씨는 소위 중국 성씨 중에 하나다. 중국 성씨로 불리는 성씨는 보통 격변기에 중국에서 건너온 이가 시조가 되어 만들어진 집안을 말한다. 특히 화교들이 건너오면서 중국 성씨도 그만큼 늘었다.
그런데 이런 성씨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성씨가 아마 명(明)씨 일 것 같다. 명씨는 이제 중국에는 없는 성씨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내에 명씨와 관련된 유적이 아무것도 없었고, 따라서 중국내에서 명씨들이 조상을 섬기는 일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런데 명씨의 시조인 명옥진(明玉珍)이 죽은 지 628년만에 중국 땅에서 명씨의 제사가 다시 시작됐다. 그것도 중국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에 있는 명씨 집안에 의해서다. 어찌보면 신기하기까지 한 이 집안의 역사를 한번 들어보자.
14세기는 중원에서 원(元)과 명(明) 교체하던 시기다. 거대한 중원은 전쟁으로 혼란했고, 그 와중에 수많은 이들이 한을 세운 유방처럼 건국을 꿈꾸기도 했던 시기다. 그런 인물 가운데 명옥진도 끼어 있었다. 1329년 호북성 수주 수현 매구에서 태어난 명옥진은 1350년 서수휘(徐壽輝)가 기양에서 송(宋)을 창업하자 그 이듬해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는 지금의 쓰촨이나 충칭에 해당하는 촉(蜀)을 중심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런 와중에 그가 모시던 서수휘가 진우량(陳友諒)에 의해 살해된다. 이에따라 그도 1361년 10월 15일 충칭에서 국왕으로 즉위했고, 그 뒤 1363년 정월 초하루에 황제로 등극하고 나라 이름을 대하(大夏)로 정했다. 이 나라는 충칭을 수도로 하고 지금의 쓰촨성 대부분과 후베이 의창(宜昌), 구이저우 준이(遵義) 샨시성 한중(漢中지)까지를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했다. 이 영토라면 삼국지의 유비가 가졌던 영토에 나중에 차지했던 한중을 더한 만큼 상당한 영토였다.
하지만 명옥진은 재위 6년만인 1366년 2월 6일 38세의 나이에 급서했다. 그의 뒤를 이어 10살 밖에 안된 아들 승(昇)이 2대 황제에 등극했다. 하지만 2년 후인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明)을 건국해, 대하국을 위협한다. 대하를 멸망시킨 명 태조 주원장은 명승을 귀의후(歸義候)로 봉한다. 하지만 그를 중원에 두기에 부담스러워 그 이듬해인 1372년엔 그를 남녀 27명과 더블어 고려의 공민왕에게 보냈다. 주원장은 공민왕에게 그를 관리로도 삼지 말고, 백성으로도 삼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명승은 모후인 팽황후(彭皇后)와 함께 고려에 살게 됨으로써 이 땅에 명씨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명옥진의 본래 성은 민(閔)씨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고려로 오면서 명씨로 정착했으니 이전과는 거의 단절된 셈이다. 명씨 집안은 개성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졌으며, 조선 건국 후 문과 4명, 무과 2명, 사마시 13명 등을 배출했다.
중원에서 명씨 역시 사라진 만큼 후손이 있을 리 만무하고 사라진 왕조를 기억해줄 리 만무했다. 그런데 1982년 충칭 한복판에서 명옥진 황제의 능인 예릉(叡陵)이 발견됐다. 이 능에는 곤룡포를 비롯한 부장품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묘석인 현궁지비(玄宮之碑)에는 명옥진 황제의 치적과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대하국의 실체 뿐만 아니라 명옥진의 묘까지 발견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명씨 집안은 급히 충칭을 찾기 시작했고, 한중 수교 후인 1994년부터는 명옥진의 기일인 음력 2월6일에 예릉을 참배해왔으며, 2001년부터는 기일인 음력 2월 6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올 3월 2일에도 50여명이 현지를 방문해 예능에서 제사를 지내고 장강을 경유해 명옥진의 고향인 수주와 적벽을 감상하고 귀국한다.

필자는 2월말에 관련 지역을 둘러봤다. 명옥진의 묘가 있는 지앙베이취(江北區)는 충칭시내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역이다. 충칭에는 창지앙으로 향한 두 개의 곶이 있다. 한곳이 지금 가장 번화한 차오톈먼(朝天門)이고 다른 하나가 지앙베이취의 끝 부분이다. 지아링지앙을 사이에 두고 500미터 정도인 두 곶의 발전속도는 천지차이였다. 하지만 충칭시가 이미 개발이 끝나 혼잡한 차오톈먼 대신에 지앙베이 곶을 충칭의 금융 중심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면서 천지가 개벽했다. 다행히 명씨 종친회의 노력으로 예능은 보호되어 공원으로 꾸며지는데 그 주변에는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를 본 딴 대극장과 과학기술전시관이 곧 개장되고 주변에는 20층 이상의 금융기관들이 들어설 전망이다.

명옥진과 관련된 곳은 한곳 더 있다. 명옥진의 묘에서 4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다 보면 강 오른쪽에 있는 따푸스(大佛寺)이다. 이 사찰은 강의 바로 옆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제법 큰 사찰이다. 이 사찰의 옆으로 창지앙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도 따푸스따치이오(大佛寺大橋)이다. 절의 아래쪽에는 5미터 높이의 불상이 하나 있다. 명옥진이 창지앙의 수위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만들었다는 사찰이다. 러산따푸가 그러듯이 이 석가모니 불이 세워진후에 석가모니의 발 위로는 물이 차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져서 지금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 불상이다. 다만 사찰은 너무 경사진 곳에 세워져서 중수되지 못하고 출입이 차단되어 있다. 이미 곳곳이 허물어져 곧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상황이다.
이 집안을 보면서 필자는 뿌리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628년의 단절된 시간을 넘어 조상의 묘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각고의 노력으로 묘를 복원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이 간 이 집안의 한분은 이렇게 말했다.
"중원에 수많은 국가가 있었지만 후손들에게 제사 밥을 먹어먹는 황제들이 몇이나 될까"
-글쓴이 창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