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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13(월). 오전 11시. 고려성경연구소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성경 연구]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막 7:23-30) by 변종길 목사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본문] 마가복음 7:24-30 (마 15:21-28)
1. 두로와 수로보니게
두로(Tyros, Tyre, 티레)는 갈릴리 호수에서 북서쪽으로 직선거리로 60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원래는 섬이었는데 육지와 연결되었다. 난공불락의 도시로, 알렉산더 대왕이 7개월간의 공략 끝에 겨우 점령하였다(주전 332년).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보통 페니키아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서는 시돈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시돈은 가나안의 장자였다(창 10:15). 두로는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며, 로마 제국 등장 이전에 오랫동안 지중해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시돈과 두로는 레바논 백향목과 청동 주물 기술자를 보내 주었으며 또한 원거리 항해술을 가진 선원을 보내 주었다. 주전 9세기에 두로는 그 부와 화려함이 극에 달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로마자 알파벳을 발명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은 이들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문자들이 이들에 의해 빈번하게 사용되다 보니 간단한 알파벳 문자로 자연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그 중에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제일 유명하다. 주전 5세기의 역사가 Herodotus, History, Book I,1에 보면, 페니키아 사람들은 Erythraean Sea라 불리는 곳에서 현재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이들은 바다로 멀리 항해했으며,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물건들을 싣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 Erytharaean Sea는 인도 북서쪽에 있는 바다(인도양)인데, 특히 페르시아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로마 역사가 Strabo에 의하면 이들은 오늘날 바레인 지역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수로보니게(Syrophoenicia)는 수리아에 있는 페니키아란 뜻인데, 아프리카에 있는 페니키아(Libophoenicia)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렇게 불렀다. 이 여인은 ‘헬라인’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헬라 민족이란 뜻이 아니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란 뜻이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헬라 제국 시대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다 ‘헬라인’이라고 불렀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문명적으로는 아주 발달된 페니키아인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자기 딸이 귀신 들려 고생하고 있었다. 아무리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귀신은 어찌할 수 없었고 귀신의 횡포 앞에 속수무책으로 고통당하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이 이곳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회다 싶어서 찾아왔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이미 많이 들었던 것이다.
2. 개들/강아지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였으나, 예수님은 의외로 냉정하게 대답하시며 이방인들을 ‘개/강아지’라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없다고 거절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겨 '개'라고 불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의 관념을 취하여서 이방인들을 ‘개들/강아지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상당히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서 사용하신 단어는 일반적인 ‘개’란 단어가 아니고 지소형(指小形, diminutive)인 ‘강아지’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히브리어 헬라어 직역성경」은 ‘강아지들’로 바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에도 ‘개’의 지소형이 없으므로(doggy가 있으나 잘 안 쓰는 것 같다) 그냥 “dogs”로 번역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런지 영어 주석들에서는 대체로 이 지소형이 가지는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는 ‘개’의 ‘지소형’인 ‘강아지’가 있으므로 ‘강아지’로 번역하고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지소형(指小形, diminutives) 어미가 붙으면 작은 것, 귀여운 것을 나타낸다. 영어에는 이 지소형이 거의 없으나 독일어, 네덜란드어와 러시아에는 많이 있다. 독일어에는 -chen, -lein 등을 붙이는데 Mädchen(소녀), Fräulein(아가씨) 등이 있으며 지소형 어미가 붙으면 문법적으로 중성이 된다. 네덜란드어에서는 -chen, -je, -tje 등이 붙으며, kindje(어린 아이), meisje(소녀), eendje(작은 오리, 오리 새끼), hondje(강아지) 등의 예에서처럼 작은 것, 귀여운 것을 나타낸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구어체에서 이런 지소형을 많이 사용한다. 러시아어에서는 -шко, -ик, -ок, -ек, -ёk, -еч, -онок, -очек, -ёнок, -ечек 등의 어미가 붙어서 지소형을 나타낸다. 헬라어에서는 -ion, -arion 등이 붙어서 지소형을 만든다(예: paidion, korasion, kunarion 등).
우리말에는 ‘아지’가 지소형 어미가 된다. 송아지(소 + 아지), 망아지(말 + 아지), 강아지(가이 + 아지), 모가지(목 + 아지), 소가지(속 + 아지), 바가지(박 + 아지), 싸가지(싹 + 아지), 돼지(돝 + 아지), 돼지(도 + 아지 ※ 여기의 ‘도’는 윷놀이의 말), 삵아지(삵 + 아지) 등. 어두에 ‘아ᄌᆞ’가 붙어서 ‘작은’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줌마(아ᄌᆞ + 엄마), 아주머니(아ᄌᆞ + 어머니), 아주버니(아ᄌᆞ + 아버지/아버님). 제주도에 가면 ‘아끈다랑쉬’가 있는데, ‘작은 다랑쉬 오름’이란 뜻이라고 한다. 여기서 ‘아끈’은 ‘작은’이란 뜻인데, 일본어에서 ‘작은 것’을 나타내는 ‘꼬(子)’가 같은 계통이 아닌가 생각된다.
헬라어로 ‘개’는 ‘퀴온’이다(우리말 ‘개’의 고어는 ‘가이’였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가이’라고 한다고 한다). 복수는 ‘퀴네스’이다. 그런데 지소형이 되면 ‘퀴나리온’이 되고, 복수는 ‘퀴나리아’이다. 여기 성경에 사용된 단어는 ‘퀴나리아’(강아지들)이다. ‘개’(퀴온/퀴네스)는 큰 개로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를 말하며 부정하고 위험한 동물로 취급받는다. 이에 반해 ‘강아지’(퀴나리온/퀴나리아)는 집에서 키우는 작은 개, 강아지이며 주인의 상에 오르기도 한다.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이 말한 ‘퀴나리아’는 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의미한다.
네덜란드의 주석가 판 레이우원(Van Leeuwen)은 이렇게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수님은 지소형인 kunaria를 사용하심으로써 이것을 순화시키셨다.”(Markus, 130) 흐로쉐이드도 “Kunarion은 품 안의 강아지, 집강아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멸시받는, 돌아다니는 야생의 개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한다(Mattheus, ad 15:26). 껄러르스(Keulers)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소형 단어인 ‘강아지들’에 의해 부드러워진다. 이로써 집의 애완동물이며 어린이들의 놀이친구가 되는 작은 개들을 의미한다.”고 한다(Mattheus, 206).
한편, 체르윅-그로스베너(Zerwick-Grosvenor)는 “여기서 만일 지소형에 강조를 둔다면 이방인들에 대한 거칠어 보이는 말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었을 수 있지만, 체르윅의 다음 설명을 참조하라.”고 한다(Grammatical Analysis, ad Mk 7:27). 즉, 체르윅은 지소형이 원래 단어와 의미상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있다면서 본 구절의 ‘퀴나리온’을 그 예에 포함시킨다(Biblical Greek, §485). 물론 ‘파이디온’과 같은 단어는 원래형인 ‘파이스’와 의미상 차이가 없으며 관용적으로 ‘파이디온’이 많이 사용되지만, 필자가 보기에 여기의 ‘퀴나리온’의 경우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퀴나리온’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가 아니라 주인의 상에 오르는 개 곧 강아지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가 주인의 상에 오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하여 부르는 ‘개’라는 표현을, 비록 시험하시기 위해 일부러 사용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그대로 자기 입에 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관념을 들어 사용하시면서도 그것을 순화시켜서 지소형 단어인 ‘퀴나리아’를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방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하시되, 거친 말을 순화시켜 사용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이 여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도전과 시험이었다.
3. 여인의 반응
수로보니게 여인은 우선 겸비하였다. 그는 문명화된 페니키아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촌스런 유대인 남자 예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간구하였다. ‘개들/강아지들’이란 말을 듣고도 화내지 않고 물러가지 않았다. 자신을 ‘강아지들’ 중의 하나로 여기면서까지 은혜를 나눠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자신의 자존심을 꺾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여인은 무엇보다도 간절함을 가졌다. 자기 딸이 귀신에서 놓여야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은 무슨 모욕을 당해도, 무슨 창피를 당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어 주시기를 간청한 것이다. 자기 딸을 향한 이런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어도, 무슨 모욕을 당해도, 심지어 개/강아지 소리를 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굴욕과 수모와 창피를 참고, 물러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간절함은 결국 자기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이런 간절함과 이런 용기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은 얼마나 사람을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인내하게 하며, 얼마나 견디게 하며, 얼마나 포기하지 않게 하는지 모른다. 사랑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결코 물러서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끈기와 인내는 또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예수님은 반드시 자기 딸을 고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자기 딸을 고침받을 수 없고 평생 귀신에게 붙들려 고생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시돈과 두로 지경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다 듣고 있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고쳐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이적과 교훈들을 통해 이 분이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임을 믿었던 것이다(마 15:22).
그리고 하나 더 이 여인에게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지혜이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강아지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을 때(27절), 이 여인은 “뭐라고요? 개라고요?”라고 대어들지 않았다. “아니, 당신, 말 다했어요?”라고 따지고 들지 않았다. 또는 “주님, 무조건 주시옵소서.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자기 말만 늘어놓지도 않았다.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강아지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하였다(28절). “주여, 옳소이다마는”은 원문을 직역하면 “네, 주여!”가 된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긍정하였다. 심히 불쾌하고 모욕적으로 들리는 말씀이라도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긍정하고 나서, 그 예수님의 말씀에서 “강아지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하는 합당한 논리를 끌어냄으로써 그 부스러기 은혜를 나에게도 좀 나누어 달라고 간절한 청원을 한 것이다.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말이다. 옛날 다윗 때 갈멜의 아비가일의 지혜를 보는 듯하다(삼상 25장). 이처럼 상대방의 말을 먼저 긍정하고 나서 나중에 자기 말을 하는 것이 대화의 지혜이다. 오늘에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를 잘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가지고, 논리를 가지고 자기 주장의 타당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최고의 논법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더 이상 시험할 것도 없이 합격이라고 판단하여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셨다(29절).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고 한다(30절).
<본문의 교훈>
1)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첫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큰 믿음’이다(마 15:28).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다. 여기서 ‘큰 믿음’이란 끈질긴 믿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말한다.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해서, 기분에 거슬리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포기하고, 화를 내고 물러갔더라면 이 여인의 딸은 고침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어머니와 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믿음이란 하나님/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 어떤 장애물이 있고 방해가 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자기의 자존심을 상하고 모욕을 당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믿음이 큰 믿음이다.
2) 이 여인은 자기를 한없이 낮추어 굴욕을 참았다. 이것은 이 여인의 겸비함을 말한다. 자기를 낮추지 않고는, 자기 자신이 살아 있고는 이런 은혜를 얻을 수가 없다. 자기가 마치 개(강아지)처럼 여김받을지라도, 멸시받고 천히 여김받는 개(강아지)처럼 취급받을지라도 왈칵 성내지 아니하고 자기를 낮추어 상 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좀 나누어 달라고 간구하였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은 무슨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상관없다는 태도이다. 한없이 낮아진 비천한 태도이다.
3)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아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졌다. 이 은혜를 꼭 받아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모든 굴욕을 참고 물러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간절한 마음은 결국 자기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딸이 귀신 들림에서 나아서 건강해져야겠다는 간절함이 모든 굴욕을 참게 만들고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끝까지 물러가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기 딸만 나을 수 있다면 이 한 목숨 다 바쳐도 좋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이처럼 사랑은 큰 능력을 가져오고 위대한 역사를 이룬다. (2023. 4. 13 수정. 변종길 목사)
첫댓글 유익한 번역과 해석을 통해 평신도들도 깊이있게 성경을 알게하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