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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역설적 사랑에서 순연한 사랑으로
-김년균의 ‘사람’ 연작시집『숙명』을 중심으로
정 성 수
시작의 말
김년균 시인의 ‘사람’ 연작시집『숙명』은 지난 1960년대, 70년대와 달리 ‘연작시’가 귀한 현재의 한국 문단에서 일단 그 작업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하나의 주제, 혹은 소재를 다양하고 깊게 파고드는 연작시는 그 나름대로 중요한 시적 성취, 즉 시의 내용이나 기교의 지평을 넓히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 작 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김년균 시인은 그동안『장마』를 위시한 7권의 일반 시집 외에 5권의 ‘사람’ 연작시집『아이에서 어른까지』『사람의 마을』『하루』『오래된 습관』『숙명』등을 펴냈다.
근래엔 우리 한국 시단에서 한 권의 연작시집을 내는 일도 흔치 않은데, 김년균 시인은 수십 년 동안 하나의 소재, 즉 ‘사람’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소재를 선택, 지금까지 무려 5권의 연작시집을 계속해서 상재하고 있다. 이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 시문학사에서 귀하고 소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번의 연작시 작업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 대 사람 사이의 사랑과 신뢰에 대한 인간적 갈등과 그 극복의 길이 무엇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시로 쓴 인간의 극단적 자아비판이면서 동시에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라는 점에서도 그 내용상에 있어서의 특별한 의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시적 작업은 한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역설적 인간애를 위한 특별한 고통의 헌사, 또는 사랑과 희망을 위한 일종의 절망(?)의 축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김년균 시인은 이번 연작시집『숙명』에 수록된 ‘시인의 말’에서 ‘사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인격이 주체인 동물. 가장 이지적이고 도덕관념을 갖춘 만물의 영장. 가슴에 만 섬의 생각을 지닌 이상적 존재.
이렇듯 많은 표현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상스럽게도 말을 줄여왔다. 누워 침 뱉는 격이란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람은 어쨌든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주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도 사람답게 바로잡히게 될 것이고, 제 역할을 다할 때, 사람의 의미나 가치도 더욱 뚜렷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지니고 있는 영혼의 긍정적인 면은 물론 부정적인 면까지 모두 벗겨놓아야 진정한 의미의 사람다운 사람의 참모습이 탄생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사람이 사람답게 바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제대로 열리게 될 것이라는 뚜렷한 주제의식을 표출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 속에서의 ‘사람’에 대한 일부 부정적 표현은 바로 ‘사람’에 대한 긍정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역설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년균 시인은 자신의 ‘사람’ 연작시를 통해 사람에 대한 부정의 길에서 어떻게 긍정의 길로 다가서게 되는지 그 고통과 갈등과 연민의 과정을 직접 살펴보겠다.
주제를 위한 전주곡
먼저 주제를 논하기 전에, 연작시집『숙명』중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일단의 보조 주제랄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시집 전체의 주제와 연관된 시들의 일부를 살펴보는 것도 큰 주제에 이르는 이 시집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또 하나의 의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첫째「눈」「머리」「가슴」「발」「손」등 ‘사람의 육체’를 노래한 시들은 ‘사람의 정신’을 ‘신체적 특성’에 비유해서 ‘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괴리된 별개의 것이 아님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의 시「눈」의 일부를 살펴보자.
‘눈은 안 보인다./눈은 세상바닥 안 간 곳 없이,/불철주야 떠돌아다녀도/돈이나 권력밖에 안 보인다.//장독 안에 숨겨둔 정수물을 떠다가/몸 씻듯 문지르며 티끌 없이 씻어 내어도/눈은 더럽고 추한 것밖에 안 보인다.//...
이 시에서의 눈은 ‘돈이나 권력’, 또는 ‘더럽고 추한 것밖에’ 보지 못한다. 말하자면 눈이 정상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사물이나 사회 현상의 정체성 확인과 관찰이 사라져버린 잘못된 눈, 즉 잘못된 정신세계의 상징이다.
그런가하면 시「머리」에서는
‘......머리는 이상하여라./언제나 꿈꾸며 살고자 한다./살아있는 동안은 몸이 찢어져도,/눈이 빠져도, 발목이 부러져도,/오로지 꿈꾸며 살고자 한다.’
즉 ‘사람’은 그 어떤 극한 상황에 부딪쳐도 ‘오로지 꿈꾸며 살고자 하'는 ‘머리’를 지닌 이상적 존재라는 것을 일부 육체의 상징화로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준다.
또한 시「가슴」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가슴이 맑은 날,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면/바다의 물결은 금세 황홀한 금빛이 돌고,/부두엔 출항하는 배들이 줄을 섭니다./내 가슴은 초록빛 바다,/잔잔한 물결 위로 꿈 실은 배들이/가득 떠있습니다.’
이 시에서도 신체의 일부인「가슴」은 ‘사람의 정신’에 대한 상징화로 탈바꿈한다. ‘내 가슴은 초록빛 바다’로 하나의 긍정적 세계관을 노래한다.
‘......발은 길을 가려고 살아있다./길은 발을 위해서 남아있다.’
라고 노래한 시「발」역시 그 어떤 삶의 목적지에 다다르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에 대한 긍정적 상징화 작업이다.
시「손」에서는,
‘......손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숨어있다./손에는 흉측한 칼과 도끼가 숨어있다./......어디 그뿐이랴./손에는 날으는 새가 숨어있다./손에는 무궁한 우주가 숨어있다.’
라고 신체의 일부를 통해 ‘사람의 양면성’, 즉 파괴와 창조를 노래한다. 따라서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함께 지닌 존재로서의 ‘사람’을 노래함으로써 이미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즉, 위의 시들은 ‘사람’의 신체 부위를 종합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사람’의 본질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인간적 본질을 향한 구체적 천착이다.
그런가하면 시「꼬리」「꾀」「돌멩이」「말(言)」「짐」「틈」등의 시들은 인간 정신 속에 내재된 삶을 조명하고 파헤침으로써 잘못된 인생에 대한 하나의 잠언적 성찰을 보여준다.
시「꼬리」에서는,
‘......꼬리를 비웃지 말라./몸통이 아니라고 얕보지 말라./꼬리는 팔뚝보다 세다./꼬리는 가슴보다 깊다.//꼬리는 두려움의 시작이다./꼬리는 몸의 끝, 마음의 끝,/ 꼬리는 시간의 끝, 꿈의 끝,/꼬리는 어느 곳이든 끝에 있지만,/그곳에서 거대한 힘은 폭발한다.//...’
이 ‘꼬리’는 물론 ‘마음의 꼬리’이다. 그런데 그 ‘꼬리’는 긍정적 의미의 꼬리라기보다 부정적 의미의 꼬리이다. ‘순수한 사념’이 아니라 일종의 ‘계산된 사념’이다.
화자는 ‘꼬리’를 ‘몸통이 아니라고 얕보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꼬리는 두려움의 시작이다.’라고 갈파한다. 또한 ‘꼬리는 어느 곳이든 끝에 있지만,/그곳에서 거대한 힘은 폭발한다.//......라고 ‘꼬리’의 숨은 힘을 경계한다.
시「꾀」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꾀는 욕심을 낳고, 욕심은 오만과 독선을 낳고,/독선은 간교함을 낳는다 하는데, 큰일이다/......무섭구나 무서워!/더럽구나 더러워!/......’
‘사람’의 ‘꾀’는 단순히 그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한 일시적 방편일 뿐만 아니라 그 ‘꾀’가 ‘욕심’의 뿌리가 되고 ‘욕심’은 ‘오만과 독선’의 뿌리가 되고 ‘독선’은 ‘간교함’의 뿌리가 된다. 최초의 ‘작은 꾀’가 마지막의 ‘간교함’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일종의 잘못된 삶 뒤돌아보기이다.
시「돌멩이」를 살펴보자.
떡이 돌멩이가 되었다./안 먹고 안 만지고 놔두니, 바람이 들어/단단한 돌이 되었다.//돌멩이는 본디 그렇게 되는가./ 누군가 만져주고 살펴주지 않은 것은/모두 그렇게 되는가.//버려진 휴지처럼 세상을 떠돌다가/오늘 아침,/내 집을 찾아온 친구 있다.//돌멩이를 등에 몇 섬
은 지고,/몇 뭉치는 손에 쥐고,/비지땀 흘리며 껄껄 웃는다.//...
‘떡’을 노력의 상징,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보석 같은 시간의 상징, 또는 사람에 대한 열정의 상징, 그 어느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떡’을 ‘만져주고 살펴주지 않’으면 ‘단단한 돌’이 되어 쓸모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떡’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휴지처럼 세상을 떠돌다가/......돌멩이를 등에 몇 섬은 지고,/몇 뭉치는 손에 쥐고,/비지땀 흘리며......찾아온 친구......’
이 시 역시 잘못된 삶에 대한 일종의 잠언적 경계의 노래이다.
다음엔 시「말(言)」을 살펴보자.
‘......말은 말마다 바퀴가 달려있다./보이지 않는 바퀴가 데굴데굴 굴러서/말은 단숨에 천 리도 뛰어넘는다.//말은 귀신처럼 변신을 잘한다./꽃밭에 가면 말은 꽃이 되고,/돌밭에 가면 말은 돌이 된다./산에 오르면 말은 산이 되고,/바다에 가면 말은 엎어지고 뒤집어지는/파도가 되어, 세상을 어지럽힌다.//......’
‘사람’의 ‘말(言)’에 대한 경종이다. 말은 ‘변신을 잘’해서 ‘꽃밭에 가면...‘꽃’이 되고’ ‘돌밭에 가면......‘돌’이 된다.’ ‘산에 오르면...산이 되고’ ‘바다에 가면 엎어지고 뒤집어지는/파도가’ 된다. 이 시 역시 잠언적이다.
이번엔 시「짐」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웃집 소문난 노랑이 할아버지가/평생 쌓아놓은 욕심을 버리고,/아예 숨조차 놓았는지,/영구차에 실린 짐이 되어/세상 밖으로 쫓겨난다.//짐은 해를 잡아먹는 어둠,/짐은 목숨을 빼앗는 전염병,/짐은 흉계를 꾸미는 악질,/짐은 하늘이 내버린 쓰레기.//오늘은 짐이 누구의 등에 오를까./누구의 두렵고 괴로운 것이 되어/꿈과 희망을 무너뜨릴까.
이 시에서의 ‘짐’은 ‘해를 잡아먹는 어둠’이고 ‘목숨을 빼앗는 전염병’이며 ‘흉계를 꾸미는 악질’이고 ‘하늘이 내버린 쓰레기’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니고 사는 ‘욕심의 짐’, 즉 ‘허욕의 짐’을 내려놓으라는 충언의 메시지이다.
시「틈」은 어떤가.
‘방안의 창문 사이, 책상의 서랍 사이......장롱의 옷가지 사이, 부엌의 그릇 사이......담장 너머의 손댈 수 없는 미궁 사이.//그 사이에 숨겨진 낡은 물질, 끊어진 줄, 잘려진 생각......그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숨어서 태평스레 누워있다......//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불안하다./숨은 곳에 누워 날마다 음모를 꿈꾸다가/어느 날 벌떡 일어서 세상거리에 나타나/무슨 행패를 부릴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소외된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국외자들은 어디서 희망과 꿈을 찾아야 할 것인가. 그들 때문에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불안은 누가 해소해줄 것인가......!
다음엔 시「객석(客席)에서」「무늬」「종점에서」등 ‘사람’의 삶을 객관적, 혹은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시선을 살펴보자.
먼저 시「객석(客席)에서」를 보도록 하자.
연극을 보려고 왔습니다./밀려왔다 밀려가는 거친 세파를 헤엄쳐 가는/사람들이 그리워서 왔습니다./돌처럼 흔해도 별처럼 높이 하늘에 떠올라/반짝이고자, 목숨 걸고 꿈틀대는/저들의 세상살이가 보고 싶어 왔습니다.//한 치쯤 시간을 잘라다 눕혀 놓은 아늑한 공간,/누군가 무릎 꿇고 버린 꽃들이 바람에 휘날리며/허둥지둥 떠다니고, 길목 어디선가/낯선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고 소곤대며/어젯밤 주머니에 넣어둔 이야기를 꺼내줍니다./아슬아슬하게 굴러온 세월의 바퀴에 치여/찢어진 저들의 옷가지들이 춤추며 펄럭입니다//구경꾼의 눈빛이 주위를 환하게 비춥니다./너도 가고 나도 가는 길을 다 아는 탓인지,/길 너머 또 다른 길이, 구천에 이르는 길이/눈감으면 환히 들여다보이는 탓인지,/저마다 열이 나서 맥박이 솟아오릅니다./......한편엔 개똥 같은 거짓말들이 득실거리고/또 한 편엔 순정한 피가 굽이쳐 흐르는데,/어느 곳도 모른 채 문밖으로 뛰쳐나와/막막한 모래밭에 숨통을 걸어놓은 사람들,/저들의 세상살이을 보려고 왔습니다./허리띠 풀어놓고 웃으려고 왔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여러 사람들의 ‘연극’을 보기 위해 객석(客席)에 앉아있는 관객 중의 한 사람이다.
무대는 지구 위의 ‘세상’이고 화자는 어쩌면 외계인, 또는 신일지도 모른다. 즉 주관의 객관화이다. 화자는 마치 신처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사심없이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일종의 자기 성찰이다.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는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가장 적절한 하나의 좋은 수단이자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되면 화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삶의 희로애락은 한 편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화자는 슬픔과 허무를 넘어서서 ‘허리띠 풀어놓고 웃’을 수가 있다.
시「무늬」를 살펴보자.
‘늦은 가을, 서산마루에 해질 무렵,/낮게 내려온 하늘로 기러기들이 줄지어/어디론지 날아가고 있다./......겉으론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은 만큼 더욱 선명하게/무늬를 남겨놓고 있다. 살아온 만큼,/또는 살아갈 만큼의 무게로.//......당신 가슴에 남은 무늬는 더 큰 응어리다./시간이 느릴수록 더욱 잘 자라는/돌덩이 같은 응어리다./긴 세월 견뎌온 고난의 표적이다.’
이 시에서「무늬」는 ‘가슴에 남은 돌덩이 같은 응어리’, 즉 ‘긴 세월 견뎌온 고난의 표적이다.’
화자에 의하면 ‘사람’의 일평생의 자취는 ‘응어리의 무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아름다운 호수 위에서 너울거리는 작은 물결 무늬가 아니라 드넓은 바다 위에서 용솟음치는 사나운 파도 무늬이다.
시「종점에서」를 보자.
‘길이 막혀 교회를 못 간다./문명이 자라면/하늘가는 길도 놓친다.//바다에 누운 생각들이/밤새워 출렁거려도/물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줄기마다 비꼬인 서툰 세상./막장이다./삽질 한 번 못하고 주저앉는다./지나던 시간들이 되돌아서며/그럴 거라고, 껄껄 웃는다.’
이 시의 화자는 ‘길이 막혀 교회를 못 간다.’ 그런데 화자가 교회에 못 가는 것은 폭설이나 태풍 같은 대자연 상황 탓이 아니라 문명 상황 탓이다.
‘문명이 자라면/하늘가는 길도 놓친다.’ 이 싯귀절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문명은 ‘사람’과 ‘신’과의 교감까지 차단해 버리고 마는 것인가.
이럴 때의 문명은 희망이 아니다.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사라진 일종의 ‘종점’이다.
사람의 운명은 그야말로 갈 곳 없는 ‘막장’에 서있는 것인가. 정말 그런 것인가. 김년균 시인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 머나먼 시적 나그네길을 다시 떠나고 있다.
‘사람’에 대한 부정과 비판
‘사람’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불신과 비판으로 가득한 한국 시인의 시집을 나는 아직까지 『숙명』이외에 만나본 일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시집『숙명』은 내용 면에서 독창적이고 특별하다. 먼저 시「가면의 꽃」을 읽어보도록 하자.
‘당신은 참 기이합니다./당신은 모양만 화려할 뿐, 향기가 없습니다./당신은 숨결이 없습니다.//당신은 하늘보다 세상을 믿고,/의로운 사람보다 악한 사람을 따르며,/길을 거꾸로 걸어갑니다.//아무리 낯설어도 무릎 꿇고 손 비비는/비굴한 사람에겐 마음을 주고, 바르고/정직한 사람은 눈 부릅뜨고 쫓아냅니다.//돈을 보면 돈에 금방 미치고,/권력을 보면 권력에 납작
엎드리고,/여자를 보면 여자에 홀딱 반합니다.//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앞뒤 형편도 살피지 않습니다./겉과 속이 확연히 다릅니다.//그래도 명색이 꽃이기에/몸뚱이조차 불태워버릴 수는 없지만,/등 돌리며 침을 뱉습니다.//당신은 장미꽃이 아닙니다./망초꽃이나 쑥부쟁이꽃도 아닙니다./개똥처럼 버려진 달개비꽃도 아닙니다.//가면(假面)의 꽃입니다./위선(僞善)의 꽃입니다/무지(無知)의 꽃입니다.//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옵니다./가다가 가파른 언덕이나 돌밭을 만나거든/하얗게 부서져 날리십시오.’
-「가면의 꽃」전문
이 시는 시집『숙명』에 실린 맨 첫 번째 작품이다. 시집의 첫머리에 이 시를 내려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시인 자신이 이 시에 대한 시적 애착이 특별하다는 얘기이고,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한 그 나름의 주제적 의미 부여가 작지 않다는 얘기도 가능할 것이다.
시의 형식상으로는 시적 화자가 ‘당신(사람)’에게 전하는 말, 또는 서한 같은 일종의 독백체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은 다행히도 ‘기이한 사람’이다. 일반 사람, 즉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한 마디로 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사실은 이미 출발선상에서부터 절망적 ‘사람’에 대한 비판 속에 ‘사람’에 대한 희망의 길을 열어놓고 머나먼 나그네 길을 떠나고 있는 셈이다.
그 ‘기이한 사람’은 불행하게도 ‘모양만 화려할 뿐, 향기가 없’고 ‘하늘보다 세상을 믿고’
‘의로운 사람보다 악한 사람을 따르며,’ ‘길을 거꾸로 걸어가’는 사람이다.
꽃으로 비유하자면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가면(假面)의 꽃’이고 ‘위선(僞善)의 꽃’이며 ‘무지(無知)의 꽃’이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는 ‘이제 돌아갈 시간’, 즉 죽음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므로 ‘가다가 가파른 언덕이나 돌밭을 만나거든/하얗게 부서져 날리’라는 극단적 저주의 말조차 서슴지 않는다.
‘기이한 사람’, 즉 비인간적인 사람에 대한 불신, 부정적 인식이 이 시 전체 속에서 시적 변용을 거치면서 숨 가쁘게 소용돌이친다.
이 시의 주인공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시인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제 모델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유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없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경험, 또는 간접경험에 의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김년균 시인이 이 시에서 대부분의 시인들처럼 사람의 아름다운 영혼을 노래하지 않고 그와 반대로 사람의 추한 영혼을 대단히 강렬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노래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다음의 시「사람이 변하면」을 살펴보자.
‘가슴에 별 하나 없더라./몸 속에 피 한 방울 돌지 않더라./숨쉴 수 없는 돌이 되었더라.//어디서 깨달았을까./야욕이 넘치더라./누구에게 배웠을까, 오만방자하더라.//군살 돋은 손에 시퍼런 칼을 들고서/가시돋친 머리엔 굽어진 생각을 담고서/걸핏하면 남의 생살을 찢어놓고,/걸핏하면 남의 집에 흙탕물을 퍼부으며/행패를 부리거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이럴 수도 있더라, 사람이 변하면/잡귀가 되더라. 사람이 변하면/짐승이 되더라. 사람이 아니더라.//......’
-「사람이 변하면」부분
이 시의 주인공은 ‘몸 속에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듯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미가 전혀 없는 냉혈한이다. 생명체가 아닌 무생물, 즉 ‘돌’ 같이 차가운 사람이다.
그야말로 ‘야욕이 넘치’고 ‘오만방자’한 사람이다. ‘시퍼런 칼을 들고서’ ‘걸핏하면 남의 생살을 찢어놓고’ ‘걸핏하면 남의 집에 흙탕물을 퍼부으며/행패를 부리거나,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지극히 잘못된 사람이다.
‘사람’이 아니라 ‘잡귀’나 ‘짐승’ 같은 존재이다. 이 시의 화자에 의하면 ‘사람이 변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의 긍정적 변신이 아닌 부정적 변신의 결과는 우리에게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영혼의 실체가 되지 못하고 ‘가면(假面)의 꽃’, ‘위선(僞善)의 꽃’, ‘무지(無知)의 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잡귀’나 ‘짐승’으로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만다.
이제 ‘사람’은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마침내 사람으로서의 의의와 가치를 상실해버린 인간성 말살의 비극적 단계에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이 시는 그 ‘어떤 사람’을 향한 일종의 독백체 형식을 띠고 있다. 아마도 시「가면의 꽃」에 등장하는 ‘당신’과 같은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인간성 상실에 대한 하나의 경고장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더 이상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람’의 비인간적 타락의 끝은 어디인가.
그의 다른 시「거머리」를 보도록 하자.
‘여기 거머리를 보십시오./머리, 얼굴, 눈, 귀, 손, 발, 가슴,/쓸 만한 것은 다 없애버리고,/오로지 남의 것 훔쳐먹을 주둥아리와/남의 물건 채워둘 창자만 남겨두었습니다.//세상 눈치 볼 것 없이,/옳고 그름을 따질 것 없이,/남의 피를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호시탐탐 기회만 노립니다.//거머리는 잔인합니다./거머리는 흉악합니다./이와 비슷한 사람,/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거머리」부분
이 시에서는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한 마리의 흡혈동물인 ‘거머리’에 비유하고 있다. ‘남의 피를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사람, ‘잔인하고 흉악’한 ‘사람’을 다른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로 지칭한다.
이제 사람은 ‘가면의 꽃’에서 ‘잡귀’나 ‘짐승’으로 추락하다가 마침내 눈도 코도 귀도 없는
최하등 생명체 중의 하나인 ‘거머리’로까지 그 은유의 뿌리를 내리게 된다. 결국 ‘사람’이란 존재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남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이 얼마나 ‘사람’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적 표현인가.
‘머리, 얼굴, 눈, 귀, 손, 발, 가슴,/쓸 만한 것은 다 없애버리고,/오로지 남의 것 훔쳐먹을 주둥아리와/남의 물건 채워둘 창자만 남겨두’고 ‘세상 눈치 볼 것 없이,/옳고 그름을 따질
것 없이,/남의 피를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잔인하고 흉악한 사람’.
‘가면’과 ‘위선’과 ‘무지’를 넘어 ‘잔인하고 흉악한’ 존재로 사람은 더욱더 비인간적이고도 비이성적인 어둠의 나락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부끄럽고 추악한 악의 대명사가 된다.
그에게는 ‘오로지 남의 것 훔쳐먹을 주둥아리와/남의 물건 채워둘 창자’밖에 없다. ‘비인간적 사람’에 대한 사형선고이자 인간애에 대한 절망선언이다. 사람다운 사람의 위대한 영혼은 어디서도 그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사람에 대한 절망’을 인류에 대한 마지막 해답으로 삼고 말아야 할 것인가......? 마침내 ‘사람’의 ‘사람다움’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김년균 시인은 시집『숙명』속에서 그것을 부정한다. ‘사람’의 ‘사람다움’에 대한 극단적 부정에서 그것을 떨쳐내고 부정에 대한 부정의 길로 한 걸음 더 아름답게 다가선다.
‘사람에 대한 부정’에서 ‘연민’의 길로
‘비인간적 사람’을 ‘거머리’로까지 극단적으로 비유했던 작품 세계는 어찌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변모를 가져온다. 사람에 대한 부정에서 그 오른쪽 길, 즉 연민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년균 시인은 사람에 대한 긍정적 시선의 하나인 ‘연민’을 어떻게 노래하는가.
그의 시「길을 간다」를 살펴보기로 하자.
‘당신은 오늘도 길을 간다./어둡고 험한 길을 힘겹게 걷는다./어제는 울퉁불퉁 솟아오른 산을 올라가고/오늘은 무너져 내린 절벽을 내려온다./하루도 쉬지 않고 올라가고 내려온다.//당신은 오늘도 길을 간다./해묵은 세월의 모퉁이에서 아침엔 넘어지고/낮에는 부서지고 저녁엔 방안에 드러누워/밤새도록 잠 못 들며 아픈 몸을 매만진다./상처의 비늘이 처마 밑에 풀풀 날린다.//당신은 오늘도 길을 간다./아득한 허공에 풍선을 띄운다./하늘은 메마른 먼지와 물기 젖은 안개와/형체 없는 바람만 막막히 떠돌 뿐/꿈꾸는 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다.//당신은 오늘도 길을 간다./평생을 죄진 듯이 허리 굽히며 간다./병마에 둘러싸인 창자를 움켜쥐고/하루에도 골백번은 문밖을 들랑거리고,/지느러미도 없이 삶의 호수를 떠돈다.//......’
-「길을 간다」부분
이 시에서 ‘당신(사람)’은 ‘오늘도 길을 간다.’ 그 길은 환하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어둡고 험한 길’이다. ‘사람’은 그 ‘길을 힘겹게 걷는다.’ ‘어제는 울퉁불퉁 솟아오른 산을 올라가고/
오늘은 무너져 내린 절벽을 내려온다./하루도 쉬지 않고 올라가고 내려온다.’
‘해묵은 세월의 모퉁이에서 아침엔 넘어지고/낮에는 부서지고 저녁엔 방안에 드러누워/밤새도록 잠 못 들며 아픈 몸을 매만진다./상처의 비늘이 처마 밑에 풀풀 날린다.’
이 얼마나 한없이 고통스럽고 힘들고 쓰라린 삶인가. 사람은 ‘평생을 죄진 듯이 허리 굽히며 간다./병마에 둘러싸인 창자를 움켜쥐고/하루에도 골백번은 문밖을 들랑거리고,/지느러미
도 없이 삶의 호수를 떠‘도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사람’은 사실상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포옹해야 할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겠느냐. 그리하여 이 시 속에서 ‘당신(사람)’은 간악한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불행하기 그지없는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긍정적 존재가 된다.
마침내 사람에 대한 불신이나 비판을 벗어난 단계, 즉 사람을 향한 연민과 슬픔의 광채가 시 전편에 넘쳐흐른다.
‘사람답지 못한 사람’에 대한 직설적 비판과 증오와 독설, 그 역설적 사랑에서 김년균 시인은 마침내 긍정적 사랑의 시발점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연민의 눈길’이자 사람이 사람에게 내미는 따뜻한 ‘악수의 손길’이다.
다음 시「동행」을 보도록 하자.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외롭고 힘든 곳에 머물러 있더라도/오는 길이 같고 가는 길이 같으면/그것이 더욱 중요하다.//어둡고 구석진 모퉁이나 풀숲 우거진 오솔길에서/만나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더라도/산 너머 강 건너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더라도/똑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더러는 빨리 가고 더러는 늦게 가더라도/거친 땅을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나무 풀 꽃 새 짐승 바람 구름들과 더불어/낯선 세월을 뒤따른다는 것이 중요하다.//문밖에 나서면 돌밭뿐인 막다른 곳에서/넘어질 듯 부서질 듯 아슬아슬한 곳에서/하루도 편할 날 없이, 작은 목숨 용케도 견디며/서로가 제 몫을 다한다는 것이 중요하다.//해와 달이 밤낮으로 번갈으며 솟구치듯이/우리들의 기쁨과 슬픔도 끊임없이 찾아든다.’ (註;끝연 2행은 시집 발행 후 저자가 추가 발표)
-「동행」전문
이 시에서 김년균 시인은 사람이 서로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외롭고 힘든 곳에 머물러 있더라도/오는 길이 같고 가는 길이 같으면/그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노래한다. ‘산 너머 강 건너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더라도/똑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고.....!
즉, 탄생의 길이 같고 삶의 길이 같고 죽음의 길이 같은 존재라면 사람의 삶과 죽음이 그 누구에게나 다 함께 걷는 ‘동행’의 길이므로 각자 하나의 사람으로서 같은 시대에 ‘똑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친구이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 전체에 대한 이웃으로서의 연민이자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고 있는 인류에 대한 이해와 동류의식, 즉 긍정의 시선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거친 땅을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작은 목숨 용케도 견디며/서로가 제 몫을 다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갈파한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거친 땅’을 걷고 있지만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작은 목숨 용케도 견디며’ ‘동행’한다는, 그 ‘함께 간다’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같이 간다’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러면서 ‘제몫을 다 한다’는 것, 그것은 상호 위안의 길이고 희망의 길이자 사람의 사람다운 길, 즉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걷는 ‘사람의 길’이다.
‘사람’은 이제 선인과 악인의 단순한 이원화의 길에서 하나의 길을 ‘동행’하는 일원화의 길,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쟁’, 부정의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생’, 즉 긍정의 세계로 한 발짝 더 다가선다. 그 긍정은 물론 다시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연민’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의 다른 시, 즉 ‘-바리나시에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빈자(貧者)를 위하여」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는 게 몹시 힘들었구나./저녁이 오면 되려 두려웠구나./잠자리에 들어도 잠은 안 오고,/슬픔만 무럭무럭 자라났구나.//세월이 또 한번 출렁거렸거나/바람이 펄펄 날며 간섭하였구나./그들의 농간에 놀아났구나.//아침에 일어서면 하늘에서 돕는다 하고/저녁에 일어서면 하늘이 버린다 하는데,/하늘이 버려서일까. 손목에 이끼가 돋고,/발에 안개가 덮였구나. 마음뿐 아니라/몸뚱이까지 갈가리 찢어졌구나.//그러나 지구가 둥근 것처럼 세상도 둥글고,/사람도 둥글고, 꿈도 둥글어 빙빙 돈다고 한다./너의 꿈도 둥글어, 어느새 뜨락에 햇볕 들면/어둠과 슬픔이 달아나고,/그리운 별들이 몰려들겠지.//지나는 길에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흐드러지게 피고, 만나는 나무마다/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겠지//하늘도 기뻐하며 웃어주겠지./언젠가 너에게 그런 날 오겠지.’
-「빈자(貧者)를 위하여」전문
이 시는 시인이 인도에 여행 갔을 때, 그들의 삶을 보고 쓴 것으로 보인다. 사는 모습은 어디나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사는 게 몹시 힘들었구나.’로 시작되는 이 시는 ‘잠자리에 들어도 잠은 안 오고,/슬픔만 무럭무럭 자라’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숨소리이자 따스한 응원의 속삭임이다.
‘사람’은 어찌보면 ‘세월’과 ‘바람’의 ‘농간에 놀아’나는 슬픈 존재이다. ‘마음뿐 아니라/몸뚱이까지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나 지구가 둥근 것처럼 세상도 둥글고,/사람도 둥글고, 꿈도 둥글어....../어느새 뜨락에 햇볕 들면/어둠과 슬픔이 달아나고,/그리운 별들이 몰려들겠지.//지나는 길에 아름답고 향기
로운 꽃/흐드러지게 피고, 만나는 나무마다/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겠지//하늘도 기뻐하며 웃어주겠지./언젠가 너에게 그런 날 오겠지.’......!
‘세상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너의 꿈도 둥글’기 때문에 ‘언젠가’는 ‘지나는 길에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흐드러지게 피고, 만나는 나무마다/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릴 날’이 올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하늘도 기뻐하며 웃어’줄 것이라고 ‘사람’의 미래를 대단히 희망적으로 노래한다.
모난 세상이 아니라 ‘둥근 세상’, 모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둥근 사람’들이 사는 세상, 모난 꿈이 아니라 ‘둥근 꿈’을 꾸는 사람들이 사는 하나의 지구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 ‘둥근 세상’은 갈등과 고통과 미움을 넘어 화해와 평화 속의 따뜻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이상향의 세계이다. 그것은 아마도 김년균 시인이 꿈꾸는 세계이자
모든 지구인들이 꿈꾸는 아름답고 눈부신 세계이리라.
따라서 이 시의 주제 역시 ‘사람’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연민이다.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날개이다. 사람에 대한 ‘꿈’, ‘사람의 꿈’에 대한 노래이다.
이 시는 ‘빈자(사람)’를 향한 독백체 형식이다. 이제 김년균의 시는 ‘사람’에 대한 갈등과 실망과 절망의 길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와 희망과 꿈의 길 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상호 신뢰와 인간애가 사라진 비인간적인 약육강식의 동물, 또는 끝없는 욕망의 동물, 혹은 본능적 동물로 바라보던 김년균 시인의 시선이 ‘사람’을 보다 희망적이고도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다운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역설적 사랑에서 긍정적 사랑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푸른 다리가 이미 이쪽과 저쪽 사이에 탄탄하게 놓여진 셈이다. 이제 허공과 허공 사이를 이어주는 무지개 같은 그 눈부신 희망의 다리를 김년균 시인의 시와 함께 건너가 보도록 하겠다.
‘사람’에 대한 ‘연민’에서 ‘사랑’으로
그러면 김년균 시인의 연작시『숙명』은 사람에 대한 ‘부정’에서 ‘긍정’으로, 다시 그 긍정에서 ‘사랑’의 길로 어떻게 접어드는지 그 시적 변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시「선물」을 보자.
‘우리 집 왕인 손녀와 함께 놀다가,/즐겁게 놀다가, 내가 기습당했다.//손녀가 갑자기 내 팔뚝을 물어뜯은 것./아아얏! 돌발적인 사고였다./상처진 곳을 닦아내고, 약을 바르는데도/손녀는 미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이,/오히려 당당하게, 눈 부릅뜨고 노려본다.//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나는 손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왜 할아버지를 물었니?”/손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할아버지가 좋아서 그랬지!”//이 순수한 사랑의 비의(秘義)./절박한 정염(情炎)의 메타포.//내가 왜 그걸 몰랐지./그건 상처가 아니라 훈장이었다./우리 집 왕이 준 귀한 선물.’
-「선물」전문
이 시는 화자와 손녀 사이에 생긴 돌발적 사고(?)에 대한 아름다운 보고서이다. 아니,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드린 사랑 선물을 소재로 한 한 폭의 특별한 구상화이다.
나이 어린 손녀는 화자가 사는 집안의 왕 같은 존재이다. 그 어린 여왕이 할아버지와 함께 놀다가 갑자기 할아버지의 팔뚝을 물어뜯는 기습 사건이 발생한 것.
손녀가 어찌나 심하게 물었는지 기습당한 팔뚝에 약을 발라야 할 정도로 할아버지의 상처는 작지 않다. 그런데도 가해자인 손녀는 ‘미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이’ ‘당당하’다.
왜 팔뚝을 물어뜯었느냐는 할아버지의 질문에 ‘손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할아버지가 좋아서 그랬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순수한 사랑의 비의(秘義).’
그렇다! 이 시는 단순히 손녀와 할아버지의 따뜻한 가족애를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로 ‘인간성 회복’의 가장 큰 요체가 무엇인가라는 지고한 명제에까지 명쾌한 해답을 전해준다.
그 ‘인간성 회복’은 다름 아닌 ‘순수한 사랑’의 힘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할아버지에 대한 손녀의 폭행(?)은 폭행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답고 ‘귀한 선물’로 황홀한 변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 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비스러운 사랑의 묘약이 전해주는 소중한 인간애의 뿌리가 숨어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이렇게 일종의 폭행조차도 소중한 선물로 승화되는 불가사의한 마법을 지닌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꽃송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가족인 손녀와 할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적
다리, 즉 인간애, 또는 인류애의 다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불신에서 신뢰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소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짓이나 가식이 삭제된 순수한 사랑, 어린이들이 지니고 있는 그 순진무구한 사랑의 마음이 불신과 증오와 비인간적 행태 속의 ‘사람’을 구원하는 일종의 구세주 역할을 하는 것.
말하자면 이 시에서의 손녀는 그냥 어린 소녀가 아니라 신이 보낸 특별한 사랑의 사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년균 시인은 이 시의 화자와 손녀와의 작은 일화를 통해서 인간 구원의 길을 마치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슬쩍 던져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시는 형식상 소설체와 수필체를 겸하고 있는 그만의 특별한 표현 양식을 띠고 있다.
다음 시「싹」을 살펴보기로 하자.
‘나를 언제나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손가락 하나로도 나를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고,/아무리 거창한 태풍이 불어와도 꿈쩍 않는/나의 옹고집도, 단번에 꺾어버릴 수 있는 사람.//세상에 온 지 몇 해 안 되어서인지/너무 여리고 작아, 눈에 잘 띄이지 않지만,/혹시나 눈길이 닿으면 가슴이 벌렁거리도록/두렵고 무서운 아이. 우리 집 예림이.//그래, 싹은 미래의 희망이다./기둥을 세우는 강철이다./어둠을 덮는 태양이다.’
-「싹」전문
여기서의 ‘싹’은 물론 ‘세상에 온 지 몇 해 안 된’ 화자의 손녀 예림이다. ‘너무 여리고 작아, 눈에 잘 띄이지 않지만’ 그러나 이 예림이는 화자인 할아버지를 ‘언제나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심지어 ‘손가락 하나로도 나(할아버지)를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거창한 태풍이 불어와도 꿈쩍 않는/나의 옹고집도, 단번에 꺾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이 어린 손녀(사람)의 이 큰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혹시나 눈길이 닿으면 가슴이 벌렁거리도록/두렵고 무서운 아이’......!
왜 어린 손녀 예림이가 화자에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되었을까...? 그것은 혹시 할아버지 세대와 어린 손녀 세대 간의 인간적 순수성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때묻은 구세대와 때묻지 않은 신세대, 즉 어른과 아이의 그 순결한 정신의 투명도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어린 손녀에 대한 화자의 엄살 섞인 진술(‘두렵고 무서운 아이’)은 바로 손녀가 지니고 있는 그 순수의 힘에 대한 반어적 예찬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메시지와 무한한 상호 조화의 위대한 가능성을 여기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 속의 화자는 말한다. ‘그래, 싹은 미래의 희망이다./기둥을 세우는 강철이다./어둠을 덮
는 태양이다.’라고......!
인간 본성의 세계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을 우리는 21세기 이 땅에서 김년균 시인의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지구인들의 ‘미래의 희망’이자 인류사회의 ‘기둥을 세우는 강철이’며 세상의 수많은 ‘어둠을 덮는 태양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시「어린 사랑」을 살펴보기로 하자.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가/벌써 사랑을 안다.//먼지나 구름에 숨은 수상한 하늘에선/손바닥만한 햇볕이 기웃거리고,/거리마다 흔들리는 나무들,/어디나 걱정 아닌 곳이 없는데,//세상에 온 지 다섯 해밖에 안 된/아이가 벌써 사랑을 이야기한다./비틀비틀 굼벵이 기어가는 글씨로/사랑을 내세우며 편지를 쓴다.//......할아버지 사랑해요/김예림 올림//아직은 잎도 피우지 않은 애송이라서/발목에 바퀴조차 안 달렸는데,/어느 결에 어른처럼 참을 줄 모르고/사랑의 길을 거침없이 굴러다닌다.//......사랑은 몸 밖에 치장한 허세가 아니라/몸 속에 숨겨둔 진실이어야 한다고,/아이는 간절히 말하고 싶은 것일까.//사랑은 가뭄에 비 내리듯 의롭고, 사랑은 어둠에 햇빛 들듯 장하고,/사랑은 풀잎에 무릎 꿇듯 겸손해야 한다고/아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천 년을 묵어도 만나지 못할/아이의 고운 숨결이,/내 몸의 억만 세포에 들어와/빙글빙글 웃으며 떠돌고 있다.’
-「어린 사랑」부분
화자인 할아버지에게 손녀인 어린아이가 이 세상의 ‘거리마다 흔들리는 나무들,/어디나 걱정 아닌 곳이 없는데,//세상에 온 지 다섯 해밖에 안 된/아이가 벌써 사랑을 이야기한다.’
‘어디나 걱정이 없는’, 즉 너무 걱정 많은 세상 속에서 아이는 ‘세상에 온 지 다섯 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중요한 정신의 핵, 즉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섯 살짜리 아이는 사람에 대한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 아무 조건 없는 순진무구한 ‘사랑’은 가치관의
혼란과 덧없는 허욕과 비리로 가득찬 이 끝없는 불신사회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아버지에 대한 어린아이의 ‘사랑’은 그야말로 순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의 ‘할아버지 사랑해요’는 아무 거짓도 수식도 없는 지순한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은 몸 밖에 치장한 허세가 아니라/몸 속에 숨겨둔 진실이어야 한다고,/아이는 간절히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물론 그러한 ‘허세’나 ‘진실’에 대한 생각이나 판단조차 없다. 어린아이의 마음 속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솔직한 자기 감정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생각 표출만 할아버지에게 전달해줄 뿐이다.
상대방을 좋아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표현할 뿐이다. 그러니까 워즈워드의 시「무지개」의 한 구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이 경우에 가장 적절한 해석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할아버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에게 ‘사랑’의 본
질과 그 표현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랑은 가뭄에 비 내리듯 의롭고, 사랑은 어둠에 햇빛 들듯 장하고,/사랑은 풀잎에 무릎 꿇듯 겸손해야 한다고/아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의롭고 장하고 겸손한 사랑’, 이것이 바로 거짓이나 계산이나 허욕이 설 자리가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사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겠는가.
그 무엇보다도 깨끗하고 맑은 ‘사랑’ 그 자체, 그것이 사회 속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삶의 뿌리라는 것을 어린아이의 사랑 고백 한 마디가 단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하자면 김년균 시인은 인간 구원의 길을 바로 어린아이의 순수한 심성 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는 ‘천 년을 묵어도 만나지 못할/아이의 고운 숨결이,/내 몸의 억만 세포에 들어와/빙글빙글 웃으며 떠돌고 있다.’라고 어린 손녀로부터 받은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숨기지 못한다.
의도적 기교를 초월한 시 표현상의 쉽고 소박한 진정성이 감동적인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린이의 가슴으로 돌아가라!’
이것이 부정적 인간에 대한 김년균 시인의 인간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의 시「숙명」을 살펴보기로 하자.
‘속세의 길목에 반질거리던 얼음판 깨어지고/잠겨진 문틈으로 따스한 바람 솔솔 스며들 무
렵,/몸 가릴 잎새 하나 없이 울퉁불퉁 몸뚱이에 돋은/가지마다 소름이 끼치도록 주먹을 불끈 쥐고,/남의 귀에 안 들리게 큰소리치며/목련꽃, 한 그루 활짝 피었다.//남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부터 몸 씻고 화장하고/그렁그렁 눈물 같은 이슬 머금은 꽃잎들,/마주친 사람마다 감격하여 가슴이 휑하게 뚫린다./그러나 쏜살같이 날으는 세월의 잣대로 보면/한 치도 안 되는 몹쓸 자투리, 그 한 자락 붙잡고/무엇을 얻으려고, 하늘땅 무너지고 재앙이 들끓는/이곳에서 무엇을 꿈꾸려고, 서둘러 나섰다가,//오가는 세월의 틈새, 혹은 그늘진 뜨락에 가엾이/떨어져 누워, 눈 감고 가슴 속에 꿈을 묻는다./가는 이여 짓밟아라. 오는 이여 팽개쳐버려라./오가는 거리마다 해 뜨고 꽃 피고 새 울어도/잠시일 뿐, 돌아보면 숨결 하나 남지 않느니,/하늘이 품은 뜻을 세상이 어찌 알랴.’
-「숙명」전문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숙명의 노래’이다. ‘숙명’이란 무엇인가. 사람으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즉 ‘날 때부터 타고난 운명’이다.
여기서의 ‘목련꽃의 숙명’은 물론 ‘사람의 숙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그래서 ‘목련꽃’은 ‘사람’과의 동일성을 매개체로 한 하나의 객관적 상관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숙명’은 아마도 어느 한 개인의 특수한 운명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보편적 운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운명은 바로 이 지구상에 하나의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평생 살아가다가 언젠가는 늙어서 병들어 죽는 ‘숙명’의 길, 즉 사람이란 생명체가 지닌 한계, 가장 기본적인 삶의 양식인 ‘생로병사’의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그래서 ‘오가는 거리마다 해 뜨고 꽃 피고 새 울어도/잠시일 뿐, 돌아보면 숨결 하나 남지 않’는다.
불가사의한 허무에서 ‘사람’이란 이름의 불가사의한 창조물로, 그 불가사의한 ‘사람’이란 이름의 창조물에서 다시 불가사의한 허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의 숙명이다.
이 세상에 ‘잠시’ 다녀가는 것. 그 최초와 최후의 과정까지 ‘하늘이 품은 뜻을 세상이 어찌 알랴.’
그렇다. ‘사람’은 신이 품은 깊은 뜻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불가사의한 ‘숙명’의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사람’이 가야 할 길은 어느 길인
가. 불신과 허욕과 저주의 길인가, 아니면 신뢰와 겸허와 사랑의 길인가......!
그 질문에 대해 ‘사람’ 연작시집『숙명』은 명쾌한 해답을 던져준다. ‘사람’들이여,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순수한 사랑’의 길, 그 길로 걸어가라고......!
마무리 말
지금까지 우리는 김년균 시인의 다섯 번째 ‘사람’ 연작시집인『숙명』과 함께 그 연작시집이 지니고 있는 시정신의 전개와 변화, 그 다양한 시적 변용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그의 연작시집『숙명』속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김년균 시집『숙명』은 ‘사람’이란 하나의 소재(주제) 아래 우리 시단에 다섯 번째로 펼쳐 보인 기나긴 연작시집으로서 그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연작시의 내용면에서 ‘사람’과 ‘숙명’과 ‘사랑’을 하나의 큰 연결고리로 삼아 사람에 대한 부정적 진단에서 긍정적 단계인 연민으로, 다시 그 다음 단계, 즉 사람다운 사람의 최
선의 길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길에 이르기까지 그 시적 과정의 인과 관계, 그 시적 상황의 변화와 전개가 대부분의 다른 연작시에서는 보기 드문 극적인 구성력과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특별한 시적 변용의 의의를 부인할 수 없다.
셋째, 연작시집『숙명』에 발표된 시들이 때로는 독백체, 때로는 수필체, 때로는 소설체에 이르기까지 내용에 따른 효과적 표현 방법의 다양성에 대한 의의를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김년균 시인의 평생에 걸친 소중한 시 작업 중의 하나인 ‘사람 연작시집’이 이제
앞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변용시켜 나가게 될 것인지, ‘사람 연작시’의 또 다른 다양성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정 성 수(丁成秀)
1945년 서울 출생
1965년『시문학』, 1979년『월간문학』신인작품상 등으로 작품 활동
<제4회 동포문학상>, <제11회 경희문학상>, <제1회 한국문학 백년상>, <제7회 앨트웰PEN문학상> 등 수상.
시집『개척자』『사람의 향내』『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누드 크로키』외 다수.
평론 <21세기 한국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 등
- <계간문예> 여름호(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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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김년균 선생님의 시집 한 권을 읽었네요...ㅋ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