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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서평 스크랩 한국교회사 - 제13장 해방이후 한국개신교회 성장 및 감소
우승호 추천 0 조회 552 13.06.01 21: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3장 해방이후 한국개신교회 성장 및 감소

 

 

제9장 해방이전 한국교회의 성장과 감소에 대한 역사적 고찰 에 계속 이어서

 

4. 해방이후, 한국전쟁 이후 회복기: 1945-1960

 

1945년 한반도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었다. 북한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파괴되었으나 남한교회는 미군정(1945-48)과 제1공화국(1948-60)의 특혜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⑴ 한국교회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던 것은 사회정치적, 군사적 구조였다. 많은 개신교인들은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교계지도자들은 친기독교정부를 유능하게 다루어 형목제도, 군목제도, 일본이 남긴 종교 적산에 대한 우선적인 양도, 친 기독교적 종교정책과 같은 특혜를 얻어내었다. 1945~1950년 사이, 개신교 인구는 24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두 배가 늘어났다.

 

⑵ 한국전쟁 이후 야기된 한국사회의 아노미 현상은 개신교 성장에 한 외적 이유가 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300만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전 국토와 주요산업은 초토화되었다. 수많은 교회건물들이 불타고 파괴되었으며, 많은 교계지도자들을 잃었다.

 

포로선교 1952


부활절연합예배(1953)

 

목회자 수양회 (1954)-영락교회

 

100만 명의 피난민들이 북에서 내려왔다. 남하한 기독교인들은 도처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은 또한 다른 난민들에게 위로의 공동체와 삶의 방향을 제공하였다. 게다가 기독교 국가와 외국교회들이 보내는 엄청난 량의 구호물자는 희생자들을 도와주었고 그것은 교회성장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1960년까지 개신교인의 인구는 623,000명이었고 이것은 지난 10년 사이에 24.6%의 교인증가를 의미했다.

 

⑶ 복음을 전파하려는 한국교회의 노력이 컸다. 빌리그래함과 같은 유명한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한국교회와 협력하여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켰고 공허한 한국인들에 사이에 많은 회심자를 얻었다. 1955년 장로교회 총회는 교회가 없는 490개의 시와 면에 교회를 개척하려는 ‘5개년 전도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큰 효과를 일으켰다.

 

 

빌리그래함 서울대회(1955)

 

중앙청앞 전도대회(1956)

 

⑷ 1950년대 개신교회들은 크게 분열했고, 개신교에서 기원한 종파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약 200개 이상의 종파와 종교집단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분파주의는 전체 개신교 인구성장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 한국개신교회 성장은 한국전쟁 이후 아노미 상황과 정부의 지원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는 삶의 영적인 의미와 신앙공동체를 제공하고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도 제공했다. 그러나 교회는 권위적인 정치권력에 부당하게 의존했고, 교회를 친정부, 친미의 이미지로 만들면서 한국개신교에서 탁월했던 예언자적 전통을 상실했다.

 

 

5.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폭발적인 교회성장 시기: 1960-1985

 

1961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산업화 수출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그것은 대규모의 농촌-도시 인구이동을 가져왔다. 1960년 도시인구는 28%였지만 1990년에는 74.4%가 되었다. 대규모의 인구이동은 도시 주변에 슬럼을 형성했고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파괴시켰다. 경제성장의 결과,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연대성이 끊어진 불안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지니고 살았고 공동체적 관계를 희망하고 있었다.

 

⑴ 한국교회는 이러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크게 교회를 성장시켰다. 교회들은 앞을 다투며 도시 안에 전도활동과 교회개척을 추진했다. 대 교단들은 양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모든 노력을 집중시켰다. 이상한 도시 환경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인구들은 교회의 방문자들을 환영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65년 초교파적인 전국복음화운동이 일어났다. 우선 지역을 따라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기도회를 가졌고, 그 후에 그들은 교인들을 동원하여 기도회를 가지고 전도훈련을 시켰다. 최종적으로 교인들은 집집마다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하였다. 그해 2,239회의 집회가 있었고 4만 명의 새 신자가 생겨났다.

 

 

전국 복음화 운동 (1965)

 

군인합동세례식 (1972)

 

빌리그래함 여의도집회(1973.5)



 

엑스플로 74 빌브라이트, 빌리, 김준곤


 

엑스플로 74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대회(1984)

 

<표 3>을 보면 1966년 개신교 인구는 90만 명으로 인구의 3%에 해당했다. 그러나 4년 후, 그것은 320만 명으로 인구의 10.2%로 급증한다. 이러한 숫치 변화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교회성장에 얼마나 큰 요인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980년 개신교 인구는 534만 명으로 인구의 14.3%가 되었다.

 

 

 <그래프 3> 한국개신교회의 성장 : 1950-2005                                      <표 3>

 

 

 

 

⑵ 한국개신교회 성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중에 하나는 대형교회의 출현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50개의 교회들 중에 23개는 한국에 있다. 성인 예배출석자가 10,000명이 넘는 15개의 대형교회가 서울에 있다.

 

이러한 대형교회들의 성장은 다른 중소형 크기의 교회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1958년 서울의 슬럼지역에서 시작했다. 그 교인 숫자는 1962년에 800명, 1973년에 18,000명, 1986년에 503,000, 1997년에 709,000으로 성장했다.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성장에 6가지 이유를 제시했다(Lee, 1993, 163-67). ① 긍정적인 메시지, ② 강력한 치유사역, ③ 산기도 운동, ④ 성령세계와 방언, ⑤ 구역회모임, ⑥ 매스 미디어의 사용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조용기 목사는 영적인 구원, 육체적 치유, 물질적 축복, 현재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설교하면서 그들에게 호소했다.

그의 메시지는 정확하게 도시 대중들이 열망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는 고난의 신학과 정직한 가난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비판들도 있다.

 

한국대형교회들의 출현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동반하는 근대화의 결과였다. 정부의 경제발전 성장제일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교회의 양적성장 전략과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시장 기업문화는 “큰 것이 좋은 것”(bigger is best) 증후군을 낳았다. 이러한 자본주의 문화는 개교회주의와 경쟁을 자극했다. 교회숫자의 크기는 성공의 척도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종교시장에서 “종교기관들은 소비상품이 되어버렸다”(Hong, 2003, 242ff).

 

한국대형교회들은 교회성장신학을 받아들였고, 교회 안에 관료제도를 정착시켜 효과를 높였다. 또한 최첨단 기술을 통해 성도들의 영성을 통제한다(방송예배, 인터넷방송국, 위성방송 등). “대형교회들의 역동성은 주로 카리스마 있는 목사들의 능력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회중들을 초월적 종교경험으로 이끌고, 거룩한 보살핌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이끄는 탁월한 은사를 발휘했다.

 

종교에 대한 근대화의 영향력 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종교의 사사화”(私事化)와 “종교기구에 대한 충성저하”이다.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효과적인 셀조직을 발전시켰다. 조용기 목사의 경우, 그는 각 지역 안에서 교인들의 경향성과 직업에 맞게 5-10명으로 구성된 구역(cell)을 조직했다. 구역장들은 잘 훈련된 평신도 여성들이었다. 1985년 여의도순복음교회에는 50,000개의 구역이 있었다. 이러한 셀 조직은 회중들이 관료주의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종교적 헌신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요약하면 한국대형교회의 특징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력, 다양한 종류의 셀 조직, 그리고 근대기술을 이용하는 실용주의라고 볼 수 있다.

 

⑶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 목사들의 교육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그들의 목회와 교회성장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졌다. 철야기도회, 성경공부, 제자훈련, 교구에 구역조직의 강화, 평신도훈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발전되었다. 1970년 한국교회는 군 선교, 경찰 선교, 병원선교, 학원선교, 도시산업선교 등 많은 분야에 선교적 관심을 확대했다.

 

⑷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한국기독학생회(IVF), 한국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네비게이토(Navigator) 등과 같은 대학생 선교조직들 혹은 파라처지들(para-churches)은 전도방법, 성경공부, 셀 조직들의 방법을 발전시켰고,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했다.

 

⑸ 1970년~1980년 동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산업선교회와 관련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에 저항하는 민주화인권운동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양적성장에 집중하는 대다수의 교회들은 그들의 도덕적 사회적 책임에 태만했다.

 

한국개신교의 해방 전통은 1980년대 중반 민중교회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민중교회들은 주로 예장통합, 기장, 감리교회에 속해 있는 작은 교회 운동이었다. 그들은 오늘의 민중은 가장 작은 자들, 배우자 없이 자녀를 기르는 부모, 장애우, 일용직 노동자, 전과자, 실업자, 매춘여성, 도시의 빈민, 양심수, 이주노동자로 규정했다(Hwang, 2006, 130-31). 민중교회는 실업자와 일용직노동자, 노숙자, 이주노동자, 한국인과 결혼한 가난한 이주여성들을 위해 민중선교를 수행하고 있다.

 

민중교회들의 이러한 실천은 교회성장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발전의 희생자들에게 우선권을 두는 실천적 방법을 보여주었고 교회갱신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가를 보여주었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 시민정부는 국가적 복지제도를 구축할 때 민중교회 프로그램으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시기 도시 안에 있는 개신교회의 대다수는 대규모 인구의 도시 이동의 상황을 통해 적극적인 전도와 교회개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교회들은 목회자와 평신도를 위한 많은 훈련프로그램들을 개발했고 전도 특공대들을 훈련시켰다(박보경, 2005). 교회들은 또한 새 신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훈련코스들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은 사회적 책임과 예언자적 역할에 대해서는 태만했다. 오직 NCCK, 도시산업선교회, 민중교회, 기독청년운동과 같은 단체들이 사회선교와 민중선교를 수행했다. 이 시기 아마도 “선포유형”(P-1), “설득유형”(P-3), “선포공동체형성유형”(P-5)은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현존유형”(P-1)은 약화되었다. 한국교회가 성장은 이루었으나 통전적인 전도는 미숙했다.

 

 

6. 산업화, 도시화 이후의 교인감소, 1985-2009

 

한국경제는 1980년대에도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국민총생산(GNP)은 1978년에 1,117달러, 1989년에 4,040달러, 1995년에 10.037달러로 성장했다. 국민총생산량이 일만 불을 넘어설 때에 한국개신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감소하기 시작했다.

 

1980-90년 사이에 개신교에는 270만 명의 새 신자가 늘어났고 교인 수는 800만에 도달했다. 1995년까지 개신교인들은 870만 명으로 총인구의 19.7%라는 가장 최고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1995-2005년 10년 사이에 개신교인의 인구는 14만 명이 감소되었다.

 

한국개신교회의 숫자가 감소하는 이유를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 정치적 민주화, 교회 내적인 부패가 그 이유로 제시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한국개신교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사회-정치적인 요인들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오늘날 종교적 다원주의는 보편화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실천보다는 경제적 번영과 여가를 즐기고 싶어 한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화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안정을 가져왔다.

 

게다가 한국개신교회는 일부교회 지도자들의 비행, 교회세습, 교파경쟁, 사회적 책임 부재,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들 사이, 도시교회와 농촌교회 사이의 빈부격차 등으로 인해 사회적 신뢰감이 거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근대화가 종교의 영향력을 감소시킨다는 세속화 이론은 한국의 종교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표 4> 인구대비 종교별 분포도(단위: 백분율)

 

종교 연도

1985

1995(성장률)

2005(성장률)

성장률

(지난20년)

종교인구

42.6

50.7 (8.1)

53.7 ( 2.4)

11.1

개신교

16.1

19.7 (3.6)

18.3 (-1.4)

2.2

불교

19.9

23.2 (3.3)

22.8 (-0.4)

2.9

천주교

4.6

6.6 (2.0)

10.9 ( 4.3)

6.3

* 자료: 뉴스미션 (2009.10.6)

* 천주교회는 자체교인 수를 정부통계발표보다 적은 446만명 (9.5%)로 발표했다.

 

 

위의 <표 4>에서 한국의 종교 인구는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 10년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장률은 4.3%였던 반면 개신교의 감소율은 1.4%였다. 김승호는 도시 인구와 교회의 숫자 사이의 상관관계가 교회성장과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지난 1960-1990의 도시화 기간에 목회자의 숫자 증가와 경쟁적인 교회개척은 도시 안에서 교회성장에 유리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도시 인구가 교외로 빠져나가는 시기에 그러한 활동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반면 로마가톨릭교회는 1990년 이전에는 개신교처럼 폭발적인 성장을 하지 못했으나 그 이후 성직자의 숫자나 교회의 숫자에 큰 변화가 없어도 가톨릭교인의 숫자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김승호는 개신교회가 필요 이상의 신학생을 배출하는 것을 줄이고 교회개척에 신중한 선택을 할 것을 충고한다.

 

 

7. 예장 통합 측의 전도전략

 

1965-70년 한국개신교회의 성장률은 250%였다. 그러나 예장통합측은 큰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970-2008년 사이 통합 측의 성장률은 407%였고 연평균 10.7%에 달하는 성장을 이룩했다. 세례교인의 비율도 22.9%에서 58.6%로 늘었다. 특별히 1995년 이후로 전체 개신교회가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합 측은 여전히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1974년 통합 측은 “교회개척의 해”를 선포하고 192개의 개척교회를 설립했다. 이 운동은 3년동안 지속되었다. 1977년 통합은 한국교회 100주년이 되는 1984년까지 “5000교회 150만 성도”를 목표로 세우고 전도운동을 벌였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 후보생들이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 2년 동안 개척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1984년 통합 측은 4,114교회와 140만 성도가 되었다. 1987년 통합 측은 “전국 복음화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6000교회 200만 성도”를 목표로 세웠다. 이 목표도 달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성장에 고무된 통합측은 1992년에 2022년까지 “1000성도 400만 교회”를 이루자는 “만사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여전히 교회개척과 목회자 양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래프 5>에서 보여주는 것 같이 1991년에 목사의 숫자가 개 교회 숫자를 능가했고 그 후로 극심한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8년 통합총회는 소위 “300만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양적 목표는 총회창립백주년되는 2012년까지 300만 성도를 이루자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식어버린 교회의 선교열기를 다시 불붙이고, 전도와 함께 봉사와 교회갱신을 이루어야 한다는 통전적 전도를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현재 300만 성도라는 양적 목표는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전적 전도를 이룩하기 위한 교회갱신과 사회봉사의 과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결론

 

한국개신교회는 경이적이고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 이유는 크게 외부적인 사회정치적인 것과 내부적인 영적이고 신학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인 급변화가 개신교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고난으로 가득한 한국 근현대사는 아마도 한국교회에 영적인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열정적인 영성과 인내심을 지닌 교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러한 성장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들의 일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심는 것과 물주는 것을 선택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 초기에 개신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동시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해방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또한 교회는 일제 통치의 사회적 부정의에 대해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교회는 통전적 전도를 통해 한국 민중들로부터 값비싼 존경과 신뢰감을 얻었고 그것이 교회성장의 바탕이 되었다.

 

1970-8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에 직면해서 개신교회는 적극적인 전도와 교회개척을 추진했고 교회는 급성장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양적성장에 집착했고 그것은 사회적 책임을 방관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산업선교회, 민중교회와 같은 단체들은 민주화인권운동, 민중운동을 수행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한국개신교회가 부유해 지면서 교회는 영적인 능력과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교회성장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하는 것이다. 만일 교회가 그 목적을 상실한다면 교회성장은 자기 확대와 제도화에 기여하는 것을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교회는 항상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 내면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증거 할 준비를 갖추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시대의 변하에 대해 방법론이 변화되도록 민감해야 한다. 산업화 시대에 사용했던 전도방식을 지금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의 삶의 질은 교회성장에 영향을 주지만, 때로는 교회의 삶의 질적 성숙 없이도 교회가 성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반드시 시간이 지나면서 반작용이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하는 교인감소 현상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임박한 과제들 중에 하나는 질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 질적 성장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전적 전도방식을 수용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은 여전히 전도에 대해 열정이 있지만 그들은 현대 사회 속에서 전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어려움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순과 비합리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전도해서 이끌고 가야하는 교회가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면 어떻게 전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교회 전도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지 교회 자체의 확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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