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구원 자유 그리고 섬김 (갈 5: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말고 오직 사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사람들은 이 은혜의 소중함을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모르고 살아가다가 그냥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믿음의 길에 선 신앙인 중에서는 이 은혜의 깊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구원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이는 내 모습과 능력과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고 선물입니다.
사도바울은 전도자이고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16장 분량에 많은 신학을 제시했습니다. 그 많은 신학 내용이 갈라디아서 6장 안에 축소되고 요약해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사도바울 신학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의 신학을 압축해서 설명할 때 가장 강조하는 신학이 구원받음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들이 볼 때는 굉장한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없었고 알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제시한 하나님의 이방인 구원 계획이 더 놀라운 것은 그 계획 속에 우리들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그 결과로 오늘 우리들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들을 구원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몇가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값 발견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구원은 주님과 하나가 되는 은혜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신비한 변화를 이루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에는 나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나는 나이지만 옛날의 내가 아니고 주와 함께 하는 나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혼자였지만 이제는 예수 안에서 주와 함께 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가치 없는 내가 주님과 함께 함으로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값입니다. 우리는 이 값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신학자는 “나는 십자가만 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만나기 전에는 불필요한 것들을 추구하였고 그런 조건들을 찾기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난 후에는 그렇게 추구하던 것들과 비교도 안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은혜이고 복입니다. 사람들은 힘을 추구하고 보이는 것을 추구하느라 동분서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말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때는 오직 예수의 힘만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부여된 우리의 값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하는 존재
본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유함을 강조합니다. 2장 4절에서는 “예수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5장 1절에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5장 13절에서는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자유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자유입니다. 자유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남용하면 구속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감옥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자유를 속박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남용하여 남에게 해를 입혔기 때문에 그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를 남용하여 질병을 얻어 자리에 눕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독으로 몸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자유를 남용하게 되면 실패가 뒤따릅니다. 모두 자유를 남용해서 주어진 결과들입니다. 자유를 남용하면 이렇게 육신의 자유를 유보당하고 침해받게 됩니다.
또 정신적인 자유도 있습니다. 몸은 자유하되 정신이 구속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사에 얽매여 살아가게 되면 몸은 자유하지만 정신적인 자유를 상실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또 마음에 원한이나 증오심을 간직한 채 살아가게 되면 정신적인 자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죄책감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면 몸은 자유해도 감옥생활이나 마찬가지로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모두 자유를 잃어버린 생활입니다.
자유에는 영적 자유도 있습니다. 자유 중에 가장 큰 자유는 이 영적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문에서 말씀하는 자유는 바로 이 자유를 말합니다. 이 영적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운명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정신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함은 종말이 와도 변함없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함입니다. 이 영적 자유함은 무한한 자유입니다.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자유함을 누린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를 알게 된 후에 누리는 이 영적인 자유함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운명이나 종말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알고 종말을 안다는 것은 굉장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때에 누구보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길을 알기 때문이고 내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답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일 축구가 열렸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경기는 몰라도 한일전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시청자들이 경기 전에 긴장을 합니다.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초반에 2:0으로 지고 있습니다. 실망하고 화가 나서 TV를 꺼버립니다. 더 시청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보니 3:2로 역전승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재방송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여전히 2:0으로 우리 편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같으면 실망하고 화가 날텐데 이전과는 달리 마음이 느긋하고 편안합니다. 왜냐하면 3:2로 이긴다는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결과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고 두려움이 없고 긴장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과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자유함입니다. 내가 내 운명의 사실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내 운명이 가는 길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평안함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자유입니다.
우리교회가 몇 주 전에 만일을 대비해서 화재 경보훈련을 했습니다. 실제로 화재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가정하고 재난 대피훈련을 한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경보가 울리자 1,500여명이 모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탈출하는데 10여분이 걸렸습니다. 질서정연하게 10여분 만에 무사히 건물 밖으로 피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훈련을 도와준 소방관이 말하기를 이것이 실제 상황이었다면 30여분이 훨씬 넘게 걸렸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상황일 때는 모두 당황해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냉정함을 잃고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다가 넘어지고 허둥대다가 사고가 발생하여 평소보다 시간이 더 지연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당황함 때문에 화재사건이나 재난 사건에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이 두려움이고 불안이고 당황함입니다. 몸에 이상이 발생한 것도 문제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함과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이 매사를 꼬이게 하고 문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불안이나 걱정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영적 안정이고 평안함이고 자유함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자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부르시고 왜 구원하셨습니까? 그것은 내 값을 발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 이 영적자유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자유를 상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13절)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죄를 짓게 되면 이 자유함을 곧바로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도 자유를 남용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존중해야 하고 잘 지켜야 합니다.
신분의 변화
13절을 보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우선 신분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격이 달라집니다. 신분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신분이 높아지면 내 값이 달라지고 내 위치나 내 존재감이 커집니다. 그래서 신분이 높아지면 먼저 책임감이 느끼게 됩니다. 의무감도 발생하고 할 일도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앎으로 가장 크게 달라지는 것이 이 신분의 변화입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아갈 때는 별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면 이전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장로가 되었을 때는 무한한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책임감은 누가 강요해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분이 높아지는데서 주어지는 책임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책임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섬김의 삶입니다. 본문은 “너희는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 그리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힘써 할 일은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부르신 이유는 이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섬기라는 말입니다. 장차 우리는 모두 종말 때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그 질문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 얼마나 성공했느냐“하는 질문이 아닐 것입니다. 그 때는 “얼마나 섬겼느냐, 그리고 어떻게 섬겼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때의 질문에 잘 대답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부름 받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섬기는 삶의 이유
그러면 성경이 이렇게 섬김의 삶을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고 자유해졌으니 이제는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사람 어느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였어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는 누군가 섬기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섬김의 손길을 통해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섬김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섬겨야 할 이유는 그 삶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섬김의 삶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모를 때는 자신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차원에 머물렀고 자기를 위한 조건만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했습니다. 모든 삶이 자기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를 만났고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눈을 뜨게 되어 진리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전 껏 자신이 추구해왔던 삶이 다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눈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조한 말씀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헌신하라, 섬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섬김의 삶은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섬김의 삶은 십자가 정신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섬김의 정신이고 사랑의 정신입니다. 이 십자가 정신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그 정신은 진정으로 예수와 하나가 될 때 주어지고 발휘될 수 있습니다. 지식신앙이나 모태신앙이나 흉내 내는 신앙으로는 절대로 이 정신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 십자가 정신이 표현된 곳이 여러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나타나는 공통점 한가지는 그들이 진정 예수와 연합된 사람들이었고 영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일 때 그 정신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양화진에 가보면 선교사들의 묘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묘가 있습니다. 그는 을사보호조약 이후 한국 독립을 위해 뛰어 다녔던 선교사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이 땅에서 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충남 서해안 도서지역을 순회하던 중 물에 빠진 소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서슴없이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거기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물에 빠져 시체도 찾지 못한 채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 앞에는 시신 없이 묘비만 서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내 민족도 아니고 내 나라도 아니고 내 친척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기적을 연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저 위에 높은 곳을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와서 우리를 섬기고 자신의 삶을 다 바치는 헌신의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는 이들의 섬김과 사랑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섬김의 삶입니다. 주님은 그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에 순응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