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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 色 地 帶
작가: 이은집
『끼룩—끼룩—꺄아—삐룽—!』
뒷곁 숲속에서 울어대는 새 소리에 트란은 문득 잠이 깨었다.
뒤틀린 방문틈으로 붉은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대나무로 엮은 외가 드러난 흙벽에 기다란 세모꼴 무늬를 그려놓고 있었다.
아버지는 벌써 망고밭으로 일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꺼멓게 그을은 천장에 늘어진 거미줄에는 파리 한 마리가 걸려서 몸부림쳤다.
트란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앉아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버지가 피우던 담배 봉지가 구석에 밀쳐 있었다.
트란은 종이를 찢어 담배를 말아 가지고 성냥불을 붙여 물었다.
쓰고 독한 연기가 정신을 확 나게 해주었다.
아버지가 하는 것처럼 트란은 콧구멍으로 담배 연기를 후우 내뿜어 보았다.
순간 재채기가 터져나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 배운지가 얼마 되지 않은 탓이라고 트란은 생각했다.
이윽고 꽁초를 비벼 끄고 나서 트란은 밖으로 나왔다.
이슬에 젖은 나무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길섶에도 이슬이 잔뜩 내려 신고 있는 <샌들>이 철떡거렸다.
아직 골안개가 덜 걷힌 강물은 검푸른 빛을 띠우고
정글에서 뻗어나와 정글속으로 굽으러져 흘러가고 있었다.
트란은 웃옷을 벗어 아버지가 뗏목을 만들려 쌓아놓은 통나무 위에 던져놓고
강물속으로 무릎까지 빠져들어가서는 낯을 씻었다.
조그만 고기새끼 떼가 발을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것이 아주 간지러웠다.
트란은 두 손으로 그것을 떠 올렸다가 하도 작아서 도로 놓아주었다.
툭 불거진 두 눈알이 몸뚱이보다도 더 큰 고기새끼 때는 그러나 겁을 내지 않고 자꾸만 덤벼들었다.
『트란! 세수하러 왔구나?』
장단지에 흙이 더께진 아버지가 삽을 둘러메고 다가오며 물었다.
『네!』
발을 움직이자 움찔 도망쳤다가 다시 모여드는 고기 떼를 해치고 트란은 뭍으로 나왔다.
『이것 좀 가지고 있어라.』
아버지가 농라와 웃옷을 벗어 트란에게 주었다.
이때 땅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비행기가 까마귀 떼처럼 몰려 북쪽으로 날아갔다.
트란은 얼른 아버지의 농라와 웃옷을 통나무를 쌓아놓은 곳에 던져버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비행기는 삽시간에 정글 너머로 사라졌다.
『아침부터 폭격인가?』
아버지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트란은 벗어 놓았던 옷을 도로 입었다.
아직도 귀가 멍한 것 같았다. 빗살처럼 양쪽으로 갈라진 야자나무 잎이 축 늘어진 채 나부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비행기 폭음에 놀란 때문인지 몰랐다.
『가서….』
아버지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떨어버리며 말했다.
『아침 먹자.』
『네!』
토란은 농라와 웃옷을 아버지에게 건네주며 대답했다.
『놀랬지?』
아버지가 트란을 보고 물었다.
『아니요, 아버지.』
트란의 대꾸에
『너도 이젠 다 컸구나.』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가는걸요, 뭘….』
오늘은 특히 낮게 떠갔을 뿐이라고 트란은 생각했다.
『너의 형이 돌아오면….』
하다가 아버지는 멀리서 들려오는 방금 날아간 비행기들이 터뜨리는 싶은 폭격 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쿵쿵!』
그 소리는 다른 날보다 유난히 크게 귓가에 와서 부딪쳤다.
강물은 파문을 일으키고, 야자 열매가 땅에 철썩 떨어졌다.
『큰일 났는걸!』
아버지는 북쪽 정글의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형은 왜 안옵니까?』
트란은 서두만 꺼내고 엉뚱하게 딴 걱정을 하는 아버지에게 다구쳐 물었다.
트란보다 여섯 살 위인 형이 집을 나간지는 우기(雨期)가 시작되기 전이니까 벌써 반년이 넘었다.
트란은 그날 일을 생각하면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이상한 산짐승 울음과 풀벌레 소리가 시끄럽던 유난히 달이 밝은 날 밤이었다.
트란은 형과 같이 강으로 나가 통나무 배를 타고 낚시질을 했었다.
트란은 형이 시키는대로 횃불을 들고 있었다.
『첨벙!』
여기저기서 물고기들이 튀어올랐다.
그때마다 파문과 파문이 서로 부딪쳐 새로운 파문을 만들고 물에 비친 횃불이 춤을 추었다.
하늘에는 흐릿한 별들이 끄무럭거리고 강가에 와서 멎은 시커먼 정글에서는 쏴아 하고 연상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트란은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형이 옆에 있으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삭은 대를 묶어 만든 횃불은 탁탁 불똥을 튀기며 탔다.
형은 낚시에 썩은 고목 둥치에서 파 온 벌레를 꿰어 물에 던졌다.
그리고 팽팽히 줄올 감아 쥐었다.
『왔다!』
이윽고 형은 괴성을 지르며 줄을 탁 채어 사려 올리기 시작했다.
트란은 횃불을 가까이 밝히며 물었다.
『어떻게 알아?』
『손에 신호가 오니까 알지!』
그러면서 형은 조심스레 줄을 실패에 감았다.
물위에 떠오른 고기는 후다닥 튀었다.
다 잡아가지고 놓칠 것만 같아 트란은 조마조마했다.
허나 형은 능숙한 솜씨로 배 안에 끌어 올렸다.
한 뼘이 훨씬 넘는 송어는 비늘을 불빛에 번쩍이며 펄떡거렸다.
아가미와 입으로는 피가 뿜어 나왔다.
『굉장히 큰 놈인데.』
형은 싱글벙글하며 다시 낚시에 미끼를 꽂았다.
그때 집 쪽으로 통하는 오솔길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형! 누가 와!』
하다가 트란은 곧 아버지임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형도 눈치챈듯 힐끗 쳐다본 후 낚시를 물에 던졌다.
아버지는 강가에 다 와서야 그들을 불렀다.
『애들아! 나오너라!』
『왜요?』
형이 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글쎄, 어서!』
『에이 참!』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형은 낚시줄을 도로 실패에 감아 올렸다.
송어는 기운이 지친듯 아가미만 뻐끔거렸다.
트란이 횃불을 들고 형이 노를 저어서 뭍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예요?』
형은 송어 바구니를 데룽데룽 흔들며 자갈밭으로 내려갔다.
『…….』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소리 않고 앞장을 섰다.
형은 쩝 입맛을 다시며 뒤따랐다.
트란은 얼른 그 사이에 끼어들어 횃불을 밝혔다.
『달이 밝은데 그 불은 꺼라!』
아버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트란은 야자나무 그늘 때문에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하는 수 없었다.
그리하여 땅에 대고 비볐다. 허나 불은 잘 꺼지지 않았다.
『이리 내라!』
형이, 받아서 저만큼 떨어진 강물에 휙 던져버렸다.
횃불은 불똥을 날리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뜰안에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대여섯명의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왔소이다.』
아버지가 형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웬일로 아버지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기운이 없이 들렸다.
『음! 수고했오!』
키가 제일 크고 뚱뚱한 사람이 대꾸했다.
아래로 잔뜩 내려쓴 농라가 얼굴을 감추고 있어서 트란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트란은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그 사람들인 모양이구나.』
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트란은 가끔 저런 사람들이 밤에 내려와서는 쌀과 소금 등을 퍼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망고>와 <빠나나>를 뗏목에 싣고 굉장히 먼 곳에 있다는 성부(城府)에 가서 바꿔 온 것을 그들은 다 가져갔다.
트란은 그때마다 허리를 굽실거리며 내어주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으나
어쩐지 뭐라고 말을 하면 안될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에―그럼 가겠오.』
아버지에게 수고했다던 사람이 형한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계속했다.
『…넌 우리를 따라가야 한다.』
『네?』
형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겁먹은 소리로 대답했다.
『어서 떠나거라.』
아버지가 외면을 하며 조용히 말했다.
『싫어요!』
형의 울음섞인 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그 사람이 화를 벌컥 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을….』
그는 꿀꺽 침을 삼키고 나서 형에게로 바싹 다가들며 다구쳤다.
『…뭐, 싫어?』
『…….』
형은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 출발이다.』
그의 명령과 함께 둘러섰던 사내들은 형의 팔을 잡아 끌고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멍하니 그 뒤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왜 형을 데려가는 거예요?』
트란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너는 몰라도 좋다.』
아버지는 눈으로 슬그머니 손등을 가져가면서 말을 이었다.
『…들어가자.』
트란은 무슨 소리를 더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아버지의 눈에서 물같은 것이 뚝 떨어져서였다.
『형은 아까 간 비행기들이….』
이윽고 회상에서 깨어난 트란은 꼭 그럴 것만 같아
『…폭격을 하는 저 곳에 간게 아네요?』
하고 아버지에게 다시 물었다.
『너는 몰라도 좋다.』
아버지는 그날 밤에 하던 말을 되뇌며 삽을 둘러메었다. 그리고 재촉했다.
『…어서 가서 아침이나 먹자!』
『네!』
트란은 하는 수 없이 앞장서 집으로 향했다.
요즘 눈에 뜨이게 가슴이 커진 누나가 벌써 아침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트란은 <망고>조림을 올려놓아 훗딱 먹어치웠다.
며칠전에 바꿔 온 쌀이 돼서 밥맛이 훨씬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검으테테하고 주름진 살결이 오늘따라 훨씬 늙어 보였다.
움푹 꺼진 커다란 두 눈은 뼈마디가 앙상히 드러난 팔뚝과 함께 트란의 마음을 갑자기 언짢게 만들었다.
<어머니도 죽고 형도 어디로인지 가버렸는데…>
그래서 트란은 아버지가 오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겨우 세살 위인 누나하고만 남는다면 빠나나와 망고를 뗏목에 싣고서 성부에 갈 수도 없을 것이고…>
트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담배에 불을 붙이던 아버지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쳐들어오겠는데….』
『누가 쳐들어와요?』
트란은 불현듯 아까 지나간 비행기와 관련이 있는 무서운 일일 것만 같아 섬찟해져서 물었다.
『미군과 따이한군이 쳐들어온단다.』
『따이한군이라뇨?』
미군은 얼마전에 강을 타고 올라온 적이 있어서 트란은 알고 있었다.
물속으로 자라처럼 숨어버리는 괴상한 배를 타고 그들은 수십명씩 떼를 지어 왔었다.
트란은 집앞 야자나무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그들은 엄청나게 키가 크고 살결이 희거나 반대로 새깜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파란 눈에 코가 뾰족한 것이었다.
트란을 발견한 그들이 나무밑에까지 와서 무슨 깡통같은 것을 수북히 놓아주고 가는 바람에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때 트란은 그들이 잡으러 오는 줄 알고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허나 그들은 곧 배를 타고 다시 어디로인지 가버렸다.
뗏목을 타고 성부에 갔던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트란은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들은 미군이며 성부에는 아주 많이 있다고 했다.
이날 트란은 깡통 속에서 별스런 것들을 다 먹어 보았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쪼코렡이란 갈색 떡, 쇠고기 다진 것, 생선요리, 빨간 토마토 즙 등….
허나 너무 많이 먹고 배탈이 나 혼이 났었다.
그런데 따이한군은 처음 듣는 말이다.
『이번에 우리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따이한이란 나라에서도 군대들이 왔단다.』
아버지가 뻑뻑 담배를 빨며 설명을 했다。
『해방시키다니요?』
트란은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적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란다.』
『아하…!』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엔 누나를 데려가겠네요?』
트란의 물음에 아버지는 어리둥절했다.
『왜…?』
『해방을 위해서 형을 데려갔으니까 말이예요.』
아버지는 트란의 말에 기가 막힌듯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다시 설명했다.
『따이한군은 정부군을 도와 너의 형을 데려간 사람들을 쳐부시러 온 것이다.』
『해방을 못하게 왜 쳐부셔요?』
트란은 그러나 점점 알 수가 없었다. 해방을 시킨다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면 누가 누구를 해방시킨다는 말인가.
『너는 몰라도 좋다.』
허나 아버지는 그날처럼 또 이런 대꾸를 하고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트란은 으례껏 말이 막히면 <너는 몰라도 좋다>고 해버리고 마는 아버지가 불만스러웠다.
『별것을 다 묻는구나.』
누나가 아침먹은 그릇들을 부엌으로 내어가며 건네왔다.
『모르니까 그렇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게?』
『왜 상관없어! 이 난리 땜에 엄마도 죽었고 형도 끌려갔잖아?』
트란의 반박에 누나는 그러나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할 수 없지 뭘 그러니?』
『흥! 누난 강물처럼 태평이야!』
더 얘기 해봐야 속만 터질 것 같아 트란은 아버지가 피우던 담배 봉지에서 한줌 꺼내어 종이에 싸가지고 휭하니 밖으로 나왔다.]
나오긴 했어도 갈만한 곳이 없었다.
구릉을 하나 넘으면 마을이 있었지만 아직 우기가 끝나지 않아 진탕이라 잘못 그곳에 빠졌다가는 헤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정글로 덮여서 호랑이를 비롯한 온갖 맹수들과 이름 모를 새들과 독충이 악마구리 끓듯 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닦아놓았다는 한길은 열 배도 더 외돌아야 하기 때문에 소용없다. 해서 트란은 늘 집근처만 빙빙 돌았다.
형이 있을 때는 그래도 강에 나가 통나무 배를 타고 꽤 멀리까지 오르내렸다.
형은 웃통을 벗어젖히면 불쑥 근육이 솟았고 힘도 세어 아버지가 하는 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일은 함께 강에서 헤엄을 쳤을 때 얼핏 본 그의 아랫도리가 꺼뭇한 것이었다.
형은 그때 어색스레 웃으며 물속으로 쑥 들어갔었다.
트란은 갑자기 형이 보고 싶어졌다.
이런 때 그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트란은 가지고 나온 담배나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앉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야자나무 밑은 그늘이 좋으나 개미가 많아서 앉을 수 없었고 앞마당은 햇볕이 따가웠다.
트란은 강가로 나와 뗏목을 만들려고 쌓아놓은 통나무 위로 올라갔다.
야자나무 그늘이 지는 데다가 개미도 없고 바람까지 잘 통해 아주 십상이었다.
트란은 종이를 찢어 담배를 말았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번죽으로 성냥을 그어 붙였다.
연기를 내뿜으며 강물을 내려다보니 물결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 위에 오리가 수십마리씩 떼를 지어 미끄러져갔다.
경글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분주히 나르며 지저귀고 있었다.
건기가 머지 않으므로 북쪽에서 날아온 철새인 모양이었다.
트란은 야자나무보다도 몇 배나 더 통이 큰 티크나무에 새까맣게 몰려서
벌레를 쪼는 양을 바라보기에 담배가 다 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올무를 놓으면 금방 잡힐 것 같아 트란은 통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집으로 뛰어가 실을 끊어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뱀과 독충이 많은 곳이므로 막대기로 길을 헤치며 발을 옮겼다.
트란은 새들이 이동하는 방향을 앞지르기 위해 덩굴손 아래 숨어 주시했다.
『호륵 삐뚜룽…!』
새들은 티크나무의 잎사귀를 샅샅이 뒤지며 소리질렀다.
이윽고 트란은 형이 언젠가 일러주던 대로 앞잡이인 듯한 새가 움직이는 쪽으로
대여섯나무쯤 걸려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통이 큰데다 버굽이 떨어져내려서 야자나무보다 오르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새들은 점점 가까이 왔다.
트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늘어진 가지에 걸터 앉아 올무를 놓았다.
손꺼스름이 벗겨져 피가 흘렀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폭음이 울리며 또 비행기가 북쪽 정글 너머로 날아갔다.
벌써 두번째니까 오늘은 변으로 비행기가 많이 뜬다고 트란은 생각했다.
다른 때는 사흘에 한번 정도였다. 올무를 다 놓은 트란은 미끄러지듯 나무를 내려왔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따쯤 와보면 다리나 목에 걸려 퍼덕거리거나, 아니면 죽어서 매어달려 있을 것이었다.
비가 내리려는지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가며 꺼먼 구름떼가 일기 시작했다.
트란은 방으로 들어왔다. 누나가 빠빠야를 다듬고 있었다.
트란은 거들어줄까 하다가 벗겨진 손꺼스름이 아파와서 그만두었다.
『왜 다쳤니?』
누나가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새를 잡은 후에 자랑스럽게 얘기할 작정이었다.
『비서리질 다 했니?』
아버지가 들어오며 누나에게 물었다.
『네!』
누나의 대답에 아버지는 농라를 벗어 벽에 걸어놓고 담배를 말았다.
그리고 비스듬히 누워 피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허리가 아파서 바로 앉아 있기가 힘들다고 했다.
트란은 뒤로 다가가서 주먹으로 슬슬 두드리기 시작했다.
『에, 시원하다!』
허리를 움직거리며 아버지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계시오?』
이때 밖에서 누가 찾았다.
『누구세요?』
하고 누나가 얼른 대답하며 방문을 열었다.
순간 트란은 깜짝 놀랐다.
그날밤 왔던 사람들이 형을 들것에 실어가지고 서있었다.
『아니…!』
아버지도 벌떡 일어나 앉으며 눈을 크게 떴다.
『놈들의 폭격에 부상을 당했오.』
그들은 방안에 형을 내려놓으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는 무어라 대꾸하려다가 잠자코 말았다.
『대단한 상처는 아니니까….』
한 사람이 약 몇가지를 내어놓으며 말을 계속했다.
『…이건 식후에 한봉씩 먹이고, 병의 것은 상처에 발라주도록 하오.』
그리고 그들은 황급히 나가버렸다.
트란은 목구멍에 무엇이 치밀어 올랐으나 꿀꺽 삼켰다.
아버지는 멍하니 그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 볼 뿐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활동을 딱 멈춘듯한 정적이 흘렀다.
트란은 흙빛으로 변해버린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광대뼈가 아버지처럼 툭 솟고 눈이 퀭해 있었다. 남루한 옷에 머리까지 깎지를 않아 더욱 초췌해 보였다.
『배 고프냐?』
이윽고 아버지가 형을 돌아보며 건네었다.
『생각 없어요.』
형은 귀찮은듯 겨우 대꾸했다.
『그래도 먹어야지.』
하면서 아버지는 누나를 보고 말했다.
『…아침 남은 것 있지?』
『네!』
누나가 일어서려하자 형이 퉁명스럽게 쏘았다.
『생각 없다니까요!』
『후우―!』
아버지는 크게 한숨만 내쉬고 더 말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기어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몰아치고 땅을 뒤집는 듯한 천둥이 요란스러웠다.
천정에서는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트란은 형에게 덮혀있는 홋이불자락 안으로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담배만 자꾸 피웠다.
비가 그칠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트란은 왜 형이 다쳤을까 궁금했으나 물을 수가 없었다. 형의 얼굴이 너무나 슬퍼보여서였다.
<시에스터>에도 형은 잠을 자지 않았다.
아버지는 저쪽 침대에서 입을 헤벌리고 코를 골아댔고,
누나 역시 모로 누운 채 잠에 빠져 있었지만 트란은 점점 눈이 말똥해졌다.
『자거라, 트란!』
형이 조금 웃어보이며 건네왔다.
『괜찮아, 형….』
트란은 정말 오늘은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손 좀 만져볼까?』
그러면서 형이 눈짓을 했다. 얼른 일어나 앉으면서 트란은 손을 내밀었다.
형은 괴로운 듯 찡그리며 트란의 손을 마주 잡았다. 형의 손은 돌처럼 싸늘했다.
『보고 싶었다, 네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형은 트란의 손을 꼭 쥐었다.
트란은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렸다. 잠자코 있기도 어색해서 좀 망설이다가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어디 갔었어? 형…!』
그러나 형도 아버지와 같은 대답을 했다.
『너는 몰라도 좋다.』
『…….』
『그보다 집에 별 일은 없었니?』
트란은 생각해 보았다.
언제나처럼 가끔 그 사람들이 내려와서 쌀과 소금 등을 가져갔고 비행기가 폭격을 했으며 참 한가지가 있었다.
『미국병정들이 저 강가에 올라왔었다.』 트란의 말에 형은 깜짝 놀랐다.
『뭐? 언제?』
아주 다급스레 물었다.
『열흘쯤 됐나봐..』
트란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했던 따이한군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순간 형의 얼굴은 겁에 질린 것처럼 파래졌다.
『왜 그래? 형….』
트란은 영문을 알 수없는 일이 자꾸만 생겨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면서 형은 입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트란은 문득 뒷산, 티크나무에 올무를 놓은 일이 생각나서 일어앉았다.
『왜…?』
형이 의아한듯 쳐다보았다.
『새 올무를 놓았는데 깜빡 잊었어.』
『그래?』
『내 나가보고 올게. 잡혔으면 형 구워주지.』
트란의 말에 형은 대견한듯 빙긋 웃었다. 트란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말끔히 개인 하늘에는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고,
저만큼 늘어선 코코낫나뭇가지에는 백토 떼가 나래를 접고 앉았다.
트란은 입에 손가락을 끼워 휘파람을 불며 뒷산으로 올라갔다.
비에 씻긴 관목 과 덩굴손이 싱싱하게 잎을 펼치고 있었다.
야자나무만이 더위에 지쳐 피곤한듯 축 늘어졌다.
예상한대로 티크나무에 새들이 옭혀 있었다.
그러나 올무에서 빠져나려 퍼덕이다가 기운이 지친데다가 비를 맞아 모두 죽어 있었다.
트란은 재빠르게 나무에 기어올라 새를 잡아 떼었다. 모두 여마섯리였다.
아버지와 형에게는 두마리씩 주리라 생각하며 트란은 실로 새를 엮어서 목에 걸었다.
순간 얼핏 눈에 들어오는 한길 저 멀리에 이상한 물체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트란은 깜짝 놀라 그것을 쏘아 보았다.
아버지가 말한 따이한군이라는 예감이 퍼뜩 들어서 정신없이 나무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가슴이 콩콩 뛰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따이한군이 옵니다! 아버지!』
트란은 왈칵 방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뭐?』
이제 막 일어난듯 충혈된 눈알을 굴리며 아버지가 다구쳐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네! 저기 한길로 무엇을 타고….』
『한길로…?』
형이 헬쓱해지며 트란의 말을 중동무이하고 끼어들었다.
『응!』
트란의 대꾸에 형은 울음섞인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눈치더니 트란에게 물었다.
『너는 나가서 따이한군이 어디쯤 왔는가 보아라.』
『무서워요!』
『아이들은 괜찮다! 어서…!』
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이 되며 트란의 등을 밀었다.
하는 수 없이 트란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이상한 물체는 부릉하는 숨찬 소리를 내며 집앞 야자나무 아래에 와서 멎었다.
트란은 겁이 났으나 미군을 보았던 경험과 조금전에 아버지가 하던 얘기가 떠올라서 약간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병정들은 열 명이 넘는 것 같았다.
그중에 정부군이 앞장을 서고 따이한군이라 짐작되는 병정은 뒤따랐다.
그들은 미군과는 달리 정부군을 많이 닮았다.
키도 그렇게 엄청나게 크지 않았고 눈알과 머리칼은 검은 것이 아주 비슷했다.
다만 살갗이 좀더 깨끗한 편이고 입술이 두텁지 않을 뿐이었다.
『이것이 너의 집이냐?』
정부군이 트란에게 와서 물었다.
『네!』
트란은 혹시나 싶어 얼떨떨해졌다.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우리는 너의 집을 도우러 왔으니까….』
『…….』
『그래 식구는 몇이니?』
웃는 얼굴로 정부군이 물어왔다.
『아버지하고 형, 누나, 네 식구예요.』
『그래? 지금 다들 집에 계시냐?』
『…….』
트란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따이한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헬쓱해지던 형을 생각하면 불안스러웠다.
『함께 좀 들어갈까? 너의 집에….』
하면서 정부군과 따이한군이 대사립 안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아버지가 먼저 나왔다.
『아이구! 어서들 오십시오!』
밤에 오는 사람들에게처럼 아버지는 또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리고 정부군에게 무어라 수군거렸다.
정부군은 따이한과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이어서 그들은 방문을 열어젖히고 떼 매어 내왔다.
형은 죽은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글쎄 베트콩놈들이 멀쩡한 내 아들을….』
아버지의 넋두리가 그들을 따라갔다.
『우리는 설사 댁의 아드님이 베트콩이라도 치료를 해줍니다.』
그 이상한 물체에 형을 실으며 정부군이 말했다.
『감옹! (고맙소) 감옹!』
아버지는 수없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트란은 갑자기 모두가 미웠다.
쌀과 소금 등을 퍼가고도 형을 다치게 한 사람들….
주책없이 굽실거리기를 잘 하는 아버지….
형을 또 실어가버리는 정부군과 따이한군.
트란은 강가로 달려갔다.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하늘을 바라보며 뛰었다.
『트란! 어디 가느냐!』
뒤에서 아버지가 불렀다.
『좋은 선물이 있다! 이리 오너라!』
정부군이 손짓을 했다.
트란은 그러나 못들은 체 통나무를 쌓아놓은 자갈밭으로 내려섰다.
조그만 선인장 가시가 발등을 찔렀다.
아릿하며 핏방울이 솟았다.
주저앉아서 그것이 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릉하며 이상한 물체가 멀어져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트란은 돌멩이를 집어 강물로 힘껏 던졌다.
커다랗게 파문이 퍼져나갔다.
물속에 거꾸로 비친 정글이 뭉개졌다.
『트란! 이것 봐라!』
누나가 무엇을 치켜들고 오고 있었다.
『……?』
트란은 심드렁하여 바라보았다.
『고무신이라는 거다.』
하며 누나는 발에 끼웠다.
뒷꿈치에서 발가락까지 다 들어가는 묘한 신은 화려한 꽃무늬 까지 박혀 있었다.
『따이한군이 주었다.』
싱글벙글하며 누나는 말을 이었다.
『…네 것도 있어! 어서 집에 가봐!』
『…….』
트란은 그러나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마을에 가면 따이한군이 좋은 구경 시켜준다고 했다.』
누나는 여전히 신이 나서 떠들었다.
『무슨…?』
트란은 좀 궁금했으나 퉁명스럽게 물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그리고 저번에 미군이 주었던 과자도 준대.
이따 해질 무렵쯤 해서 아까 타고 온걸로 데리러 온댔어.』
『누굴…?』
『너하고 나하고지.』
『거기 가면 형 만날 수 있어?』
트란은 그것만이 궁금했다.
『그럼! 구경이 끝나면 오빠있는 곳에서 자게 될텐데 뭘!』
『그래?』
트란의 마음은 금시 조급해졌다.
어서 형을 만나고 싶었다.
『아니 너 웬 새를 목에 걸고 다니니?』
누나가 채근하는 바람에 트란은 그제야 이때껏 깜빡 잊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티크나무에 올무를 놓아서 잡은 새야.』
트란은 목에 걸었던 새를 떼어 손에 들었다.
그리고 어서 구워가지고 이따가 저녁에 형에게 가져다 주리라 마음먹었다.
집으로 온 트란은 부엌에서 소금과 칼을 가지고 다시 강가로 나왔다.
그리고 통나무 쌓아놓은 곳에서 버굽과 흩으러진 삭정이 가지를 주워 모아 성냥 번죽으로 불을 붙였다.
마른 풀잎으로 부잡이를 하자 푸슥푸슥 소리를 내며 곧 불이 당겼다.
파란 연기가 강쪽으로 퍼졌다.
트란은 새를 올려놓아 털을 꺼슬렸다. 노린내를 풍기고 지글지글 털끝이 오그라들며 이내 타버렸다.
막대기로 굴려내어 털을 뽑았다.
뭉척뭉척 아주 잘 뽑혔다.
설익어 검붉은 살점이 군데군데 문드러진 새는 유난히 목과 다리가 길어보였다.
트란은 강물로 이것들을 가져다가 배를 갈랐다.
핏물이 절어든 내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손끝으로 싹 긁어내고 다리와 머리도 잘라버렸다.
냄새를 맡은 물고기 떼들이 꽤 큰 놈까지 모여들어 서로 싸웠다.
하얗게 쉬어드는 버굽 숯불을 입으로 불어 괄게 한 다음 새에 소금을 뿌려 올려놓았다.
탁탁 물기를 튀기며 새고기는 김을 내뿜고 익어갔다.
트란은 익은 것을 보아 뒤집어 놓고 혹은 옆으로 돌려놓기도 했다.
완전히 잘 구어진 것은 넓직한 덩굴손 잎을 따다가 쌌다.
벌써 정글의 그림자가 강물에 잠기고 태양이 서쪽으로 훨씬 기울었다.
머지않아서 따이한군이 데리러 올 것이라 생각하며 트란은 새 고기를 호주머니에 넣고 집을 향했다.
아버지는 일을 그만 두고 다듬어 놓은 빠나나를 대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누나가 벌써 저녁을 짓고 있었다.
『네 고무신 방에 있다.』
막대기로 불을 쑤시며 누나가 건네왔다.
트란은 방으로 들어와 고무신을 신어보았다.
발이 꽉 째서 간편했으나 답답했다.
누르는대로 부들부들 하면서도 모양이 쭈그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고무신을 신고 가서 새고기를 내어밀면 형이 퍽은 놀라워 할 것 길았다.
『내일 올 때는 형을 데리고 와야지.』
상처를 고쳐준다고 아주 멀리로 데리고 갈 것만 같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데리러 온다던 따이한군인가 싶어 트란은 얼른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찾아 온 것은 뜻밖에도 곁두리때 형을 떼밀고 왔던 사람들이었다.
『아니…!』
아버지가 황망스럽게 그들을 맞이했다.
『…웬일들이십니까?』
『놈들이 왔었지?』
『…….』
대꾸를 못하는 아버지에게 한 사람이 집안을 휘이 둘러보며 빈정거렸다.
『마을을 정찰하고 오는 길이니까 바른대로 부는 것이 좋을거요.』
『저….』
아버지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모두 연극을 꾸민거요. 그래서 내 아들은 치료를 받게 되고….』
『다 알고 있소. 시간이 없으니….』
아버지의 말을 중동무이 시키고 한 사람이 트란에게 손짓을 했다.
『…너 좀 나오너라.』
트란은 줄에 끌리듯 밖으로 나왔다.
그는 허리에서 뭉툭한 쇳덩어리를 하나 꺼내었다.
그리고 트란에게 주며 말했다.
『너 오늘밤에 마을에 가지? 가거든 이것을 빼고 한창 노래랑 춤이 어울어졌을 때 던져라! 알겠지?』
트란은 그가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아버지를 훔쳐보았다.
웬일로 아버지는 아까 따이한군이 왔을 때보다 더 처참하게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
『갈 적에는 여기 숨겨라.』
하며 트란의 팬티속에 넣어주었다.
디룩거려서 걸음을 옮기기가 몹시 불편했다.
이윽고 밖에서 그 이상한 물체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재빨리 헛간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허리께에서 구멍뚫린 쇠막대기가 불쑥 나타났다.
아버지는 붙은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왔습니다. 기다렸지?』
정부군이 대사립안으로 들어서며 아버지와 트란에게 건네왔다.
그뒤엔 따이한군이 서있었다.
『아직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군?』
하고 정부군이 난처한듯 중얼거리자 따이한군이 무어라 그에게 말했다.
『오케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정부군은 아버지에게 건네왔다.
『마을에 가서 식사를 시킬테니 그대로 보내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붙은듯 서있을 뿐이었다.
『자! 빨리 가자! 시간없다!』
정부군과 따이한군의 재촉에 트란은 또 한번 줄에 끌리듯 그들에게 딸려나갔다.
누나가 어느새 앞장을 서고 있었다.
『트란!』
순간 엄청난 크기의 아버지 음성이,
뒷덜미를 잡았다. 트란은 훗딱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을 던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수류탄이다!』
그와 동시에 탕탕하는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오고 아버지는 푹 쓰러졌다.
트란은 무슨 신호라도 내린 것처럼 팬티에서 쇳덩어리를 꺼냈다.
좁은 가랑이를 빠져나오다가 던질 때 빼라던 철사 꼬부린 것이 쑥 빠졌다.
무엇을 물으면 항상 <너는 몰라도 좋다>고 얼버무리기만 하던 아버지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이 쇳덩어리의 이름만은 알려주는 것일까? 트란은 쇳덩어리를 꼭 쥐었다.
『…그것을 던져서는 안된다! 수류탄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야! 위험하다! 버려라!』
야자나무 둥치에 몸을 감추고 쇠막대기에서 풀풀 불연기를 내뿜던 정부군이 외쳤다.
따이한군도 무어라 소리쳤다.
『쾅―!』
다음 순간 트란은 갑자기 심한 충격과 황홀한 현기를 느끼며 높은 돌담이 와르르 무너내리는 환상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