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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무안 24코스 제2부
물암마을-마갑산-금산방조제-대섬-백동마을-창산마을-매당마을
20221109
1.탄도만 칠면초에 흐르는 바다의 향기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 입구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고 서해랑길 24코스 남은 구간 탐방길에 나선다. 물암마을은 국도24호선이 잿등 고개를 가로지르는데 도로를 경계로 하여 위쪽은 당난구지(當難求地)마을, 아래쪽은 한뿌리마을이다. 당난구지(當難求地)는, 마땅히 어려움을 구할 수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명당지에 속하며, 한뿌리는 '물이 한 곳에 나온다' 해서 한뿌리, 또는 탄도만을 향해 하나로 쭉 뻗어 있는 잿등의 맥을 등지고 있어 한뿌리마을이라 이른다고 한다. 당난구지(當難求地)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국도24호선을 가로질러 한뿌리마을을 거쳐 탄도만 해안으로 내려왔다.
이 지역민들은 일반적으로 탄도만을 서해안이라 이르는 것 같다. 그런데 현경면에서 해제면으로 들어와 서해 바다로 벋어나간 해제반도 양쪽을 함해만과 탄도만으로 구분해 부르는 게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탄도만 바다는 서해 바다로 바로 이어지고, 함해만은 서해 바다 남쪽으로 함평까지 깊숙하게 파고들어 서해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지만해제반도 동쪽의 함해만(함평만)과 서쪽의 탄도만으로 구분하는 게 해제반도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하여도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제면 유월리 한뿌리마을 아래 탄도만 해안에서는 서해랑길 24코스 남은 구간인 해제면 지역이 전체적으로 조망된다. 그곳에서 24코스 탐방의 주요 지점인 해제면 용학리 마갑산(마실산), 마갑산과 대섬을 잇고 천장리로 이어지는 금산방조제, 천장리의 대섬, 창매리의 철마산과 매령산을 가늠하였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걸었던 홀통과 바다의 물바우도 이제 분명히 보인다. 현경면 마산리 물바우(水巖)를 이 지역민들은 '해제 물바우'라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물바우를 지도에 은복도라 기록하고 있는데, 엄섬 또는 은섬이라고도 불리는 은복도(銀伏島)는 함해만 현경면 가입리 앞 바다에 떠 있는 섬인 것 같다.
유월리 탄도만 해안 제방길에는 강아지풀이 아침 이슬을 털며 떼지어 피어 있다. '강아지풀'의 시인 박용래는 '강아지풀'에서 우리 겨레의 고통을 읊었다. 반면에 '풀꽃'의 시인 나태주는 '강아지풀에게 인사'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강아지풀과 서로 대화하는 낭만적 감성을 노래했다. 아침의 강아지풀에 인사하며 탐방객은 바삐 길을 떠난다. "혼자 노는 날 / 강아지풀한테 가 인사를 한다 / 안녕! // 강아지풀이 사르르 / 꼬리를 흔든다 // 너도 혼자서 노는 거니? // 다시 사르르 / 꼬리를 흔든다."(나태주(1945~)의 '강아지풀에게 인사' 전문)
서해랑길은 마갑산(마실산) 해안에 해안길이 조성되어 있지 않아 해안을 벗어나 마갑산 북쪽으로 돌아서 다시 탄도만 해안으로 이어진다. 마갑산 북쪽 해제면 용학리 해제지도로로 내려갔다. 도로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 멋지게 솟아 줄지어 서있으며, 마갑산 자락 길가에 함평 모씨 세장碑 2기가 세워져 있다. 알고 보니 해제면 용학리 기룡마을의 입향조가 함평 모씨이며 마갑산은 함평 모씨의 선산이라고 한다. 해제지도로 기룡마을 입구에서 헤제지도로와 헤어져 용학리 농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해제지도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따라가고 말았다. 그래서 용학리 드넓은 간척농지와 그곳에 자리한 기룡마을을 비롯한 용학리 마을들을 살피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멍청한 짓을 했다. 기룡마을회관 앞 표석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고 한다. "騎龍, 용을 타고 신선이 내려 기룡인가? 용의 기상 서렸기에 기룡인가? 용상 주인 점지되어 기룡인가? 용꿈 꾸고 살아가는 선량들 마을?"
해제지도로에서 드론실기장을 거쳐 금산지구 방조제로 올라왔다. 금산지구 방조제는 용학리의 마갑산과 천장리의 대섬을 이어 천장리 백동마을로 이어지는 긴 방조제이다. 그런데 금산이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다. 천장리 백동마을이 자리한 구릉을 금산이라 이르는 걸까? 아니면 철마산 지역을 금산지구라하는 걸까? 금산방조제는 대섬의 바위들이 활용되었고, 흙은 함평 모씨 선산인 마갑산에서 퍼와서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방조제에 의하여 드넓은 간척지가 조성되어 농지가 부족했던 농민들이 풍요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대신에 마갑산 앞을 흐르던 대섬강은 방조제에 막혀 이제 흐르지 못하고, 넓은 습지와 저수지를 형성하였다. 자연은 인간의 삶에 맞게 개선된다. 갯벌의 중요성과 자연 보존을 지금 외치고 있지만 당시 상황에서 방조제를 건설하여 간석지를 농지로 바꾸는 일은 농민의 먹고 사는 생활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용학리 기룡마을의 유래를 보면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저기 다 놔두고 무점으로 시집 가냐?'
"기룡마을은 무점이라고도 불렀으며, 주민들은 똑점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도 옹기 파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마을은 농지가 없었다. 금산간척지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다. 밭이라야 손바닥만한데 그것도 비가 와야 농작물을 심을 수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다 간척이 되면서 비로소 벼를 심을 수 있는 농지를 갖게 된 것이다. 마을이 얼마나 가난했던지 다른 마을에서 이 마을로 시집을 오려고 하면 비아냥거리면서 불려졌던 노래가 있다. ‘여기저기 다 놔두고 무점으로 시집 가냐’라는 자조적인 노래이다."(무안문화원)
대나무가 많이 자라서 '대섬'이라 불리는 바위섬에 만민교회가 세워져 있다. 재일교포 김문평씨가 소유하고 있던 섬인데 만민교회로 소유주가 넘어갔다고 한다. 이 만민교회 때문에 서해랑길은 대섬을 거치지 못하고 대섬을 돌아나간다. 대섬을 거치지 못하여 아쉽지만, 대섬을 사유지로 둔갑시킨 무안군 행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탄도만 천장리 해안에서 백동마을로 올라갔다. 백동마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희생당했던 148명의 영령을 모신 위령비가 있다고 하는데 어디인지를 모르고 그냥 지나친다. 천장리 학살은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집에서 피해자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천장리 장동마을 출신들이라고 한다.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 이후 퇴각로를 잃은 신안 임자도 주둔의 인민군들이 지리산으로 퇴각하기 위한 중간지점인 영광 불갑산을 향해 퇴각하는 도중이었다. 10월 14일(음력 8월22일) 천장리 장동마을에 도착한 인민군은 한밤중에 주민 148명을 천장리 백동마을 가실 근처 바닷가 산기슭으로 끌고 가 총칼과 죽창으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마을 단위로는 가장 많은 양민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인민군의 양민 살육현장이었던 해안에 1984년에 위령탑, 1985년에 추모비, 그리고 1988년에 묘지 단장을 했으며, 현재 무덤은 74기가 있다고 한다.(무안문화원 참조) 민족의 비극, 인류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카인과 아벨의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평화, 민족의 평화와 세계 인류의 평화를 간절히 소망한다. 인간 세상은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는 인간 욕망들의 투쟁인가? 그렇다고 하여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야 할까?
천장리 백동마을에서 탄도만 해안으로 내려갔다. 바다 갯벌 모래밭에 붉은 칠면초들이 모여 있다. 칠면초(七面草)는 칠면조의 얼굴처럼 붉게 변한다고 하여 칠면초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름 이후 대군락지의 붉은 풍경이 장관을 이루며, 그 풍경의 장관은 주로 서해안 지역에서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모래밭으로 내려가 칠면초에게로 가보았다. 아직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칠면초 잎을 조금 씹으면 짭조름하며 씁쓰레한 맛이 느껴진다. 그 맛에 바다의 향기가 스며 있다. 드넓은 탄도만 갯벌바다의 갯벌내음, 바다의 향기가 입 안에 피어오른다. 칠면초 붉은 꽃 잔치 절정기에 칠면초 대군락지에 가보고 싶다. 저녁노을 물드는 칠면초 풍경 속에 나도 한 풍경이 되고 싶다. 갯벌 내음, 바다 향기 가득 머금고서.
천장리 백동마을 구릉 앞에서 탄도만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창매리 해안을 동그랗게 돌아간다. 탄도만을 에워싼 해안마을의 밭에서는 주로 양파와 양배추를 재배하고 있다. 특히 매령산 자락 언덕밭에서는 양배추들이 풍성히 자라고 있다. 매령산 자락을 둘아가며 걸어온 탄도만 해안의 위치를 확인하는 즐거움에 빠진다. 새벽에 현경면 용정리 봉오재마을 앞에서 출발하여 곡지마을과 검무산, 홀통을 거쳐온 해안을 어림한다. 제대로 위치 점검도 못하면서 헐레벌떡 걸었던 오류리 검무산과 불빛 속 홀통 해안이 분명히 제 모습을 보여준다. 탄도만 북쪽 끝 유월리 물암마을과 마갑산, 대섬을 돌아서 천장리 백동마을과 창매리 매당마을로 이어지는 탄도만 해안선이 반가운 친구처럼 정답다.
매당마을로 내려갔다. 입구에 오랜 연륜을 보여주는 팽나무 두 그루가 있다. 두 그루 팽나무 앞 작은 양파 모종밭에서 여인들이 양파 모종을 분리해 내고 있다. 이제 양파 모종을 양파밭에 옮겨심는 어려운 일이 남아 있다. 그래서 요즈음 무안에서는 일손이 많이 가는 양파 재배보다 일손이 덜 가는 양배추 재배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창매리 매당마을은 매령산 자락에 위치한다. 지도에 중매산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 산은 매령산 옆 매안마을 쪽 산이다. 매령산은 마을 주민들이 신령시 여기는 산으로, 산 이름도 마을 주민들이 직접 지었다고 하며, 의미는 매당마을의 신령스러운 산(梅靈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매령산은 탄도만의 중심이 되는 산들 중의 하나로 탄도만을 탐방하는 데 기준이 되어주는 산이다.
매당마을 앞 바다에 개구리섬 와도(蛙島)가 앙증스럽게 떠 있다. 그 뒤쪽으로 탄도 섬이 보인다. 탄도만이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는 탄도 섬은 망운면 송현리 조금나루에서 지척이다. 탄도만을 동북쪽으로 한 바퀴 돌아 창매리 매당마을에서 바라보는 탄도 섬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탄도, 숯섬 炭島가 아니라 여울섬 灘島라고 해야 올바르다고 한다. 서해랑길 24코스 탐방 때 송현리 조금나루에서 철벅철벅 바다를 건너 여울섬으로 걸어가는 환상에 젖었었다. 매당마을에서 여울섬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울섬이 오랜 친구처럼 나를 부른다. 너에게로 가고 싶다. 여울섬이 그리움으로 내 가슴을 달군다. 그리움 가득 품고 탄도만 밖 서해 바다를 아득히 바라보았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0.72km 중 9.22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30분 중 2시간 47분
서해랑길 24코스 시점 11.5km, 종점9.0km 지점. 바다 건너편 왼쪽에 솟은 산이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으로 그 아래가 24코스 종점이다. 서해랑길은 국도24호선 현해로를 건너 한뿌리마을을 거쳐 탄도만 해안으로 내려간다.
길 건너편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회관 아래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해제면 유월3리 물암(勿岩)마을은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 방면으로 3㎞ 정도 떨어져 있으며 유월3리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당난구지와 한뿌리[一根]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24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다. 當難求地 또는 唐難求地는 24번 도로 오른쪽의 함해만 쪽으로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當難求地는 마땅히 어려움을 구할 수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 알려졌다. 먹고 살 수 있는 길지라는 것이다. 唐難求地는 당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구함을 받았다는 땅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동동구리, 동동고지라고도 부르며 난을 당해도 인명을 구할 수 있는 자리일 뿐 아니라 동서 양편이 북과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마을의 위치도 함해만에 접해 있어 이름처럼 먹고 사는 것에 크게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지역이다." - 무안문화원
한뿌리마을을 거쳐 탄도만 해안으로 내려와 뒤돌아보았다. 이 지역민은 탄도만 해안을 그냥 서해안이라 이르는 것 같다.
"한뿌리마을은 서해안을 바라보고 위치해 있다. 예전에 마을 뒤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잿등이라는 고개가 24번 도로를 가로질러 있었는데 그 잿등의 맥이 서해안을 향해 하나로 쭉 뻗어 있었다. 이 마을은 그 맥을 등지고 형성되었는데 한뿌리라는 마을 이름은 그곳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른 유래도 있다. 마을의 지형이 한 발로 찧는 방아 형국의 땅이어서 불려졌다는 것이다. 실지로 주민들이 방에 누워있을 때 ‘쿵 쿵’하는 방아 찧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옆 마을인 기룡마을에서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기룡 마을 주민들이 물암 마을에 농지가 있어 경작을 해왔는데 '물이 한 곳에 나온다' 해서 한뿌리라 불렀다." - 무안문화원
현경면 가입리 명당지 안산이 앞에 있다. 가입마을은 안산 왼쪽 뒤 아래 함해만 쪽에 위치한다.
"안산에 속칭 해제 8명당 중 하나인 花蟹弄珠(화해롱주, 게가 구슬을 희롱하는 명당)의 형국이 있다. 산의 지세가 마치 게의 형국으로 앞 섬인 은복도를 구슬로 보고 희롱하는 형국이다. 이 명당은 장성 출신으로 황주 변씨인 망암 변이중 선생의 사패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선생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시 전라도 소모어사를 할 때 지나가면서 봐 두었던 명당으로 죽을 때 이곳에 자신의 묘를 쓸 것을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던 명당지이다." - 무안문화원
중앙 뒤에 현경면 오류리 홀통, 그 왼쪽 앞에 현경면 마산리 물바우, 맨 왼쪽 뒤는 오류리 검무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한뿌리 마을 앞에 물바위가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현경면에 속하지만 보통 해제 물바우라 부른다. 고기잡이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부인이 애기를 업은 채 돌이 되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바위다. 망부석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하여 주민들은 이 바위를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혼이 바위가 되었다 해서 넋바위[魂巖] 또는 물바위[水巖]이라 불렀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주변 마을의 아낙네들이 많이 찾아와서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려 왔다. 부부간의 情이 시원치 않거나 恨이 많은 아낙네들은 이 바위를 찾아와 넋두리를 하거나 쓰다듬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한다. 평상시에는 바위의 7부까지만 바닷물이 차올라 마치 먼 바다를 향해 합장하고 있는 불심 깊은 스님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막상 다가가서 보니 둘레가 9.7m나 되고 길이는 1.9m가 넘는 큰 바위이다. 예전에는 모래 속에 많이 묻혀 있어서 아이들이 바위 위에 쉽게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점차 모래가 씻겨 나가면서 주민들은 바위가 자라고 있다고도 했다. 썰물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니 마치 아낙네가 편안하게 앉아서 굴을 까고 있는 모습이다." - 무안문화원
맨 왼쪽에 24코스 종점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 중앙 앞에 해제면 천장리 대섬, 오른쪽에 해제면 용학리 마갑산(마실산)이다.
해제면 용학리의 마갑산(마실산) 왼쪽으로 금산방조제가 천장리 대섬으로로 이어진다. 맨 왼쪽에 천장리 철마산이 가늠된다.
해안 제방길에 강아지풀이 떼지어 피어 있다. 박용래 시인의 '강아지풀'이 생각난다. 겨레의 고통과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반면에 나태주의 '강아지풀'은 낭만적이다. 위쪽 언덕은 국도24번의 수암교차로 부근일 것이다.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 구내 모퉁이/ 어메는 노오란 아베도 노란 화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마른 침목(枕木)은 싫어/ 삐걱 삐걱 여닫는 바람소리 싫어/ 반딧불 뿌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 간다./ 다 두고 이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 소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 박용래(1925~80)의 '강아지풀' 전문
"길가나 빈터, 묵정밭에 고개를 수그리고 피어 있는 연한 녹색의 강아지풀. 손으로 쓸어보면 비단처럼 보드랍게 넘어가다가도 꽃 이삭의 까끄러움이 꼭 손가락에 남는 것. 가난한 이사를 가는가. 화물차에 실려 어느 역 구내 모퉁이에 가난한 강아지풀 식구들이 오종종 묻어 있는가. 솥단지는 없이 이슬단지만 들고 가는가. 절창은 바로 여기.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엄마가 해준 음식찬합을 들고 심부름을 가면 꽃이 가득한 화단을 가꾸고 있다가 “아이구, 내 강아지들, 왔는가” 일어서시던 외할머니 그리워지는 “오요요 강아지풀”. <김승희·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
해제면 유월리 탄도만 해안 제방길을 따라 용학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은 유월리 한부리들이다.
왼쪽에 물바우, 그 오른쪽 뒤에 홀통, 맨 오른쪽에 천장리 대섬, 그 왼쪽 뒤에 창매리의 매령산이 확인된다.
왼쪽에 천장리 대섬, 맨 오른쪽에 용학리의 마갑산(마실산), 대섬과 마갑산을 잇는 금산방조제가 조성되어 있다. 중앙 왼쪽 맨 뒤에 창매리 철마산이 보인다.
한부리들 위쪽 언덕에 국도24호선 해제지도로가 달릴 것이다. 오른쪽 뒤에 해제면 유월리의 이성산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곧바로 용학리 마갑산(마실산) 해안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으로 오른다.
유월리에서 용학리로 넘어왔다. 전봇대 뒤에 명당지 안산, 오른쪽 바다에 물바우, 그 뒤쪽에 홀통이 흐릿하다.
물바우황토펜션 뜰에 초록 구슬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멀구슬나무들이 자란다. 오른쪽길로 해제지도로로 내려간다.
해제면 용학리 마갑산 언덕의 물바우펜션에서는 탄도만의 일출과 일몰 조망이 모두 가능해 보인다.
이곳에서 길을 건너 맞은편 농로로 진입하여 농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그냥 국도를 따라가고 말았다. 길 건너 오른쪽은 해제(海際)에서 최초로 교회가 세워진 기룡마을 입구이다. 기룡마을 소개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온다.
"용학4리인 이 마을은 기룡동과 반탁골로 이루어졌으며 도성 마을에서 1988년에 분리되었다. 이 마을의 지명인 기룡동은 마을 앞에 있는 함평 모씨의 선산인 馬甲山[또는 마실산]에서 비롯된다. 마갑산의 지세가 앞에 있는 대섬강을 향해 힘차게 건너는 형국이어서 그것을 바라보는 마을의 이름을 기룡(騎龍)이라 하였다. 대섬강은 금산 간척지가 형성되기 전 마갑산 앞에 있었던 강이다. 현재는 종교시설이 들어선 대섬은 풍수상 말 구시통에 해당한다. 속칭 해제 8명당 중 하나에 해당하는 마을로 추마도강(捶馬渡江) 또는 갈마음수(渴馬飮水)의 지형을 안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의 牟氏 입향조는 모찬경(자-시숙. 1722-1832)이다. 공은 함평 모씨 22세손으로 1700년대 중반에 양매리 외분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씨가 해제에 들어온 것은 250여 년 전 13세 모수진공이 함평군 손불면에서 양매리로 입향한 것이 최초다. 문헌으로 살펴 본 이 마을의 지명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의 자료에 해제면 騎龍洞,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용학리 기룡동으로 나온다. 이후 1980년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다가 근래에 다시 해제면 용학4리 기룡동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무점이라고도 불렀다. 옹기를 구웠던 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오른쪽에 도리갱변(돌아가는 강변)이라 부르는 곳에 옹기 가마터가 있었다. 주민들은 똑점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도 조금만 파면 옹기 파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마을은 농지가 없었다. 금산간척지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다. 밭이라야 손바닥만한데 그것도 비가 와야 농작물을 심을 수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다 간척이 되면서 비로소 벼를 심을 수 있는 농지를 갖게 된 것이다. 마을이 얼마나 가난했던지 다른 마을에서 이 마을로 시집을 오려고 하면 비아냥거리면서 불려졌던 노래가 있다. ‘여기저기 다 놔두고 무점으로 시집 가냐’라는 자조적인 노래이다." - 무안문화원
해제지도로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즐비하다. 왼쪽 마갑산 자락에 함평 모씨 세장碑가 세워져 있다.
국도24호선 해제지도로 옆, 함평 모씨의 선산인 마갑산(마실산) 자락에 함평 牟씨 세장碑가 세워져 있다. 함평 모씨 선조가 해제면 용학리 기룡마을 입향조라고 한다. 빗돌은 기룡마을을 향하여 있다.
해제지도로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즐지어 서 있다. 해제지도로 오른쪽 용학리 농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국도를 따라가는 실수를 범하여, 농로에서 용학리 들녘을 살피지 못하고 말았다.
"해제면 용학리(龍鶴里)는 동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 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룡동, 도성동, 장성동, 이방리, 학천동을 합하였으며 기룡과 학천의 이름을 따서 용학리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용학리는 도성, 장성, 이방, 기룡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용학리 곳곳에는 옹기를 구웠던 흔적과 점등, 무점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에 도성리, 이방리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기룡동, 도성동, 장성동, 이방리, 학천동 등이 나온다. 이어 1917년과 1987년의 자료에도 해제면 용학리 기룡동, 도성동, 장성동, 이방리, 학천동으로 표기되었다." - 무안문화원
서해랑길을 정상적으로 걸어오면, 용학리 농로에서 해제지도로로 나와 오른쪽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 드론실기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드론실기장 앞을 거쳐 금산방조제로 나간다. 오른쪽에 대섬강이 보인다.
금산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대섬강은 넓은 습지를 형성하고 용학리 일대에 드넓은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왼쪽 뒤에 목적지인 창매리의 매령산, 중앙 오른쪽 뒤에 천장리의 철마산이 가늠된다.
서해랑길은 금산방조제 제방길을 따라 천장리 대섬으로 넘어간다.
가락회관과 마실횟집이 탄도만 마갑산 해안에 자리하고 있지만 겨울철이어서인지 문을 닫았다. 멀구슬나무가 운치 있다.
방조제 끝에 대섬이 보인다. 금산 지구 방조제는 마실산에서 천장리 대섬을 거쳐 창매리 해안으로 이어진다.
해제지도로 마갑산 자락에서 드론실기장으로 들어와 금산방조제로 올라왔다. 이곳은 마갑산이 대섬강을 건너는 형국의 명당지라고 한다. 그래서 마갑산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 기룡(騎龍) 마을이며, 오른쪽은 해제면 용학리 지역이다.
대섬강은 금산 간척지가 형성되기 전 마갑산 앞에 있었던 강인데, 지금은 흐르지 못하는 강이 되어, 주변에 넓은 습지와 저수지를 형성하였다. 오른쪽에 해제지도로의 마실교가 대섬강을 가로지르고, 중앙 뒤에 천장리의 독산과 천마산이 보인다.
방조제 끝 대섬, 그 왼쪽 뒤에 현경면 오류리 홀통, 오른쪽 뒤 해제면 창매리의 매령산과 중매산을 가늠한다. 이곳을 금산 지구라 하는데, 금산이 어디일까?
왼쪽 뒤에 현경면 오류리의 홀통이 흐릿하다. 앞에 천장리의 대섬 선착장과 오른쪽에 만민교회가 보인다. 만민교회가 들어서 있는 대섬은 풍수상 말(馬) 구시통에 해당한다고 한다.
오른쪽 현경면 오류리 홀통에서 왼쪽 현경면 마산리와 가입리로 이어진다. 중앙 왼쪽에 물바위가 보인다.
오른쪽 현경면 마산리와 가입리로 이어져 왼쪽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맨 오른쪽 끝에 물바위가 보인다.
오른쪽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에서 왼쪽 해제면 용학리와 마갑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갑산 해안길이 없어 서해랑길은 마갑산 뒤쪽으로 이어와 금산방조제 제방으로 나온다.
마갑산의 산세가 왼쪽에 있는 대섬강을 향해 힘차게 건너는 형국이며, 마갑산 북쪽(뒤쪽)에 있는 마을은 이 형국을 바라보는 마을이어서 기룡(騎龍)마을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마갑산 오른쪽 뒤에 해제면 만풍리 이성산이 보인다. 마갑산(마실산) 남쪽(앞쪽) 자락에 가락회관과 마실횟집이 있으며, 마갑산은 해제면 용학리 기룡마을 입향조인 함평 모씨 선산이라고 한다.
해제면 용학리에서 천장리로 넘어왔다. 선착장 뒤가 대섬인데, 대섬은 풍수상 말(馬) 구시통에 해당한다. 현재는 종교시설 만민교회가 들어서 있다. 대섬을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좋을텐데 만민교회가 자리하여서 통제되는 것 같다.
"대가 많이 있어서 대섬이라 했는데 바위섬이다. 제일교포인 김문평씨가 소유하고 있던 섬인데 만민교회로 소유주가 넘어갔다. 대섬엔 바위가 많아 금산간척지를 막는데 활용되었다. 흙은 함평 모씨 선산 마갑산에서 퍼왔다. 지금은 간척을 위한 제방이 쌓여져 육지와 연결되었는데 그곳에 만민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 불렸다고 한다. 대섬에 만민교회가 들어서 있다.
무안 만민교회 표석이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탄도만 해안으로 걸어오면 좋을텐데 그러지 못하여 아쉽다.
해제면 천장리 925 지역으로 24코스 종점 5.8km 지점이다. 금산 지구 방조제가 해제면 용학리에서 천장리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 뒤에 백동마을이 보인다. 이정목 뒤에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 그 오른쪽에 중매산이 가늠된다.
창매리의 매령산과 그 오른쪽에 중매산이 가늠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농장이 보이는 백동마을로 이어진다.
왼쪽에 현경면 오류리의 홀통이 바다로 돌출하였고, 드넓은 탄도만의 갯벌 바다가 펼쳐져 있다. 멀리 탄도 섬을 어림해 본다.
금산 지구 방조제가 해제면 용학리 마갑산 자락에서 오른쪽 천장리 대섬을 거쳐 길게 이어지고 있다.
탄도만 해안 제방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천장리 백동마을로 향한다.
농로를 따라 오른쪽 양배추 밭이 있는 언덕의 농장으로 올라간다. 뒤에 솟은 산은 창매리 매령산이다.
스프링 쿨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리고 있는 양배추밭 언덕에 한우 축사가 있는 농장이 있다.
천장리 백동마을 들녘에 양배추밭과 양파밭이 드넓다. 왼쪽 뒤에 살짝 보이는 마갑산에서 중앙의 대섬과 오른쪽 해송숲으로 금산 지구 방조제가 길게 이어진다.
천장리 들녘에 백동마을이 몇 곳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천장리(泉壯里)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 지점에 위치한다. 里의 서쪽으로는 금산간척지가 있으며 24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의 갈등으로 인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백동마을에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이 있다. 보천동의 샘은 마을 이름에 등장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천장삼거리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창매리 양월리와 함께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으나 1906년에 무안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보천과 장동의 이름을 따서 천장리(泉壯里)라 하여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장동, 보천, 돌기, 백동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장동마을에 기계 유씨 진산단을 포함하여 재각인 황관재 그리고 효자각 열부각 등 각종 비가 있으며 보천동에는 공덕비 등 3개의 비가 있다. 백동마을에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145명의 영혼을 모신 위령탑이 있다." - 무안문화원
백동마을 언덕에 드넓은 밭이 있으며 양배추와 양파를 재배하고 있다. 오른쪽 산이 철마산이라 가늠한다.
"잣골이라고도 불리는 백동(栢洞)은 가실과 함께 천장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금산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원래는 장동과 한 마을이었으나 198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천장1리에서 분리되어 천장3리가 되었다. 가실은 당초 가곡(佳谷)이라 불렀다. ‘栢洞’이란 지명 유래에 대해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에 잣나무가 많았으며 백동과 가실을 합하여 栢洞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물어 보니 원래 마을에 잣나무는 없었다고 한다. 대신 참나무과에 속한 아름드리의 상수리나무들이 많았는데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상수리나무를 잣나무로 여겨 잣골로 이름 지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이 온통 야산지대였다. 근래에 들어 개간이 되면서 밭으로 변했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대부분의 주민이 김성규와 김철진의 소작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 주변의 땅 80% 이상이 김성규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김성규는 일제 강점기 때 상성회사를 차려 아들 김철진과 함께 이 땅들을 관리했다. 이처럼 무안 곳곳에는 김성규 소유의 땅들이 많았다. 조선조 말 그는 전라남도 양무감리를 맡으면서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일제 강점기 때 해제 지역의 상성회사와 흥업회사는 해제초등학교 앞에 있었다. 이 마을에는 1950년대에 백동에 7가구, 가실에 5가구가 살고 있었다. 가실에는 1950년 10월에 희생당했던 148명의 영령을 모신 위령탑이 있다.
한국전쟁에 148명의 양민이 희생돼 마을 옆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 철마산(鐵馬山)이다. 마치 산의 형태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함께 한 주민에게 ‘왜 철마산이라 이름 붙였느냐’고 물었으나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을 앞 바닷가 가오리골 주변에서 철을 제련하고 남은 슬러지로 보이는 쇠똥들이 많이 발견되기도 한다. 마을 앞으로는 서해안 바다가 자리하고 있다. 해서 이 마을의 특산 해산물이 석화와 낙지이다. 밭농사 특산물은 콩이다. 콩밭 곳곳에 채종장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있어 콩 종자를 채취하는 단지임을 알 수 있다. 마을의 동북쪽에 대섬이 있다. 우죽골[牛跡洞], 돈머리[豚頭], 가오리골, 송성골, 약나무골 등이 있다. 가오릿골은 마을 앞 바다에서 잡았던 가오리를 방죽을 만들어 보관한데서 비롯되었다. 송성골은 오리와 관련된 지명이다. 한국전쟁 때 주민들은 벼를 수확하지 못했다. 무섭기도 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다 보니까 일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확하지 못한 벼를 청둥오리들이 날아와 먹었다. 벼를 먹은 오리들은 갯벌에 가서 뻘을 집어먹었는데 대부분의 오리가 뻘바닥에 쓰러져 주민들에게 잡혔다. 그 오리를 주었던 골짜기를 송성골이라 부른다. 약나무골은 장동마을에서 백동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저수지가 있는데 그 저수지 위를 말한다. 그 골짜기에 약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무안문화원
천장리 백동마을이 몇 곳에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왼쪽 뒤의 산은 창매리의 매령산, 그 오른쪽은 중매산이라고 가늠한다.
탄도만 천장리 해안이 건너편 창매리 해안으로 둥글게 돌아간다. 창매리 매령산이 탄도만의 기준이 되어 준다.
천장리 백동마을 신선채팜 농장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탄도만 해안으로 내려간다. 뒤쪽에 보이는 마을이 장동마을이다.
"장동마을은 해제 수암 사거리에서 시작되는 해제면 외곽도로를 따라 지도 방면으로 약 4㎞ 가량 가면 찾을 수 있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해제면 천장1리에 속한다. 장동과 장두로 이루어진 이 마을의 특산물인 감태와 숭어는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올라갈 정도로 맛이 좋았다. 해서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을 포함한 백동과 창매리 양월리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하기도 했었다. 마을이 처음 이루어질 당시는 짱골[壯谷]이라 하였다. 마을 전체가 소[牛] 형국을 취하고 있어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듯 하다. 마을을 둘러싼 곳곳에 소와 관련된 지명들이 있다. 즉 우족동, 구시통, 핑경등, 각골 등이 그것이다. 또한 현재 마을이 있는 곳은 소의 배 부분에 해당되며 소가 이 마을을 감싸는 형국이라 하여 행정구역 개편시 현재의 ‘壯洞’으로 바꿨다.
원래 이 마을의 터는 마을 앞 철마산 기슭이었다. 당시 마을의 좌향은 북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자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마을 뒤에는 기계 유씨 兪永煥과 관련된 진산단(珍山壇)이 있다. 진산단은 유영환 선생의 문하생들이 그의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1년에 세운 단으로 매년 음력 2월 13일에 제자들이 모여 제사를 모신다. 유영환(1834-1877, 호- 東溪)은 김중암 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의 조예가 깊어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돌기마을에서 장동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기계 유씨 입향조를 모시는 문중재각인 황관재가 있다. 1984년에 건립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제사를 지낸다." - 무안문화원
왼쪽 뒤에 천장리 백동회관이 보인다. 언덕에는 무안의 명품 양파밭이 펼쳐져 있고 마을 아낙들이 양파 모종을 심고 있다.
탄도만 해안은 천장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창매리로 넘어가 건너편 창매리 해안으로 이어진다. 건너편 창매리 해안 왼쪽에 매령산과 그 오른쪽에 중매산이 있다.
탄도만 바다에 붉은 칠면초가 자라고 있다. 내려가서 칠면초를 살폈다. 오른쪽 뒤에 홀통이 보인다.
가을에 군락을 이루는 붉은 칠면초가 드넓게 펼쳐진 탄도만 해안이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탄도만 해안이 해제면 천장리에서 창매리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아가고 있다. 왼쪽의 산은 창매리의 중매산이다.
맞은편에 창매리의 매령산과 중매산이 있다. 서해랑길 24코스 종점이 매령산 뒤쪽 매당노인회관이 있는 곳이다.
탄도만 모래밭에서 칠면초를 살피고 해안으로 올라왔다. 중앙 오른쪽에 신선채팜 농장, 왼쪽 뒤에 백동회관이 보인다.
해제면 백동길 108-54(천장리 1016-1) 신선채 식품연구소는 친환경 농산물 가공업체이다. 이곳을 지나면 창매리로 넘어간다.
해제면 천장리에서 창매리로 넘어왔다. 방조제 아래의 농로를 따라 해안길을 걸어 창매로로 나간다.
해제면 천장리 언덕의 백동마을에서 탄도만 해안으로 내려와 해안의 방조제 아래 농로를 따라 창매리로 들어와 걸어왔다.
이 지역 주민들은 그냥 서해 바다라 이르는 것 같다. 중앙 왼쪽에 홀통과 그 왼쪽 현경면 탄도만 해안이 흐릿하다.
창매리 해안을 따라 창매로로 나간다. 왼쪽의 산은 창매리의 중매산이다.
탄도만 창매리 해안이 동그랗게 돌아가고, 썰물 때의 간석지(干潟地) 배들이 갯벌에 정박해 있다. 왼쪽의 매령산 품이 넓다.
해제면 창매리 창매로로 나가는 도중 농로에서 멀구슬나무를 만났다. 멀구슬나무 열매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탄도만 해안을 걸어 오른쪽에서 창매로로 나왔다.
창매로 왼쪽 철마산 자락에 창산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에 독산, 오른쪽에 철마산, 그 아래 창산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지역민들은 오른쪽 산을 철마산이라 이르는데, 지도에는 천마산이라 적혀 있다. 창산마을에 대한 소개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온다.
"창산은 창매1리에 속하는 마을로 광산 김씨의 동족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창마(蒼馬)라 했으나 언제 현재의 창산(蒼山)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자료를 통해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나 1912년의 자료로는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1906년까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기 때문이다.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 해제면 창매리 (창마)蒼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엔 해제면 창매리 창산(蒼山)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창산, 진등, 참샛골, 장두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철마산을 주산으로 하고 우측에 독산과 응봉산(매봉산), 좌측에 도문산 그리고 마을 앞 건너에 중매산이 자리하고 있다. 철마산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독산은 산 위에 커다란 독(바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 독아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응봉산은 철마산과 독산 사이에 있는 산이다. 응봉산 기슭에 금굴이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철마산에 쇠로 만든 말이 자리하고 있어 주민들이 그곳에서 치성을 드리곤 했다’고 한다. 이는 철마신상을 모셨다는 말이 된다. 이 지역이 목장이었기 때문에 전해져 오는 풍습으로 보인다. 목장이 있었던 진도의 철마산 유래를 보면 ‘고을 수령이 북산에서 1년 중 특정한 날짜에 말 목장의 원활한 마정(馬政, 말의 사육·개량·번식·수출입 따위에 관한 행정)을 기원하며 철마신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마조단(馬祖壇)이 있던 데서 철마산 이름이 붙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중앙 오른쪽 바다로 돌출한 천장리 백동마을 언덕 끝에서 창매리로 이어지는 탄도만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탄도만 해안이 창매리의 매령산 자락으로 동그랗게 이어진다. 맞은편 바다에 홀통이 흐릿하게 보인다.
창매로에서 뒤돌아서 옥산과 철마산, 그 아래 창산마을을 다시 바라보았다. 창매리에 관한 소개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긴다.
"해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금산 간척지를 지나 6㎞ 지점에 위치한 창매리는 해제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창매리는 천장리, 양월리와 함께 조선시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으면서 진하산 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창산은 철마산이 주산이며, 매당은 매령산, 매안은 중매산이 주산이다. 자료에 따르면 190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영광군 진하산면 창마리(蒼馬里)로 나온다. 또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하산면에 속했던 신월, 명양, 신촌, 창마, 매당, 장동 등의 6개 마을이 해제면으로 바뀐다.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창매리 창마리와 매당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현재의 창산, 매당, 매안 등 세 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창산에 결풍재, 매당에 광산 김씨 삼강려를 포함하여 각종 비가 있다. 매당 매안마을에서 생산하는 낙지, 감태, 석화 등은 해제의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 무안문화원
천장리 백동마을 언덕 끝에서 창매리로 이어지는 탄도만 해안을 조망하였다. 양파밭에서는 여인들이 양파모종을 내고 있다.
창매로에서 다시 뒤돌아보았다. 오른쪽 철마산과 왼쪽의 독산 사이에 응봉산이 보이고 그 아래 창산마을이 있다. 창매로 길 양쪽 밭에서는 모두 양파를 재배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창매로의 창매교회 앞을 지나 왼쪽 매령산으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창매로에서 왼쪽 매령산 가는 길로 이어간다. 앞에 보이는 산은 중매산이며 창매로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창매로는 국도24호선 지도해제로로 이어진다.
창매리 868 지역으로, 24코스 종점까지 1.9km가 남아 있다. 뒤쪽은 해제면 양월리 해안이다.
창매로에서 매령산 방향의 길로 들어선다. 왼쪽에 매령산이 보인다.
오른쪽 뒤에 철마산, 중앙 앞에 창매교회, 왼쪽 뒤는 탄도만 양월리 해안이다.
왼쪽 뒤에 철마산, 맞은편 창매리 해안이 매령산 아래 창매리 해안으로 동그랗게 이어지고 있다. 양파밭과 양배추밭이 드넓다.
양배추밭 사이의 농로를 따라왔다. 오른쪽은 창매리 독산 자락, 그 왼쪽 뒤는 양월리의 왕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양배추밭에서 알이 꽉 찬 양배추가 아침이슬을 머금고 자라고 있다.
맨 오른쪽 뒤에 도문산, 그 왼쪽에 철마산, 그 왼쪽 중앙에 독산과 응봉산(매봉산)이 보인다. 맨 왼쪽 뒤는 양월리 왕산이다.
탄도만 해안이 동그랗게 돌아가고 중앙에 철마산, 그 왼쪽에 독산, 그 오른쪽에 도문산이 가늠된다. 철마산 자락에 창매리 창산마을, 맨 오른쪽 천장리 백동마을, 도문산 오른쪽에 천장리 장동마을이 모두 가늠된다.
중앙 뒤에 흐릿하게 보이는 용학리 마갑산에서 시작하여 왼쪽 백동마을 구릉으로 금산방조제가 이어지고 있다.
매령산 자락길을 따라 창매리 매당마을로 이어간다. 바다 건너 맞은편은 왼쪽 마갑산으로 이어지는 해제면 탄도만 해안이다.
오른쪽 용학리 마갑산(마실산), 왼쪽 천장리 백동마을 구릉, 그 오른쪽 바로 뒤에 대섬이 가늠된다.
오른쪽 현경면 용정리로부터 중앙의 오류리 검무산과 왼쪽 홀통, 맨 왼쪽 마산리로 탄도만 해안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탄도만 창매리 매당마을 앞 바다에 머우섬이라 불리는 개구리 섬(蛙島)이 떠 있고, 그 뒤에 탄도 섬이 가늠된다.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 아래에 자리한 매당마을이 보인다. 매당마을 앞 바다에 와도와 그 뒤에 탄도가 가늠된다.
"해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금산 간척지를 지나 6㎞ 지점에 위치한 창매리는 해제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창매리는 천장리, 양월리와 함께 조선시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으면서 진하산 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창산은 철마산이 주산이며 매당은 매령산, 매안은 중매산이 주산이다. 자료에 따르면 190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영광군 진하산면 창마리(蒼馬里)로 나온다. 또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하산면에 속했던 신월, 명양, 신촌, 창마, 매당, 장동 등의 6개 마을이 해제면으로 바뀐다.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창매리 창마리와 매당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현재의 창산, 매당, 매안 등 세 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창산에 결풍재, 매당에 광산 김씨 삼강려를 포함하여 각종 비가 있다. 매당마을과 매안마을에서 생산하는 낙지, 감태, 석화 등은 해제의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 무안문화원
매당마을 북쪽에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마을의 당산나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을 남쪽 입구 매화정 옆에 오래된 팽나무가 있는데 그 당산나무 앞에 선돌을 세워 놓았다. 마을 아낙들이 양파 모종을 캐내는데, 이 모종을 양파밭에 심을 것이다.
"마을에 당산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그 중 마을 앞에 있는 나무가 몇 해 전에 고사되어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았다. 고사된 나무는 버드나무였다. 세 아름이 훨씬 넘는 크기였는데 태풍에 넘어지면서 고사된 것이다. 그 나무 옆에는 수호신처럼 서있던 선돌이 있었다. 주민들은 그 선돌을 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나무 옆에 세워놓았다. 마을 옆에 있는 나무는 둘레가 4미터10이 넘을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무다." - 무안문화원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 동쪽 자락에 매당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매당마을에 관한 소개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온다.
"매당마을은 창매2리에 속하는 마을로 진등, 산넘어(통계), 매당 등 세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매당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주민들은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 좋은 터를 나타내는 명당이 와전되어 孟堂으로 이후 맨댕이로 불러왔다가 행정구역 개편 당시 梅堂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은 梅靈山과 中梅山을 배경으로 하고 마을 앞에는 서해 바다를 접하고 있다. 梅靈山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해서 부르는 이름이고 中梅山은 매당과 매안의 가운데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산 중턱의 경사진 곳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주변 경치는 좋지만 농지가 적고 물이 귀해 생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해제에서 잘 사는 마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마을 앞 바다 우아래갓이란 곳에서 무안에서 가장 질이 좋은 매당석화와 매당낙지 그리고 매당감태 등 다양한 수산물을 수확하여 높은 수익을 올리기 때문이다. 실지로 감태를 매는 계절이 오면 마을 전체에 향기로운 냄새가 넘친다. 마을 앞 정챙이 뻘에서 매(채취)는 감태는 무안에서 가장 질 좋은 감태로 소문이 났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 나가서 하루에 20동 이상씩 매기도 했다. 그 외에 낚시 미끼인 홍거시를 비롯하여 낙지, 석화 등은 이 마을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마을 뒤에 있는 산은 예로부터 ‘명당산’이라 불렀다. 해제에 비가 오지 않으면 양월리에 있는 사람도, 대사리와 양매리에 있는 사람도, 이 산으로 기우제를 지내려 왔다. 해제의 모든 사람들이 봉대산이나 백학산, 강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산으로 왔던 것이다. 그만큼 산의 기운이 좋아 하늘의 감응이 빨랐던 것이다. 해서 주민들은 자기 마을을 ‘명당’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맹당’으로 변하면서 현재의 마을 이름인 ‘매당(梅堂)’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산에 이름이 없었다. 마을 뒤에 있다 해서 ‘뒷산’이라 불렀는데 이제는 주민들 스스로 이름을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모은 결과 김성규 어른의 의견대로 매령산(梅靈山)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매당 마을의 신령스러운 산’이란 의미이다. 예전의 명당산이란 이름값을 그대로 이어받은 지명이기도 하다.
마을 앞에 머우섬이라 부르는 蛙島가 있다. 개구리 섬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앞에서 바다를 따라 쭉 뻗어있는 지형이 이 개구리를 잡으려는 뱀과 같다 하여 배암 혓바닥이라는 지명도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동백나무가 무성하여 주민들의 자랑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섬이 되었다. 원래 이 섬은 마을 공동 소유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관리 소홀로 언제부터인지 개인 소유로 변해 있었다. 머우섬 주변에 정챙이개가 있다. 정챙이에는 깊은 강이 있어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변을 당하기도 했다. 동아실은 마을 왼쪽에 있는 지역으로 예전에는 이곳이 지도 사람들이 망운 장을 보러 갈 때 배로 지나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이곳에는 주막이 세 군데나 있을 정도로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현재는 그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동아실 앞에는 살쾡이 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 무안문화원
해제면 창매리 매당마을 매당노인회관 앞 마당 옆 민가 담장 앞에 서해랑길 무안 24·25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창매마을 골목길을 걸어와 창매노인회관 마당 옆 민가 담벽 앞의 서해랑길 무안 24·25코스 안내도 앞에 섰다.
거리 20.5km, 소요시간 7시간이라 적혀 있다. 실제 탐방 거리는 20.72km, 아침 식사 시간을 포함 5시간 30분이 걸렸다. 그러니까 탐방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속도를 낸 것이다.
매당노인회관 앞을 지나 마을 입구로 이어간다.
매당마을 입구 갈림길에 서해랑길 25코스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작은 전봇대 기둥에 25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서해랑길 25코스는 왼쪽 길을 따라내려가 해안으로 나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어 들녘길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서해랑길 무안 24코스 탐방을 끝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