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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왜 기도하는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1).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7장을 다소 보편적인 의미에서 살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본 그 관점에서보다는 본 장과 예수님의 이 기도가 기도라는 전체 주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느냐는 관점에서 보고 싶습니다. 저는 가끔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주제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주여,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하였을 때, 그들이 어떤 느낌을 갖고 이런 부탁을 하였을지 이해가 됩니다. 어떤 특별한 이유로 해서 기도는 우리들에게 참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문제가 자신의 관심거리라고 말하던 어떤 목사님도 제 의견에 동의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도 생활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매우 크고 복잡한 문제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이 설교 한 편으로 모든 문제를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또 지금 그것을 상세하게 분석해 보자고 제안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기도와 같은 주제를 잘 살피려면 여러 차례에 걸친 설교와 강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단순히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우리 주님의 기도에 나타난 몇 가지 교훈들을 살펴보는 데 주로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묵상할 때 잘 떠오르는 어려움으로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주로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이 취했던 입장과 아직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취하고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입니다.
첫째로, 기도하는 일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극단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처럼 쉽고 단순한 일이 없다는 인상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표현을 매주 즐겨 사용합니다. 그들은 어떤 문제가 있든지 기도만 하면 응답이 오고 모든 것이 다 잘 풀릴 것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해서는 안 되며 기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위로 거기에 어떤 수고나 어려운 일도 없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도를 그처럼 쉽게 해내며 기도에 대해서 그처럼 입심 좋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과 의문을 일으킵니다.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들과 그들의 입장을 조화시키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기도를 그처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약속들과 제안들에 딸려 있는 모든 조건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교훈을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실천에 옮겨 보려고 애썼던 수많은 성도들은 그것이 그처럼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낙담한 나머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의심할 뿐 아니라 기도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의혹을 갖게 됩니다. 이런 복잡한 양상은 제가 방금 설명 드린 견해의 과장된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온갖 종류의 어려운 문제들과 당황으로 이끄는 또 다른 입장이 있습니다. 기도의 가치와 중요성을 다소 부인하는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그들의 논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일어난 결과이니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을 가진 주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이나 통제가 없이는 그 어느 일도 일어날 수 없으며 또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의 목적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런 견해를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의 엄격하게 폐쇄된 일련의 과정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전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그 교리에서 그릇된 결론을 끌어낸다면 우리는 도무지 기도할 의지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상이 기도와 관련된 주요 견해들입니다. 두 가지 입장만을 소개한 것은 그것들이 양극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 다른 견해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처럼 많은 문제와 당황스러운 결론을 일으키는 두 극단적인 입장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기도에 대한 참된 교훈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난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한 가지 원리를 설정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즉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두어야 할 한 가지 일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이론과 상념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진리라고 이해하는 그 이해 자체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가능한 한 공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의 명백한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도의 문제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런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교리적인 틀에 도저히 끼워 맞추기 어려운 성경의 내용을 대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 자신의 교리에 입각해서 성경을 설명해 보려 하는 위험을 자초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분명히 파악하고 있는 교리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내용을 발견한다면, 제가 볼 때 가장 지혜로운 해결 방법은 때가 될 때까지 우리의 교리를 그냥 놔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던 그 교리를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 교리를 떠나서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이 특별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다시 성경의 이 명백한 가르침과 우리가 이미 확신하고 있는 교리를 관련시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라는 주제를 다룰 때 해야 할 일입니다. 다행히 성경에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뽑아낼 수 있는 자료들이 정말 풍성합니다. 저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점들을 뽑아 보고자 합니다. 어떠한 의심이나 불확실성의 우려도 일으키지 않는 분명한 말씀들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은 기도에 대한 모든 문제를 제가 다 풀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기도라는 측면에도 우리가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궁극적인 난제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가능한 한 그 교훈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첫 번째로 명백한 요점은 성경이 기도에 대해서 매우 탁월한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기도는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성경은 실제로 많은 교훈과 실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계속 기도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절대로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서신서들에서도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쉬지 말고기도하라"는 것이 서신서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항상 기도할 것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분이 어떻게 이해하든지 상관없이, 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기도가 매우 탁월한 부분이되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교훈적인 말씀을 통해서만 기도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실제의 사례들을 통해서도 기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여러 족장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하나님께 간구한 실례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시편을 살펴보십시오. 거의 대부분이 기도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74편을 생각해 봅시다. 이 시는 시편 기자들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데, 특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 줍니다. 선지서에서도 기도를 발견합니다. 실로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나 기도가 발견됩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위대한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친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이 모든 사실이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단지 기도하라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기도할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는 두 번째 요점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즉 경건한 성도일수록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인물을 성경에서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경건한 성도일수록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사실이 절대 불변의 진실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과 제가 보편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논했다면, 어쩌면 우리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어떤 분이 매우 성자다운 분이라면 그분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자기의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그런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기도할 필요가 적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탁월하게 경건한 분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분들이 다른 어느 누구보다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뜻이 그저 이루어지기를 수동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가서 하나님께 아닙니다.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아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마카톨릭교회에 속해 있든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속해 있든지, 위대한 성도의 독특한 특징은 언제나 그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매일 최소한 네 시간도 기도하지 않는 신자를 매우 불쌍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에서 가장 뛰어났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형적 진술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은 우리를 예수님이 친히 기도하신 요한복음 17장으로 직접 이끌어 줍니다. 그 무엇보다 가장 분명하고 중요한 사실은 다름아닌 우리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기도가 그처럼 중대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저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그 점을 깊이 묵상해 본 적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었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사실에 대한 지식적 이해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 사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깊이 묵상한 적이 있느냐고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할수록, 우리는 성경 가운데서 가장 의미 심장한 사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친히 기도에 힘쓰셨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매우 긴 시간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온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온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셨다니! 우리는 예수님이 새벽 미명이 되기 훨씬 이전에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는 기록을 자주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이 여기에서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충동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이유 때문에 주님이 기도하면서 그처럼 기뻐하셨는지 의아해하였으며, 또한 어째서 예수님이 그처럼 많은 기도를 해야 하시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고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 같은 분이 따로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행동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기도 생활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구나. 우리도 그것을 가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항상 많이 기도하셨다는 사실과 특별히 위기가 닥치거나 대단히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는 더 비상하게 많이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밤새워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본질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택하기 전에 밤을 새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경우가 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그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를 강제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 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이 억지로 자기들의 왕을 삼으려는 의도를 파악하시고 산으로 혼자 올라가셔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이때는 정말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의미 심장한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광야에서 그와 같은 시험을 받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로 끌어들이라는 시험이었는데, 그 시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홀로 빠져나와 하나님과 기도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때도 역시 엄청나게 중대한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막 살리실 작정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이 언제나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잘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7, 28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만큼 큰 고통과 고뇌 속에서 밤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하고 있는 마지막 시간에 위대한 대제사장적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의 인성에 관한 어떤 사실들을 끌어내는 일로 많은 시간을 쓰는 것도 좋은 일이 되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최소한 그것이 예수님에 대해 대단히 많은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육신의 교리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기도 생활 속에 드러난 이 한 편의 기도문이 여러분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이십니다. 그저 가상적인 몸을 입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신현, (Theophany)도 아니셨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진실로 사람이십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 2장에서 사용한 "자기를 비어" (He emptied Himself: RV)라는 표현이 이해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우리 주님께서 여기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하나님으로서의 능력들을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사셨기 때문에 기도가 그분께 필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진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은 친히 자주 말씀하신 바, 즉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삶에 대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기 이 지상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지시를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하실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고 또한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과 인도하심을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셨으나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의뢰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실은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능력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여기 이 세상에 계셨을 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그 참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지명된 중보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어떤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이 지상으로 파송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친히 기도하신 내용을 우리가 살
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진실로 사람이십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 2장에서 사용한 "자기를 비어" (He emptied Himself: RV)라는 표현이 이해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우리 주님께서 여기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하나님으로서의 능력들을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사셨기 때문에 기도가 그분께 필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진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은 친히 자주 말씀하신 바, 즉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삶에 대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기 이 지상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지시를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하실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고 또한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과 인도하심을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셨으나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의뢰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실은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능력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여기 이 세상에 계셨을 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그 참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지명된 중보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어떤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이 지상으로 파송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친히 기도하신 내용을 우리가 살펴보는 것은 그분의 복된 인성의 위대한 신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만일 여러분 중에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점에 대하여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예수님이 친히 기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인성 교리에 이 점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저 육체의 옷을 입으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립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만 되신다면 그분은 전혀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도 분명히 주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인(神人: GodMan) 이십니다.
자 이제 저는 여기에서 기도 자체에 대한 보다 더 보편적인 결론 몇 가지를 이끌어 내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제시했던 요점들을 근거로 그 결론들을 매우 분명하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족장들과, 다윗 왕과 선지자들과 그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기도한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더 경건한 사람일수록 더 성자다운 사람일수록 더 많이 기도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한 장면을 살펴보십시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기도하신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겠습니까? 저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란 매우 자연스런 것이며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란 다시 말하면 부자 관계의 한 가지 표현입니다.
자,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많이 기도하지 않는 어떤 한 사람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분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는 필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그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가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높은 도덕성을 지닌 사람일 수 있으며 교회의 사역에 매우 신실한 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역이든지 능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의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알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시는 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자주 대화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은 항상 자기 아버지에게 말을 한다는 사실은 새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고관대작의 아들이나 딸이 그에게 자유롭게 말하는 반면 그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그 사람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신 적이 없습니까? 자녀는 아버지 앞에서 쩔쩔매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말합니다. 자녀는 아버지와 자기가 어떤 관계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에게 담대하고 자유롭게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하고 성자 같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문을 연구할 때 이런 전체적 안목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문제는 맨 처음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맨 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어떤 응답을 받기 위한 열렬한 소원으로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에 대하여 당황하게 되기 쉬운 까닭은 이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자녀가 아버지께 해야 할 가장 분명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도처럼 우리와 하나님의 전반적인 관계를 더 웅변적으로, 보다 더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건전한 성도들은 기도의 서두에서부터 하나님께 요구할 이런 저런 것들을 늘어놓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건전한 성도라면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지속하면서 하나님과 사귀는 일을 우선적으로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애석하게도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전반적인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그저 우리의 나아갈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나 요구 행위 정도로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의 모욕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성도가 그 무엇보다도 앞서서 가장 원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우리와 아버지 사이가 잘되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성도에게 있어서 더 큰 즐거움은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을 계속하기를 간절히 원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존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성도들은 지금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밖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시험들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성도의 믿음과 생활에 거슬리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을 겪다가 어떤 때는 거의 낙담하는 수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건전한 성도는 즉각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것 저것을 요구하기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잘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고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지,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되었는지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행하고 계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기도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게 자주 드러나 보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도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때 그렇게 하시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것을 말씀으로 이렇게 옮겨 놓으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그는 기도하고 계십니다"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언제나 예수님은 마음속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ㅡ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다..." (요 11:41, 42).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을 향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잘되어 있음을 아시지만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자기 마음으로 확신하십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더욱이 그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이 가장 탁월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그분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분들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울 의향이 있으시고 또 언제나 그럴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과 세상이 갖다 주는 시련들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대함을 우리 스스로 다시 확신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울 능력과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확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직접 가서 기도로 아뢰는 방법이 최고입니다. 경건하고 성자다운 분들이 언제나 기도 처소로 달려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 라"(잠 18:10). 다시 말하면 건전한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께 돌진하며 스스로 이런 사실들을 재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신한다는 믿음의 가장 좋은 표현 방식입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 아뢸 때만큼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선포하는 때는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건전한 성도는 기도할 때에 자기의 요청과 간구로 일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기다리며 진실로 의지하는 사람은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 모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 계신 것을 제가 알며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서만 제가 평화와 안식과 고요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그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옳은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성자 같은 분들과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방식이나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와 같은 때에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구나."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 여러분이 다니엘서 9장에 나와 있는 것 같은 놀라운 성도의 기도문을 읽어 본다면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매우 많은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의 전체적 시대 상황은 그 선지자에게도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가 확신하고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 후에 사실상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을 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 계신지 저는 이해하고 싶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가서 어떤 밭을 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예레미야의 첫 반응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미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마당에 밭을 사는 일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밭을 사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하는 반응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다시 한 번 묵상하더니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 우둔함을 일깨워 주소서.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저로 알게 하시고 그 거룩한 뜻을 제게 설명해 주소서.”
이제 우리는 보편적인 결론들을 끌어낼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론들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가 기도에 대해서 다른 것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것만큼은 분명히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은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로 이미 뜻을 굳히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지만,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촉구하시며, 또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할 때 응답해 주십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제가 알고 싶은 것이바로 그것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그런 질문에 누가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못합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릴 뿐입니다. 저는 어째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것은 분명히 압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고 저는 그 방식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신다는 점에 대해 저는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보십시오. 특별히 이 분들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친히 기도하고 계시는 부분을 잘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모든 분들이 하나님을 잘 알게 된 것은 다른 어떤 방법 때문이 아니라 많은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 주시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시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어떤 어려운 환경에 직면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저는 지금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불행해지고 비참해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곧이어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기 시작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영적 생활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계시며,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유도하고 계십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기도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자기의 목적들을 이루시는 방법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모든 문제와 의심은 사라졌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이런 방식으로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하나님의 전능성이 문제로 제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저는 그것이 절대로 하나님의 주권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법들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 사이에는 상충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작정하신 분이 바로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기도는 전혀 상충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역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가르침으로부터, 특별히 요한복음 17장으로부터 몇 가지 놀라운 실제적인 결론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기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올려 드리는 것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범적 기도인 주기도문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분명합니다. 주기도문은 “저의 이 작은 요청을 들어주소서..."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분을 우리가 좋아하기 때문이며, 그분께 우리의 존경심을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이며,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하나의 실제적인 결론으로 끌어낼 수 있는 또 다른 한 가지는-저는 그것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고 있는데-하나님은 친히 이미 알고 계시는 것들에 대해서 듣기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기도로 하나님께 이런 저런 사실들을 아뢰는 사람들을 비웃기 좋아하는 일부 지성인들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이런 비판을 들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은 기도의 본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 보면, 예를 들어, 요한이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는 것들을 아뢰는 장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은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 종알종알 말하는 것을 듣기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말씀 드리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행여나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은 전지(知)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저는 그저 조용히 하나님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드리십시오. 하나님은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친하게 사귀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사귀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요점 또 한 가지는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이나 뜻을 변경시키기 위함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뜻을 즐겁게 나의 뜻으로 삼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요청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아뢰기를 기다리고 계시며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청과 간구를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아뢰십시오. 경건하고 성자같은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특히 우리 주님께서 친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했던 것처럼 그대로 따라하십시오. "가능하시면...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러분의 요구를 아버지께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소원을 아뢰시되 항상 즉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작고 유한해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그게 아니라면 저는 그것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저는 거기에 만족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위임의 자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를 옳게 시작하셨다면, 즉 만일 여러분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기도를 시작했다면 여러분은 사실상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최고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청할 것들을 아뢸 때에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이라는 표현을 덧붙이지 않는 기도 방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항상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이라고 말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갖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취되어야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요구 사항들과 소원들을 하나님께 아뢰되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하십시오.
이제 마지막 결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간절한 요청과 주장과 요구는 완전히 합법적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주목해 보셨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요구 사항들을 하나님께 자세히 아뢰었을 뿐만 아니라 간절히 부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의 기도 방식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보다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은 하나님께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그렇게 했습니다. 한번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킬 기세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버리고 그들을 그 악한 자리에 내버려두겠다고 하시자 모세는 하나님께 "절대로 그러실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74편 기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사실은 "주여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하도록 허락하십니까?"라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런 간구와 논리와 주장을 듣기를 즐거워하신다고 믿습니다. 오늘의 무기력한 신자들은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 약속하신 것을 지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즐거워했던 모습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건방진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거짓된 겸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가르침에 근거하여 시편 기자처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 주옵소서"라고 하나님이 친히 하신 약속을 상기시켜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것이 제 불완전성 때문임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이 약속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셔서, 하나님의 이 약속들과 현재 제가 처해 있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보게 해 주옵소서."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완전히 옳은 것입니다. 우리주 예수님도 하나님께 그렇게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올린 이 위대한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요구 사항들을 제시하시면서 하나님께 주장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친히 하셨던 약속들을 붙들고 하나님께 요구 사항을 아뢰셨으며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그 요구 사항을 들어 주실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러한 기도를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런 일을 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주 우리가 받은 기도의 응답에 깜짝 깜짝 놀라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르고 참된 방법으로 기도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기도는 항상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친밀하게 나아가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함께 이 위대한 기도와 그 표면에 분명히 드러나는 몇 가지 위대한 교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여러분이 그것들을 배우고 실행에 옮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기도하기 전에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여러분은 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이 위대한 신앙의 모범들을 보시되, 무엇보다도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죄인들의 모순을 스스로 짊어지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싸우시되 피흘리기까지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럽게 부르짖으며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경건한 경외심으로 인해 기도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실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그렇게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