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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북 지방 스크랩 구미 도리사 - 신라 최초의 사찰
普願 추천 0 조회 97 16.06.23 18: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라 최초의 사찰, 구미 도리사

 

 

도리사 일주문

 

 

 

 

▶ 도리사(桃李寺)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태조산(太祖山)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桃李寺)라 하였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도리사(桃李寺)는 아도가 창건했다는 바로 그 도리사는 아니다.

본래의 도리사는 폐사되었고, 후대에 도리사의 부속 암자였던 금당암을 중심으로 하여 중창한 절이 현재의 도리사이다.

도리사의 옛자리는 현재 냉산의 남록 즉 현재의 도리사로 올라가기 전 골짜기 옆에 장대한 석축지가 있는데, 이곳이 옛 도리사지라고 마을 사람들은 지적한다. 이러한 추정은 금당암은 도리사 북쪽에 있다(金堂庵在桃李寺北)”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불우조 기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사지는 대웅전, 누각 등의 건물을 조영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고, 와편도 흩어져 있다

 

도리사는 창건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1677(숙종 3)의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린 뒤, 1729(영조 5) 대인(大仁)이 아미타불상을 개금(改金)하여 금당암으로 옮겨 봉안하고 금당암을 도리사로 개칭하였다. 1807(순조 7) 절을 중창하였고, 1823년 조사전(祖師殿)을 중수하였다. 1876(고종 13) 극락전을 중건하였으며, 1922년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766월 아도의 석상(石像)이 발견되었으며, 19774월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에서 금동육각탑 형태를 띤 사리구(舍利具)와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 1과가 발견되었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때에 모셔온 세존진신사리라고 하며 세존 사리탑 보수 공사 중 탑신 속에서 금동육각사리함에 봉안되어 발견되었는데,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고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태조선원(太祖禪院삼성각(三聖閣조사전·요사채 등이 있다

    

태조선원

 

도리사의 1970년대 모습

 

 

조사전은 정면 3, 측면 1칸의 건물이며 창건주 아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 영정은 직지사성보박물관으로 옮겨가고 1976년에 발견된 아도화상 석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도리사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아도화상 석상·세존사리탑·아도화상 사적비, 조선 후기의 탱화 등이 있다.

 

 

 

적멸보궁  

 

 

적멸보궁이라는 건물 뒷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가여래사리탑이 있다.

사리탑은 높이 560cm에 폭이 390cm로서 흰색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고려시대의 팔각승탑 형태를 본따 만들었다.

사각의 기단 위에 석난간을 설치하고 사방에 계단을 놓고 기단 위에 팔각의 사리탑을 세웠는데,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팔각원당식으로 전통양식에 의하였고 설계 제작되었다. 사리탑 앞쪽에는 배전을 건설, 참배공간을 두어 적멸보궁식을 따랐다.

 

 

 

 

 

사리탑에 모신 사리는 19774월 극락전 뒷편의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을 해체, 복원하다가 금동육각탑 형태를 띤 사리구(舍利具)에서 발견된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 1과이다. 사리는 직경 8mm 크기로 타원형이며 영롱하고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도굴꾼들이 골짜기에 버린 석탑재에서 진신사리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다.

 

도리사 사적기에 의하면, 마을 주민 김계장(金界丈)이란 사람이 냉산 기슭에 있는 석적사지(石積寺址)의 불사리탑에서 불사리 1과를 얻었는데, 그 크기가 이의(苡薏)만 하고 색깔이 백옥 같았고, 당시 도리사의 체안대사(體眼大師)가 석옹탑(石甕塔)을 건조하여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이 석옹탑이 현재 상부의 연봉형 보주(寶珠)세존사리탑이라는 음각명이 있는 석종형 부도로, 17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탑의 사리공에서 출현한 금동육각사리함은 석적사지에서 수습된 것이므로, 도리사 세존사리탑의 조성 연대와는 다르다.

금동육각사리함은 우리나라 초유의 육각사리함이라는 점, 그리고 각부의 문양으로 미루어 8세기 중엽에서 뒤지지 않는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사리함과 사리는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1987년 주지 법등화상이 건립한 현재의 사리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하고 사리함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적멸보궁에서는 뒷 유리창을 통하여 석가여래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 석가세존사리탑-석옹탑(石甕塔)

 

 

 

석가세존사리탑의 기단석

 

석가세존사리탑의 기단석 모퉁이의 동물상

 

원래 칠성각 동북쪽 담장 밖에 있었던 것으로, 도굴로 인하여 계곡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77년 도리사 경내에 옮겨 칠성각 옆에 새로 기단석과 난간을 만들었고 앞면 좌우에 석등(石燈)을 세웠다.  

이 때,복원 공사를 하던 중 1977418일 이 속에서 금동육각사리함과 함께 세존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원래의 사리탑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지대석이 묻혀 있다고 한다.

 

보주 윗부분의 원좌(圓座) 다섯 곳에 음각하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라고 한 자씩 새겨져 있어 석가세존사리탑이라 부른다.     

도리사 세존사리탑은 석종형(石鐘型)의 승탑(僧塔)으로서 하대석 3단은 새로 만들어 올려 놓았다. 3단의 상부는 복판(複瓣)으로, 복련(伏蓮)을 조각하였고, 하부에는 안상(眼象)에 초문(草文)을 양각하였다.

원래 4각형의 상대석에는 네 모서리에 각각 사자의 머리를 조각하여 놓았다.  

탑신의 하부에는 단엽10(單葉十瓣)의 앙련(仰蓮)을 조각하였고, 중앙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으며 상부에는 복련을 돌렸다.

보주(寶珠)는 상촉(上促)의 연봉형(連峰型)으로 만들었고, 승탑의 높이는 1.62m, 지대석 길이 1.3m, 탑신 높이 1.02m이다.

 

 

▶ 금동사리함

 

 

 

 

이 사리함은 1977년 도리사의 석가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되었다. 육각을 기본으로 하여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으며 뚜껑 구실을 하는 육모지붕 모양의 지붕, 여섯 면에 정교한 무늬가 들어 있는 탑신, 면마다 안상이 투각된 좌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높이는 17cm, 밑면의 지름은 9.8cm이다. 지붕 모서리마다 귀꽃이 앙증맞게 솟았는데, 그 목에는 작은 고리가 하나씩 감겼고 처마에도 면마다 고리가 하나씩 달려 열두 개의 고리에 무언가 장식물이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에는 선각으로 제석천, 범천, 사천왕들을 새겼는데 그 선들이 거침없고 유려하게 흘러내리는가 하면 정교하고 치밀하여 매우 숙달된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제까지 발견된 사리함이 거의 사각을 기본으로 하는 데 반해, 이 사리함은 육각의 부도형이어서 신라시대의 부도연구나 목조건물의 양식 고찰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성 연대는 17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본사인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도리사석탑-보물 470

 

 

 

1층 몸돌의 문비와 상륜부

 

 

 

 

 

극락전 앞에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의 화엄탑이 있다. 얼른 보면 네모난 돌들을 그냥 적당히 쌓아 놓은 것 같다. 그러나 탑에 쓰인 부재의 규모와 정성을 살펴보면, 갖춰야 할 형식을 다 갖추고 있는데 왜 이런 모양으로 탑을 쌓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탑은 모전석탑과 닮았으나기단부에서 그 차이를 보이며 다만 외관에서 의성과 안동의 방단형석탑(方壇形石塔)과 연관성을 보이고 있다

 

보물 제470호로 지정되어 있는 높이 3.3m의 이 석탑은 극락전 앞마당 중심선에 건립되었다는 점과 현 위치밖에 넓은 대지가 없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의 기본형은 방형으로서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단(基壇)이 놓이고 그 위에 탑신부(塔身部)와 상륜(相輪)부 등이 세워져 있다.

 

지대석은 10매의 장대석으로 짜여졌는데, 윗면에는 한 단의 각형 굄을 새겨서 그 위에 기단부를 받치고 있다. 기단부는 모서리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에 긴 네모모양의 판석을 여러 장씩 세워서 마치 병풍처럼 돌려쳤는데, 북쪽면만 7매석이고 다른 면은 모두 6매석으로 되어 있다

남쪽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긴 네모모양의의 문비(門扉)가 오목새김되어 있다.

 

 

 

 1층 몸돌의 문비

 

 

기단 갑석(甲石)도 네 귀에 넓은 판석(板石:넓고 얄팍한 돌)을 놓고 그 사이를 여러 장의 돌로 짰는데, 각 면이 똑같이 3매석씩이다. 갑석 윗면에는 별다른 구조가 없이 평평한데 그 위에 탑신이 놓였고, 각 층은 10개의 크고 작은 석재로 구성되어 있어서 마치 모전석탑(模塼石塔)의 구조와도 같은 면을 보이고 있다.

 

탑신은 3층으로 초층은 각 면에 네모난 석재를 3중으로 쌓아 이루었는데, 동면은 15매석이고 남면은 13매석이다. 그 위의 옥개는 일반형 석탑의 옥개석 형태와는 달리 지붕형의 옥개가 아니어서 받침이 없고 그 위에 낙수면도 없으며, 전탑이나 모전석탑에서와 같이 윗면에 몇 단의 층단이 마련되어 있다.

 

각 층단은 기단부 갑석과 같이 네 귀에 장대석을 배치하고 그 사이를 몇 장의 네모난 석재로 결구(結構)하였고, 그 위에 2단의 층단을 놓았는데 그 층단은 상하층 동면이 같이 4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남면은 하층이 5매석, 상층은 4매석이다.

 

2층 옥신은 면마다 2층으로 장방형 석재를 겹쳐 조립하였는데, 남면에는 중앙에 양 문비형을 모각한 판석을 끼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다. 그 위의 층단받침은 3단이다.

 

3층옥신과 옥개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되었고 밑에 각형 1단의 받침이 있으며, 낙수면에는 2단으로 굄을 만들어 그 위에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석주(石柱), 연화가 조각된 원형의 앙화(仰花)와 보주(寶珠)가 각각 놓였다.

 

 

 

 

이 석탑은 구조상 옥개 낙수면부에 층단을 이루고 있는 점이라든지 층마다 작은 석재를 여러겸으로 쌓아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모전석탑의 계열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 탑을 현지에서는 화엄석탑(華嚴石塔)’이라 일컫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건조연대는 남쪽면에 새겨져있는 양쪽 문비형의 양식과 상륜부의 조각을 비롯한 각 부재를 다룬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엽으로 추정된다.

 

 

 

 

극락전

 

 

 

높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극락전은 앞과 옆이 각각 세 칸 짜리 정방형에 팔작지붕을 얹은 건물로서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공포는 다포로 얹어 화려한 단청을 그려 넣었다.

도리사의 암자였던 옛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는 목조로 된 아미타여래불이 주불로 안치되어 있다.

 

 

목조아미타여래불(구미문화재대관 사진)

 

 

도리사 극락전 내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 양식을 띠고 있고 높이 129, 무릎너비 92.5이다.  표면에는 건칠(乾漆)을 하고 금박을 입혔으며 상호 각부에는 색칠을 하였다.

19683월 개금을 하기 위해 불상을 다른 곳에 안치하고 밑의 보료를 들어냈을 때 그 중간에서 여러 장의 묵기(墨記)가 발견되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대한 최초의 개금은 1731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복장까지 보았다고 하며, 두 번째 개금은 1764년에 이루어지고 세 번째 개금은 1876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어 1968년에 네 번째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한 셈이다.

1731년에 최초의 개금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 연대는 1700년 이전인 1600년대로 추정된다.

 

아도화상 석상

 

아도화상 석상은 1976년 현 도리사 경내 화엄석탑 뒤 석축을 정비하다가 발견하였다. 아도화상 석상은 자연석을 깎아서 만든 입상(立像)으로 전면 폭이 좁아 기이한 감을 주나 조각의 윤곽은 뚜렷하다.

 

안조(仁祖) 때 부제학 강원도 관찰사(副提學 江原道 觀察使) 등을 지낸 최현(崔晛)‘일선지(一善志)’ 불우조에는 아도화상의 석상(阿度石像)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금당암(金堂庵)도리사 쪽 수십보 쯤에 위치하는데 아도석상(阿度石像)이 있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에 의하여 이 석상이 아도화상 석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유물을 감정한 동국대 황수영박사는 '도리사에서 발견된 아도상은 동남쪽 넓은 들과 긴 강을 바라보고있는데 이는 일선지(一善志)의 기록과 일치되고 있으며, 보관이나 나발 등이 없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불상이 아니며, 퀴 코 눈 등의 모습이 이국적이기 때문에 위나라 사람과 한국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도화상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아도화상의 석상(石像)은 총높이가 97㎝, 마리높이가 32cm, 신체 높이 65cm, 옆면 폭 26cm, 정면 17에 불과한 아담한 小像(소상)이다. 발굴 후 취급부주의로 목이 부러졌으나 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얼굴은 좁고 긴 편이며 눈은 추켜 떠 위엄이 당당하다. 양손은 치켜들어 가슴 쪽에서 서로 닿은 듯 하며 왼손으로는 법의(法衣)인지 또는 연봉오리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물체를 가지고 있다. 오른쪽 측면에는 여덟 갈래의 화엽형(花葉形) 둥근 무늬를 부조했는데 가사(袈裟)를 고정시키는 매듭의 장엄구를 나타낸 듯하다.

의습(衣褶)은 단조롭고 선()이 굵으며 전체적으로 주는 느낌이 고신라시대의 조각수법을 연상케 하고 있다 란다.

 

현재 도리사 조사전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있어 참견을 할 수 없었다.

1970년대에 인근에 있는 봉한리사지에서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작품으로 이 지역이 이른 시기의 불교 전래지였음을 말해 주는 유물이다.

 

 

▶ 좌선대

    

 

 

 

 

석탑의 왼쪽에 절 밖으로 나가는 작은 돌문이 있고 그 곳을 통과하여 아래로 조금 내려서면 아도화상이 참선을 했다는 좌선대(座禪臺)가 있다. 네 개의 자연석 위에 대충 다듬은 넓은 돌 하나를 얹어 한 평 남짓한 곳이 있는데 아도화상이 좌선하던 곳이라 한다

아도화상이 모례장자에게 집안에 칡넝쿨이 들어오면 그 넝쿨을 따라오라고 하였는데 아도화상의 예언처럼 집안으로 칡넝쿨을 따라 이곳까지 와보니 이 바위 위에 아도화상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전설이 서려있는 바위이다. 

  

좌선대 뒷쪽에는 2기의 비()가 남쪽을 바라보고 나란히 세워져 있다.

아도화상사적비와 도리사불량답사주질비이다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는 대석과 이수를 갖춘 형식으로 비 전체 높이 296cm, 비신 높이 197cm, 84cm, 두께 24cm, 이수 높이 69cm이다.

자연 암석을 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파서 화강암으로 만든 탑신을 만들었다.

 

비신의 앞면에는 윗부분에 가로로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라고 전서로 적혀있고, 비문은 해서로 내용을 음각하였다.

 

또한 이 비의 뒷면에는 1643(인조 21)부터 1655(효종 6)까지 13년 동안 불상(癸未, 乙酉)과 불좌(辛卯年), 아도비(癸巳年) 등의 불사를 하였다는 내용과 그 공로자들을 기록한 자운비(慈雲碑)가 음각되어 있다.

 

이 비문의 끝부분에 숭정즉위후이십팔년오월 일입(崇禎卽位後二十八年五月 日立)’이라고 적혀있어 이 비는 1655(효종 6)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고, 아도비가 아도화상사적비를 칭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동일한 것이라면 아도화상사적비는 1653(효종 4)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논과 밭을 시주한 이의 이름과, 논밭의 규모를 적어놓은 비이다. 자연 암석을 받침 삼아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꽂아두고, 머릿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머릿돌은 앞뒷면에 굵은 선으로 연꽃봉오리와 줄기를 조각하였고, 두 옆면에는 2중으로 된 원모양의 띠를 새겨 장식하였다. 꼭대기에는 꽃봉오리모양을 한 머리장식이 우뚝 솟아있다.

앞뒷면에 세로로 새긴 비문은 앞면 첫줄에 비의 이름을 적은 후, 그 아래에 불량답(佛粮畓-논밭)을 시주한 자와 그 규모를 밝혀두었다. 비문 끝에 남긴 기록을 통하여 숙종 38(1712)에  석수 김성원(金成元)이 각자하고 승통 능철(能哲)이 세웠음이 나타나 있다.

 

 

도리사의 해우소

 

아도화상(阿度和尙)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아도화상 초상화

 

아도의 어머니 고도녕은 중국에서 온 사신 아굴마와 연정이 깊어져 아도를 낳게 되었다.

그 후,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고도녕은 아도를 출가시켰다. 아도가 16세가 되자 아도는 중국으로 가 현창화상 밑에서 수행을 하고 고구려로 돌아왔다.

어머니 고도녕은 아들을 불교가 없던 신라로 불법을 전하라며 보냈다.  

당시 신라는 외래 문물에 배타적이어서 불교 박해가 심했었다.

 

그는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부 도개에 와서 모례장자의 집에 몸을 의지하고 낮에는 일을 하여 도움을 주고 밤에는 사람을 모아 자비로운 불법을 전하였다.

 

그때, 양나라의 사신이 신라에 향을 예물로 보내왔으나 그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 걱정 해오던 중 모례장자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가 향의 사용법을 알려주길 향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그윽하여 신성하기가 이를데 없고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하였다. 이에 왕의 공주인 성국공주가 큰 병이 들어있었는데, 왕이 아도화상에게 치료를 청하니 아도화상이 칠일간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니 신통하게도 공주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아도화상의 동상

 

그 공덕으로 불교를 전할 기회를 얻었으나, 왕이 세상을 뜨자 아도화상을 해치려 하는 무리들이 공격을 해와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모례장자의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나려하자 모례장자가 가는 길을 물었으나 나를 만나려거든 얼마 후 칡순이 내려올 것이니 칡넝쿨을 따라 오시오.”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그 해 겨울 과연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에 모례장자 집 문턱으로 칡순이 들어왔다. 모례장자는 그 줄기를 따라가 보았다. 한 겨울인데도 복숭아 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나무 아래 좌선대에서 아도화상이 정진하고 있었다.

 

잘 오셨오. 모례장자. 내 이곳에 절을 세우려 하니 이 망태기에 곡식 두말을 시주하시오.”

 

아도화상은 모례장자 앞에 작은 망태기를 내놓고 시주를 권했다. 모례장자는 기꺼이 승낙을 하고는 다시 집으로 내려와 곡식 두 말을 망태기에 부었으나 어인 일인지 망태기는 두 말은커녕 두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모례장자는 재산을 모두 시주하여 도리사를 세웠다.

 

아도화상은 절 이름을 복숭아 꽃과 오얏꽃의 이름을 따 도리사라 칭했고 그곳이 바로 신라에 처음 세워진 절 도리사이다.

 

아도화상은 도리사에서 정진하다 나이가 들어 금수굴에 들어가 열반에 들었다.

지금도 도리사에서는 성국공주의 병을 낫게한 아도화상 동상 앞에서 향을 피워 올리며 가족과 친지들의 쾌차를 위해 기원하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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