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목許穆의 <태백산기> 소고
2023.10.27. 윤순석
허목의 <태백산기>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상충하는 점이 있어 살펴봤다.
太白山 新羅北嶽. 文殊,大朴,三台,虞甫,虞檢,摩羅邑白山 皆大山. 蟠據東暆,眞番之域. 太白,文殊最高大. 北連頭陀,普賢. 東極滄海 積翠六七百里. 文殊絶頂皆白礫, 望之如積雪. 山有太白之名以此云.
미수 허목의 문집인 <미수기언>중의 <태백산기> 시작부분인 윗글을, 2006년에 한국고전번역원 소속 학자 ‘김내일(순조 일성록도 해석한 분임)’씨가 번역한 글에서는 아래와 같이 해석되어 있다(이하 ‘한국고전번역원’이라 한다).
태백산은 신라 때의 북악北嶽이다. 문수文殊ㆍ대박大朴ㆍ삼태三台ㆍ우보虞甫ㆍ우검虞檢ㆍ마라읍摩羅邑 백산白山이 모두 큰 산인데, 동이東暆와 진번眞番 지역을 점거하고 있다. 태백산과 문수산이 가장 높고 큰데, 북쪽으로 두타산頭陀山ㆍ보현산普賢山과 이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뻗쳐 있어 푸른 산이 6, 7백 리나 된다. 문수산 정상은 모두 흰 자갈이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쌓인 것 같으니, 태백이란 명칭이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부분을 전前홍익대 최강현 교수의 <미수허목의 기행문학>(신성출판사 2001.12.31.일 발행)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이하 “최강현 교수”라 한다).
태백산은 신라 때의 북악北嶽이다. 문수, 대박, 삼태, 우보, 우검, 마라읍(摩羅邑:여기서는 지금의 제주도를 가리킴)의 백산(白山:지금의 한라산)은 모두 큰 산이다. 동이(東暆:樂浪)와 진번(眞番:그 위치에 관하여 여러설이 있으나 필자는 요동설을 지지한다)의 땅에 자리잡고 서리어 있다. 그중에서 태백산과 문수산이 가장 크고 높다. 북쪽으로는 두타와 보현이 이어 있으며, 동쪽으로는 더할 수 없이 푸른 바다가 적취(積翠:지금의 부산직할시 동래구에 있었던 정자)까지 6~7백리(240~280km)이고, 문수의 절정은 모두가 하얀 자갈돌들이어서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이여 있는 듯하다. 이 산이 태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원문이 「태백산과 문수봉이 최고 크다太白文殊最高大」라고 비교급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강현 교수의 해석은 잘못된 것 같다. 즉, 허목이 태백산을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태백산과 관계없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언급하고 나서 「지금까지 언급된 산중에서 태백산과 문수봉이 제일 크다라고 했다」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동이東暆니 진번眞番이니 하는 것은 한사군漢四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의 지방도시인 군현 단위의 지역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진번은 진주 즉 삼척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최강현 교수의 해석은 규모를 너무 크게 잡았다.
또 東極滄海 積翠六七百里를 한국고전번역원은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뻗쳐 있어 푸른 산이 6, 7백 리나 된다’라고 하고 있고, 최강현 교수는
「동쪽으로는 더할 수 없이 푸른 바다가 적취(積翠:지금의 부산직할시 동래구에 있었던 정자)까지 6~7백리(240~280km)이고...」
라고 번역하고 있다. .
최강현 교수는 6~7백리는 40km가 백리이니 단순하게 40×7=280km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부산쯤의 원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 싶어서 부산동래구 소재 정자이름까지 생각한 것 같으나, 적취積翠의 주어는 ‘창해’가 아니라 ‘태백산’이고 태백산의 푸르름의 ‘길이’가 아니라 푸르름이 쌓인 공간 곧, 태백산의 삼림‘면적’을 나타내는 단어다. 혹 조교가 글을 쓰고, 최강현 교수가 나중에 겉핥기식으로 감수 한번 한 것이 그대로 출판된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이 옳다.
사실 번역도 번역이지만 이 지역에 살면서도 삼태산이나 우검산 그리고 마라읍이 어딘지, 마라읍의 백산은 또 어딘지.,, 아마 삼척 도계 마읍리가 ‘마라읍’이 아닌가 싶고, 백병산이 백산이라고 하면 옛날 마라읍의 영역은 철암 백산 통리지역과 도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지 않았나 싶다. 또 진번은 진주주로 삼척이라고 대충 짐작은 하지만 동이는 어딘지.... 너무나 생소한 지명들이라 이글을 번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궁금하다. 시간을 두고 추적해 볼 생각이다.
글은 문수봉의 유래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지는데 이 부분에서는 최강현 교수나 한국고전번역원이나 기타 자료에서나 해석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즉,
문수봉 정상은 모두 흰 자갈이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쌓인 것 같으니, 태백이란 명칭이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文殊絶頂皆白礫,望之如積雪. 山有太白之名以此云.
로 새긴다.
다시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는 큰 차이가 난다.
孟春日在營室 寒日滌凍 塗上巾衣. 俯瞰杳冥 西南望太白 雪山塞空. 絶頂埋雲霧 不可見雲霧下大麓 皆深山沍陰 其下百石坪. 山上有太白祠 太白南八十里覺化 太史所藏. 山出蔘,苓,芎藭,當歸,群藥,蔓生柏,瑰材,紫檀,桑實三寸. 誌言東海三寸椹此也.
위 문장을 한국고전번역원은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맹춘孟春에 해가 영실성營室星에 있어 추운 날씨가 변하여 얼음이 풀렸으므로 건의령巾衣嶺에 올라 아득한 곳을 굽어보고 서남쪽으로 태백산을 바라보니 눈 덮인 산이 하늘을 막고 있으며 정상은 운무雲霧에 가려서 볼 수 없었다. 운무 아래 넓은 산기슭은 모두 깊은 산이어서 꽁꽁 얼어 있고, 그 아래는 백석평百石坪이다. 산 위에 태백사太白祠가 있으며, 태백사 남쪽 80리 지점에 각화사가 있는데 사책을 보관하고 있다.
태백산에서는 인삼, 복령, 궁궁, 당귀, 군약, 만생백, 괴재, 자단, 세 치의 오디가 나오는데, 지리지地理誌에 동해의 삼촌심三寸椹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최강현 교수는
초봄 어느날 강원도 감영監營의 방에 있는데 추운 날임에도 얼음이 녹아 길을 가는 나그네의 의관을 씻어 내리는 듯하였으며, 아래를 굽어보면 까마득하기만 하였다.
서남쪽으로 태백산을 바라보면, 설산이 허공에 가득차게 막히어 있고, 그 절정은 구름과 안개속에 묻히어 있어서 운무의 밑에 있는 큰 산기슭을 구경할 수가 없으며, 모든 깊은 산은 얼어있다. 그 산 북편 아래쪽은 백석평百石坪이다.
이 산 위에는 태백사太白祠가 있고, 태백산 남쪽 800리(320km)에는 각화(覺化: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태백산에 있는 覺華寺)가 있으니, 태사(太史:歷史書 조선시대 태백산사고를 이름)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이 산에는 인삼과 복령과 천궁과 당귀 같은 여러 가지 약재들과 넝쿨이 자라고 잣나무와 괴재(瓌材:구슬을 만들 옥돌)와 자단(紫檀:향나무의 한가지)과 상실삼촌(桑實三寸:크기가 약 10cm되는 뽕나무 열매. 곧 큰 오디)들이 산출된다.
『지지地誌』에서 “동해의 삼촌침(東海三寸椹:동해산 10cm크기의 오디)”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해석했다.
또 김정경 편저, 배재홍 교수의 번역본인 <삼척향토지>(삼척시립박물관 2016.3월 발간, 이하 “배재홍 교수본”이라 한다)에서 이 부분을
이른 봄에 영실營室에 있으면서 날이 추워 길이 꽁꽁 얼었을 때 건의巾衣를 걸치고 아득히 서남쪽으로 태백산을 바라보면 흰 눈이 하늘을 막았고, 정상엔 운무가 자욱하여 볼 수가 없다. 운무 아래 큰 산줄기는 모두 깊은 산과 울창한 숲이다. 그 아래가 백석평百石坪이고,...
라고 하고 있는데,
「이른 봄날에 삼척 감영에서 있자니孟春日/在營室」로 해석하느냐, 「이른 봄, 해가 영실성에 있어서孟春/日在營室」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확 달라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윗 글에서 ‘영실營室’은 서양별자리로는 폐가수스 자리, 우리별자리로는 영실營室 즉, 영수室宿라는 별자리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영실성營室星은 여름이 끝나는 처서處暑쯤의 저녁하늘 동쪽에 떠있는 별이지 눈이 막 녹는 봄철에 나오는 별이 아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른 봄날 감영의 방에 있자니...孟春日/在營室... 」
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구절인 「한일척동 도상건의寒日滌凍 塗上巾衣」가 「추운 날씨가 풀리고 얼음이 녹았기에 길을 나서 건의령에 올랐다...」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여기서 「上巾衣 俯瞰杳冥~」부분이 학자들에게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최강현 교수의 해석은 애시당초 앞부분 「寒日 滌凍 / 塗上巾衣...」(영인본 원문에는 塗/上으로 끊어 읽는 표시가 있긴 하지만 구두점을 잘못 찍은 듯함)를 「寒日 滌 / 凍塗上巾衣...」로 끊어 읽는 탓에
「추운날 얼음이 녹아 길가던 나그네의 의관을 씻어 내리는 듯 하였으며, 아래를 굽어보면 까마득하기만 하였다」
라는 무리한 해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배재홍 교수본에서도
「날이 추워 길이 꽁꽁 얼었을 때 건의巾衣를 걸치고 아득히 서남쪽으로 태백산을 바라보면 흰 눈이 하늘을 막았고...」
라고 하여 해석상 최강현 교수와 똑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건의를 옷으로 해석하는 부분에서 대해서 검토해 보자면,
1660년은 효종 사후에 인조의 계비 즉,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을 두고 예송논쟁이 일어나는 상황이였고, 예송논쟁에서 패배한 허목이 1660년10월에 삼척부사로 좌천된 상태라서 「건의巾衣」를 국상에 따른 복제를 염두에 둔 용어인지는 복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판단할 수가 없어서 확신은 할 수 없기에 의복종류로 해석될 여지도 있겠다 싶지만,
국상이 나면 야외에 나들이 하는 지방관료들도 모두 상복을 입었던 것인지, ‘상복, 복상’등의 용어를 두고 상복을 입었다는 것을 일상적인 문장에서 ‘건의巾衣’란 단어로 표현하는 지, 그리고
건의巾衣 앞에 ‘오를 등登’의 의미가 있는 ‘상上’을 쓴 것과,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위치 정도라야 몸을 구부려 내려다본다는 뜻의 ‘부감俯瞰’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인데,
「까마득한 산봉우리들을 구부려서 내려다 보고俯瞰杳冥」부분을 배재홍 교수는 「구부려서 내려다 본다는 ‘부감俯瞰’」은 해석하지 않고 ‘아득히’라는 단어로 뭉퉁거려서 넘어갔고, 최강현 교수도 「아래를 굽어보면 까마득하기만 하..」였다고 해석하는 점에 착안하여 살펴보면,
배재홍 교수나 최강현 교수나 모두 해석하기를, 허목이 감영안에 앉아있는 상황으로 봤으니, 감영에서 어디를 굽어보고 내려다볼 곳이 있는지! 있어 봤자 대청에서 마당을 내려다 볼 정도일텐데 마당을 ‘내려다보면서 뭐가 까마득하다’고 느낀 것인지...
이런 점에서 ‘건의’는 옷이 아니라 지명이 될 수 밖에 없고, 허목은 감영에 있다가 날씨가 풀려서 건의령까지 올라갔다는 해석이여야 한다.
그래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건의령巾衣嶺에 올라 아득한 곳을 굽어보고 ...
라고 한 해석이 가장 무난한 해석이다. 이하 건의령에서 태백산쪽을 바라본 경관에 대한 설명은 여러 책마다 대동소이한데, 최강현 교수는 태백산에서 각화사까지의 거리 80리를 800리로 오독한 것 같다.
이어서
薩奈淨巖之水北流入太陰江, 下虞甫九沙屹 下流爲五十川 東流百餘里入海.
黃池在虞甫西十里 與山中之水合而西南流 過百石坪二卜里 穿山石南流爲洛東源曰穿川. 前古置祭田水圼祀之.
의 구절 중에서 앞부분 「살내정암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 태음강에 들어간다 ....... 오십천이 되어 동쪽으로 백여리를 흘러가서 동해로 들어간다 薩奈淨巖之水北流入太陰江, 下虞甫九沙屹 下流爲五十川 東流百餘里入海」는 문장을 해석을 위해 일단 구분해보자.
①정암사 물이 북쪽으로 흘러 태음강으로 들어간다.薩奈淨巖之水北流入太陰江
② ?? 下虞甫九沙屹 下流
③오십천이 되어 동쪽으로 백여리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爲五十川 東流百餘里入海.
앞의 학자분들이 위 ①~③까지를 각각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보자
한국고전번역원은
살내 정암의 물이 서북쪽으로 흘러 태음강으로 들어가며, 우보 구사흘로 내려와 아래로 흘러서 오십천이 되고, 동쪽으로 백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해석하여 ‘하우보下虞甫’의 하下를 ‘우보로 내려갔다’는 자동사로, ‘태음강’을 주어로 처리했다. 즉, ①번이 ②번의 상류이고, ③번은 ①②번의 하류가 된다. 따라서 살내정암의 물은 구사흘 계곡물이고 태음강이면서 오십천이고 마지막으로 동해로 흘러 나간다.
최강현 교수의 해석은
살내정암薩奈淨巖의 물은 서북으로 흘러 태음강太陰江으로 들어가니, 그 아래가 우보 구사흘九沙屹이며, 그 하류가 오십천이고, 동쪽으로 100여리(40여km)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해석했는데, ②와 ③은 동일수계이지만 ①과는 동일수계인지 아닌지 모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허목이「(태음강에서) 그 아래가 ‘우보구사흘’이며 그 하류가 오십천이고...」라고 할 것이라면 「..太陰江 / 其下虞甫九沙屹下流爲五十川」라고 알기 쉽게 기술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반해, 어렵고 애매하게 번역원본의「太陰江 / 下虞甫九沙屹下流爲五十川」이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배재홍 교수본에서는
살내정암薩奈淨巖의 물이 서북으로 태음강太陰江에 흘러들고, 밑의 우보虞甫의 구사흘九沙屹에서 아래로 흘러 오십천이 되고 동으로 1백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하여 최강현 교수의 해석과 비슷하지만 「밑의 우보虞甫의 구사흘九沙屹」이라고 명사화하여 번역한 점에서는 고심이 많았던 듯하다.
문제는 「하우보~下虞甫~」의 하下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이다. 동사로 보니까 해석이 이상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상우보上虞甫’의 반대 즉, 고유명사로서의 「하우보下虞甫 : 상하 우보산중 ‘하우보산’」라고 보면 가능하다. 「하우보산 구사흘봉 하류는下虞甫九沙屹下流 (爲五十川..오십천이 되고..)」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래쪽’이라는 부사로 볼 수도 있긴 하다. 그럴 경우에도 건의령에서 봤을 때의 ‘아래쪽’이긴 하지만 건의령 현장에서 아래쪽이라는 의미가 더 부각되는 듯 하다. 즉, 「‘허목’이 주어가 되어 건의령에 서서 아래쪽인 남쪽에 있는 우보산을 보면서 ‘저기 우보산 구사흘골짜기의 발원수가 오십천 상류구나’」하는 뉘앙스의 해석이 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장은
黃池在虞甫西十里 與山中之水合而西南流 過百石坪二卜里 穿山石南流爲洛東源曰穿川. 前古置祭田水圼祀之.
이다.
최강현 교수는 원본을「....過百石坪二卜里....」라고 ‘이복리二卜里’로 판독하여 해석했고, 한국고전번역원과 배재홍 교수본에서는 「....過百石坪二十里....」라고 하여 ‘이십리二十里’로 판독함으로써 번역원판이 각각 다르다. 영인본을 구해서 대조해봤더니, 명확한 ‘복卜’자다. ‘십十’자로 판독한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번역자가 면적단위로서의 ‘복卜’자의 개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최강현 교수의 ‘이복리’가 맞다.
벼 한줌을 일파壹把라고 하고, 열파는 한단 일속壹束이고, 열속은 한짐 일부壹負다. 부負를 복卜이라고도 한다. 이복리는 벼 두짐 정도 생산되는 동네, 논이 거의 없다시피한 동네라는 말이다.
황지는 우보 서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산중의 물과 합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백석평과 이복리를 지나고 산의 바위를 뚫고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의 근원이 되니, 이를 천천이라고 한다. 옛날에 제전을 두어 홍수나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에 제사 지냈다.
라고 해석되고 그 외에는 한국고전번역원이나 최강현 교수나 배재홍 교수본 책에서나 내용은 비슷하다. 한국고전번역원이나 배재홍 교수본은 ‘이복리’를 ‘이십리’로 봤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었다.
황지는 우보 서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 백석평 20리를 지나 .... 산의 바위를 뚫고서 ...... 옛날에 제전을 두어 홍수나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에 제사 지냈다.
한편, 삼척부사 허목의 <척주지>는 1662.6월 상순에 발간되었고 <태백산기>는 그보다 앞서 그가 1660년10월 부임 다음해인 1661년 초봄인 듯하다. 전국 안가 본 곳 없을 정도로 역마살이 낀 허목이 한해를 건너뛸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의 글 중 백석평 부분에 관한 내용이 다른 작품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보인다. 즉,
황지는 우보 서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산중의 물과 합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백석평과 이복리를 지나고 산의 바위를 뚫고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의 근원이 되니, 이를 천천이라고 한다.
라고 하여 ‘황지연못물이 백석평을 지나는 것’으로 단정했던 기술이 1662년에 편찬된 <척주지>(배재홍 옮김, 삼척시립박물관 2001.04.30.초판발행본을 인용함)에서는
황지의 물은 산중의 물과 합해져서 남쪽으로 30리를 흐르면서 천천을 이루는데 냇물이 작은 산을 뚫고 지나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의 원류가 된다. 黃池之水 與山中之水合而南流三十里 爲穿川 川水穿過小山南 爲洛東源
라고 ‘황지연못물이 백석평 지난다’는 내용이 누락되었고,
느릅령에서 서쪽쪽 십리에 황지가 있다, 서남쪽 오리에 백석평이 있다. 또 서남쪽으로 이십리를 가면 천천이다. 自楡峴西十里黃池 西南五里百石坪 又西南二十里穿川
라고 하여 A(B+C+D)의 해석 곧, 느릅령에서 서쪽 십리에 황지가 있고 느릅령에서 서남쪽 오리에 백석평이 있다. 그리고 또, 느릅령에서 서남쪽으로 이십리를 가면 천천이다. 라는 해석이 가능한 문투로 바뀌어 졌다. (자세한 내용은 윤순석의 2023 백석연못 소고 참조)
이로부터 후대에 출간된 삼척군지나 향토지, 기타 태백산과 황지를 다녀간 다종다양한 여행기에서도 황지연못물이 백석평을 직접 지난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 <태백산기>에 대한 상충되는 해석을 살펴봤다.
마지막의 구절은 영인본에서 확인해보면, 앞의 <태백산기> 글이 한줄 용량18자 공간에 18자가 들어갔는데 비해, 이 마지막 구절은 <태백산기>마지막에 끝에 붙어 있긴 하지만, 한줄18자 용량의 각각의 줄에 앞의 한칸을 띄어쓰기하여 17자만 들어가게 함으로써 앞의 <태백산기>와 구별하고 있다.
내용상으로도 <태백산기>와는 전혀 관계없기에 마치 책장에 잘못 끼워놓은 삽입지 같다. 학자들이 해석할 때 이 부분을 제외하는 것은 이 때문인 듯 싶다. 내용은 한국고전연구원의 해석을 인용했다. 아래와 같다.
1672년 임자년 8월에 희중(希仲:윤휴尹鑴의 자)이 풍악산을 유람하려 할 적에 동계東界로 나와 일출을 구경하고 석록石鹿으로 나를 찾아와 조언을 구하기에, 독지지讀地誌와 동유박물東遊博物 600여 자를 지었고 글씨를 써서 주었다.
壬子八月. 希仲將遊楓嶽. 仍出東界觀日出過我石鹿求言. 作讀地誌 東遊博物六百餘言. 書贈.
- 이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