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이름:朴慶錄 (rock@inje.md) 2003/2/2(일) 13:04 (MSIE6.0,WindowsNT5.1) 211.106.217.158 1024x768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가 평가한 가수들 "타고난 가수"에 대한 이정선씨의 이 언급이 기억에 남네요. "거의 다 후천적이었다. 갈수록 노래가 좋아졌으니까. 타고 난 가수는 거의 못 봤다." ^^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가 평가한 가수들~ 뮤지션만큼 당대의 가수들을 속속들이 꿰는 사람들이 또 어디 있을까.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 한국의 최정상급 네 뮤지션이 당대의 가수들을 품평한다. @@ `훌륭한 가수`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이정선: 듣는 사람에게 감흥을 일으키는 가수. 함춘호: 음악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으며, 가슴을 열고 순수 한 채로 노래하는 가수. 정원영: 노래를 잘 하는 것은 기본. 자기만의 색깔을 연출할 줄 알아야 한다. 손무현: 가창력과 필링(feeling)을 겸비한 가수. @@ 가장 음감이 뛰어난 가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정선: 내가 만난 가수들은 다들 좋은 편이었다. 음감은 어느 한 부분일 뿐이 고 가수로서의 존재 가치를 한 단계 뛰어넘어 자연스러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 중요한데, 아직까지는 누구도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함춘호: R&B가수 박정현과 나훈아. 정원영: 초기의 김현식. 송창식 같은 음악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손무현: 김건모. @@음악적 센스나 보컬 테크닉이 가장 좋은 가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정선: 테크닉으로는 이미자. 함춘호: 이은미와 이적. 정원영: 김창완, 나원주, 김현철, 김동률 등등. 대개 싱어송라이터들이 음악 센스가 뛰어나다. 김장훈도 비슷한 경우인데, 음정은 잘 맞지 않지만 어떻게든 자기식의 연출로 그 곡을 소화한다. @@흔히 말하는 `필`이 가장 훌륭한 가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정선: 예전에 신중현의 곡으로 몇 장의 앨범을 낸 김정미라는 가수가 있었 다. 한국말 발음의 새로운 가능성을 테스트했고 목소리가 마치 악기처럼 들렸는데, 거기에 필이 묻어 있었다. 함춘호: 얼마전 `하루`라는 곡을 히트시켰던 김범수. 같이 레코딩 했을 때 듣 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라이브에서는 그매력 이 배가된다. 정원영: 김현식, 한영애, 이은미. 한영애를 두고 `오버`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용감한거다. 손무현: `슬픈 베아트리체`를 발표할 당시의 조용필. @@내가 꼭 빼았아오고 싶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가수는 누구였나요? 이정선: 외국 가수 중에는 `He`ll have to go`를 불렀던 짐 리브스. 목소리가 반주에 묻히지 않고 반주 위에 동골동골 살아 있었다. 우리나라 가수중에는 없었던 것 같다. 있었으면 벌써 따라 했을 것이다. 함춘호: 임재범. 정원영: 임재범. 손무현: 박효신. @@실력에 비해 대중에게 덜 알려진, 그래서 참 아깝다고 생각되는 가수는 누구인가요? 이정선: 신중현과 뮤직파워던가? 두명의 여성 싱어에다 브라스까지 동원된 재 미 있는 편성을 취한 밴드가 있었는데, 둘 중 한 명이 아주 묘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함춘호: `먼지가 되어`라는 곡을 히트시켰지만 후속곡이 따라주지 않았던 이윤 수. 신촌블루스의 정서용. 한영애의 `누구 없소`를 작곡한 윤명운. 정원영: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손무현: `그런 뜻 아니었어`라는 곡을 불렀던 유진하. 노래를 참 매력적으로 하 는 데도 프로모션이 부족해서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최고의 남녀 보컬리스트로는 누구를 꼽고 싶으세요? 이정선: 노란색은 노란색일 뿐이고 빨간색은 빨간색일 뿐인데, 노란색이 빨간 색 보다 낫다고 할 수는 있겠는가. 조용필로 말하자면 테크닉으로도 훌륭했 고 장르에 구애받지 않았다. 정훈희 만큼 맑고 투명한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듣기 힘들다. 자기 색깔로 치자면, 거의 `썩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임희숙이 생각난다. 한대수는 아무런 기교 없이, 있는 그대로 노래 한다. 노래 자체가 메세지인 셈이다. 요즘의 한영애는 노래가 너무 강해졌다. 너무 양념이 많이 뿌려진 음식 같다고나 할까. 이은미는 한영애 보다 양념이 덜 하지만 자기가 잘한다고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함춘호: 여자 보컬리스트로는 박정현. 남자로는 80년대의 조용필. 정원영: 여자로는 정훈희, 패티김, 인순이, 이은미, 정훈희는 노래를 참 `맛있 게` 하여 음악이 곧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가수다. 이은미는 힘과 기교를 겸비 했고 나이들면서 더 원숙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남자 가수 중에는 김현식, 김민기, 조동진, 임재범을 꼽고 싶다. 김민기는 노래도 노래지만 정말 훌륭한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다. 손무현: 남자로는 조용필. 여자 보컬리스트 중에는 어떤 노래든 자기 스타일로 소화할 줄 알며, 발전 가능성이 엄청난 박화요비를 꼽고 싶다. 신효범, 장혜진, 이은미, 정수라 같은 가수들은 노래는 참 잘하지만 진정한 뮤지 션으로서의 자질은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가장 아끼는 곡을 주고 싶은 가수는 누구인가요? 이정선: 글쎄, 항상 가수에 맞춰 노래를 줬기 때문에 누구라고 말하기 힘들다. 이광조도 참 맛깔나게 부르는데, 요즘은 충전을 하지 못하고 계속 소모 되기만 해서 그런지 예전만 못하다. 일단 스타가 되면 쉽게 쇠진하게 된다. 김현식도 거친 창법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였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돼있을까 궁금해진다. 함춘호: 박정현 1집때 같이 녹음하면서 목소리에 밀크빛이 담겨 있다고 느꼈 다. 정원영: 조수미. 손무현: 조용필. 다른 가수들에게는 내가 얼마든지 곡을 줄 수 있지만 그에게 는 내 곡이 아직 부족하지 않나 싶어 드린다는게 망설여진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선희와 정수라, 신효범 세 가수를 놓고 논쟁이 붙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셋 중에 가장 쳐주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정선: 셋 다 소리 지르는 데 머물러 있는 가수다. `내 노래를 들어줘`하고 강 요 하는 단계인데, 대중들은 여기에 가장 열광하지만, 이 단계를 벗어나 숨 쉬듯이,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노래 부르는 경지가 돼야 한다. 함춘호: 이선희, 차갑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맛이 있고, 쉬어갈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정원영: 세 가수들의 노래를 많이 듣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손무현: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정수라. 곡 해석이 마음에 든다. @@가장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가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정선: 거의 다 후천적이었다. 갈수록 노래가 좋아졌으니까. 타고 난 가수는 거의 못 봤다. 함춘호: 박효신. 그 나이에 나올 수 없는 목소리를 가졌다. 정원영: 임재범. 손무현: 임재범. @@레코딩 도중에 가장 놀라게 했던 가수는 누구였습니까? 이정선: 이광조는 너무 예민한 탓에 녹음실에만 들어가면 긴장해서 베스트를 다하지 못했다. 한영애는 완벽주의자여서 더 잘하려다 망치는 경우도 많았다. 조하문은 정훈희처럼 맑고 투명하게 소리는 잘 질렀는데 맛이 없었고, 김현식은 임이 부쳐 음정 잡기가 힘들었지만 느낌은 좋았다. 함춘호: 김건모, 김범수, 박효신. 이들은 첫 레코딩 때도 `과연 누굴까?`하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정원영: DJ DOC의 곡을 세션할 때 `의외로 진지하게 펑크(punk)처럼 살고, 또 그렇게 노래하는 괜찮은 친구들이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손무현: `의미없는 시간`을 히트시켰던 최민수. 내가 음반을 프로듀스 했는데, "노래할게요"하고 한 마디 하더니 정말 한 방에 끝내버렸다. @@레코딩 기술의 덕을 가장 많이 본 가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정선: 요즘은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실력보다 시스템이 중요해진 시대 아닌 가. 함춘호: 누구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국내 가수중 10%가 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정원영: 흔히 말하는 틴아이돌 그룹들. TV를 보다보면 `저들이 왜 가수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손무현: 요즘 등장한 10대 가수들 전부. @@임재범의 보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정선: 전인권이 한국식 발성을 한다면 임재범은 머리가 동그래서 공명이 잘 되는 흑인들의 발성을 한다. 강약조절이 잘 되지 않아 변화가 없다. 그래서 두 곡을 들으면 똑같다. 중간중간 나쁜 소리도 내야 하는데 너무 좋은 소리만 내려고 한다. 함춘호: 지난번 김현식 추모 앨범 때 디렉팅을 맡으면서 같이 작업했다. 그의 목소리는 흡인력이 있으며 듣는 사람이 절로 감동하게끔 만든다. 곡 해석력도 탁월한 데다 이제는 삶의 깊이까지 느껴진다. 정원영: 정말 놀랍다. 목소리는 물론, 발음도 좋다. 자신으 목소리를 다룰 줄 알기 때문에 너무 힘든 노래인데도 무리가 없다. 손무현: 천부적인 보이스와 음감을 지녀 천상 가수가 될 수 밖에 없다. 음색과 곡해석력도 탁월하고 작곡력까지 갖췄다. @@서태지가 칭찬받아야 할 점, 반면에 아쉬웠던 점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정선: 랩이 우리 식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특히 `하여가`에서 태평 소 연주 부분은 새로운 시도였다. 그래서 그 뒤로 뭐가 나오려나 싶었는데 거기서 그쳤다. 미국이란 곳은 자기 세계가 없이 들어가면 압도되고 마는 곳이다. 조금 일찍 미국에 들어갔고, 그래서 휩쓸려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어떤 면에서 아깝다. 함춘호: 메틀로 음악을 시작한 덕분인지 록의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고, 후배들 에게도 이런 정신을 물려주었다. `교실 이데아` 같은 곡을 통해 젊은이 들과 공감을 획득한, 앞서가는 뮤지션이었다. 하지만 은회 후로는 더 이상 무대에 서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마치 새로운 것인양 들고 나온 갱스터랩이나 하드코어는 그때까지 그 장르를 해오던 그룹들이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원영: 정말로 관심이 없다. 최근 앨범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쨌든 이 필드에서 `건강하게` 남았으면 좋겠다. 손무현: 나의 음악적인 기준을 떠나있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왜 그 음악을 하는지 모르겠고, 대중성이 있는지, 음악성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도 `국민가수`이니 내가 평가할 수는 없다. @@근간에 등장한 가수 중에서는 대개 박효신을 최고로 평가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정선: 김현식이 가지고 있던 파워가 없고 소리가 얇아서 그렇지, 정훈희가 그랬던 것처럼 저음에서 고음까지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점은 대단하다. 함춘호: 징그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노래를 잘 하며, 마이클 볼튼과 비슷하면서 도 한국적인 정서가 있는 음색은 요즘의 음악 트렌드와도 잘 맞는다. 정원영: 실제로 들어본 적도, TV에서 들어본 적도 없어 잘 모르겠다. 손무현: 기성 가수들에게는 없는 비음과 두성을 가졌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느낌이 모자란다. 그래서 듣고 나면 `남는 게` 많지 않다. @@보컬리스트가 아닌, 뮤지션으로 최고라고 생각되는 가수는? 이정선: 뮤지션은 노래를 잘하기 보다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조동진은 자다깬 목소리지만 이 음악에는 이 목소리가 낫다는 걸 알고 있다. 요즘은 인디 음악 하는 친구들이 좋게 보인다. 노래를 이쁘게 하지 않고 음악 전체를 보고 있다. 이들이 한 단계 올라가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지켜보는 중이다. 함춘호: 전인권. 악기를 잘 다루어야만 뮤지션이 아니다. 그는 진정 음악을 사 랑 하고, 그것을 잘 표현하는 음악인이다. 정원영: 신중현. 우리 음악을 여기까지 이끈 분이고, 음악에 임하는 자세와 작사/곡 능력, 연주력 모든 면에서 훌륭한다. 손무현: 조용필. 무러 바바 머든지.. 내가 칼켜주께..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141 BLUES Pt.2 朴慶錄 02/02 [13:20] 16 140 BLUES Pt.3 朴慶錄 02/02 [13:21] 16 139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 朴慶錄 02/02 [13:04] 22 138 school mlusic & nownuri 이민재 01/09 [18:36] 68 137 Re..school mlusic & nownuri 여혁재 01/09 [19:27] 58 136 [퍼옴]우리집방음공사 그효과와 비용 朴慶錄 12/29 [03:17] 54 135 [퍼옴]올드 악기와 새 악기에 대하여 朴慶錄 12/29 [03:13] 39 134 [퍼옴]대통령후보와 기타 朴慶錄 12/29 [03:05] 43 133 [스튜디오탐방] 부산이야기 朴慶錄 12/27 [21:00] 53 132 라면 사용기 朴慶錄 12/26 [17:21] 52 Copyright(c) 2000 technote inc Q&A 이름:朴慶錄 (rock@inje.md) 2003/2/2(일) 13:19 (MSIE6.0,WindowsNT5.1) 211.106.217.158 1024x768 BLUES Pt.1 이글은 김지영 저 < 이상의 시대 반항의 음악 > 중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1. 고통의 담금질, 록의 뿌리 블루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이 미국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블루스다. 블루스는 록의 뿌리이며 록은 미국 대중 음악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남부 미시시피 델타의 흑인 노예들에 의해 처음 생겨난 블루스는 머나먼 낯선 땅으로 끌려와 장시 간 노동과 굶주림, 백인들의 멸시 등을 감내 해야만 했던 흑인들의 고통과 아픔이 만들어낸 음악이 다 블루스는 흑인음악의 여러 뿌리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미국역사가 빚어낸 진 정한 미국의 음악이기도 하다 조상 대대로 노래와 춤에 젖어 살았던 흑인들은 블루스를 통해 자신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표현 할 줄 알았다.때로는 울분을 토하거나 분노에 절규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긴 한숨만 뱉어 내기도 했으며 더러 작은 삶의 기쁨에 흠뻑 젖을 때도 있었다.. 블루스는 그들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나 다름 없었다..흑인들은 일상의 모든 시름을 덜어주 는 블루스의 선율에서 큰 위안을 얻었고, 그저 자신들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만으 로도 블루스를 사랑했다 맨처음 블루스는 단순한 음악이었다.대개 열두마디에 가사는 세줄 정도였고 빠르기는 4분의 4박자 가 일반적이었다..코드는 일정한 페턴대로 진행되었다 이는 아프리카의 단조로운 음악이 자연스레 어어진 것이기도 했지만 복잡한 형식을 발전시키기에는.. 너무나 열악했던 그들의 삶의 조건 탓이 기도 했다 형식이 단순한 만큼 그 내용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델타 블루스는 흑인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현대적인 모습을 갖 추기 시작했다.Louis Amstrong, Benny Goodman, DukeEllington 등이..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이 시기의 어번 블루스를 대표하는 거장들이며 이들은 후일 백인들의 블루스에 가장 지대한 영향 을 미쳤다..이어 30년대에는.. 보다 쉽고 빠르며 경쾌한 리듬을 강조한 리듬 앤 블루스가 나타났다. 머디 워터스와 하울링 울프,존 리 후커,엘모어 제임스,비비 킹 등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의 전설 적 스타들이 활약했던 것도 이 무렵이다.그리고 50년대, 블루스는 록큰롤을 낳았다. 2차 대전을 전 후해 블루스에서 떨어져 나온 리듬 앤 블루스가 백인들의 컨트리와 결합해 록큰롤 이라는 새로 운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흑과 백 두가지 요소 중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것은 물론 흑인 음악 쪽이었다..그러나 50년대 말 록 큰롤의 열기가 식자 사람들은 블루스를 잊어버렸다.한층 대중적이었던 리듬 앤 블루스는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했지만 본래의 블루스는 흑인들에게서조차 외면 당했다.. 블루스는 영국 그룹들이 몰려올 때까지 저만치 뒤편으로 밀려나 있어야 했다 록큰롤은 블루스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 받았다..그중에서도 펄펄 살아 움직이는 감정은 컨트리에서 는 찾아볼 수 없는... 블루스가 록큰롤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이다.록큰롤이 등장하자마자 수많 은 젊은이들을 대번에 사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블루스로부터 내려온 열정이 뭔가 시끄럽고 강렬 한 것을 원하고 있던 이들의 욕구를 그대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목화밭 노예들에서 비롯된 블루스는 기본적으로 소수의 가진 자들보다는 다수의 가난한 자들 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음악이었고..그 시작은 함께 일하며 부르는 노동요였다..록큰롤 역시 비록 컨 트리의 여유로움에 가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 다수의 현실 불만에 근거한 음악이었 고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충동이 담겨있었다.억압받는 자들의 음악 블루스 로부터 물려 받은 이 전통은 이내 고정된 것에 대한 반항으로 바뀌어 갔다 때문에 모든 록 가수들에게 블루스는 자기 음악의 뿌리이다..거기에는 현재의 록이 지금의 모습 을 갖추기 이전의 그 무엇.. 원초적인 질감이 살아있기 때문이다.에릭 클랩튼은 블루스를 가리켜 '록의 충전용 배터리'라고 표현했다.사실 그랬다.록은 언제나 그 기운이 떨어질 때는 블루스를 찾았다..60년대 후반은 록이 기억 속에서 블루스를 끄집어낸 첫번째 시점이었다 2. 60년대 후반의 블루스 리바이벌 (감상하기) - Robert Cray: What a bout me - 68년이 되자 미국 사회는 점점 더 양극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60년대 초 반부터 존재했던 사회의 모든 갈등이..이제는 한꺼번에 불거져 다시는 돌이 킬 수 없을 정도의 극단으로 미국을 몰아 가고 있었다.그 중심축은 물론 세 대 갈등이었다..젊은이와 기성 세대는 모든 문제에서 사사건건 첨예하게 맞 붙었다.나라 전체가 이들의 싸움으로 상처 투성이였다..젊은이들은 이제 기 성 세대를 타도와 일소의 대상으로 생각했다.이피와 블랙 팬더는 이러한 극 단을 가장 잘 상징했다.그러나 이제는 기성세대들도 만만치 않았다.기성 세 대는 '사랑의 여름' 이후 히피로 대표되는 체제 반항적인 청년 세력 전체를 잠재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보다 고도의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그러자 한때 완전 우위를 점할 듯 보였던 젊은이들은 조금씩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다..기존의 벽은 생각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이들 은 그 속에서 분노와 절망이라는 두개의 감정을 함께 느껴야 했다...이들은 상황을 타계할 강한 자극과 돌파구를 원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블루스 붐은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물론 그 이전에 브리티 쉬 인베이젼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영국인의 침공' 이후 비로소 50년대 리듬 앤 블루스의 매력에 눈을 뜬 백인 젊은이들은..그 강렬한 에너지와 생 생한 감정에 이끌려 점차 리듬 앤 블루스의 근원인 블루스까지 더듬어 올라 갔다.이들은 리듬 앤 블루스에 비해 훨씬 어두우면서도 인간의 원초적인 감 정을 좀더 순수하게 드러낸 블루스에 대번에 매료 되었다.이제까지 어떤 음 악도 이처럼 깊은 감정을 담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들은 블루스의 본고 장인 남부와 시카고를 돌아다니며 흑인들의 블루스를 하나하나 배워 나갔고 점차 자신들의 감정을 블루스에 담아내기 시작했다..록큰롤과 리듬 앤 블루 스를 통해 흑인 음악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화 해냈던 백인들은 이제 흑인 음악의 가장 오랜 전통인 블루스마저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할 줄 알게 되었다 블루스는 이내 움직이는 세대 Moving Generation들의 음악이 되었다.수많은 젊은이들, 특히 백인 청년들이 흑인음악인 블루스에 열광했고..이는 블루스 의 부흥이라고까지 불렸다.현실의 문제들에 짓눌려 있던 젊은이들은 블루스 의 강렬한 사운드에 사로잡혔다.거기에는 폭발할 듯한 힘과 마음 깊은 곳으 로부터 터져나오는 절규가 있었다.그것은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환각적인 무 게와는 다른 것이었다..지극히 현실적이었고 강도는 더 높았다.이들에게 블 루스는 현실에 대한 모든 불만의 발상이자.. 기성 세대에 대한 강한 분노의 분출을 의미했다.동시에 이들은 억압받는 이들의 음악 블루스에서 자신들이 함께 하려는 다수의 절규를 느꼈다.블루스에 실린 흑인 특유의 감성은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하던 많은 백인 젊은이들에게도 자연스런 것이었다.이제 블 루스에 담긴 흑인 게토 청년의 절망은.. 바로 답답한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백인 청년의 그것과도 같았다..또 어떤 의미에서 블루스는 백인들에게 내재 되어있는 흑인들에 대한 죄의식을 덜어주는 것이기도 했다.블루스는 전쟁과 타락한 기성 세대들에게 찢기고 상처받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공감가는 음악 이자 따뜻한 위안이었다 블루스 리바이벌 붐은 가히 폭발적이었다..수많은 백인 블루스 가수들이 등 장해 인기를 얻었고 흑백이 혼합된 그룹들도 다수 생겨났다..오랫동안 뒷전 으로 밀려 있던 흑인 블루스의 거장들에게도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져..20여 년간 흑인 상대의 값싼 무대만을 전전해 왔던 비비킹이나 존 리 후커, 머디 워터스 등은 하루아침에 엄청난 출연료와 인기를 한 몸에 누리는 최고의 스 타 대접을 받게 되었다..68년 샌프란시스코 필모어 웨스트에서 백인 관중들 이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렸던 킹의 공연은..5년전 그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의 관객 95%가 흑인이었던 것과 비교해 그간의 세태가 얼마나 달라졌는 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오히려 이 무렵 흑인들은 지난날 고통에서 뿌 리내린 블루스 보다는 흑인의 정체성을 강조한 소울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이 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7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사이키델릭 블루스로 불린 지미 핸드릭스와 가장 뛰어난 백인 여성 블루스 싱어 제니스 조플린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고.. 흑인 블루스를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많은 가수들이 록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때문에 백인 블루스에 비관적인 시 각에서는 이 시기의 블루스 리바이벌이 주류 팝의 기교를 넘지 못했다고 혹 평하기도 한다..그러나 68년 무렵의 블루스 리바이벌이 갖는 음악적,사회적 의의에 대해서 만큼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왜냐하면 이는 사람들에게 블루스를 록의 뿌리로서 처음으로 인식시켜 준 것이었으며 거기 에는 60년대의 마지막 흐름으로서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한 60년대의 상황이 가장 압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이 첫번째 블루스 리바이벌 이후 모든 록 가수들은 한계에 부딪힐 적마다 뿌리찾기로서 블루스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무러 바바 머든지.. 내가 칼켜주께..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144 최고의 drummer가 될려고 하는 심정 朴慶錄 02/02 [13:46] 34 143 최고 드러머가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겠죠? 朴慶錄 02/02 [13:51] 35 142 BLUES Pt.1 朴慶錄 02/02 [13:19] 38 141 BLUES Pt.2 朴慶錄 02/02 [13:20] 16 140 BLUES Pt.3 朴慶錄 02/02 [13:21] 16 139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 朴慶錄 02/02 [13:04] 22 138 school mlusic & nownuri 이민재 01/09 [18:36] 68 137 Re..school mlusic & nownuri 여혁재 01/09 [19:27] 58 136 [퍼옴]우리집방음공사 그효과와 비용 朴慶錄 12/29 [03:17] 54 135 [퍼옴]올드 악기와 새 악기에 대하여 朴慶錄 12/29 [03:13] 39 Copyright(c) 2000 technote inc Q&A 이름:朴慶錄 (rock@inje.md) 2003/2/2(일) 13:20 (MSIE6.0,WindowsNT5.1) 211.106.217.158 1024x768 BLUES Pt.2 3. 블루스맨 1) 버터필드,블룸필드,윈터 블루스 리바이벌을 이끌었던 스타 가운데 가장 돋보인 인물을 3명 꼽으라면 폴 버터필드와 마이크 블룸필드 그리고 자니 윈터를 들 수 있다 폴 버터필드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블루스의 진가를 선보인 인물이었다.어 번 블루스의 본 고장 시카고 태생인 그는 노래와 작곡 모두에 능했고, 특히 흑인들의 애수 어린 하모니카를 즐겨 다뤘다.그가 처음으로 미국 대중의 주 목을 받게 된 것은 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발을 통해서였다.그는 밥딜런과 함께 페스티발에 참가해 그 유명한 일렉트릭 기타 소동에 한몫했다..덕분에 유명해진 그는 이듬해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데뷔작 < Paul Butterfield Blues Band > ('66)와 그의 최고걸작으로 꼽히는 < East-West > ('66)를 잇 따라 발표해 블루스 리바이벌의 물꼬를 텄다..이후 그는 자신의 그룹 폴 버 터필드 블루스 밴드를 이끌고 블루스의 외길을 걸었으며..블룸필드를 비롯, 마크 나프탈린, 엘빈 비숍, 데이비드 샘본, 닉 그래베니티스 등..걸출한 블 루스 뮤지션들을 배출해 냈다.그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백인 뮤 지션들에게 순수 블루스의 매력을 처음으로 일깨워 주었다. 미국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손꼽히는 마이크 블룸필드 역시 시카고 태생이었다..유태인 중산층 출신이었던 그는 65년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 에 가입했고 수많은 흑인 기타리스트들이 평생을 바쳐도 이룰까말까한 유연 성과 풍부한 감정을 이미 20대 때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연주는 깨끗하고 시원시원했으며 감정적이었다.때로 긴 울음처럼 늘어 지는 음들은 그의 전매 특허였다.그는 같은해 밥딜런의 앨범 < Highway 61 Revisited > 에서 리드기타를 맡아 예의 연주를 들려주었고, 67년에는 일렉 트릭 플래그라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이듬해 그 는 스티븐 스틸스, 알 쿠퍼와 등과 < Super Session >을 발매, 적잖은 인기 를 얻었고.. 영화 음악에도 손을 대 < The Trip > ('67), < Medium Cool > ('69) 같은 사운드 트랙 앨범을 발표했다..한편 기타의 이론화 작업에도 남 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기타 강의를 했고 기타 전문지 < 기타 플레이어 >의 자문을 맡기도 했다 택사스 출신의 자니 윈터는 남부의 정서가 물씬 밴 블루스를 선보였다.사시 와 색소 결핍증으로 어려서부터 남모를 아픔을 경험한 그의 음악은..음악의 한 분야로 블루스에 매료된 다른 백인 뮤지션들과는 달리 그 자체로 고통을 담고 있는 진짜 블루스였다.그는 로버트 존슨, 하울링 울프 등에 매료돼 열 한살때 처음 기타를 잡았으며 열네살 나던 해 동생과 그룹을 만들어 루이지 에나로 진출했다.이 시절의 그는 일당 8달러를 받아가며 하루에 6시간씩 기 타에 매달리곤 했다.그는 흑인음악인 블루스를 좀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흑 인들과 접촉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웬만한 백인들은 들어가려고도 하 지않는 흑인 클럽을 찾아다니며 블루스에 관해 교감을 나누었다.그 결과 블 루스의 고향인 남부에서..그만큼 블루스를 제대로 이해한 백인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클럽을 전전하던 그는 블루스 붐을 타고 입에서 입으로 그 명 성이 전해져 69년 무렵에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그는 대표곡인 "Missi- -ssippi", "Leland" 등에서 알 수 있듯.. 작곡과 일렉트릭 기타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거센 스타카토에서 높은 소프라노에 이르는 풍부한 음색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그의 노래에서는 별다른 기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블루스는 감정의 음악이다.그냥 느끼면 된다"는 그의 말처럼 그저 진한 감 정으로 듣는 이를 감싸안을 뿐이었다..그는 69년 컬럼비아와 60만 달러라는 거액에 5년 계약을 맺어 가장 비싼 블루스 가수가 되었다 2) 블루스 그룹 그룹으로는 Canned Heat, MC5, CCR이 최고였다.로스엔젤레스의 캔드 히트는 블루스 리바이벌이 시작된 68년 무렵 최고의 인기 그룹이었다..알란 윌슨과 봅 하이트가 주축이 된 5인조 캔드 히트는..Tommy Johnson의 28년도 곡에서 그룹 이름을 땄고 20년대 저그 밴드 스타일의 블루스를 그룹의 기초로 삼았 다.67년 데뷔작 < Canned Heat >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이들은 그 해 몬터레 이 페스티발에서 가장 주목받는 그룹으로 떠올랐고, 이듬해인 68년 새 드러 머 알프레도 피토를 영입한 뒤 두번째 앨범 < Boogie With Canned Heat >을 발표, 성공의 궤도에 올랐다.이 앨범 중 특히 Jim Olden의 곡을 리메이크한 "On The Road Again"은 윌슨의 여린 음성과 시타를 연상시키는 기타,가슴을 저미는 하모니카의 애잔함이 어우러져..많은 사랑을 받았다..곧바로 발표한 발표한 이들의 2장짜리 앨범 < Living The Blues > ('68)는 이보다 더 훌륭 했다.Charlie Patton의 리바이벌 곡 "Pony Boy"나 19분짜리 대곡 "Partheno genesis" 등은 사람들에게 블루스가 무엇인가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Hen ry Thomas의 "Bulldoze Blues"를 가사만 바꿔 부른 "Going Up The Country" 도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시대 분위기를 타고..빌보드 11위까지 올랐다.이 들은 69년 두장의 앨범을 더 내놓았고.. 70년 윌슨이 약물과용 끝에 자살한 뒤에도 블루스의 한길을 고집하며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MC5는 블루스 밴드 가운데 가장 정치적이었다..이들은 첨예한 문제 의식과 기성 세대에 대한 맹공을 특징으로 했다..모두 디트로이트 출신인 다섯명의 멤버들은 고교 동창 사이로 67년 존 싱클레어가 주축이 되어 그룹을 결성했 다..하나같이 디트로이트의 빈민가 링컨 파크에서 살고있던 이들은 그해 여 름의 디트로이트 흑인폭동이 만들어낸 그룹이나 마찬가지였다..그룹 이름을 디트로이트의 별명인 자동차 도시 'Motor City'의 약자로 지은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블루스에 담긴 흑인들의 절규를 디트로이트의 유혈 사태로 구체화 시켰다...이들의 음악에서는 시커먼 연기를 토해 내는 디트로이트의 굴뚝과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시끄러운 사운드와 사나운 전자음은 어딘지 모르게 기름때에 절은 듯 했고 공장의 그늘처럼 어 둡고 음산했다.그리고 그 속에는 대규모 유혈 사태로 폭발했던 흑인들의 분 노와 저항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자연 이들의 음악은 선동적일 수밖에 없 었다.이들은 블루스에 강력한 록 사운드를 도입해 울부짖는 듯한 분노와 대 중들을 휘어잡는 엄청난 힘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냈다.뿐만 아니라 이들은 공연을 의식적인 선동의 장으로 삼았다.증오와 폭력으로 가득 찬 이들의 무 대는 마치 혁명 전야의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MC5는 끊임없이 젊은이들에게 세상으로 뛰쳐나와..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관중들을 '동물 친구들'이라 불렀고 기타를 총처럼 부여잡고 노래를 했다.때로는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음란한 동작도 서슴지 않았다..마치 기존 의 모든 가치를 철저히 파괴하려는 것 같았다 블랙 팬더에 맞먹는 백인 급진 단체 White Panther Party의 창당 발기인이 기도 했던 싱클레어는 스스로를 일컬어 '음악 게릴라'라 불렀고 "록이나 마 약, 음란 행위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 기성문화를 파괴하는 것이 우 리의 목표"라고 공공연히 선언했다..MC5는 이피의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68 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의 거리 투쟁에 참여해 "여러분, 저기 혁명 의 소리가 들리십니까.혁명은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라며 정열적인 선동 을 벌였다.이들은 69년 첫 앨범 < Kick Out The James >를 발표했고 여기에 서 블루스의 거장 존 리 후커의 "Motor City Is Burning"을 빌려 그들이 말 하고 싶은 것을 한 줄로 표현했다. "모든 도시가 불타고 있어.저 먼지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사람은 바로 여러분!" 이것이 이들의 가장 명백한 외 침이었다.이에 대해 그들의 음반을 구입한 10만이 넘는 대중들이 가장 확실 한 지지를 보내 주었다..MC5는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어 있던 블루스의 분노 를 정치적인 문제로 끌어 올렸고 여기에 록의 공격적인 사운드를 덧칠해 후 일 펑크와 헤비메탈의 기초를 닦았다 샌프란시스코의 CCR은 가장 60년대적인 감각으로 블루스를 복원해 냈다..존 (보컬)과 톰(베이스) 포거티 형제, 이들과 한동네 친구인 더그 클리포드(드 럼), 스튜 쿡 (피아노) 4인으로 이루어진 CCR은..60년대 블루스 리바이벌의 가장 성공적인 밴드였다..67년 데뷔한 이들은 첫 싱글 "Susie Q"가 골드 싱 글을 기록한데 이어 69년 한 해 동안만 "Proud Mary", "Bad Moon Rising", "Green River", "Down On The Corner" 등이.. 모두 백만장 이상의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으며 72년 6월 해산할 때까지 "Who Will Stop The Rain"('70) 등 모두 14곡의 히트를 기록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이들은 순수한 결 정체(블루스)를 부활시켜 내겠다는 신념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을 뜻하는 그부 이름처럼..블루스 본래의 의미를 어느 정도 살리면서도 컨트리 색채가 강한 초기 록큰롤의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해..경쾌한 리듬과 특유의 정서를 만들어 냈다.부모의 불화와 가난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경험했던 존 포거티의 목소리에는 블루스의 끈끈함과 컨트리의 투박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으며..진한 여운을 남기는 일렉트릭 기타와 담백한 어쿠스틱 기타도 나 무랄데 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단순한 블루스와 리드미컬한 쭉 뻗은 사 운드는 CCR만의 독특한 매력이었다.뿐만 아니라 이들은 여기에 당시 젊은이 들의 의식과 반전 메세지를 모나지 않게 담아냈다.멤버들 중.. 존 포거티는 스스로 "나는 하층 계급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바라본다"고 공언할 만큼..첨 예한 계급 의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우리나라에서는 흥겨운 댄스곡으로만 알려져 있는 "Proud Mary"도 실은 숨막히는 도시를 떠나 무념무상의 자연으 로 돌아가자는 당시 젊은이들의 생각을 반영한 곡이며..비오는 날 라디오의 단골 메뉴인 "Who Will Stop The Rain" 역시..미국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비의 이미지로 상징해 누가 이 비를 멈춰 줄지를 알 수 없다는 냉소를 표현 한 곡이다..또 "난 아냐,난 아냐,난 군대의 자식이 아냐" 라는 "Fortunate Son"에서는 반전의 메세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블루스와 컨트리의 조 화, 거기에 적당한 정치 의식까지 겸비한 이들의 음악이야말로 블루스에 열 광하던 당시 젊은이들의 구미에 가장 잘 맞는 음악이었다.CCR이 3년 반이라 는 길지 않은 활동기간 동안 그처럼 폭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 로 이 오묘한 절충 덕이었다.그러나 이는 바꿔 말하면..이들의 음악은 백인 들의 블루스 리바이벌이 블루스 본래의 순수함에서 벗어나..점차 록으로 탈 바꿈해 가는 과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3) 오선지 밖의 목소리..제니스 조플린 그러나 블루스 리바이벌 최고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제니스 조플린이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여장부로 이 시기뿐 아니라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 틀어 가장 뛰어난 여가수였다..또 스물아홉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간 예술가이자 반역자이기도 했다.조플린은 68년 타임 인터뷰 에서 "나는 노래할 땐 마치 아주 강한 약을 먹은 듯한 기분이 된다"고 털어 놓았다.이 말은 그가 이미 강한 약의 느낌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 거인 동시에 그에게 노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 이다. 그는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았다.미국에서도 유난히 보수적인 텍사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플린은 어려서부터 별난 아이였다..그림 그리기와 시를 좋아했으며 오데타와 레드벨리 같은 흑인 음악을 즐겨 들었다.그 자신의 말 대로 "주말이면 남자애들과 어울려 영화 보러가고 콜라나 좋아하는 텍사스 여자 아이들" 속에서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그는 또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당했고 그럴수록 점점 더 자기 속으로 파고들었다.조플린은 이때부터 이 세 상에 기댈 곳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평생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리 고 점차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는 열여덟살이 되던 61년 고향을 떠나 휴스턴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5년간 여기저기 떠돌며 일하고 노래하는 그된 시절을 경험했다.그는 이 기간동안 세상살이의 힘겨움과 더러움을 절감했고 세상이 점차 나아지리 라는 기대를 아예 저버리게 되었다..희망을 버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러운 세상을 저주하거나 술과 약물에 젖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 뿐이 었다..그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고 행동은 공격적으로 변해갔다.오직 노래 만이 그가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66년 그는 블루스 밴드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에 가입하고 활 동무대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그리고 이듬해 몬터레이 페스티발을 통해 조플린 신화의 막을 올렸다.그는 이제까지 미국인들이 익숙해 있던 백인 여 가수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 등의 맑고 고운 소프라노, 아무리 달려봐야 그레이스 슬릭 같은 도발적인 음색이 여가 수의 전부인 줄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조플린의 목소리는 가히 충격적이 었다.갈라진 목소리에 절규와 비명, 다이나마이트 같은 엄청난 에너지는 도 무지 여자 가수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몸 안의 모든 힘을 소진시켜 버리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헝클어진 긴 금발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 어대는 무대 위의 모습 역시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아주 가끔 느린 블루 스를 부를 때 보이는 육감적인 목소리와 몸놀림에서만..그가 여자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껍데기를 벗고 느껴보라"고 외쳤다.그가 말하는 껍데기란 위선과 가식 뿐 아니라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도덕 관념이나 상식까지 포 함하는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갔다.누구 도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그는 언제나 하고 싶은대로 말하고 행동 했다..당시까지만 해도 여자가 섹스를 언급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노골적인 섹스 얘기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여자가 말한다는 것 자체 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조플린은 이내 자유와 금지되지 않은 것, 거침 없음의 상징이 되었다 조플린은 빅브라더에서 두장의 앨범을 발표했다.67년 데뷔작 <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 >와 이듬해 발표된 두 번째 앨범 < Cheap Thrills > 모두 남의 곡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그의 능력이 단연 돋보인 작품들 이었다..특히 < Cheap Thrills >는 조플린의 마력이 가장 잘 드러난 걸작으 로 그해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Piece Of My Heart"를 비롯하여.. George Gershwin 원작의 "Summer Time", 블루스의 거장 Big Mama Thornton의 리바 이벌곡 "Ball And Chain" 등..나름함에서 대폭발에 이르는 조플린의 역량이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나 있다.그는 블루스를 통해 열정과 절망, 저항을 한 꺼번에 표현했고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강력한 힘과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쾌락에 대한 갈망을 노골적으로 담아냈다..이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 는 여가수였다 그러나 조플린은 대중 속에서 더욱 진한 고독을 느꼈다..그는 "나는 무대에 서 2만5천명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눈다.하지만 집으로 돌아갈땐 늘 혼자다" 라는 말로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곤 했다.조플린은 그것이 자기 몰두가 만들 어낸 거대한 괴물임을 알지 못했다.그는 68년 빅 브라더를 탈퇴함으로써 새 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사실 조플린은 다른 밴드의 여성 멤버들과 마찬 가지로 그 중요도에 걸맞는 위치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이는 남성 위주 의 록계에서 몇 안되는 여성 록 가수들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구조 적인 문제였다.그는 이에 대한 반발로 새로 조직한 Kozmic Blues Band를 자 신의 백밴드로 한정했다.그러나 빅브라더의 탈퇴는 그의 오판이었다.빅브라 더는 조플린의 중요한 특성인..설익은 아마추어리즘을 유지하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극단을 누그러 뜨리고 악기와 선명한 대비를 이뤄 보컬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가 내놓은 솔로 앨범과 사후 발표된 < Pearl > ('71)에 수록된 "Me And My Bobby McGee" 등에 나타난 그의 음악 은 혼자서 현실에 맞서다 지친 나머지 이제는 타협을 생각하기 시작한 그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극단적이었다.조플린은 핸드릭스가 세상을 떠난지 며칠 후 인 70년 10월 4일 할리우드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사인은 해로인 과용이 었지만 실제 그의 죽음은 자살이나 다름 없었다.그가 벌였던 불안하고 즉흥 적이며 이기적인 동시에 자기파괴적이었던 인생 게임의 종말로는 지극히 당 연한 것이었다 조플린은 음악과 인물이 같은 비중으로 중시되는 몇 안되는 록 스타다.그는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갖은 반항과 대담한 실험을 통해 개인적인 자 유와 문화 혁명을 꿈꿨던 당시 젊은이들의 역사와 신화를 상징했다.또한 그 는 남성 위주의 록계에서..성 해방까지 포괄하는 여성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가시화 시켰으며 제한된 틀 안에서나마 기성사회의 성을 맹공한 페미니스트 였다.조플린은 남성과는 별도의 여성 록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어냈고 이후 모든 여성 록 가수들은 크게든 작게든 조플린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가 5년이라는 길지않은 기간동안 불꽃처럼 확 타올랐다 한 순간 사라지고 서도 사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십년간 활동한 다른 가수들보다 더 많은 의의를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무러 바바 머든지.. 내가 칼켜주께..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143 최고 드러머가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겠죠? 朴慶錄 02/02 [13:51] 35 142 BLUES Pt.1 朴慶錄 02/02 [13:19] 38 141 BLUES Pt.2 朴慶錄 02/02 [13:20] 17 140 BLUES Pt.3 朴慶錄 02/02 [13:21] 16 139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 朴慶錄 02/02 [13:04] 22 138 school mlusic & nownuri 이민재 01/09 [18:36] 68 137 Re..school mlusic & nownuri 여혁재 01/09 [19:27] 58 136 [퍼옴]우리집방음공사 그효과와 비용 朴慶錄 12/29 [03:17] 54 135 [퍼옴]올드 악기와 새 악기에 대하여 朴慶錄 12/29 [03:13] 39 134 [퍼옴]대통령후보와 기타 朴慶錄 12/29 [03:05] 43 Copyright(c) 2000 technote inc Q&A 이름:朴慶錄 (rock@inje.md) 2003/2/2(일) 13:21 (MSIE6.0,WindowsNT5.1) 211.106.217.158 1024x768 BLUES Pt.3 4. 신들린 운지, 록의 3대 기타리스트 블루스 리바이벌이 록 음악에 미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영향은 일렉트릭 기타의 부상이다. 일렉트릭 기타는 물론 록큰롤 이래 대중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였다.그러나 블루스 리바이벌 이전까지는 전체 음악 속에서 다른 악기들과 함께 보컬을 받쳐주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 다..몇몇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이 있긴 했지만 다른 모든 요소를 압도할만한 비중을 지니지는못했 다. 적어도 대중들에게까지 일렉트릭 기타의 엄청난 마력과 힘이 분명히 각인되고 기타리스트가 스타 대접을 받게 된 것은 블루스 리바이벌부터이다 블루스에 담긴 인간의 내적인 갈등과..현실에 대한 불만과 절규를 표현하는데 있어 일렉트릭 기타 만한 악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나자..어느 누구도 기타가 중심이 되지 않 는 록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일렉트릭 기타의 주법과 사운드 기술도 대부분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시도되기 시작한 것 들이다..사이키델릭에서 블루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등장한 일렉트릭 기타의 제왕 지미 핸드릭스로 부터 시작된 이 흐름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리듬 앤 블루스에서 갈라져나와..블루스 붐을 전후해 저마다의 기타 사운드를 일궈낸 3인의 기타리스트 Eric Clapton, JeffBeck, Jimmy Page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후일 록의 3대 기타리스트로 불렸다 에릭 클랩튼은 3인 중 가장 블루스적이었다. 그는 인간 내면에 깃들인 고귀한 그 무엇에 대한 탄원을 연주의 첫번째 동기로 삼았고 백인으로서 는 드물게 블루스에 내재된 고독과 분노,두려움,유머까지도 이해했다..때문에 그를 빼놓고 블루스 와 일릭트릭 기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클랩튼 개인의 음악 경력만 봐도 백인 블루 스의 역사를 반 이상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개의 블루스 뮤지션들이 그렇듯 클랩튼의 어린 시절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열여섯살난 소녀 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외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가 또래 소년들과는 달리 어둡고 진한 블루 스에 그토록 심취했던 것도 열네살 되던 생일 처음으로 선물 받은 기타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 도 마음붙일 곳을 찾고 있던 소년 시절의 심리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아마추어 밴드에서 실력을 닦은 클랩튼은 63년 리듬 앤 블루스 밴드 야드버즈를 시작으로 본격적 인 기타 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이때부터 이미다른 악기를 압도하는 깊이와 에너지를 간직 하고 있었다..그는 대번에 야드버즈의 핵으로 떠올랐고.. 특유의 블루스 주법으로 인해 '슬로우 핸 드'라는 별명을 얻었다.그러나 그는 야드버즈가 인기 절정이던 65년 18개월 만에 그룹을 떠났다.. 뼛속까지 블루스맨인 그로서는 리듬 앤 블루스로도 성이 차지않았기에.. 대중들의 기호를 쫓아가려 는 다른 멤버들과는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클랩튼은 바로 영국 최고의 블루스 밴드 존 메이욜스 블루스 브레이커스를거쳐 66년 진저 베이커 (드럼), 잭 브루스(베이스) 와 함께 크림을 결성했다 블루스 브레이커스에서 델타 블루스와 시카고 블루스로 단련된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록을 받아들 이기 시작했다..이 무렵의 클랩튼은 음악적으로나 외적으로 강하고 거칠어져..무대에서는 늘 20여 분 이상의 즉흥 연주를 즐겼고 벨벳과 가죽옷으로 악마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곤 했다.과거와는 달 리 격렬한속주를 내세운 파격적인 음악을 펼쳤던 그는..이때 '기타의 신'이라는 두번째 별명을 얻었 다. 크림은 클랩튼의 기타에 힘입어 68년 파워 넘치는 블루스록 "Sunshine Of Your Love"로 빅히트를 기록했으며 뒤이은 블루스 붐을 타고 가장 뛰어난 블루스 밴드 중의 하나로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크림은 그 해 걸작 < Wheels Of Fire >를 끝으로 해산했다..너무나 개성이 강했던 크림의 3 인은 결코 쉽사리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사이였다. 들은 음악적 견해 차이로 사사건건 충돌했고 마지막에 가서는 무대에서의 즉흥연주조차 밴드의 음악이라기보다는..뛰어난 솔로의 각축 같은 인상마저 줄 정도였다 크림 이후 클랩튼은 다시 예전의 차분함을 되찾았다.그리고 이번에는 밴드로서의 의미에 보다 충 실한 Blind Faith를 결성했다..블라인드 페이스는 록사상 최초의 수퍼 그룹으로 클랩튼 외에..크림의 베이커, 트래픽 출신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윈우드, 페밀리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 등 하나같이당대를 대표하는 실력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이들은 와일드 하면서도 어느정도의 상호 통제가 가능했고 데뷔 앨범 < Bline Faith > ('69)가 백만장의판매고를 올릴만큼 대중적인 영향력도 엄청났다.그러나 누구 못지않게 개성이 강했던 블라인드 페이스의 멤버들 역시.. 클랩튼의 의도와는 달리 1년도 채 못돼 크림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클랩튼은 이 짧은 기간 블라인드 페이스를 통해 블루스와 록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인도 라가와 재즈등 보다 다양한 음악들을 받아들였다.멜로디는 한결 명료해졌고 노랫말의의미도 이전에 비해 한층 중요하게 다뤄졌다.이 모든 경험들은 블라인드 페이스 해체 석달만에 듀언올맨 등과 결성한 Derek & Dominos의 명반 < LaylaAnd Other Assorted Love Songs > ('70)에 이르러 나무랄데 없는 조화를 이루어냈다 제프 백은 클랩튼과 전혀 달랐다.클랩튼이 블루스 적이었던데 반해 그는 훨씬 록에 가까왔고 클랩튼이 내면의 느낌을 살리는데 주력했던 반면 그는 여러가지 기술적 장치를 사용한 사운드의 실험에 치중했다.클랩튼이 정적이고감성적이라면 백은 동적이고 이성적이었다 클랩튼의 뒤를 이어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가 된 백은 소리의 합성에 의한도전적이고 파괴력 넘치는 연주로 이내 클랩튼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다..그는 기타리스트로는 처음으로 퍼즈톤을 사용했고.. 인도 음악의 요소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악기 파괴로 유명했던 The Who에 앞서 기타를 부수는 파격을 연출했던 것도 바로 그였다.야드버즈는 백의 공격적인 기타를 앞세워 그룹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66년말 야드버즈를 떠난 백은 이듬해 백 밴드 성격의 제프백 그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솔로 활동에 나서 < Hi-Ho Silver Lining > ('68) 등 두어곡의히트 싱글을 냈다.그러나 그는 얼마지 않아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깨달았다.그는 탁월한 기타리스트이긴 했지만..팝 스타가 될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이후 그는 노래와 반주 등 여느 밴드의 기타리스트들과 다를바 없었던 이제까지의 활동 방식에서 벗어나..오직 기타 하나에만 매달렸다 제프백 그룹의 다른 멤버들에게 보다 많은 재량권을 주고 자신의 역할은 기타로 한정시켰다..그가 3대 기타리스트 중 가장 혁신적이었으면서도 대중적인 지명도에서는 가장 처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백은 68년 후일 자신을 능가할 정도의 명성을 얻게 되는 로드 스튜어트(보컬)와 론 우드(베이스), 드러머인 미키 윌러, 건반주자 닉 홉킨스와 함께 미국 투어에 나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첫 앨범 < Truth >를 발매했다. 그의 음악은 야드버즈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실험적이었지만 그 사운드는 한층 세련되었고 특 유의 파격적인 기타 연주 또한 완숙미를 물씬 풍겼다..그는 오직 연주 실력하나만으로 대중을 사로 잡았던 거의 유일한 기타리스트였다..백은 69년 스튜어트와 윈우드가 페이시스로 떠난 뒤에도.. 멤버를 교체해 제프백 그룹을 이끌었으며 73년 이후로는 비록 드문드문이긴 해도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발휘하는 작품들로..세계에서 가장 실력있는 기타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더욱확고히 다졌다 지미 페이지는 이들과 또 달랐다.클랩튼 보다는 록의 느낌이 강했지만 백보다는 블루스적이었다.그렇다고 둘 사이의 절충도 아니었다.페이지에게는 클랩튼이나 백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정열과 균형이 있었다.그는 안으로 잦아드는 클랩튼이나 공격적인 실험주의자 백과는 다른 뜨거운 감정으로 스테이지를 달구었으며 절제 속에서도 현란함을 잃지 않았다.세사람 중 가장 뒤늦게 출발한 그가 일렉트릭 기타의 황금기인 70년대에 최고의 기타리스트로대접받게 된 데에는 이러한 그의 특성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일찌감치 세션 기타리스트가 된 그는 야드버즈 가입 이전부터 영국내에서는실력파로 이름이 높았다..일설에 의하면 63년부터 65년 사이에 영국에서 발매된 음반의 절반 이상이 그의 연주였다고도 하는데 알려진 것만도 The Who의 < I Can't Explain > ('65), Them의 < Gloria > ('65) 등이 있고 이밖에킹크스, 롤링 스톤즈, 허먼스 허미츠 등의 음반에도 참여했다 페이지는 66년 야드버즈에 베이스 주자로 가입했고 얼마뒤 백과 함께 록 그룹 사상 최초의 더블 리드기타를 맡게 되었다.백과 페이지 두사람의 연주는물과 불 같았다..양쪽 다 파괴적이고 힘이 넘쳤으나 백의 연주가 차갑고 이지적이었던 반면 페이지의 연주는 타는 듯이 뜨겁고 감정적이었다.두사람의묘한 대조와 배가된 힘은 이후 모든 록 그룹들에게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애초부터 스타일이 달랐던 두사람은 자주 부딪쳤고 6개월 뒤미국 투어중 백이 그룹을 탈퇴하면서 짧았던 관계도 끝나 버렸다 (페이지는후일 제프백 그룹의 곡 "Beck's Bolero"에 세션맨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페이지는 이후 야드버즈의 리드 기타로..68년 7월 밴드가 해산될 때까지 활동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석달 뒤 그는 로버트 플랜트와 존 폴 존스,존 본헴과 함께70년대 최고의 록 그룹 Led Zeppelin을 결성했다.페이지의 신들린듯한 현란함은 "Whole Lotta Love" ('69)에서처럼 보다 강하고 고도로 증폭된 사운드를 지향했던 레드 제플린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이후 헤비메탈이라는 용어가 생겨나면서 그의 연주는 헤비메탈의 상징처럼 되었다...페이지는블루스 기타리스트의 마지막 스타였던 동시에..70년대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의 원조였던 셈이다 - 끝 - 무러 바바 머든지.. 내가 칼켜주께..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142 BLUES Pt.1 朴慶錄 02/02 [13:19] 38 141 BLUES Pt.2 朴慶錄 02/02 [13:20] 17 140 BLUES Pt.3 朴慶錄 02/02 [13:21] 17 139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 朴慶錄 02/02 [13:04] 22 138 school mlusic & nownuri 이민재 01/09 [18:36] 68 137 Re..school mlusic & nownuri 여혁재 01/09 [19:27] 58 136 [퍼옴]우리집방음공사 그효과와 비용 朴慶錄 12/29 [03:17] 54 135 [퍼옴]올드 악기와 새 악기에 대하여 朴慶錄 12/29 [03:13] 39 134 [퍼옴]대통령후보와 기타 朴慶錄 12/29 [03:05] 43 133 [스튜디오탐방] 부산이야기 朴慶錄 12/27 [21:00] 53 Copyright(c) 2000 technote inc Q&A 이름:朴慶錄 (rock@inje.md) 2003/2/2(일) 13:37 (MSIE6.0,WindowsNT5.1) 211.106.217.158 1024x768 [퍼옴]한국에 세계적인 드러머가 없는 이유 chris라는 id를 쓰는 어떤 분의 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인 DRUMMER가 있습니다.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런데 세계적인 DRUMMER의 개념이 도대체 무엇인지요? 실력이 세계적인 수준이 아니어도 세계에 알려지면 세계적인 드럼어가 되는게 아닌지요? 저는 미국에 살고 있으면서 DURM을 한지가 거의 15년이 되어 갑니다. 요즈음은 한국에서도 훌륭한 드럼어가 많지만 10년전만 해도 형편 없는 그리고 개념이나 IDEA도 없는 밤무대 DRUMMER에게 배우면서 시간은 낭비 했었죠. 그리고 저 자신도 더 이상 배울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미국에 왔었는데, 왠걸요! 주말이 되어 악기사에 갔었는데 악기로 사로 온 사람들 보다 악기에 앉아서 연주를 하는데 처음엔 무슨 CD 틀어 놓았는줄 알았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정도 되는 아이가 DOUBLE BASS 연주를 PRO 같이 하더군요. 거기서 저는 다시 시작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TAKE FIVE의 작곡자인 DAVE GRUBECK BAND의 DRUMMER였던 JOE MORRELLO의 제자 MAT PATELLA씨에게 LESSON을 받았습니다. (JOE MORRELLO 할아버지에게는 LESSON 학생도 오디션을 통과해서 받을수 있으며 엄청 비쌉니다.)그 분과 1년 반정도 'MASTER STUDY'라는 책을 공부하고 하니 드럼에 눈이 다시 띄어지기 시작햇했었습니다. 그리고 전공도 바꾸어 DRUM을 할려고 버컬리 음대를 갈려고 준비를 하고 있던차에 'DAVE WECKLE'씨에게 메일을 보냈었는데, 답변이 오기를 '사실 고등학교때 부터 DRUM을 시작하면 늦었으며, 유명한 드럼머 사운드를 내기에는 힘들것이니 너무 잘 해서 세계적인 드럼머 꿈꾸지 말고, 취미로 즐기면서 하는것 더 좋을것이다'라는 편지를 받고 허왕된 세계적인 드럼머의 꿈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여기서는 국민학교 3학년 정도때 부터 드럼을 시작합니다. (BUDDY RICH 나 STEVE GADD은 4살때 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만). 그리고 6살정도면 남자도 피아노나 첼로를 시작하므로 음악에는 일찍 접하게 되므로, 한국의 사정과는 완전 틀리지요. 만약 한국에서 국민학교 3학년짜리가 드럼하겠다고 한다면 아마 부모님들께 엄첨 두들겨 맞겠지요. 여기 미국에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다 부분의 아이들이 특별활동으로 방과 후 SOCCER 나 BASEBALL 아니면 밴드부나 오케스트라에 들어갑니다. 특히 고등학교 재즈 밴드부에서 연주하는 학생들을 보면 소위 말하는 완전 프로 입니다. 특히 재즈 밴드 특히 빅 밴드 지휘자가 솔로할 사람하면, 기타 연주자, 드럼머, TRUMPET 연주자 할것 없이 서로 할려고 손들고 난리입니다. 여기서 12-13살에 악기 시작한 아이들은 끼지도 못 합니다. 미국에는 이런 재능 있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SESSION과 LESSON만 하며 자기네 지하실에서 평생 악기 연습만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강수일씨도 LA에 있는 MIT학원 다니며 지하실에서 DRUM으로 5년정도 '도'를 닦고 한국으로 돌아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DRUM으로 일인자가 될 만큼 유명해 지셨지만, 그 분에 여쭈어 보면 잘 아실것입니다. 왜 한국에는 세계적인 드럼머가 없는지를... 사실 DAVE WECKLE도 CHICK COREA가 JAZZ 바에 우연히 가서 연주하는 걸 보지 못했으면, DAVE WECKLE은 아마 지금도 바에서 연주하며, 하루 하루 힘들게 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끝으로 세계적인 DRUMMER가 될 가능성이 있는사람은 엄첨 많이 있습니다. 세계 방방 곳곳에 하지만 세계적인 DRUMMER가 되는것에는 실력도 있어야 하지만 좋은 밴드를 만난다던지, 좋은 밴드 리드를 만나야 한다는 조건도 있습니다. 만약 강수일씨가 DAVE MATTEW 밴드와 같이 연주 활동을 한다면 소위 말하는 세계적인 드럼머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DREAM THEATER의 한국 사람 BASS 연주자인 MR. LEE씨가 한국에서 밴드 활동하면 절대로 세계적인 BASSIST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GREEN DAY의 드럼머가 어디 드럼머 입니까? 비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국에도 수도 없이 많지 않습니까? 무러 바바 머든지.. 내가 칼켜주께..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148 Musicman의 기타/베이스들.. 朴慶錄 02/14 [21:32] 57 147 [퍼옴]유명드러머들의 조언 朴慶錄 02/02 [13:56] 50 146 [퍼옴]한국에 세계적인 드러머가 없는 이유 朴慶錄 02/02 [13:37] 46 145 groove & improvision 朴慶錄 02/02 [13:42] 35 144 최고의 drummer가 될려고 하는 심정 朴慶錄 02/02 [13:46] 34 143 최고 드러머가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겠죠? 朴慶錄 02/02 [13:51] 35 142 BLUES Pt.1 朴慶錄 02/02 [13:19] 38 141 BLUES Pt.2 朴慶錄 02/02 [13:20] 17 140 BLUES Pt.3 朴慶錄 02/02 [13:21] 17 139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 朴慶錄 02/02 [13:04] 22 Copyright(c) 2000 technote inc Q&A 이름:朴慶錄 (rock@inje.md) 2003/2/2(일) 13:42 (MSIE6.0,WindowsNT5.1) 211.106.217.158 1024x768 groove & improvision 같은 chris님의 글입니다. (어느 사이트에서 온 글인지 궁금하군요) 아래 reply 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만 속도가 빠르다고 세계적인 드럼머가 될 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저도 7-8년전에는 속도가 빠른게 좋다고 아니 솔직히 말하면 멋있다고 생각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밴드를 하다보며 느낀점이 있다면,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groove & improvision" 입니다. 이것들은 연습량과 경험(연주량)에 비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키라 짐보가 미국에 와서 허비메이슨 (지금은 four play의 drummer) 연주를 보고 "저 사람은 drum의 god (신)" 이라고 했습니다. 아키라 짐보도 속도로 따지면 허비 메이슨보다 훨씬 빠르겠죠. 그렇지만 음악에 맞는 응용력이나 improvision, concept, 그리고 groove 면에서는 차이가 월등히 나는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Simple is the best를 주장하고 있는 steve gadd의 drumming을 보고, 악보를 보면 쉽지만 그 악보 가지고 연습해 본 사람은 알지만 그런 'groove' 안 나옵니다. 그리고 steve의 improvision은 미국의 pro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끊이지 않습니다. 한예로, 사이몬과 가펑클의 "late in the evening" 이나 "fifty way leave your lover"을 들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수들이 곡을 보여주고 idea를 주면, drum part는 본인이 알아서 만들어 내는데,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때문에 모든 연주자나 가수들이 steve gadd과 연주를 할려고 하는것 같습니다. 사이몬이 처음에 late in the evening 곡을 주면서 (곡 자체는 rock style에 가깝지만) 좀 이국적이면서 여러 드럼머가 연주하는 처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steve는 곡을 한번 훌터 보고는 모잠비크 리듬에 stick을 한 손에 두개씩 들고 연주할 수 있는 리듬을 만들어 내어서, 처음 들으면 도저히 감을 잡기가 힘든 drumming 해 줍니다. 또 한가지 더 pro 연주자들이 steve를 선호 하는 이유는 솔직히 pro들이라고 하더라도 live 연주시, 특히 솔로시 tempo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steve는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보 읽는것도 거의 신의 수준입니다. 악보 보며 바로 연주를 해서 녹음을 처음으로 해 보는것을 first take이라고 하는데,chick corea의 friend 앨범 녹음때 first take으로 끝낸 곡도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Dave weckle, steve smith, vinnie, neal peart 등의 연주를 보면 steve gadd의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합니다. 그 만큼 steve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drum의 아버지라고 할수 있는 buddy rich는 다른 drummer 특히 후배 드럼머의 칭찬을 잘 안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지만, steve의 연주를 듣고, steve의 drumming은 색 다르고 이때까지 흘러온 drumming 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고 극찬 했습니다. 세계적인 드럼머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green day의 드럼머를 세계적인 드럼머가 아니다고 한 말에 솔직히 속이 상한 것 같으신데, 관점을 어디에 두는지가 더 중요한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드럼머인지 아닌지는 연주자 본인이 더 잘알고 있으니 논쟁의 여지는 없지만, 드럼을 연주한지 6개월이든 6년이 되었던지 상관하지 말고, 연주 하는것을 보고, 자기보다 낫은점을 찾아서 자기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사이트를 보며 느꼈지만,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사이트 많지만, 이런 귀중한 lesson을 공짜로 가르쳐 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보니 이곳 저곳에서 좋다고 생각되시는 것은 다 끌어다가 요약해서 경험이나 오랜 연주에서 나올수 있는 것까지 다 cover 하시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욕심이 있다면 외국이나 한국 drummer 특히 봄, 여름, 가을, 겨울 band의 drummer들의 특정 부분이나 끝나는 부분의 drumming 악보 (transcript)을 띄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latin jazz에 심취해 있는데, 거기에 관련된 conga, samba등과 같은 latin beat에 대해서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ratice makes perfect!!! 무러 바바 머든지.. 내가 칼켜주께..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147 [퍼옴]유명드러머들의 조언 朴慶錄 02/02 [13:56] 50 146 [퍼옴]한국에 세계적인 드러머가 없는 이유 朴慶錄 02/02 [13:37] 46 145 groove & improvision 朴慶錄 02/02 [13:42] 36 144 최고의 drummer가 될려고 하는 심정 朴慶錄 02/02 [13:46] 34 143 최고 드러머가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겠죠? 朴慶錄 02/02 [13:51] 35 142 BLUES Pt.1 朴慶錄 02/02 [13:19] 38 141 BLUES Pt.2 朴慶錄 02/02 [13:20] 17 140 BLUES Pt.3 朴慶錄 02/02 [13:21] 17 139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 朴慶錄 02/02 [13:04] 22 138 school mlusic & nownuri 이민재 01/09 [18:36] 68 Copyright(c) 2000 technote inc Q&A 이름:朴慶錄 (rock@inje.md) 2003/2/2(일) 13:46 (MSIE6.0,WindowsNT5.1) 211.106.217.158 1024x768 최고의 drummer가 될려고 하는 심정 역시 앞의chris의 글입니다........ 많은 분들이 최고의 drummer가 될려고 하는 심정 이해 합니다. 유명한 drum 연주자가 연주하는 모습 보면 나도 곧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꿈에 부풀며 살게 됩니다. 존경도 받을 수 있고, 마치 유명 연애인 대접(아니면 명성, 명예)을 받고 싶은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습성입니다. 저 또한 10년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며,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돌아가서는 최고의 drummer가 되리라 다짐하고 미국에 8년전에 왔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하면 steve gadd, terry bozzio 나 omar hakim과 같이 연주할 수 있을까 고민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사보고 열심히 연습 했습니다. 그리고 실력은 없으면서 한국의 유명 drummer 나 교회에서 drum 치는 사람들의 연주나 실력을 비평이나 하고 (본인은 그 사람들 보다 잘 하지도 못하면서) 말로만 최고의 드럼머가 될려고 했었습니다만 지금에서 돌아보면 정말 유치한 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 미국의 악기점에 가보면 소위 아마추어라는 사람들의 연주를 듣게 되면, 나도 drum 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집니다. 꿈을 가지고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 좋습니다. Dave weckle도 꿈은 성취 되도록 있는것이라고 했습니다. Dave weckle도 국민학교때 부모님께 세계적인 top drummer가 되겠다고 얘기 했다고 합니다만 중간에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번 아니었다고 합니다. Dennis Chambers는 billy cobham의 오른손과 발로 paraddle 하고 왼손으로는 심벌을 빠르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한동안 따라하다가 안 되어서 drum을 포기할려고 한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최고의 drummer가 된다는 말은 drum을 아주 잘 연주하다는 것인데, 연주를 잘 하기위해서는 피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늦게 시작한 만큼, 치루어야 할 댓가는 큽니다. 그래도 본인은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믿고 연습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drum 배우는 학생들 가운데 거의 다가 본인은 타고 났다고 착각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여기와서 아닌것을 알게 되었으며, 기초 부터 다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편견없이 많이 듣고 보는 것입니다. 일전에 저희 교회에 중학생 밴드가 와서 연주했는데, 그 드러머는 배운지 6개월 그리고 독학 했다고 했습니다만 연주중에 fill만 들어가면 박자 흐드러지고, 빨라지고 난리가 났지만, 그 중에 느린곡 연주시 5연과 6연 fill을 섞어 가며 하는데, 듣기가 괜찮아서 연주가 끝난후 그 어린 드러머에게 찾아가서 그 부분이 좋았다며, 다시 한번 들려달라고 했더니 본인은 뭘 연주했는지도 모르며, 연주 때 처럼 똑 같이 replay를 못하는 것을 봤습니다만, 말씀드리고 하는 요점은 자기보다 잘 하던 못하던, 그 연주자의 장점만 보고 그 것을 자기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단점이나 실수가 발견되면 자기는 그런 단점이 없는지 아주 냉철하게 분석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보다 좀 낫다고 보이는 연주자에게 가서 실수한 것이나 단점등을 들추어 내어 말로 깍아 내리려는 아주 유치하고 초보적인 극도의 아마추어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 개인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막 드럼 시작하신 분들에게 하고 싶은말은 좋은 lesson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초를 닦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파라디들, double 파라디들 이나 double stroke(2연), 1연, Flam paraddle 같은것은 손에 익을 정도만 하고 리듬 중심으로 연습을 했었는데, 결국은 부딪치는 문제가 기초를 얼마나 정확하게 잘 연습했는지 였습니다. 그리고 처음 잘못 배운 자세나 손동작 같은것은 시간 지나면 고치기가 엄청 힘듭니다. 어떨때는 불가능합니다. 잘못된 박자 개념 가져서 몸에 익어버리면, 차라리 드럼 그만 두는게 밴드 멤버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제대로 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처럼 엉터리 밤 무대 drummer 한테 배웠다가 자세고치는 데 1년 반이 걸립니다. 그리고 지금 하시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면서, 드럼을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2-3학년 되어서 공부포기하고 이제 드럼으로 인생을 걸겠다고 생각치 마시고, 드럼이외에 다른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하시길 바랍니다. New york 양키스에 티노 마티네즈는 drum이 프로 수준이며, 여기 아마추어들 jam session 가보면 치과의사, 주식 부로커, 뱅크 근무자, 배관공들이 나와서 double bass로 드럼 치는데, 말이 아마추어지 프로와 구별이 잘 안됩니다. 저도 드럼은 취미로 바꾸어서 다른 일 하면서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드럼이 주 생계수단은 아닙니다만, 저 같은 case도 많이 있습니다. 제 조카처럼 예술고등학교에서 드럼 전공하고 있으며, 락 카페에서 연주하고 있다면 드럼으로 인생을 걸라고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무러 바바 머든지.. 내가 칼켜주께..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146 [퍼옴]한국에 세계적인 드러머가 없는 이유 朴慶錄 02/02 [13:37] 46 145 groove & improvision 朴慶錄 02/02 [13:42] 36 144 최고의 drummer가 될려고 하는 심정 朴慶錄 02/02 [13:46] 35 143 최고 드러머가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겠죠? 朴慶錄 02/02 [13:51] 35 142 BLUES Pt.1 朴慶錄 02/02 [13:19] 38 141 BLUES Pt.2 朴慶錄 02/02 [13:20] 17 140 BLUES Pt.3 朴慶錄 02/02 [13:21] 17 139 제 목 : 이정선, 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씨?.. 朴慶錄 02/02 [13:04] 22 138 school mlusic & nownuri 이민재 01/09 [18:36] 68 137 Re..school mlusic & nownuri 여혁재 01/09 [19:27] 58 Copyright(c) 2000 technote inc Q&A 이름:朴慶錄 (rock@inje.md) 2003/2/2(일) 13:51 (MSIE6.0,WindowsNT5.1) 211.106.217.158 1024x768 최고 드러머가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겠죠? 이글은 밑의 Chris의 글에 대해 프로 드러머 김인용씨가 답글로 적은글입니다. 어떤 길에서든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군요. ^^ -------------------------------------------------------------------------------- 작성자 : 김인용 (cuban@chollian.net) 조회수: 4 , 줄수: 118 , 분류: 기타 최고 드러머가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겠죠? 한 교실에 30명의 학생이 있다고 칩니다. 최고의 자리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한다면 1등을 제외한 나머지 29명의 학생은 1등을 위해 꼭두각시가 되어주기 위해 학교에 가는 걸까요? 그렇다면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은 전국수석 학생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꼭두각 시일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겁니다. 반에서 1등하는 친구는 그에 걸맞는 생활을, 30등하는 친구도 그에 걸맞는 생활을 하고 있을거라는 얘깁니다. 물론 최고의 자리에 대한 바램과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죠. 때문에 열심히 공부 하는 것일테니까요. 공부하는 방법, 요령, 시간, 노력등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등수가 결정되는 것 뿐이죠. 그러나 1등이 되지 못할바엔 아예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친구는 없을겁니다. 드럼도 마찬가지예요. 꼭 세계 최고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진정한 드러머는 아닙니다. 물론 누구라도 그것은 꿈같은 바램이고, 목표일수도 있겠죠. 하지만, 세계 최고가 되기엔 많이 부족하니 그냥 드럼은 취미로 돌리고 다른일 을 해보는게 좋을거라는 얘기는 쉽게할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세계제일의 드러머라는 소리를 듣는 몇몇 드러머 이외에,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언더, 아마추어, 또는 클럽등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드러머들은 모두 취미로 드럼을 쳐야 하는건 아닐겁니다. 또는 현실적으로 환경이 어려운 우리나라의 경우 늦게 시작했다고 해서 '당신 은 이미 일류급이 되기는 늦었으니 프로가 되겠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그냥 취미로 드럼을 해라' 하고 말할수도 없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것은 즐기는 것입니다. 취미든, 프로든, 즐긴다는 것 하나는 공통적이죠. 데이브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싫은 것을 억지로 연습하고 연주한다면 어떨까 요? 그것은 아마도 연습실 구섞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고무판을 두드리는 학생 보다도 불행한 일이 되겠죠. 그러나 드럼이 싫은데 억지로 연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겁니다. 프로가 되거나, 세계적인 드러머가 된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드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걸 정도로 좋아서 두드리고 연습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즐기다 보니 그렇게 된것이죠. 물론 돈벌이가 먼저 떠올려지는 것도 옳은 모습은 아닐테죠.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쁘다니까, 헤어지면 쪽팔리니까 그냥 사귀는거야' 보다는.... '다른사람들은 안이쁘다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