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구유간에서 향란이가 아기를 낳았다
눈이 내리고
나귀가 지나가고
백치(白痴)처럼
박쥐우산 속에서
나는
헤어진 살붙이 생각에
안 나오는 웃음을 쥐어짰다
눈이 내리네…… 개똥이도 지나가고
여울목 비오리, 문학과지성사, 1981
성탄제 1955/김종길
성탄제(聖誕祭) 1955
가슴에 눈물이 말랐듯이
눈도 오지 않는 하늘
저무는 거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동(東)녘 하늘에 그 별을 찾아본다.
베드레헴은 먼 고장
이미 숱한 이날이 거듭했건만
이제 나직이 귓가에 들리는 것은
지친 낙타(駱駝)의 울음 소린가?
황금(黃金)과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이
빈 손가방 속에 들었을 리 없어도
어디메 또 다시 그런 탄생(誕生)이 있어
추운 먼 길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
나의 마리아는
때묻은 무명옷을 걸치고 있어도 좋다.
성탄제, 삼애사, 1969
성탄절 가까운 신경림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나보다
가슴과 등과 팔에 새겨진
이 현란한 무늬들이 제법 휘황한 걸 보니
하지만 나는 답답해온다 이내
몸에 걸친 화려한 옷과 값진 장신구들이 무거워지면서
마룻장 밑에 감추어 놓았던
갖가지 색깔의 사금파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정의 플라타너스 나무에
무딘 주머니칼로 새겨넣은 내 이름은 남아 있을까
성탄절 가까운
교회에서 들리는 풍금소리가
노을에 감기는 저녁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버렸나보다
출전:전국국어교사모임(2000), 국어시간에 시 읽기 1, 나라말
성탄제* 김동현
성탄제*&
동방박사는 옛 얘기
서녘의 별도 옛 얘기
우리는 헤롯도 아니건만
서녘의 별은 찾아도 없다
어두운 하늘 아래
얼어버린 마음뿐
너는 홀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가난한 순수를 찾아 나섰니?
눈으로도 덮을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외로운 눈물 뿌리며
때묻은 무명옷의 마리아를
찾아 나섰니?
―잠처럼 슬픔을 덮어 줄
눈도 내리지 않거니
오늘 밤
너를 떠나보낸 나의 빈 마음엔
작은 꽃송이가
등불을 밝혀 들고
때묻은 무명옷의 마리아를 찾아
헤매이누나
* 한 소녀가 성탄절이 가까와질 무렵 시골에 있는 자기 아버지 묘소로 성묘가서 나에게 시인 김종길의 성탄제를 써 보내다. 이에 화답하다.
새, 청하, 1984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셨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마지막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시집 성탄제, 1969)
성탄 김정환
성탄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칠흑 같은 밤이 술렁거렸고, 땀에 찌든 막벌이꾼들의 치미는 근육덩어리들이
반짝였다, 어물전에 산더미처럼 쌓인 생선의 비늘들이
진압치 못해 축축한 성욕처럼 온 세상 위를 꿈틀대며 기어갔다
그리고 밀어닥친 홍수처럼, 아님 밀려난 흥남부두처럼
사람들이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마구 건너갔다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가난의 뱃속에서 희망의 씨앗이 잉태됐고
나는 온통 시끄러운 아수라장 속에서 알았다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
현실은 어떤 꿈보다도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성스러움의 끈적끈적함을, 끈적함의 견고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