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7
'달 따러 갈래?' 느긋한 오후에 날아온 문자메시지. 퇴근 시간까지 두어 시간 남았다. ‘참 어제가 보름이었지. 근데 잔뜩 흐린 날이라 달 흔적도 못 봤네. 지금 하늘을 보니 오늘 밤은 황홀하겠는걸.’
달리는 차창으로 다가온 달이 수줍은 듯 발그레한 얼굴을 내민다. 꽉 들어찬 만월이다. 시골 산등성이의 달을 그리며 청도 이서 쪽으로 핸들을 잡았다.
초저녁이지만 어둠이 깔린 길은 아늑하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코끝에 훈훈한 바람을 몰아준다. 새롭게 단장한 유호연지 주차장에 들어선다. 그때였다. 건너편 산봉우리 위로 잘 익은 홍시 닮은 달이 쑥 고개를 내민다. “와! 달이다.” 숨이 턱 막힌다. 영화 속 스크린에서 만난 일출 같이 이글거리진 않지만 언제 저만큼 달이 정열적으로 보인 적이 있었던가. 불빛이 적은 시골이라 그런가? 보는 순간 가슴 속으로 뜨거운 무엇이 쑥 들어온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몇 해 전 겨울, 지리산 천왕봉 등산길에 장터목산장에서 칼잠을 청하고 있을 때다. 다음 날 천왕봉 일출을 보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저녁 여덟 시에 불을 껐지만 좁은 잠자리에다 여기저기 뒤척이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종일 눈길을 걸어온 몸은 숨죽인 배추처럼 축 처졌지만, 정신은 초롱초롱했다. 자정 가까이 되었을까? 갑갑함을 견디기 어려워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 중천에서 만난 열이틀의 달! 오리온, 북두칠성과 셀 수 없는 별들을 거느리고 내 정수리 위에서 싸늘히 내려 보고 있던 은화(銀貨) 한 닢.
사방은 온통 하얀 눈으로 쌓여 있고, 첩첩이 누운 봉우리들만 뿌옇게 빛나는 삼경(三更)의 지리산 달밤.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다. 해발 1,650m. 이 산중에 나는 무엇을 하러 왔을까. 무슨 인연으로 이 시간, 이 자리에 서 있을까? 골 깊고 산 높은 장터목산장에서의 하룻밤. 볼이 찢어질 듯 차가운 이 밤에 잠 못 들어 서성거리고 있는 내 실체는 무엇일까? 별과 달을 한참 우러러도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살을 에는 추위도 잊고 허공만 뚫어지게 쳐다본 기억이 또렷하다.
달빛이 강해진다. 때마침 못 안의 군자정(君子亭) 조명등이 눈을 비빈다. 거울 같은 물에 뜬 달, 유럽의 어느 고성보다 아름답게 물 위에 비친 정자 실루엣. 실물보다 더 또렷하게 대칭을 이루어 수면에 누워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 곡차에 흠뻑 취하지 않더라도 나도 이태백처럼 물에 풍덩 뛰어들어 달을 따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느긋이 바라볼수록 달과 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듯하다.
달빛이 나와 친구의 온몸을 뚫고 지나간다. 천천히 못 주위를 걸으니 두 개의 달이 따라와 길을 안내한다. 세상은 흐뭇한 빛에 취해 고요의 섬이다. 새로 단장한 수십 개의 뿌연 가로등이 못을 호위하고 있다. 적막한 산책로엔 소금 먹은 달빛이 앞장선다. 갑자기 오른쪽 물에 잠긴 달 옆에서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들린다. 개구리들이다. ‘아니, 이놈들이….’ 벌써 봄이 왔다고 노래하는가? 아직 경칩(驚蟄)도 지나지 않았는데. 발소리를 죽이고 둑에 서서 한참 귀를 기울인다. 반갑고 기특하다.
둑 옆의 묵은 복숭아밭을 지나니 벗은 나무 그림자가 영화 속의 한 장면이다. 달빛에 젖은 나무 겨드랑이마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다. 그도 이런 달빛을 받고 새봄의 생명을 틔우는 것이리라. 반짝이는 곳엔 꽃불이 일렁인다. 축축 늘어진 가지엔 머지않아 산골 소녀의 해맑은 얼굴 닮은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달밤의 정경도 그려진다. 이글거리며 뜨는 동해의 일출도 찬란하지만, 텅 빈 늦겨울 과수원을 은은히 비추는 만월의 사랑스러움은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언어가 있을까.
달이 하늘 중앙으로 천천히 헤엄친다. 봉창 밖 매화나무 가지 끝에 걸린 둥근 달을 보면서 꽃향기에 취해 서성거렸을 옛 선인도 생각나고, 어느 시인은 경포대에 뜬 다섯 개의 달을 노래했지만, 알 수 없는 내 마음은 텅 비어 채워지지를 않는다. 갑자기 유년 시절 달집태우기 추억이 떠오른다. 풍물을 앞세워 동구 밖 높이 만든 달집에 불을 붙일 때면, 친구들과 신천에서 깡통에 불붙은 나무를 넣고 빙빙 돌리던 기억이 꿈결 같다. 그 시절 그 동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 달은 알고 있을까?
따라오는 달을 머리에 이고 십여 분을 더 달려 옛 읍성에 닿았다. 시골 밤의 거리는 흰 설탕을 뿌린 듯 허옇고 적막하다. 오래된 성터에 올랐다. 달맞이하기는 멋진 곳이다. 성곽 아래 작은 연못에도 달이 휘영청 밝다. 눈앞에 펼쳐진 들길을 달빛이 걸어간다. 달빛에 취한 두 사람의 마음도 천천히 들판을 가로지른다. 중천으로 달음질하는 달이 처음보다 훨씬 커진 것 같다. 달 속으로 내가 빠져 들어간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속의 복숭아꽃 아래를 걷는 착각이 든다. 그날도 오늘같이 환한 달밤이었으리라. 안평대군과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학자들이 무엇을 토론하는지 크게 서로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가만히 서서 달을 우러르며 심호흡을 한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세계이다.
건너편 길에서 다정하게 두 사람이 걸어온다. 밤 산책 나온 부부일까? 그들도 달에 취해 나왔을까? 아름답다. 노랗게 물든 들풀이 계절을 노래하고, 막 길어온 샘물에 세수한 듯 환한 달빛만 어깨 위에 반짝인다. 그립고 사랑스러운 동화의 나라에 들어온 듯하다. 세상이 아득해진다. 별들도 함께 내려앉는다.
눈을 감고 합장하며 소원을 빈다. 남은 내 삶이 저 달처럼 둥글고 밝게 이어졌으면... 어릴 적 추석 날 할머니의 손을 잡고 언덕에 올라 달맞이한 꿈을 꾼다. 알 수 없는 무엇이 가슴속에서 뜨겁게 소용돌이친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칠 때 하늘이 천천히 기울어진다.