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평화전망대 : 통일을 염원하는 그리운 금강산
20220302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를 처음으로 찾아갔다. 그동안 애기봉 전망대에 2차례 올라서 북한 땅을 조망해 보았지만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를 찾아간다고 마음만 먹었지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다.
검문소에서 신원 확인 뒤 통행증을 받아서 평화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 북쪽 끝에 있는 남북 1.8 평화센터 건물은 카페와 북한전문음식점인데 공사 중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매표소 앞을 통과하여 제적봉 평화전망대 건물 앞 무궁화공원과 야외전시장을 둘러 보았다. 청파 김흔중의 '채명신 장군은 묘비가 말한다' 시비와 '彼恨' 시비, 애사 편강열의사 추모비, 연성대첩비, 제적봉碑,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를 보고 북녘 땅을 조망하는 곳의 망배단과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를 본 뒤에 전망대로 올라갔다. 3층, 2층, 1층 순서로 살피며 북녘 땅을 바라보며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새기지만 현실의 이념벽은 굳건해 보인다.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조망되었다. 송악산 아래 고려궁성 만월대가 있었지만 고려 멸망 이후 폐허가 되었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8차에 걸쳐 남북이 공동으로 만월대를 발굴조사하다가 현재 중단된 상태다. 발굴조사 결과를 보고하고 그 전시회를 평창동계올림픽 때인 2018년 2월 평창에서 그리고 4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토유물 전시회를 개최하였었다. 그리고 서울 덕수궁 선전원 터에서 '개성 만월대, 열두 해의 발굴'이라는 제목으로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성과 전시회를 2019년 11월 8일~28일 개최하였었다. 그때 그 전시회를 관람했었다. 평화의 길, 통일의 길이 역경이지만 언젠가는 이루어내야 할 민족의 과제이다. 그 고난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민족의 역량과 관련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려말 개성 만월대를 찾아간 원천석(1330∼?)이 쓴 시조 '회고가(懷古歌)'를 읽으면 망국의 비통함이 느껴진다. "興亡이 有數하니 滿月臺도 秋草로다./ 五百年 王業이 牧笛에 부쳐시니/ 夕陽에 지나는 客이 눈물 계워하더라."(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운수가 있으니, (화려했던 고려의 궁터인) 만월대도, 이제는 시든 가을풀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로구나. 오백 년 고려의 왕업이 이젠 목동의 피리 소리에나 담겨 불려지고 있으니 석양에 이 곳을 지나는 나그네(작자 자신)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남과 북이 공존공생, 평화와 통일을 향한 노력을 위한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길손은 애상에 잠겼다가도 강물의 통일을 보며 큰 희망을 품는다. 임진강과 만난 한강이 예성강과 만나는 서해바다처럼, 우리 민족의 길이 분명히 열리기를 기원한다.
강화시설관리공단 사이트의 강화 평화전망대 안내글을 아래에 옮긴다.
강화평화전망대는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민족 동질성 회복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구축을 위한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민통선북방지역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전방 약2.3㎞ 해안을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고 우측은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신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어 타 지역에선 보기 힘든 북한의 문화생태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구 철산리 산 6-1)
문의전화 : (032)930-7062, 7063
층별안내
1층 : 관리실, 통일염원소, 휴게실, 기념품매장, 화장실
2층 : 전시관, 북한땅 조망실(시청각교실)
3층 : 북한땅 조망실(시청각교실), 옥외 전망대
지하1층,4층 : 군부대 전용시설
주차장 북쪽 끝에 있는데 공사 중이었다.
오른쪽에 붙은 안내문이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다.
나의 조국 금수강산/ 두 동강이로 허리를 잘라/ 강화도를 휘감아/ 한강수는 유유히 흐르고// 하루에도 두 차례 거슬러 오르고 다시 내려가는/ 피눈물 고인 짙은 물줄기// 뚝건너/ 한 많은 사연이 있어/ 애절한 신음소리 끊이지 않고// 한 핏줄 내 형제를 바라보며/ 손짓해도 못 본체 외면하면/ 목놓아 다시 불러 보아도/ 메아리조차 허공으로 빗겨가니// 좁은 가슴에 스미는 설음일랑/ 이곳에 묻어두고/ 찬란한 미래의 꿈으로/ 비둘기 나래를 펴리니// 가까우면서도 멀고 먼/ 강 건너에/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 놓아/ 단숨에 가고 오며/ 통일의 찬가를 부르리라. - '피한(彼恨)'
1974년 11월 3일 강화도 최북단 758OP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해병 소령 김흔중 씀
애사(愛史) 편강열(片康烈, 1892~1929) 황해도 연백(延白) 출생. 14세 때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한학을 하다 말고 16세 때 영남 의병장 이강년(李康佾)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1907년 전국의 의병이 양주(楊州)에 집결, 서울로 진격할 때 부상을 입고 귀향하였다가 1910년 평양 숭실(崇實)학교에 입학, 학우들과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월산 주비대(籌備隊)를 조직, 황해도 일대의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다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서 조정으로부터 초토사(招討使)로 임명된 이정암(李廷馣)이 1,000여 명의 일본군을 맞아 승리한 연안대첩(延安大捷)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를 기려 1608년 현재 북한지역인 황해도 연백군 모정리에 세웠는데, 실향민이 양사면 인화리(망향단)에 재건했고 이를 2009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임진년(1592년)에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여 북상했습니다. 우리의 방비(防備)는 미약했으나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서 해전으로 왜군의 기세를 꺾었고 절도사 김시민(金時敏,1554년~1592년)은 진주성(晋州城)에서 분투(奮鬪)하여 충절을 다했으며,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의병(義兵)과 함께 연안성(延安城)을 지켜냈습니다. 또한 원수 권율(元帥 權慄)은 행주산선(幸州山城)에서 승리하였고 명(明)의 제독 이여송(李如松,1549~1598)은 평양성(平壤城)의 왜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개성(開城)을 탈환함으로써 3경(평양. 개성. 한양)과 8도를 수복했습니다.
살펴보건대 고(故)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이정암(知中樞府使 李廷馣,1541~1600)은 지난 날 주상(主上)께서 몽진할 때 호종(扈從)했는데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던 공의 아우 정형(廷馨)이 형과 함께 개성(開城)을 지키겠다고 주청(奏請)하였고, 임진강 방어전에서 실패하자 공은 그해 8월 22일 연안부(延安府)로 넘어갔습니다.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이 의병 1백여 명을 모아 반겨 맞으며 말하기를 공께서 부사(府使)로 있을 때 은혜를 베풀었던 이곳을 지켜달라고 하여, 공이 싸워 죽을 곳을 얻었노라 하고 의병 5백여 명을 모아 각자에게 임무를 분담시키고 가마솥을 걸어 노약자들도 구휼(救恤)했습니다. 28일 적장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재령(載寧), 신천(信川), 해주(海州)를 함락시킨데 이어 3천여의 병력을 몰고 연안성으로 쳐 들어오니 사람들이 놀라 성밖으로 도주하려 했습니다.
공은 사수(死守)를 결심하고 겁을 먹은 사람은 출성(出城)해도 막지 않겠다 하니 다들 감격하여 힘껏 싸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녁 무렵 연안성의 방어태세를 살피던 적의 신봉을 중문장 장응기(中門將 張應祺)가 화살로 사살하자 왜군은 성 서쪽에서 대포와 불화살을 쏘아 성내의 초가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했지만 때마침 풍향이 바뀌어 불길이 성 밖으로 건너뛰자 적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적은 막사를 헐어 해자를 메우며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자, 공은 섶 위에 앉아 아들 준(濬)에게 성이 함락되면 섶에다 불을 질러 아비가 자진할 수 있게 하라 명하자 모두가 감읍(感泣)하며 죽을 각오로 나흘간 맞서 싸우니 적의 과반수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적은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 불사르고 다음날 아침 포위를 풀고 패퇴하였고, 아군은 적이 남긴 시체 18구를 구덩이에 묻고 우마 90여 필과 군량미 130여 석을 노획했습니다. 이 대첩으로 연안(延安) 이하 13주(州)가 회복되었으며, 아산(牙山), 강화(江華), 용강(龍岡)으로 이어지는 서해의 물길이 열린 것은 공의 힘이었습니다.
공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며 21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했고, 문장은 세상을 울렸으며 국란에 무훈(武勳)을 떨쳤으니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장부(丈夫)입니다. 이 비석(碑石)은 좌의정 이항복이 짓고, 대사헌 정사호(鄭賜湖)가 썼으며 상호군 김상용(上護軍 金尙容)이 전자(篆字)하여 선조(宣祖) 41년(1608) 5월에 세웠습니다.
연백군 모정리에 있던 이 비는 실향민이 망향단(양사면 인화리)에 의사 편강열 추모비와 함께 건립했던 것으로 2009년 8월 19일 이곳 평화전망대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공산 침략자들을 무찔러야 한다. 그래서 이곳을 제적봉이라 이름하고 불굴의 의기를 기르는 것이다. 서기 1966년 민주공화당 의장 김종필
공정식 제6대 해병대사령관은 최초 김포 애기봉을 제적봉으로 명명하려 하였으나, 1966년 故 박정희 대통령께서 현 애기봉 방문시 애기의 전설을 듣고 제적봉 명칭 대신 애기봉으로 명함에 따라 강화도의 현 고지를 새로이 제적봉으로 정하고, 1966년 당시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 참석하에 그가 친필로 쓴 제적봉 비(碑) 건립과 명명식을 거행했다. 제적봉은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공산 침략자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현재까지도 해병대는 이 봉우리에서 불굴의 투지와 매서운 눈초리로 적을 제압하고 있다.
4층 – 군부대시설(출입금지)
3층 – 북한땅 조망실(전망실), 옥상휴게실
2층 – 전시관, 전망실
1층 – 식당, 통일염원소, 특산품판매장, 관리사무실, 게스트룸
지하 1층 – 군부대시설(출입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